< 광끼 -55 >
[1 vs 1]
경신 대기근을 맞춘 도전자.
그것은 다섯 명 가운데 단 하나에 불과했다.
조선 시대의 대재앙으로 유명했지만, 그다지 널리 알려진 편이 아니기 때문에 오답이 많이 나온 것이다. 그 답이 발표됨과 동시에 녹화는 잠시 중단됐다.
워낙 긴 녹화시간 때문이었다.
출연자뿐만 아니라 스태프 역시 집중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그리고 잠시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여준 성우를 위한 배려이기도 했다.
나머지 299명의 도전자.
그들까지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생업이 바쁜 이들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다들 무대에서 내려보냈지만, 상당수가 무대 주변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이런 구경거리를 놓칠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 퀴즈를 좋아하는 이들이기에 명대결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쉬러 간 사이.
노지영 PD는 주요 스태프를 불렀다.
지금 상황이 범상치 않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로 녹화를 오래 한 적은 지금까지 없었다. 길어야 10문제 내외면 끝이었다. 그런데 예비 문제까지 꺼내야 할 판이었다. 그녀는 메인 작가인 오서경에게 질문했다.
“지금까지 가장 오래 진행했던 기록이 몇 문제죠?”
서경은 잠시 고민했다.
충분히 그럴 만도 한 상황이었다.
이 퀴즈 프로그램의 역사는 짧지 않았다.
적어도 6~7년 동안의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녀는 이곳의 터줏대감이었다. 이 프로그램에서 막내 작가로 시작해 메인까지 오른 좀처럼 볼 수 없는 특수한 케이스였다.
“제 기억으로는 21번째 문제까지 갔던 적이 있었어요.”
“누구죠?”
“2년 정도 전에 추진구요.”
노 PD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장면은 자신도 본 기억이 있었다.
인수 인계받기 전에 모니터 했던 영상이었다.
추진구는 개그맨이었다.
지금은 뭘하고 사는지 알 수 없지만, 그때는 제법 잘 나갔던 거로 기억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1:1의 대결에서 졌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때는 떨어졌죠?”
“네. 마지막으로 남은 도전자도 동반 탈락해서 말이 많았죠.”
“이번은 어떨 것 같아요?”
“글쎄요. 퀴즈가 아무리 쉬워도 운이 없으면 떨어지는 거 아시잖아요.”
그런 일은 빈번하게 일어났다.
답을 아는 사람이야 쉬운 문제로 보이겠지만, 자신의 관심사가 아니면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남아있는 저 둘이 신기했다. 어지간히 잡학 다식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혹시 모르니 한 아나운서님한테 말해서 마지막 남은 도전자 쪽의 인터뷰도 많이 따주세요.”
“물론이죠.”
“오늘 사고 한 번 제대로 치죠. 녹화 잘 뜨면 회식입니다!”
“앗싸!”
환호성이 들렸다.
노지영 PD는 플랜을 짰다.
만약 유성우가 우승한다면 바로 지원 사격이 필요했다. 오랜만에 화제를 모을 기회였다. 역시 퀴즈쇼에서 하이라이트는 우승자의 배출이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책임 프로듀서인 CP의 번호를 찾았다.
일반 도전자의 입을 타고 퍼지기 전에 방송국에서 먼저 선수를 쳐야 했다. 지금의 이 상황이라면 어떤 결말이 나오더라도 상관없었다. 이미 화제성은 충분히 있었다. 물론 최고의 시나리오는 있었다. 그것은 유성우가 더 오래 버티다 결국 승리하는 것이었다.
“CP님. 저 노 PD입니다.”
*
30분 후.
성우는 다시 무대에 올랐다.
무대 아래에서 진수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녀석은 무척 초조한 모습이었다.
얼굴 가득 걱정스러운 표정이 고스란히 보였다. 하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약간의 휴식 덕분에 컨디션은 상당히 돌아온 상태였다. 물론 두부에게는 엄하게 주의를 줬다. 더 이상의 환상을 보면 정말 앰뷸런스에 실려 나갈 것 같았다.
그 사이 무대는 조금 바뀌었다.
홀로 남은 도전자는 메인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는 성우와 마주 보고 섰다. 그런 상황에서 한석현 아나운서가 성우에게 다가왔다. 그 역시 진수와 마찬가지로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 힘내세요.”
그는 웃으며 격려해줬다.
성우는 그런 그에게 깍듯하게 인사했다.
아나운서 가운데 연차가 제법 높은 한석현이었다. 방송을 하다 보면 어디서 그를 또 만날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 녹화를 시작한다는 PD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무대 위에 울렸다. 그것을 신호로 한석현은 성우를 바라보며 다시 진행을 이어갔다.
“자! 1대1의 상황입니다. 우승이 코앞에 있는데 지금 기분이 어떤가요?”
“믿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제가 운이 정말 좋았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 풀었던 문제 가운데 가장 힘들었던 것이 뭔가요?”
“저는 소고기 부위를 물었던 것이 어려웠어요.”
그 말에 한석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명칭은 아니었다. 충분히 이해될만한 답변이었다. 그의 인터뷰는 적지 않게 이어졌다. 이번에는 특히 단 한 명 남은 도전자에게 질문을 집중적으로 던졌다. 덕분에 성우는 자신과 대결하는 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36세의 이형문.
직업은 자동차 외판원이라 했다.
그는 치열한 예선을 다 뚫고 300명에 올랐다. 그리고 마지막 퀴즈의 지존을 가리는 일대일의 대결까지 오른 것이다. 그의 지적 호기심은 상당히 대단해 보였다. 그런 그의 인터뷰를 보며 두부는 안타까워했다.
-잘 풀렸으면 학자가 될 상인데.
‘그래?’
-관상으로 봤을 때 상정(上停)이 넓고 고른 것이 학업운이 좋아. 눈썹도 적당한 것이 괜찮은데 재물복이 영 별로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
관상쟁이 두부의 말은 언제나 그랬다.
제대로 알아듣는 것은 거의 없던 성우였다. 하지만 두부의 말처럼 그의 빈곤함은 얼굴에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이형문이라는 저 사람의 얼굴에는 절박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성우도 느낄 수 있었다.
1대 300의 우승 상금.
그것은 출연자와 도전자의 보상 자체가 달랐다.
출연자는 2억이었지만, 도전자는 최대 1억이었다. 그리고 이형문은 거듭 높아진 단계의 수로 인해 이미 1억이라는 조건에 도달해 있었다. 성우만 꺾으면 그 돈을 받아간다는 말이었다. 물론 세금은 떼야겠지만, 적지 않은 돈이었다. 그 순간 두부가 호통쳤다.
-정신 차려! 네가 뭔데 동정해.
‘누가 뭐래?’
-네 생각이 뻔히 보이는데 나한테 발뺌하냐?
약간 뻘쭘했다.
분명 그런 생각을 잠시나마 했다.
만약 자신이 마지막 문제를 놓치면 어떻게 될까? 그게 행복한 결말이 아닐까 고민했던 것이었다. 고군분투하는 그와 달리 자신은 뭔가 편법을 쓰는 기분이었다. 물론 2억이라는 돈이 성우라고 아쉽지 않을 리 없었다.
왈우를 촬영하며 번 돈.
그것은 적지 않았지만, 세금과 회사에서 떼어가고 난 이후에 직접 받은 것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물론 예전에 극단 작두를 다니던 당시와 비교하면 무척 큰돈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막 쓰고 다닐 정도도 아니었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돌팔이 아저씨가 베풀라는 의미가 그런 게 아니잖아! 이 오만한 녀석 같으니!
‘알겠으니까 진정해.’
성우는 마음을 다잡았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니 살짝 흔들렸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일부러 져줄 생각은 없었다. 자신의 바로 앞에 서 있는 이형문의 눈을 봤기 때문이었다. 그는 돈에 대한 욕심보다 이 순간을 순수하게 즐기고 있었다.
그 순간.
17번째 문제가 출제됐다.
[퀴즈]
속담 가운데 oo에 숟가락 꽂고 산다는 말이 있다. oo에 들어갈 말은?
1. 패랭이, 2.삿갓 3.초립
모르는 문제였다.
성우가 처음 본 속담이었다.
하지만 두부는 곧바로 답을 내놓았다. 그의 말로는 패랭이가 정답이라고 했다. 확실히 속담이나 그런 쪽에 있어서 무사귀의 도움은 절대적이었다.
“정답은 1번입니다.”
도전자는 먼저 답을 누른 상태였다.
성우가 상대방의 답을 따라 누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선택은 어디에도 표시되지 않았다. 오롯이 답을 확인할 때만 노출되었다. 성우는 잠시 그의 표정 변화를 살폈다. 그리고 곧 이번 퀴즈에서 결판나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둘 다 같은 답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답은 정답이 맞았다.
다음 문제가 연달아 나왔다.
하지만 둘의 답은 매번 같았고 또 정답이었다.
이처럼 평행선을 그리며 달려가는 둘의 대결은 지켜보는 이들이 진땀을 흘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쉽게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9번째 문제...
20번째 문제...
21번째 문제...
성우의 인내심도 슬슬 한계 부딪혔다.
벌써 녹화가 시작한 지 4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문제를 푸는데 걸리는 시간은 무척 짧았지만, 답을 확인하고 또 아나운서의 질문에 답을 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적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분량이 넘쳐날 것이 뻔했다.
그리고 곧 22번째 문제가 출제됐다.
[퀴즈]
같은 한자가 아닌 것은?
1. 글을 쓰는 <작가>
2. 벼슬을 뜻하는 <작위>
3. 헤어짐을 의미하는 <작별>
성우는 멍하니 바라봤다.
역시 한자는 그에게 너무 어려웠다.
학교에 다닐 때도 한자는 별로 좋아하지 않던 그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두부가 있었다. 한자는 양반이었던 그에게 무척 쉬운 문제였다.
-당연히 2번! 우승 가즈아!
‘확실해?’
-물론이지. 작위는 벼슬 작(爵)을 쓴다고.
토를 달 필요는 없었다.
두부가 확실하다니 망설임 없이 답을 눌렀다.
“정답은 2번입니다.”
그 순간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었다.
그것을 느낀 성우는 마침내 긴 퀴즈 레이스의 종착점에 도달한 것을 깨달았다. 자신과 이형문이 서로 다른 답을 낸 것이 분명했다. 한석현 아나운서는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진행을 이어갔다.
“방금 두 분이 서로 다른 답을 내셨어요.”
“그랬나요?”
“어떤 분의 답이 정답일 것 같나요?”
“글쎄요. 저는 제 답에 확신이 있습니다.”
성우는 당당하게 말했다.
반면에 형문은 그 표정이 반대였다.
무척 불안한 것이 모르는 상태에서 답을 찍은 것 같았다. 어쨌든 둘 다 답은 고른 상태였다. 이제는 그저 정답의 발표만 기다릴 뿐이었다.
“스물두 번째 문제의 정답은...”
한석현은 뜸을 들였다.
그가 그럴수록 긴장감은 더 커졌다.
현장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이들이 야유를 보내지 않을까 노 PD가 걱정할 정도였다. 그것은 진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두 손을 모아 무대 위를 바라보며 온갖 신을 향해 기도했다. 딱히 믿는 종교가 없기 때문이었다.
반면 성우는 무척 담담했다.
마음을 비웠다기보다 두부를 믿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틀렸더라도 상관없었다. 두부와 무사귀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성우는 만족스러웠다.
“정답은! 2번 작위입니다.”
그가 답을 발표하는 순간.
도전자인 형문이 서 있던 자리의 불이 꺼졌다.
그리고 폭죽이 터지며 무대 위로 반짝이는 종이가 쏟아졌다. 무척 요란한 연출에 성우는 은근히 깜짝 놀랐다. 그런 그를 향해 한석현이 크게 소리치며 진행을 하고 있었다.
“1대300의 우승자는 유성우! 10번째 퀴즈왕이 탄생했습니다!”
“와아아~”
다들 박수를 보냈다.
구경하던 도전자는 물론이고 제작진도 열광했다.
그만큼 오늘의 대결은 대단했다.
레전드로 불려도 무방할 수준의 대결이었다.
역대 어느 우승자를 봐도 이처럼 흥미진진한 상황은 없었다. 성우는 그 자리에서 도전자였던 형문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 역시 후회 없는 도전이었는지 웃으며 그걸 받아줬다. 그의 입의 움직임을 봤을 때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좋은 대결이었습니다.’
*
녹화가 끝난 이후.
어떻게 알았는지 벌써 스포일러가 살짝 담긴 기사가 떠다녔다. 아마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방송국에서 일부러 노출한 것 같았다. 어쨌든 훌륭한 작전이었다. 벌써 대중의 이목은 그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유성우는 엄친아? 몸짱 배우인지 알았더니 머리도 좋아]
[1대300의 역대 10번째 우승자는 유성우?]
[역대 최고의 퀴즈 쇼로 기록될 1대 300의 레전드편. 다음 주 방영]
모두가 관심이 쏟아질 무렵.
정작 성우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스튜디오를 벗어나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그를 반겨주는 것은 치킨을 비롯한 온갖 배달음식이었다. 그런 그의 대량 주문에 진수는 의문을 표했다. 다 먹지 못할 수준의 양이었다.
“뭐 이렇게 많이 시켜?”
“다 필요하니 주문한 거지. 우리는 이거 두 마리면 충분하지?”
“그래서 하는 말이잖아.”
“나머지는 뚜껑 열어서 저기 식탁 위에 올려놔. 아! 젓가락 꽂아두는 거는 잊지 말고.”
“야! 무섭게 또 왜 그래?”
진수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뭔가 느낀게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를 보며 성우는 슬쩍 웃었다. 허약한 친구를 위해 보약이라도 써줘야 할 것 같았다. 귀신과 동거를 하려면 적어도 그 정도의 투자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고생했다. 많이 먹어라.’
< 광끼 -5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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