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끼 -53 (여기까지 무료)
늦은 가을의 따사로운 햇살.
성우는 테라스에서 그 느낌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앉아 한동안 멍하니 있던 그에게 진수가 다가왔다.
“뭐 마실 거라도 줄까?”
“고맙지만 사양하겠어. 지금 몇 시야?”
“오후 2시 조금 넘었어.”
“벌써 그렇게 됐나?”
성우는 책을 덮었다.
2시가 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그제야 배가 고팠다. 평소 아침은 잘 먹지 않는 그였다. 보통 11시 내외에 아침 겸 점심을 먹었는데 오늘따라 무척 늦어진 것이었다.
“밥 먹으러 나가자.”
“조금만 기다려. 정이 형도 온다고 했으니까.”
“오늘 스케줄도 없는데 왜?”
“그 형의 시커먼 속을 누가 알겠어? 뭐 새로운 옷이라도 협찬받았나 보지.”
성우는 그것도 그렇다며 수긍했다.
최정이 코디를 맡은 지 벌써 한 달이 넘어서고 있었다. 하지만 좀처럼 속내를 보여주지 않아 조금 아쉬웠다. 업무적인 관계 그 이상의 접근은 허용치 않았다.
그래도 실력 하나는 좋았다.
최근 성우는 평소 듣지 못했던 말을 종종 들었다.
그건 패션 센스가 좋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이 성우의 센스는 아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최정이 지시한 대로 따랐을 뿐이었다. 어쨌든 평가가 좋았기에 동네에 나갈 때도 성우는 그가 코디해 놓은 그대로 입고 나섰다.
“저 형도 양반은 아니네.”
“그러게.”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 최정.
그의 패션은 오늘도 무척 난해했다.
황금빛이 반짝이는 모자며 자루를 입은 것 같은 배기 팬츠까지 힙합 아티스트에 빙의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는 그나마 조금 얌전해진 편이었다. 그가 입고 다니는 것을 보고 오만석 실장이 한 소리 했기 때문이었다.
연예인보다 더 튀는 코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평소 볼 수 없었던 고지식한 면모라 성우 역시 조금 놀랐다. 하지만 오 실장으로서도 그 이상 방법이 없었다. 그를 코디로 붙여준 것은 강훈 대표였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최정은 그들이 있는 테라스로 올라왔다.
“좋은 아침! 준비는 잘 하고 있어?”
“아침이라뇨. 벌써 점심시간이 넘었어요. 평소 실력으로도 망신당하지 않을 정도는 돼요.”
“꼭 저러다가 첫 문제에서 떨어지더라.”
“훗! 그런 악담을 하시다니.”
성우는 그래도 그가 좋았다.
적어도 뭔가 꿍꿍이가 없어 보였다.
진수의 말처럼 공과 사를 칼 같이 나누는 것은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그게 편할 때도 사실 많았다. 어쨌든 성우가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앞에 놓인 협탁 위에 쌓인 책들이 증명했다.
[지적인 대화를 위한 상식 사전]
[경제 신문을 보기 위한 기초 상식]
[1분 시사 상식]
퀴즈 쇼를 위한 책이었다.
물론 이거를 본다고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때론 운에 맡겨야 할 때가 있었다. 시험 전에 아무리 공부해도 공부한 곳에서 나오지 않으면 끝이다. 특히 얼마 전에 우승했던 Gotta의 김태호를 생각하면 더 그렇게 여겨졌다.
찍신의 강림.
그 일화는 무척 유명했다.
아니 이제는 전설이라 해도 무방했다.
성우가 추격전에서 전설을 썼다면 퀴즈 계에서는 김태호가 있었다.
세 번째 출연만의 일이었다.
그는 결국 300명 모두를 압도하고 우승했다.
역대 열 명도 되지 않은 우승자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이다. 물론 그가 모든 답을 알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동물적인 직감과 답을 유추해 찍는 능력이 만든 결과였다.
“진수 너는 이번에 성우가 어디까지 갈 거 같아?”
“글쎄요. 그래도 찬스가 있는데 5~6번째 문제까지는 가겠죠.”
“나도 그 정도만 가면 소원이 없겠다. 그래서 짜잔~ 이걸 준비했지.”
최정은 옷을 꺼냈다.
한눈에 봐도 제법 비싸 보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브랜드의 이름은 성우나 진수에게 무척 생소했다. 그래도 옷의 때깔은 무척 좋아 보였다.
“내가 이거 협찬받으려고 엄청 노력한 거 알아둬.”
“처음 보는 브랜드인데요?”
“이게 요즘 얼마나 핫한 건데! 공중파 방송인데 깔끔하게 입고 가야지. 적어도 내 담당 연예인이 누추하다는 이야기는 들을 수 없잖아.”
“뉘에~뉘에~”
성우는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겪어본 결과 이게 가장 올바른 반응이었다. 괜히 옷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그의 수다는 끝도 없었다. 특히 그런 쪽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성우이기에 조심해야 했다.
“그나저나 진수야.”
“왜?”
“회사에 시나리오 괜찮은 거 없어?”
그 말에 진수는 잠시 머뭇거렸다.
뭐가 있는 것 같은데 망설이는 느낌이었다.
그것을 감지한 성우는 진수를 달달 볶기 시작했다. 녀석의 입을 열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가장 적당했다. 결국, 진수는 마지못해 입술을 뗐다.
“너한테 들어온 게 몇 개 있기는 한데. 실장님이 고르고 있어.”
“네가 봤을 때 괜찮은 게 있었냐고.”
“내 의견이 뭐 중요하냐.”
“시나리오 보는 눈은 네가 가장 좋으니 그렇지. 영화 공부도 할 겸 보라니까.”
“영화는 무슨.”
진수는 씁쓸하게 웃었다.
영화가 좋아서 이 바닥에 들어온 그였다.
하지만 인력 사무소에 가까운 보조 출연자 관리를 하다가 친구의 매니저가 된 그였다. 점점 더 꿈은 멀어져가고 있는 것 같았다.
“누누이 말하지만, 나는 너 정년까지 보장 못 한다.”
“같이 일하자고 꼬실 때는 언제고 이제 와 그딴 소리냐!”
“그러니까 네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틈틈이 공부하라고. 나중에 나 원망하지 말고.”
성우의 바람이었다.
진수가 가진 꿈과 열정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괜히 자신이 그걸 막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고민도 많이 했었다.
그래도 자신에게는 녀석이 필요했다.
완벽하게 무주귀를 몰아내기 전까지 안심할 수 없었다. 그런 진수이기에 만약 그가 훗날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어떻게라도 갚아주고 싶었다. 그때 진수가 입을 열었다.
“정말 재미있게 본 시나리오가 있기는 한데...”
“어떤 건데?”
“영화는 아니고 16부작 특집 드라마. 내년 봄에 걸리는 거라고 하더라.”
“아니 역할이 뭐냐고.”
“닥터 헬기를 타는 의사 가운데 신입. 세 명의 주연 가운데 하나야.”
메디컬 드라마.
그건 성우도 내심 꿈꾸고 있던 것이었다.
부모님이 그에게 단 한 번도 내색한 적은 없지만, 자신들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되길 바라던 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영문학과를 선택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생명의 무게를 너무 잘 알기 때문이었다.
담당하던 환자의 죽음.
그 최악의 상황에서 의사는 무너진다.
그것은 성우의 부모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소아과 의사인 엄마의 경우는 정도가 더 심했다. 자기 자식이 귀한 만큼 남의 자식이 귀한 줄 알고 있기에 더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때론 술에 기대야 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스스로 감내해야 하는 일이었다. 뭐 결국 두 분 모두 그 위기를 잘 헤쳐나왔다. 하지만 성우는 그럴 자신이 없었다.
“그 시나리오 한번 보고 싶다.”
“내일 가져올게.”
“오케이! 자 점심 먹으러 나갈까요?”
성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공부할 것은 상당히 남았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두부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나는 두부 송송~ 김치찌개!
* * *
얼마 후.
성우는 방송국을 찾았다.
스케치 박스 촬영 이후에 오랜만의 일이었다. 당시를 생각하면 그 초조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왈우의 개봉 전이니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충무로의 떠오르는 샛별.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 배우.
한국을 대표하는 액션 배우.
성우에게 붙은 수식어였다.
이제 그는 당당히 주연급 배우라 할 수 있었다. 왈우의 성공에 있어서 그의 역할이 적지 않았기에 당연할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하늘 높을 줄 모르고 치솟는 인기.
그것을 타고 정신없이 있다가 대기권을 뚫고 우주 저 멀리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수가 있었다. 오만석 실장은 언제나 그것을 그에게 주의시켰다. 하지만 성우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두부라는 존재 때문이었다.
-옛말에 욕존선겸(欲尊先謙)이라는 말이 있지.
‘그게 뭔데?’
-남에게 존경을 받으려면 먼저 겸손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갑자기 왜?’
-저기 작가님에게 왜 인사를 하지 않는 거야? 벌써 연예인 병이야?
성우는 한숨을 쉬었다.
못 보고 지나칠 수도 있을 문제다.
그런데 오늘따라 두부는 그냥 놔두지 않았다. 마치 훈장 선생님을 모시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퀴즈 좀 도와 달라고 한 내가 죄다. 아주 기고만장해져서 난리도 아니네.’
-싫으면 말고~ 누군 뭐 땅 파먹고 사나.
‘그래서 오늘 저녁에 치킨 두 마리 쏘기로 했잖아.’
-우승 상금이 2억이라던데... 겨우 치킨 두 마리?
‘풋! 우승하겠다고?’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만약 우승할 수 있다면 천 마리도 문제없었다.
하지만 그걸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내기 싫었다. 아마 그걸 들으면 두부의 눈이 획 돌아갈지 몰랐다. 하지만 두부는 집단 지성이라는 말을 모르냐며 여전히 거들먹거렸다.
성우의 목표는 반타작이었다.
실패하더라도 적어도 150명 정도가 떨어질 때까지는 버텨야 했다. 그 정도의 분량도 확보하지 못한다면 아니함만 못했다. 그때 성우를 부르는 진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촬영 시작한 데.”
성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그는 최정이 한껏 꾸며 놓아 평소와 다른 모습이었다.
캐주얼 정장을 입은 그의 모습은 일견 보기에 재벌 3세 정도로 보였다. 물론 그의 통장을 보면 그런 생각은 들지 않겠지만...
무대 위에 섰다.
그러자 어둠 속에 앉은 300명이 보였다.
모두 우승을 위해 오늘의 도전에서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 같았다. 그 기세에 성우는 처음으로 압박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였다.
진행을 맡은 한석현 아나운서가 입을 떼자 분위기는 반전했다. 다들 성우 못지않게 긴장하고 있던 것이었다. 확실히 사회자의 중요성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오늘의 출연자는 왈우에서 멋진 활약을 보여주신 유성우 씨입니다! 박수로 맞아주세요.”
“안녕하세요. 신인 배우 유성우입니다.”
“반갑습니다. 오늘 퀴즈에서 우승할 자신이 있으신가요?”
“글쎄요. 무척 어려울 것 같은데요.”
“하긴 저희 프로그램이 쉬운 편은 아니죠?”
그렇게 말하며 한석현이 웃었다.
1대300의 극악에 가까운 난이도는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곧 성우의 근황을 물으며 인터뷰를 했다. 성우는 그의 질문에 충분히 그리고 성실하게 답을 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 프로그램의 팬이 가장 원하는 것은 그가 아닌 퀴즈였다.
“자! 첫 번째 문제입니다.”
[보기 가운데 독립 운동가가 아닌 이는?]
1. 김구 2. 안중근 3. 노덕술
성우는 그것을 듣고 내심 웃었다.
왈우를 촬영하며 근현대사를 다시 공부했던 그였다. 확실히 첫 문제는 너무 쉬웠다. 그건 모든 출연자에 대한 배려였다. 적어도 한두 문제는 풀고 가라는 의미였다.
특히 노덕술은 워낙 유명했다.
민족의 반역자이자 악덕 순사인 그의 이름이 안중근 의사의 옆자리에 있는 것조차 보기 싫었다. 하지만 곧바로 답을 누르지는 않았다. 방송을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누군지 아시겠나요?”
“네. 확실히 아닌 분이 계시네요. 이름 석 자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화가 납니다.”
“그러시군요. 이번에 강남에서 진행했던 퍼포먼스를 놓고 일본 대사관에서 항의한 소식 들으셨나요?”
“이해가 안 되더군요. 그들이 사는 땅에서는 표현의 자유도 허락되지 않나 봅니다.”
“하하하. 시원한 대답이군요. 정답 역시 시원하게 눌러주세요.”
성우는 3번을 쿡 눌렀다.
손바닥 가득 들어오는 볼을 누르자 불이 들어왔다. 그리고 곧 정답이 발표되었고 300명 가운데 단 한 명도 떨어지지 않았다.
두 번째 문제 역시 쉬웠다.
간단한 영화 상식이었고 그 정도는 충분히 풀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세 번째 문제가 나왔다. 그것을 본 성우는 당황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 지 한석현 아나운서는 그것을 차근차근 읽기 시작했다.
[숫자 100은?]
1. 축, 2. 쾌, 3. 접
처음 듣는 단위였다.
잠시 고개 숙인 그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단위의 명칭이라는 촉은 왔지만, 답을 알아내진 못했다.
그런데 이게 뭘까?
성우는 전에 봤던 환상이 다시 보였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가득한 어떤 거리였다. 성우는 촬영 중이었던 것을 깨닫고 서둘러 두부를 찾았다.
‘두부! 여긴 또 어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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