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끼 -52
성우는 손을 뻗었다.
그를 향해 날아오던 검은 곧 그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그것을 쥐는 순간.
성우의 눈빛은 완벽하게 변했다.
모든 이들을 베고 말겠다는 다짐이 엿보였다.
광기와 같은 서늘한 살기가 주변의 공기마저 얼어붙게 했다.
독립 운동가와 일본군.
둘이 양립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성우에게 그들은 악마이자 악당이며 원수였다. 그저 그에게는 모조리 찢어서 죽일 대상에 불과했다.
물론 연기라는 것은 잊지 않았다.
실제로 그가 마음먹고 검을 휘두르면 큰일 날 일이었다. 공터로 뛰어든 그의 눈동자는 단 한 명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바로 앞서 소리친 그 일본군 장교였다.
“흐아앗!”
우렁찬 기합.
성우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구경하던 이들이 움찔거렸다.
그 박력 넘치는 모습에 이 퍼포먼스가 실제 상황처럼 느껴졌다. 생과 사를 가로지르는 결전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 검을 맞이해야 하는 일본군 역의 배우들은 죽을 맛이었다.
‘썩을 놈··· 또냐?’
민상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첫 합부터 칼을 놓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위례검을 직접 배우고 있는 이들 가운데 하나가 자신이었다.
절대 그런 꼴을 보일 수 없었다.
민상은 성우의 패기 넘치는 검을 옆으로 흘렸다. 그리고는 다음에 이어질 발차기에 대비했다. 첫 번째는 손으로 한 번 막아내고 두 번째 돌려차기에 쓰러진다.
그것이 그와 성우의 첫 합이었다.
하지만 그걸로 끝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오늘 준비한 액션은 총 분량이 4~5분에 달하는 무척 긴 것이었다. 물론 계속 날뛰는 것만은 아니었다. 적절하게 중간마다 ‘왈우’의 대사가 섞여 있었다. 덕분에 숨을 고를 시간은 되었다.
파아앙!
요란하게 울리는 소리에 다들 놀랐다.
성우는 칼만 휘두르지 않았다. 예전에 보여줬던 발차기 실력을 뽐내며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그 화려한 몸놀림에 발맞춰 액션 배우들이 쓰러졌다.
“우와아!”
“저걸 와이어도 없이 하네?”
“저게 사람 맞아?”
다들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화면 속에서만 보던 액션이었다.
그런 것이 코앞에서 어떤 장치도 없이 이뤄지고 있었다. 특히 성우가 좀처럼 보기 힘든 수준의 고난도 액션을 펼쳐낼 때마다 관객들은 환호성을 보냈다.
더구나 상대가 상대였다.
일본군이 독립투사를 괴롭힌다?
그것은 역린을 건드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성우가 그런 일본군을 응징하는 것이기에 환호성은 점점 더 커졌다. 마치 가슴 속에 100년쯤 묵은 체증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일본 활동은 이제 끝났구나.
두부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일본에서 활동하지 않아도 잘 먹고 잘사는 배우가 더 많았다. 그보다 더 넓은 세상이 있는데 두려울 것은 없었다.
그 모든 것은 계산된 것이었다.
기획의 가장 중심부에 있던 것은 주호민 PD였다. 마지막 피날레로 이만한 것이 없다는 판단이었다. 물론 성우가 아니었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이런 액션을 단 한 번의 NG도 내지 않을 배우는 없었다. 덕분에 제작진은 소리 없는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대박이지?”
“역시 PD님이 보는 눈이 있으세요.”
“성우 씨가 아니면 엄두도 안 났을 거야. 이제 끝이 멀지 않았으니 다들 힘냅시다!”
주호민은 스태프를 다독였다.
이제 거의 끝까지 도달했지만, 아직 할 일은 많이 남아 있었다. 퍼포먼스가 끝난 이후에 왈우의 제작사 ‘더 랜턴’에서 준비한 굿즈(Goods)를 나눠줄 예정이었다. 그걸 나눠주는 동안 추격자로 참여한 이들의 인터뷰를 따야했다. 추격전의 소감이 빠질 수 없었다.
마침내 퍼포먼스가 끝날 무렵.
성우는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일본군 장교 역의 민상을 바라봤다. 그는 굵은 땀을 흘리며 비틀거렸지만, 아직 눈빛은 살아있었다.
‘지금 갑니다.’
성우가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민상의 고개가 살짝 끄덕였다.
그의 눈에는 지금껏 볼 수 없었던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이번 합은 정말 잘 맞춰야 했다. 아니면 크게 다칠 가능성이 있었다.
그가 마른침을 삼킬 무렵.
성우가 검을 한 차례 거세게 휘둘렀다.
마치 칼날에 묻은 피를 털어내는 모습을 연상시켰다. 그런 그를 향해 민상은 기합 소리와 함께 칼을 길게 찔러 넣었다.
심장을 찌르기 위한 기습이었다.
한 번에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에 가까웠다. 그 모습에 구경하던 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
채애앵~!
성우는 가볍게 그걸 막았다.
비명 소리가 무색할 정도였다.
그리고 회전하며 안으로 더 파고들었다.
민상의 검은 성우의 왼쪽 뺨을 스치듯 지나쳤다. 그 모습에 다들 깜짝 놀랄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성우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칼자루에 명치를 맞은 민상.
그는 휘청거리며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성우는 그 타이밍에 맞춰 최후의 공격을 준비했다. 그는 민상의 겨드랑이를 정확하게 노렸다. 그리고 거침없이 쑤셔 넣었다.
푸우욱...
겨드랑이 사이로 통과된 검.
그 검을 쥐고 민상은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며 쓰러졌다. 그렇게 그가 쓰러짐으로 퍼포먼스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그와 동시에 주변을 가득 메꾼 이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추격전의 엔딩치고 너무 퀄리티가 좋았다.
“오늘 재미있었어요!”
“다음에 또 해요.”
“언젠가는 잡고 말 거야!”
그게 완벽한 끝은 아니었다.
성우는 그 이후에도 바로 떠나지 못했다. 왈우를 잘 부탁드린다는 인사를 해야 했고 방송에 넣을 인터뷰를 따야 했다. 마지막으로 추격전을 취재하러 나온 기자들에게 시달리고 나서야 스케줄을 끝낼 수 있었다.
[왈우. 천만 공약. 성공적! 강남 추격전 대박 나다.]
[흑표는 결국 잡히지 않았다. 500명의 추격 속에서도 생존한 유성우의 명품 추격전!]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흑표 추격전의 방송은 o월 oo일 TCN에서 방송 예정!]
[진정한 추격전의 품격을 보여준 유성우. ‘런닝 피플’ 보고 있나?]
하나 아쉬운 것은 있었다.
바로 식사를 함께하는 것과 항공권 증정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추첨 형식으로 따로 뽑는다고 하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성우는 지친 몸을 이끌고 밴으로 향했다.
이미 자정이 훌쩍 넘은 깊은 밤이었다. 그런 그를 반기며 진수는 별 다른 말없이 곧바로 출발했다.
“진수야.”
“왜?”
“우리 술이나 한잔 하자.”
“내일 오전 일찍 인터뷰 있어서 안 돼.”
“내가 언제 술 먹고 늦게 일어나는 거 봤어?”
“너 말고 내가 힘들어.”
그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이럴 때는 가장 친한 친구가 매니저인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집 근처에 있는 24시간 감자탕집에서 소주 한 잔!”
“안 된다니까.”
“나 너무 배고프다. 몇 시간을 뛰어 다닌 지 아냐? 아까 촬영 전에 먹은 건 이미 다 소화 다 된 지 오래야.”
진수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이라고 안 땡길리가 없었다. 감자탕과 소주는 둘이 즐기는 메뉴였다. 성인이 되어 술을 마시기 시작한 이후. 그보다 좋은 조합은 아직 찾지 못했다.
“나 조금만 잘게.’
눈이 저절로 감겼다.
피로감이 확 밀려오는 것 같았다.
성우는 그렇게 의자에 쓰러지듯 눈을 붙였다. 그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겪었던 나날들 가운데 가장 힘든 저녁이었다. 그래도 팬들과 함께하는 그 시간만큼 행복한 것은 없었다. 왠지 오늘 밤은 어느 때보다 꿀잠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날 이후.
성우는 전보다 더 바빠졌다.
특히 추격전이 TCN을 통해 방송된 이후에 더 심해졌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 특집 방송이 기록한 시청률은 무려 13%였다. 시리즈가 아닌 단발성 프로그램 가운데 이 정도를 기록한 예는 없었다.
그래서일까?
왈우의 성적은 더 높아졌다.
특히 성우의 액션을 보기 위해 다시 보는 이들도 있었다. 그 영향을 받아서 왈우는 1,200만을 돌파했다. 역대 개봉 성적 가운데 10위를 기록한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점차 상영관은 줄어들고 있었다. 물론 아쉬움은 있지만, 후회는 없었다. 모두가 최선을 다했고 큰 결과를 만들어냈기 때문이었다.
바이올렛의 회의실.
서류 더미가 올려진 탁자 앞에서 오만석 실장은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거듭되는 성우의 출연 거절 때문이었다.
“아니 거기는 왜 출연하지 않겠다는 건데?”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성우를 향한 방송국의 러브콜이 적지 않았다. 물론 그 가운데는 U-Bro의 출연 건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만석이 가장 눈여겨보고 있는 프로그램은 역시 ‘런닝 피플’이었다.
추격전에 특화된 프로그램.
그곳에서 성우에게 눈독 들이지 않을 리 없었다.
그가 강남에 펼친 추격전에서 보여준 모습은 확실히 대단했다. 그것을 방송으로 본 담당 PD가 눈여겨본 것 같았다. 오죽하면 성우를 위한 특집을 준비하겠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건 TCN의 주 PD님에 대한 의리가 아닌 것 같아요.”
“무슨 소리야?”
“아무래도 연달아 추격전으로 출연하면 조금 그렇잖아요. 차라리 다른 프로그램에 나갈게요.”
사실 그거는 핑계였다.
그 당시에는 나름 즐겼던 성우지만, 더는 추격전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지가 그대로 굳어질 것 같은 걱정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자신이 가진 한계라 여긴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성우였다.
“그럼 뭘 하고 싶은데?”
성우는 잠시 망설였다.
오 실장이 꺼내놓은 프로그램은 제법 많았다. 모두 성우는 캐스팅하기 위해 접촉해온 곳이었다. 성우는 그것들을 천천히 살펴봤다. 모두 그가 평소에 즐겨보던 프로였다.
-정글에서 생존하는 ‘생존의 법칙’
-제주도 민박집에서 알바하는 ‘제주 민박’
-유럽에 버스킹을 하러 가는 ‘원스 어게인’
-부활한 군대 이야기 ‘레알 사나이’
레알 사나이...
그것을 본 성우는 한숨이 나왔다.
이제 전역한 지 1년이 지난 그였다. 그런데 다시 군대라니! 욕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확실히 이곳은 아니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오 실장이 눈치껏 먼저 나섰다.
“나도 거기 보낼 생각은 없어.”
“다행이네요. 성질날 뻔했거든요.”
“네가 화를 낼 때도 다 있네?”
“당연하죠. 아직은 그쪽을 바라보고 소변도 보고 싶지 않거든요.”
꼬인 군번의 비애였다.
뭐 특별하게 괴롭히는 이는 없었지만, 편한 군대 생활도 아니었다. 당연히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이 정상이었다. 솔직히 성우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은 ‘원스 어게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 혼자 결정할 것이 아니었다.
“이거는 안 되는 건가요?”
“아··· 그거는 U-Bro 너희 둘 다 가야 하는 거야. 그런데 일한이 녀석이 연말에 콘서트가 있어서 스케줄이 도저히 안 나오네.”
“그러면 어쩔 수 없죠.”
“왜 그걸 하고 싶은 거야?”
“해외도 나가고 기타도 원 없이 칠 거 아니에요. 더구나 일한이랑 같이 하는 거니까요.”
확실히 땡기는 프로그램이었다.
아직 다른 출연자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스스로 재미있게 촬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유브로의 멤버인 유일한 그 녀석이 함께하지 못한다면 출연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그러다 한 프로그램이 눈에 들어왔다.
성우는 그것을 잠시 바라보다 오만석 실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성우의 손에 들린 서류를 잠시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다.”
“왜요. 저 못 믿어요? 생각보다 머리 좋아요.”
“네가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구성 대학에 다녔다는 거는 나도 알고 있어.”
“그런데 왜요?”
성우의 질문에 만석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이내 그는 그 프로그램을 꺼리는 이유를 말했다. 다른 버라이어티나 황금 시간대의 프로그램보다 주목도가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만석은 계속 그를 설득했다. 한참 주가를 올릴 때 더 메인 프로그램에 나가야 했다.
하지만 성우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그가 그 프로그램을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부모님이 한국에 계실 때 거의 유일하게 보던 프로그램이 그것이었다. 그 방송이 나올 무렵이 되면 세 가족은 거실에 앉아 저마다 퀴즈를 풀었다.
뭐 그가 이겼던 적은 없었다.
고득점자는 항상 부모님이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아마 해외에 계셔도 즐겨 보실 것 같았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와이파이만 되면 한국의 방송은 전 세계 어디서든 볼 수 있었다. 적어도 아들이 TV에 나오는 것은 보여드리고 싶었다.
“1 vs 300. 거기 나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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