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끼 -47
2개월 후.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공간.
이른 아침 그곳에 들어서던 성우는 코를 막았다. 온갖 불쾌한 것들이 스멀거리며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환기의 기능이라고는 전혀 없는 곳이 이곳 작업실이었다.
딸칵!
전등의 스위치를 켰다.
단숨에 환해진 작업실의 소파 위.
그곳에서 어둠의 기운이 가득한 뭔가가 꿈틀거렸다. 바로 이 냄새의 원인이자 최근 작업실을 독차지하고 있는 유일한이었다.
“야! 냄새 장난 아니잖아.”
“으··· 왔냐?”
“잠은 집에서 자라니까. 또 여기서 밤새운 거야?”
“뭐 보이는 대로.”
일한은 한쪽 눈만 겨우 뜨고 답했다.
그의 주변에는 지난 밤의 사투 흔적이 남아 있었다. 찌그러진 맥주캔과 야식의 흔적이 곳곳에서 보였다. 그나마 녀석의 퉁퉁 부은 눈을 보니 조금 안쓰러웠다.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성우가 지금 상황에서 그를 도울 일은 거의 없었다. 일한이 밤을 새우는 이유는 프로듀싱 때문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이번 앨범을 직접 만들겠다는 욕심이 그를 이렇게 피폐하게 만들고 있었다.
“녹음은 어떻게 할 거야?”
“예정대로 해야지.”
“그러니까 그냥 준비했던 곡으로 하자니까 굳이 뭘 또 새로 준비해.”
“너 영화 찍으면서 대충 넘긴 씬있냐?”
성우는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카메라 앞에서 그런 적은 없었다.
일한은 그것 보라며 자신 역시 음반 앞에서 그럴 마음이 없다고 말했다. 그런 그의 말을 들으며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성우도 대충할 마음은 없었다. 오히려 무임승차라는 말이 듣기 싫어 더 노력하던 그였다.
“그래서 말인데 어제 내가 끝내주는 곡 하나를 썼지.”
그렇게 말하며 일한은 의자에 앉았다.
역시 음악 이야기를 할 때는 에너지가 넘치는 녀석이었다. 자다 일어나서 뒷머리가 붕 떠 있었지만, 그 나름대로 매력이 있었다. 물론 두부의 눈에는 그저 개폐인에 불과했지만...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적어도 6시 정도에는 기상해야...
‘조용해라.’
-저 불결한 것이 옮을까 두렵구나.
그 사이에 음악이 나왔다.
일한이 지난 밤 동안 작업한 곡이었다.
아직 가사는 없는지 일한이 자신의 목소리로 가이드를 넣은 상태였다. 완성 단계는 아니었지만, 성우는 그 곡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지금껏 일한이 내놓은 곡들 가운데 최고라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곡이었다.
“나는 이거 좋은데.”
“다행이다. 사실 제목도 벌써 붙였어.”
“뭔데?”
“U! 우리 프로젝트 팀명으로 할 거야. U-Bro가 부릅니다. U~ 얼마나 좋아.”
그렇게 말하며 일한은 의자에 기댔다.
그러자 녀석의 허리에서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났다. 앨범 몇 개만 더 내면 없던 골병도 생길 판이었다. 저절로 곡소리가 나려고 할 때 성우가 질문을 던졌다.
“조금 전에 그 곡 포함해서 다섯 곡으로 이제 확정된 거지?”
“솔로 1곡씩 그리고 듀엣 2곡 마지막으로 연주곡 하나. 합쳐서 다섯 곡 맞아.”
“연주곡은 꼭 넣어야 하냐? 다른 곡이랑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데.”
“엑스트라 트랙 개념으로 넣을 거라 상관없어.”
이번 달 안에 모든 작업이 끝날 것 같았다.
성우가 말했던 3개월 안에 정말 작업을 마칠지는 생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이렇게 빨리 진행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싱어송라이터 유일한.
그가 지금까지 써놓은 곡은 상당히 많았다.
덕분에 성우는 입맛에 맞는 솔로곡을 찾을 수 있었다. 벌써 녹음을 마친 곡만 세 개였다. 이제 남은 것은 어젯밤에 막 만든 ‘U’라는 듀엣곡과 성우의 연주곡이 전부였다.
“맞다. 다음 달에 시사회하는데 놀러 올래?”
“언제인데? 나야 초대해주면 고맙지.”
“9월 첫째 주 중에 한다고 하던데. 날짜는 다시 확인해서 말해줄게.”
“알았어.”
일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번 가을은 두 사람 모두 무척 바쁠 것 같았다. 특히 성우의 경우에는 영화의 개봉까지 겹쳐있었다. 체력을 가득 비축해놓으라는 오 실장의 말은 무섭기까지 했다. 특히 신미령 배우를 따라다닌 경험이 있던 진수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고는 치를 떨기도 했다.
몇 시간 후.
성우와 일한은 녹음을 시작했다.
둘이 함께해서인지 가사는 쉽게 나온 편이었다.
이미 한 번 듀엣곡 녹음을 해봤던 둘이었다. 당시에 겪었던 시행착오 덕분인지 이번 곡의 진도는 전보다는 무척 빨리 나갔다. 그래도 타이틀 곡이라 그런지 일한의 요구는 적지 않았다.
[거기서 조금 더 간절하게 불러.]
“유우~ 너를 떠올려.”
[아니 그게 아니라. 너어르을 떠올려 이런 식으로.]
“똑같은 거 아냐?”
[뭐가 같아! 요 미묘한 차이 때문에 느낌이 확 달라진다고.]
한숨이 절로 나오는 성우였다.
부스 밖에 있는 일한의 요구는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때로는 같은 소절만 수십 번을 계속 부를 때도 있었다. 그래도 첫 녹음 때와 비교하면 무척 양호해진 것이었다.
[너와 함께 보낸 그곳에
홀로 남겨져 있는 나
너무나도 소중했던 추억
그걸 잊을 수 없어
유(U)~ 너를 떠올려
달빛조차 영롱하던 그 날
너는 아름다웠어]
사랑과 이별.
확실히 식상한 주제였다.
하지만 수백, 수천 년이 지나도 변함없을 것이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인생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과정이었다. 성우 역시 그런 아픈 이별의 경험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사에 더 몰입되었다. 점차 촉촉하게 젖어 드는 성우의 목소리 덕분일까? 결국, 일한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오~ 느낌 좋아!”
“에고고 힘들다. 차라리 영화 한 편을 더 찍고 말지. 이거는 못 하겠다.”
“바로 연주곡 녹음 갈까?”
그 말에 성우는 혀를 내둘렀다.
일한이의 프로듀싱 스타일은 무척 빡셌다.
그나마 자신이 친구니까 이 정도인 것 같았다. 나중에 조금 더 경력이 쌓이면 장난 아닐 것 같았다. 여러 후배 가수들이 눈물짓는 것이 벌써 눈에 선하게 보였다.
“넌 아마 오래 살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어서 안 들어가고 뭐 해?”
“뭐 그렇게 급해?”
“네가 빨리 끝내달라며. 그리고 나 활동 쉰 지 벌써 4개월이 넘어가고 있어.”
“나는 촬영 끝낸 지 반년이 지났다. 누구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가수는 배우랑 다르다고. 자잘하게 그리고 빈번하게 활동해야 기억에서 안 지워져.”
그렇게 말하며 일한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 그를 보며 성우는 내심 웃음을 지었다. 사실 그와 앨범 작업을 함께한 것은 어찌 보면 다행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반년을 보냈다면 심심해 죽었을 것이 분명했다. 적어도 지금까지 2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심심한 적은 없었다.
만약 그 제안을 거절했다면?
성우는 아마 보조 출연이라도 했을 것이다. 도저히 그냥 쉰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오늘은 어제 죽은 이들이 간절하게 바라던 내일.’
어디서 읽은 건지 기억나진 않았다.
하지만 이 말을 떠올리면 1초도 아쉬웠다. 허송세월하는 것은 정말 싫었다. 특히 몇몇 무사귀의 전생을 봐서 그럴 수도 있었다. 죽음이라는 것은 순식간에 찾아온다. 불시에 찾아오는 그 불청객은 순식간에 생명을 앗아간다. 그런 아까운 시간을 그냥 보낸다니 말도 되지 않았다.
[준비되었으면 시작해]
“롸져~!”
촤아앙~!
성우는 일렉 기타를 연주했다.
그의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음은 다양했다.
연주곡은 처음 연주했던 것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동안 성우가 나름대로 편집을 계속해온 덕분이었다.
손가락도 더 강인해졌다.
2개월에 불과했지만, 제법 굳은살이 생겼다. 이제는 전과 같이 쉽게 상처가 생기지 않을 수준은 되었다. 그렇게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성우의 실력은 그대로 녹음되고 있었다.
6분여의 연주는 끊어지지 않았다.
성우는 단 한 번도 실수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달렸다. 그 연주를 마치고 나서야 일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케이! 다시 한번 갈까?]
“오케이라며?”
[그래도 한 번만 연주하기는 아쉽잖아.]
“그 이상은 무리! 조금 전의 연주가 가장 잘 나온 거란 말이야.”
[쩝··· 알았다.]
그렇게 녹음은 마쳤다.
물론 그대로 끝이 난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 더는 성우가 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일한은 달랐다. 믹싱과 마스터도 마쳐야 앨범으로 나올 수 있었다. 더구나 콘셉과 비주얼, 뮤직비디오 등 할 것이 산더미였다. 이제 성우는 그저 그의 결정에 따라 움직여주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내 역할은 이제 끝이지?”
“수고했어. 연락하면 잘 받아. 아직 다 끝난 거 아니다.”
“물론이지. 어쨌든 수고해라.”
“에휴··· 종종 와서 살아있나 확인을 해줘라.”
그렇게 말하며 일한은 다시 소파로 향했다.
아마 조금 자고 일어나서 또 작업할 것으로 보였다. 역시 오늘도 녀석이 집에 가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그것을 보며 저 녀석의 동생인 하나의 부탁이 떠올랐다. 적어도 잠은 집에서 자게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야! 집에 가서 자.”
“왜에에~~ 나 피곤해. 그냥 조금만 눈 좀 붙이자.”
앙탈을 부리는 녀석을 보고 성우는 발길을 돌렸다. 도저히 눈 뜨고 볼만한 모습은 아니었다. 제아무리 하나의 부탁이라지만, 포기해야 했다.
* * *
8월의 마지막 날.
U-Bro의 앨범은 세상의 빛을 보았다.
일한은 용케 예정했던 일정에 맞췄다. 그리고 바이올렛의 전폭적인 홍보 공세에 힘입어 돌풍 수준은 아니더라도 꽤 입소문을 타고 있었다. 바이올렛의 미래를 이끌 성우와 일한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만큼 둘에게 거는 기대는 상당히 컸다.
특히 성우를 보는 시선이 바뀌었다.
전에 그의 노래 실력이 형편없다고 평가했던 보컬 트레이너는 어느 순간부터 회사에 나오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실력이 부족해서 못 알아본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았다. 어쨌든 음원 사이트에 올라온 자신의 노래를 본 성우는 감회가 새로웠다.
[U-Bro]
1. U (Title) 04:52
2. Feel you(일한) 04:42
3. 너라는 선물 04:36
4. 여름 아이(성우) 04:13
5. Way to heaven (연주곡) 06:29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앨범.
그것은 일한에게 커다란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다. 대부분 그가 모든 것을 다했으니 더 그렇게 느껴졌다. 어쨌든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런 그를 향해 일한이 다가왔다.
“우리 나갈 시간 다 됐어.”
“벌써?”
“너는 뭔데 안 떠냐? 나는 첫 무대 오를 때 엄청 떨었는데.”
“나 떨리는 거 안 보여?”
그렇게 말하며 성우는 손을 바르르 떨었다.
그 엄살에 일한은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를 보며 성우는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지난 연말에 처음 봤을 때 설마 이곳까지 함께 올지 생각도 못 했었다. 우연이 아닌 인연이었고 또 오랫동안 변치 않고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나가서 가사 까먹는 거 아니지?”
“내가 영화 찍으면서도 그런 적은 없었다. 설마 그러겠어? 어차피 생방송도 아니잖아.”
“그래 그러니까 쫄지 마. 어쨌든 첫 공연이다. 잘 하자.”
“어쨌든 잘 부탁한다.”
“가자!”
둘은 무대 뒤에 섰다.
그리고 사회자의 진행을 기다렸다.
무대 위는 TV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넓어 보였다. 어쩌면 무대 뒤에 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오늘은 유브로의 처음이자 마지막 방송이 될 예정이었다. 단 한 번뿐인 무대이기에 더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애초에 예정에 없던 무대였다.
하지만 그가 이곳에 올 수밖에 없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영화의 성공을 바라는 그의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다.
당장 2주 후에 왈우가 개봉될 예정이었다.
그 영화의 홍보를 위해 성우는 이 무대를 승낙해야 했다. 런닝 개런티로 계약한 그이기에 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둘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흥 음원 강자! 유브로의 U. 박수로 맞아주세요.”
KBC의 스케치박스.
그 무대 위로 성우와 일한은 걸어 들어갔다.
오랜만에 조명이 가득한 무대 위에선 성우는 호흡이 가빠졌다. 역시 세상 그 어떤 곳보다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마치 이 세상에 모든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된 것 같았다. 더구나 객석에서 터져나오는 환호성에 아찔할 정도였다. 그 순간 가장 첫 소절을 맡은 일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와 함께 보낸 그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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