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끼 -44
‘더 룸’의 극작가
그의 이름을 알아내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팸플릿 뒷면.
그곳에 이름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홍지석이었다. 성우는 나름 그에 대해 알아봤다. 문제는 그를 아는 이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아마 이번 작품이 첫 작품인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극단에 문의하기도 모호했다.
극단 사무실에 불쑥 들어가 물어본다고 쉽게 알려줄 것 같지 않았다. 결국, 성우는 주이호 단장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이쪽 바닥에 인맥이 넓은 그라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주이호와 성우는 다시 만났다.
“그쪽 극단에서도 연락이 되지 않는데.”
“정말요?”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지.”
“그렇기는 하죠.”
이호의 말에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허탈한 마음이 드는 순간이었다. 어렵게 단장에게 부탁까지 했는데 전혀 소득이 없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던 주이호는 주머니 속에서 쪽지 하나를 꺼냈다.
“이건 뭐죠?”
“그 친구 전화번호. 전화가 끊겼다고 하는데 혹시 모르니까 가지고 있어.”
“고맙습니다. 단장님.”
성우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자신 때문에 바쁜 와중에 알아봐 준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 쪽지에 적힌 번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홍지석 010-9XXX-XXXX]
유일하게 얻은 단서였다.
죽은 번호라지만, 그래도 뭔가 느낌이 좋았다.
그런 그를 보며 주이호는 내심 혀를 찼다. 사실 성우가 이렇게 극작가를 찾아 봤자 아무 의미가 없었다. 녀석이 다시 무대에 오를 일은 당장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본인만 그걸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둔감한 녀석 같으니.’
주이호의 감이었다.
성우에게 이곳은 너무 좁았다.
이번 영화를 계기로 그의 진가를 알아보는 이들이 분명 생길 것이다. 이 녀석과 함께한 작품이 겨우 하나라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네가 극단 작두의 소속이라는 것은 잊지 마.”
“갑자기 무슨 소리에요.”
“어디를 가든 부끄럽지 않은 연기를 하라고. 작두에서 연기하는 단원들의 명예가 걸린 일이야.”
평소답지 않은 말이었다.
그것을 들은 성우는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내 그의 정색한 얼굴을 보고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적어도 욕을 먹지 않게 할 자신은 있었다.
“영화 개봉은 언제냐?”
“아직 멀었죠. 이제 겨우 크랭크업(촬영 종료)되었는데요.”
“그러면 가을 무렵은 돼야 극장에 걸리겠네?”
“그렇게 들었어요.”
왈우의 개봉일.
그것은 아직 먼일이었다.
촬영이 끝났다고 금방 영화가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영상 편집을 해서 1차 모니터도 해야 했고 음향과 음반을 비롯한 포스터 등의 여러 작업과 가장 중요한 배급을 결정하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어요.”
“촬영 기간이 길었던 것치고 크랭크인 1년 만에 상영이면 나쁘지 않은 거지.”
“그래요?”
“어떤 영화는 다 만들어 놓고 거의 1년 동안 상영관을 못 잡아서 늦깎이 개봉하는 예도 종종 있어.”
이호는 몇 가지 영화를 예로 들었다.
성우 역시 이름은 들어봤던 영화가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극장에서 봤던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하긴 대부분 군대에 있을 때 개봉한 거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 동안 뭘 하게?”
“글쎄요. 아직 별로 생각은 안 해봤어요. 혹시 이번 연극에 남는 자리 있나요?”
“어디서 무임승차하려고!”
“단역이라도 마다하지 않을게요.”
주이호는 잠시 고민했다.
주연으로 더블 캐스팅을 해도 될 일이었다.
그의 연기력과 암기력이라면 1주일만 투자해도 충분했다. 하지만 새로운 연극에서 주연을 맡은 상준에게 할 짓은 아니었다. 이미 몇 개월 전에 캐스팅이 완료된 판이었다. 그걸 이제 와 깨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하나씩 예외를 두다가 개판이 된 극단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싫은데. 내가 왜 그래야 해?”
“에~ 단장님. 부탁 좀 드릴게요. 뭐 드시고 싶으신 거 없으세요?”
“이게 어디서 청탁이야. 그런 거 나한테 씨알도 안 먹혀.”
주이호는 눈을 부라렸다.
그의 반응에 성우는 풀이 죽은 듯 말했다.
“싫으면 말고요. 그런데 정말 촬영이 끝나니까 뭘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건 너희 회사에 물어봐. 왜 여기 와서 그러는 건데.”
그 말에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호의 말대로 회사에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오만석 실장님이라면 뭔가 해결책이 있을 것이었다.
다른 배우는 어떤가 궁금했다.
성우는 주 단장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며 극단을 나섰다. 그의 주머니 속에는 이호가 건넨 쪽지가 고이 접혀 있었다.
*
“촬영 끝낸 지 얼마나 됐다고...”
만석은 할 말을 잃었다.
갑자기 찾아온 성우는 밑도 끝도 없었다.
얼굴을 보자 바로 꺼낸 말이 일을 달라는 것이었다. 의욕이 가득 찬 배우를 보는 것은 분명 기분 좋은 일이다. 그래도 이건 빨라도 너무 빨랐다.
이제 겨우 크랭크업 시기가 지났다.
더구나 보통의 영화의 배에 달하는 7개월이란 장기간에 걸친 촬영이었다. 체력은 물론이고 정신적인 피로감이 상당할 것이 분명했다. 아직은 휴식이 더 필요한 시기였다. 길게 연기 생활을 할 거라면 쉴 때 잘 쉬어야 했다.
그와 비슷한 나잇대의 배우.
그들은 촬영이 끝나면 곧바로 잠적했다.
그동안 절제해온 모든 것에 대해 폭주했다. 술과 여자 때로는 음식까지 집착의 대상은 다양했다. 뭐 그나마 양호한 것이 게임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런 폭주 현상은 상영일이 잡혀 무대 인사를 하기 전까지 유지되었다.
“심심한 걸 어떻게 해요.”
“그렇다고 갑자기 배역이 뚝 떨어지는 거는 아니잖아.”
“어디 없을까요?”
“없어. 그렇다고 보조 출연을 갈 수는 없잖아. 일단 네 매니저 진수랑 같이 놀고 있어.”
“그냥 놀면 된다고요?”
“뭐 평소에 하고 싶었던 거를 해보던가.”
성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지금 해보고 싶은 것들이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일단 요즘에 하는 것은 무술 수련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과 책을 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나마 계속 노력한 탓에 책은 400권째를 얼마 전에 통과했다.
그때 두부가 끼어들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그럼 노래를 배워.
‘노래?’
-저번에 춤 배울 때 못했잖아. 이번 기회에 배우는 거는 어때?
그 말에 성우는 솔깃했다.
지금껏 무사귀들이 알려준 것들.
그것을 생각하면 거절한다는 것이 오히려 우스웠다. 해솔과 사택천이 전해준 것으로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특히 춤을 배우겠다며 무술에 손을 댔던 것이 신의 한 수였다.
그런데 노래를 배운다?
그 결과가 또 어떻게 다가올지 모를 일이었다. 솔직히 기대될 정도였다. 그런 생각이 들자 성우는 오만석 실장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실장님. 혹시 트레이닝 룸을 제가 좀 쓸 수 있을까요?”
“왜? 회사에서 위례검인가 그거 수련하게?”
“안무실 말고요 보컬실이요.”
“보컬?”
오 실장은 인상을 썼다.
한때 윤종범 실장과 아웅다웅했던 일이 떠오른 것이었다.
“노래는 왜?”
“혹시 그쪽 영화가 들어올지도 모르잖아요. 그리고 브로드웨이도 요즘에는 연극보다 뮤지컬이 강세죠.”
“그렇기는 한데... 너 노래 정말 못한다며.”
그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성우의 노래 실력은 다들 알고 있었다.
당시 보컬 트레이너였던 예지민은 딱 2시간 만에 두 손을 들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힘들 것 같다는 평가였다. 세상에 음치란 없다고 주장하던 그녀에게도 감당할 수 없었던 존재가 성우였다.
‘신은 그에게 연기력을 주었지만, 목소리를 빼앗아 갔지.’
배우들 가운데 그런 이들은 상당했다.
연기력이나 외모의 훌륭했지만, 노래는 어처구니없을 정도인 이들이 있었다. 어차피 활동 영역이 달랐기에 연기 활동에 지장을 줄 정도의 요소는 아니었다.
만석은 가수 파트 쪽의 담당자에게 연락했다.
아무리 같은 회사라도 보컬룸은 그쪽에서 담당하고 있었다. 괜히 스케줄이 겹치면 곤란하니 미리 확인해야 했다. 잠시 통화하던 그는 전화를 끊었다.
“예지민 트레이너는 자리에 없다는데?”
“오늘은 혼자 목만 풀게요.”
“흐음··· 뭐 그건 알아서 하고. 1번 실 비어있어.”
“감사합니다!”
성우는 인사를 함과 동시에 2층으로 향했다.
무척 오랜만에 2층에 오는 것 같았다. 지난 여름에 이곳에서 있었던 해프닝이 떠올랐다. 만약 그때 아이돌 그룹에 들어갔다면 어떤 결과를 맞이했을까?
결론은 이미 나와 있었다.
바이올릿 엔터의 유일한 아이돌 ‘와일드’
그들은 연말에 결국 데뷔를 했지만, 성적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그동안 그들에게 쏟은 비용을 생각하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그 때문에 그 프로젝트를 이끌던 윤종범 실장은 목이 간당간당한다고 들었다. 물론 그런 내용은 모두 진수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보컬룸 1번 실.
바이올렛에서 가장 시설이 좋은 곳이었다.
그곳에 들어선 성우는 문을 닫고 마이크 앞에 섰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시야에 낯선 풍경이 보였다. 네 번째 무사귀가 보여주는 자신의 전생이었다.
갈색 톤의 곱슬머리의 남자.
촌스러운 안경을 쓴 그는 의자에 앉아 짙은 갈색 기타를 어루만졌다. 잠시 그렇게 있던 그는 곧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영롱한 음이 기타에서 튀어나왔다. 하지만 연주가 이어질수록 무척 격해졌다.
손가락은 점차 바쁘게 움직였다.
그 움직임을 도저히 읽어낼 수 없을 속도가 되자 현이 견디지 못하고 끊어졌다. 피크도 없이 거침없이 튕기던 그의 손가락 끝에는 피가 맺혀 바닥에 떨어졌다. 갑자기 내려앉은 적막 속에서 그는 중저음의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뭔가를 읊었다.
[내 가엾은 청춘아
이제 방황도 끝이다
저 떨어지는 낙엽
이 처량한 이 계절
다시 돌아오지 못할 그 날들
텅 빈 마음으로 소리친다.
차가운 달만이
내 목소리를 들어
거기 아무도 없으려나
거기 내 청춘 없으려나]
무반주의 노래였다.
그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마치 시를 낭송하는 느낌이었다.
어떤 기교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진솔하게 속마음을 노래하는 것 같았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묘하게 중독성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곧 다른 장면으로 바뀌었고 그 남자는 온갖 악기를 다루며 노래했다. 못 다루는 악기가 없는 것 같았다. 적어도 성우가 본 것만 해도 기타, 피아노, 하모니카와 드럼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정체가 궁금해졌다.
‘이번에도 이름조차 안 가르쳐주나?’
-조금 더 지나면 저절로 알게 될 거야.
‘그런데 노래보다는 악기 연주가 더 위주인 거 같은데?’
성우가 굳이 질문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두부는 대답을 안 했고 그걸 뒤늦게 깨달았다. 잠시 두부가 침묵을 지키자 연습실에 있던 기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 비치되어있는 공용 기타였다. 고급은 아니었지만 제법 괜찮은 기타 같았다.
촤아앙!
현을 한 번 튕겼다.
그러자 뭔가 자글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두어 번 더 반복하던 성우는 그 껄끄러웠던 것의 이유를 알아차렸다. 조율 문제였다. 어떻게 안 건지는 몰라도 본능적으로 거슬렸다. 한참 만지작거리던 성우는 마침내 기분 좋은 소리를 찾아냈다.
“소리 좋네!”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저절로 손가락이 움직였다.
마치 원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익숙했다. 왼손가락이 코드를 잡았고 오른손의 다섯 손가락은 리듬을 타며 줄을 뜯었다.
흐음~흠~~
노래 가사는 없었다.
그저 허밍을 하며 생전 처음 하는 연주에 몰두했다. 처음 잡아보는 기타라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성우가 눈을 감은 채 자아도취에 빠져있을 무렵.
1번 실의 문이 살짝 열렸다.
그리고 좁은 틈으로 누군가 고개를 내밀었다.
처피 뱅 헤어 스타일의 정체 모를 여자였다. 그녀는 성우가 하는 연주를 잠자코 바라봤다. 한참 연주하던 성우는 이상한 느낌에 눈을 떴다. 그리고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입술을 뗐다.
“누구?”
“누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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