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끼 -43
나른한 봄날.
침대 위로 햇살이 떨어졌다.
성우는 따사로운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일까?
뽀송뽀송한 베개를 떼어낼 수 없었다.
마약에 중독된 것처럼 몸은 계속해서 잠을 탐하고 있었다. 마치 그동안 맘껏 부려먹었던 몸뚱이가 적당히 하라며 파업한 것 같았다. 더구나 묘한 공허감이 그를 휘감고 있었다.
“흑표라···”
아쉬움이 남았다.
이제 흑표는 사라지고 없었다.
촬영도 이미 끝났고 열린 결말이던 마지막 씬도 죽음으로 바뀌었다. 제작진의 긴 회의 끝에 나온 결론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속편에 대한 회의감 때문이었다. 물론 서윤희 작가는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게 깔끔하다는 것은 성우 역시 인정했다.
[소포모어 징크스]
그 말은 원래 스포츠계에서 쓰이던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징크스가 영화계에도 존재했다.
첫 작품의 대박이 난 이후.
이어지는 다음 작품이 부진한 경우를 말하는 것이었다. 특히 영화계에서 속편 제작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국내에서는 투자조차 받기 어려울 정도로 모두 꺼렸다. 성우로서는 조금 아쉬운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끄아아~ 심심하다!”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였다.
이렇게 맘 편하게 쉰 것이 얼마 만인지 몰랐다.
지난 초여름에 연극을 시작한 이후에 처음이었다. 이미 계절은 거의 한 바퀴 돌았다. 하지만 이제 슬슬 이것도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불과 3일 만의 일이었다.
멍하니 있는 것도 이제 한계였다.
몸이 찌뿌둥한 것이 운동을 쉰 티가 났다. 성우는 결국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다.
샤아아~
머리 위로 떨어지는 물줄기.
하얀 거품을 잔뜩 머금은 물은 굴곡진 근육을 타고 아래로 떨어졌다.
하지만 예전만큼 근육은 찾아볼 수 없었다. 울퉁불퉁한 느낌은 사라진 상태였다. 운동을 소홀하게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촬영 내내 운동의 강도를 높인 성우였다.
한껏 성나 있던 벌크업 근육.
그것은 이제 쩍쩍 갈라지는 잔 근육이 되어있었다. 흑표 역할을 하며 은근히 신경 쓰이던 것이 바로 상의 노출 씬이었다. 계약할 당시에도 몸 관리를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기에 더 그랬을 수도 있었다.
-오늘은 어디 가려고?
‘글쎄 운동 좀 하고... 대학로에 가보려고.’
-그럼 오랜만에 쟁반 짜장 어때? 그게 참 별미란 말이야.
‘일단 접수.’
딱히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요즘 성우는 무사귀에 대한 자세를 바꿨다.
어떤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사귀의 복지 증진(?)을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적어도 그들이 자신에게 해준 것을 생각하면 뭘 해줘도 아깝지는 않았다. 복지 증진이라 해도 특별한 것은 없었다. 그저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들을 들어줄 뿐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음식이었다.
자신이 딱히 먹고 싶은 것이 없는 한 두부의 요청은 받아들였다. 하지만 곤란할 때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몸 관리를 하던 성우였다. 그런 그에게 고칼로리 음식은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다행인 것도 있었다.
적어도 가리는 음식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문을 해놓고 못 먹거나 그런 것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그가 전혀 알지도 못하던 음식을 먹는 경험도 해봤다.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암뽕 순대’였다. 전라도 부근에서 촬영을 마치고 올라오다 담양 부근에서 먹은 그것은 독특했다.
처음에는 뭔가 싶은 그였다.
하지만 곧 그 정체를 알고 경악했다.
암뽕이 암퇘지의 자궁 부위라니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름만 그럴 뿐이었다. 실제 암뽕 순대는 돼지 막창으로 만든다는 이야기를 듣고 겨우 젓가락을 들었던 그였다.
‘확실히 맛있기는 했지.’
*
그날 오후.
성우는 대학로로 향했다.
운동하느라 꽤 늦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적당했다.
오늘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밤늦게 작두의 단원을 보기는 하겠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뭘 볼까?’
성우는 잠시 고민했다.
그가 고민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여러 연극 가운데 선택 장애가 왔기 때문이었다. 오늘 그가 대학로를 찾은 이유는 연극을 보기 위해서였다. 작두의 단원이기도 한 그였지만, 정작 연극을 본 경험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나는 ‘디자이어(Desire)’에 한 표.
‘누드 때문에 보려는 거면 죽는다.’
-욕망을 억누르지 마. 네가 무슨 스님도 아니고 말이야.
‘내가 연애를 못 하는... 아니 안 하는 이유가 너희 때문인데 무슨 소리야.’
생각하다 보니 성질이 났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따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괜히 입만 아플 뿐이었다.
성우는 안내 센터를 천천히 둘러봤다.
대학로 거리로 들어가기 전에 있는 그 건물 안에는 여러 팸플릿이 비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워낙 그 종류가 많아 좀처럼 하나를 선택할 수 없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대학로에서 무대에 올려지는 연극만 70여 개에 달했다.
“찾으시는 연극이 있으신가요?”
성우에게 직원이 다가섰다.
인상 좋게 보이는 중년의 여성이었다.
가슴에 달린 명찰에는 소정현이라 적혀 있었다.
느낌이 평범하지는 않은 것이 무대에 오르던 배우 같았다. 얼굴에 써놓은 것은 아니지만,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니요. 딱히 그런 거는 없는데요.”
“여자친구랑 보실 거면 이런 연극은 어때요?”
정현은 팸플릿 하나를 꺼냈다.
딱 봐도 달달한 스토리의 연극인 것 같았다. 하지만 성우에게는 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하트가 뿅뿅 솟구치는 커플 틈에서 그걸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저 혼자 볼 거라서요.”
“아하! 연극을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혼자 보시는 분은 정말 드문데요.”
“사실 저도 연극배우거든요. 다른 분들의 연기를 보고 싶어서요.”
“정말요? 어디 극단 소속인데요?”
“작두라고··· 아시나요?”
그의 말에 정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성우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 보더니 후다닥 데스크 뒤로 향했다. 잠시 후 다시 나온 그녀의 손에는 하얀 종이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는 그에게 슬쩍 내밀며 수줍게 웃었다.
“‘악의’ 주연이셨던 분 맞죠? 무대 위에서 봤던 이미지와 많이 달라서 못 알아볼뻔 했어요. 사인 좀 부탁드릴게요.”
“사인이요?”
“제가 악의만 세 번을 봤거든요. 완전 팬이에요.”
성우는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지금껏 사인을 해줬던 적이 전혀 없었다.
연극 무대를 마치고 사진을 찍어가는 이들은 있었지만, 이렇게 사인을 요청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제가 싸인이 따로 없어서요. 그냥 이름을 써도 될까요?”
“물론이죠. 그게 더 희소성이 있겠네요.”
하얀 종이와 검은 마카.
사인회를 가본 적은 없지만, 스타들의 전유물 같은 존재였다. 일단 마카를 집어 들기는 했지만, 하얀 공간 위에 써 내려가기는 어려웠다. 그때 두부가 참견을 해왔다.
-품위 있게 한문으로 써.
‘그게 더 어렵잖아.
-내가 좀 도와줄게. 에헴~ 첫 사인인데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마카가 종이 위에 내려진 순간.
검은색의 선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한 획씩 더해질수록 종이의 빈 곳은 점차 줄어들었다. 혹시 이름을 알아보지 못할까 싶어 한글도 수줍게 써넣었다.
[유성우 劉晟祐]
“오! 대단한데요. 어렸을 때 서예를 배웠나 봐요.”
“아··· 어릴 때 조금 배웠어요.”
“우리 아이도 서예 학원을 보내야겠네요. 호호.”
성우는 대충 둘러댔다.
자신이 봐도 그냥 막 쓴 글씨는 아니었다.
누가 봐도 명필이라 할 수 있었다. 획마다 힘이 느껴질 정도였다. 본래 악필에 가깝던 그였기에 더 기분 좋았다.
그것을 받은 정현은 난리가 났다.
지금까지 그녀가 받았던 사인 가운데 이런 것은 없었다. 사실 처음에는 별 기대를 안 하고 있었던 그녀였다. 아직 사인조차 없는 것 같았다. 대학로의 배우들 대부분 성우와 비슷하기에 이상할 것도 없었다.
“정말 고마워요. 이 사인은 제가 가보로 간직할게요.”
“제가 뭐 대단한 배우도 아닌걸요.”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제가 이 바닥에서만 20년이 넘었어요. 연기는 예전 같지 않아도 보는 눈은 아직 죽지 않았어요.”
“아이코 선배님이셨군요.”
고개 숙여 인사했다.
하지만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웃을 뿐이었다.
“에이 선배는 무슨요. 하여튼 기대 많이 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번 작두 공연에는 왜 출연 안 해요? 얼마나 아쉬웠는지 알아요?”
“영화 출연이 있어서 아쉽지만, 참여 못 했어요.”
영화라는 말에 정현은 의아했다.
조연이나 보조출연을 하는 거라면 어느 정도 조율이 가능한 문제였다. 그것 때문에 연극 무대를 포기했을 거란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혹시 주연이 아닐까 싶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언제 개봉하는데요?”
“글쎄요. 아직 촬영 중이라 잘 모르겠어요.”
“아차~! 연극 추천해준다고 하고 실수했네요. 그럼 이거는 어때요?”
정현은 의도적으로 주제를 바꿨다.
아직 촬영 중인데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그저 그런 배역일 것 같았다. 괜히 그것을 들춰낼 필요는 없었다. 그녀 역시 연극배우였기에 그 정도의 배려는 할 줄 알았다. 정현은 팸플릿 하나를 꺼내 성우에게 건넸다.
“더 룸이요?”
“이게 요즘 대학로에서 가장 핫한 연극이에요.”
“내용이 뭔데요?”
“제가 말하면 재미없죠. 그런데 극본이랑 연출이 독특해서 볼만 할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정현은 간단하게 설명해줬다.
3개의 대본과 3개의 공간 그리고 3개의 공연으로 이뤄지는 연극. 그것을 들은 성우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구성이었다.
“보고 싶은 것까지 보면 돼요.”
정현의 말은 선문답 같았다.
결국, 성우의 선택은 그 연극이었다.
뭔가 복잡해 보이지만, 관심이 끌렸기 때문이었다. 공연장으로 향하는 그의 발길은 가벼웠다. 평일이지만 대학로는 봄을 맞아서인지 연인이 제법 많았다.
“저기가 쇳대 박물관이니까 이쪽인가?”
골목길로 향하니 목적지가 보였다.
건물 외부에는 ‘더 룸’의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공연 시간이 임박해서인지 그 앞에는 벌써 줄이 제법 길게 서 있었다. 성우 역시 그들의 뒤에 서서 입장을 기다렸다.
-쟁반 짜장... 쟁반 짜장...
‘잊지 않았으니까 적당히 해라.’
-사인도 도와줬는데 그냥 가면 가만 안 두겠어~
‘그런데 그 사인은 내가 배울 수는 없나?’
두부는 가능하다는 답을 줬다.
물론 수많은 연습이 필요하고 했다. 그래도 좋은 소식이었다. 과연 서예 하듯 사인을 해주는 이가 있을까 싶었다. 뭔가 특별해지는 기분이었다.
둘이 그렇게 노닥거리는 사이.
드디어 극장 안으로 입장하기 시작했다.
객석에 앉은 성우는 무대 위와 다른 느낌이 들었다. 환한 조명 아래 서는 것과 반대로 그곳만 시야에 한가득 들어왔다. 모든 신경이 그쪽에 집중되는 느낌이었다.
‘작은 연기라도 허투루 할 수 없구나.’
새삼스레 다시 느꼈다.
특히 가장 앞자리에 앉았기에 더 그렇게 느껴졌다.
이 위치라면 배우의 모공은 물론이고 눈동자의 움직임까지 보일 것 같았다.
마침내 조명이 꺼진 이후.
수많은 관객이 기다리던 연극은 시작되었다. 확실히 소정현이 추천해줬던 이유는 있었다. 다소 난해한 부분이 있다지만, 이건 보통의 연극과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3개 룸.
그곳에 펼쳐지는 시공간은 달랐다.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서로 다른 상황을 보여줬다. 물론 다른 방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그저 벽 너머의 목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게 더 상상력을 자극했다.
연극의 4대 요소.
그것은 배우와 관객, 무대 그리고 극본(희곡)이라 해솔에게 배운 성우였다. 그 가운데 극본이 극대화를 이룬 것이 ‘더 룸’이었다. 스토리는 빈틈이 없었고 또 흥미로웠다. 성우는 과연 이것을 쓴 사람이 누구일지 궁금해졌다.
지금까지 만나본 극작가.
그들 가운데 이 정도의 수준은 볼 수 없었다.
물론 주이호가 직접 쓴 ‘악의’도 대단한 수준이었지만, 이것은 뭔가 차원이 달랐다.
기발한 재치가 엿보인달까?
성우는 그 순간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이 사람이 쓴 무대에 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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