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끼 -42
성우는 자신을 흔드는 손길을 느꼈다.
그제야 한껏 무거워진 눈을 겨우 뜰 수 있었다. 뿌연 시야 속에서 진수가 보였다. 녀석의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표정이 가득했다.
“무슨 꿈이길래 자면서 그렇게 펑펑 울어?”
“내가 울었어?”
“거울이나 보고 말해. 바로 촬영 들어가야 하는데 어쩌냐.”
진수는 그게 걱정이었다.
아무리 화장해도 충혈된 눈은 어쩔 수 없었다. 성우의 두 눈은 눈병에 걸린 듯이 벌게진 상태였다. 그 말을 들은 성우는 햇빛 가리개를 내렸다.
그러자 거울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진수의 말처럼 그의 얼굴을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적지 않게 울었던 것 같았다. 그제야 성우는 자신이 탄 차가 낯선 곳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여긴 어디야?”
“나도 몰라. 주차장이 보이길래 그냥 들어온 거야. 네가 옆에서 대성통곡을 하는데 방법 있냐?”
“내가?”
“그래 네가! 도대체 무슨 꿈을 꾼 거야?”
진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성우는 답해줄 수 없었다.
말하기 싫은 것이 아니라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성우는 잠시 시계를 보고는 진수를 재촉했다.
“늦겠다. 나는 괜찮으니 어서 가자.”
“정말 괜찮은 거 맞아? 혹시 그 부적 때문에 그런 거는 아냐?”
“전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성우의 재촉에 진수는 마뜩잖았다.
하지만 다시 시동을 걸 수밖에 없었다. 벌써 시간이 제법 흘러 지각을 면하려면 꽤 밟아야 했다. 그는 묵묵히 다시 차를 몰아 스튜디오로 향했다.
차가 출발한 이후.
성우는 자신이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그가 보았던 것은 아비규환이 된 조선 땅이었다.
조선 곳곳에 발생한 역병.
그 병으로 조선의 땅은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마을마다 시체가 가득했고 죽음의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수십만 명이 죽었기에 무덤을 만든다는 것도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마을 곳곳에서는 울음소리가 가득했다. 마을 전체가 전멸한 경우도 허다했다.
하지만 꿈이었다.
그곳에서 성우가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 슬픔은 아직도 끈적하게 남아 있었다. 그 꿈에서 성우는 무기력함과 함께 좌절감을 맛봤다. 그런 느낌은 두 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내가 본 거는 그냥 꿈일까? 아니면 진짜 있었던 일이었을까?’
-과거에 실제 있었던 일이야.
‘그렇게 많은 이들이 죽었다고?’
-전염병이 천재지변보다 더 무서운 거야. 하긴 요즘에 그런 병은 거의 없었지.
기분이 더러웠다.
아니 참담하다는 단어가 더 적당했다.
차라리 꿈이었다면 더 좋았을 일이었다. 도대체 왜 그런 전생의 일부를 보여준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거 혹시 두부 네 전생의 기억이야?’
-나? 그건 아니지. 내가 살았던 당시보다 100년도 전의 일인데.
‘그러면 정조 정도 되는 시기인 건가?’
-정확하게는 영조라 할 수 있지.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전염병이 무섭게 퍼지던 시기였다.
그 순간 자신이 어떻게 그 내용을 알고 있는 건지 신기했다.
그런 내용을 따로 배운 적은 없었다.
그러다 자신의 무릎 위에 놓여 있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전염병의 역사에 관련된 책이었다. 아마 조금 전에 생각난 그것은 이 책에서 읽었던 것 같았다.
왜 그렇게 죽어야 했을까?
과연 방법이 없었던 것이었을까?
그것이 궁금해진 성우는 다시 책을 펼쳤다. 하지만 책을 보면 볼수록 한숨이 나왔다. 꿈에서 본 그 끔찍한 모습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책을 읽을수록 더해졌다.
그리고 하나 느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 시대의 방역은 정말 개념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정말 이걸로 방역된다고 생각한 거야?’
-뭐 그 시대에는 그게 최선이었으니까. ‘쥐통’이라 불리던 콜레라를 잡겠다고 고양이가 그려진 부적을 쓰던 시기야.
‘하아··· 할 말이 없다.’
고양이 부적은 애교에 불과했다.
황소의 머리를 잘라 대문 앞에 두기도 했다.
그것을 보고 전염병을 일으키는 귀신이 도망간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어떤 이들은 종이로 코를 간지럽혀 재채기하면 나쁜 것이 빠져나가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여기기도 했다.
두부 역시 착잡했다.
그가 살았던 당시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100년 뒤라고 해도 전염병의 무서움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옆집에 살던 친우인 최 참판 댁 둘째 범이도 그렇고, 몸종이었던 꺽쇠도 역병으로 보냈다.
삶과 죽음.
그것은 종이 한 장 차이였다.
누군가는 그토록 무서운 병에 걸려도 버텨냈고 누군가는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져 죽기도 했다. 죽고 난 이후에 그것을 깨달은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살아있을 당시에 그것을 알았다면?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다. 자신이 제아무리 관상에 용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제 죽음은 예견해내지 못했다. 설마 그런 식으로 생을 마감할지는 예상도 못 한 두부였다.
-착하게 좀 살 걸 그랬어.
‘응? 뭐라고?’
-아냐 그냥 혼잣말이었어.
두부의 말에 성우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책을 보는 재미에 푹 빠졌다. 오랜만에 지적 호기심이 요동치는 기분이었다.
그와 함께 부모님이 떠올랐다.
해외의 오지에서 의료 봉사를 하는 두 분이 더욱 자랑스러워졌다. 전화라도 한 통 할까 싶어 핸드폰을 꺼냈다. 하지만 다시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시차 때문이었다.
지금 나이지리아 현지는 새벽 3시였다.
아쉬웠지만 다음 기회를 노려야 했다. 이럴 때는 조금 불편했다.
‘촬영 끝나면 그냥 내가 갈까?’
그런 생각을 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프리카는 인간적으로 멀어도 너무 멀었다.
* * *
시간은 빨리 흘러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지났다.
그리고 구정까지 지나니 어느덧 봄이 왔다.
3월의 어느 날.
경기도 인근의 한 야산.
그곳에서 성우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아직 날이 풀리지 않았기에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어둠 속에 보이는 그의 눈빛은 무척 날카로웠다. 마치 한 발자국이라도 그에게 다가서면 온몸이 찢길 것 같았다.
“이제 포기해!”
일제의 순사 허태식.
그는 담뱃불을 붙이며 말했다.
흑표의 무예 실력은 충분히 아는 그였지만, 몸동작에 여유가 가득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서 있는 주변에는 일본군이 가득했다.
그들은 성우의 주변을 둘러싸고 총으로 성우를 겨누고 있었다. 작은 틈조차 찾을 수 없었다. 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지는 능력이 없는 한 이 자리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하! 그럴 수는 없지. 특히 허태식! 일본의 개가 된 네 놈의 멱은 꼭 따고 말 거니 기대해.”
“주변을 보고 말해. 더는 도망칠 곳도 없어.”
“어차피 그럴 마음도 없었어.”
나지막하게 웃었다.
이미 이승에 대한 미련 따위는 더는 없었다. 누나인 홍분도 죽음을 택했다. 옆에서 싸늘하게 식어가는 누이에게 부끄러운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성우는 속으로 숫자를 헤아렸다.
이왕에 갈 때 가더라도 할 일이 있었다.
강우규 선생님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드리는 것이 가장 중하고 그다음이 저 배신자 새끼를 처치하는 것이었다.
‘지금이다!’
강한 돌풍이 불어왔다.
바닥에 흙먼지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들 반사적으로 눈을 가렸다. 그 찰나의 순간을 성우는 놓치지 않고 단숨에 달려들었다. 하지만 허태식한테 가는 그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하나...
둘...
셋...
열하나...
열넷...
제아무리 그라도 더는 무리였다.
온몸이 흉기라 해도 총칼에 비하면 한계가 있었다. 더구나 그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홍분과 함께 이곳까지 오며 입은 총상만 세 곳이었다. 특히 허벅지에 입은 상처가 결정적이었다.
욱씬!
가위차기 이후.
바닥에 떨어진 성우는 곧바로 일어나지 못했다.
마침내 한계가 온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바로 옆에 서 있던 일본군 하나를 인질로 잡고 주변을 살폈다.
사 분의 일.
그가 쓰러뜨린 이들은 그 정도에 불과했다. 그것을 보며 성우는 안색을 굳혔다. 더구나 허태식은 포위망 밖으로 도망친 상태였다.
“컷!!! 수고하셨어요.”
추 감독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제야 성우는 팔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자신의 품에 안겨 있던 일본군 역의 배우가 컥컥거렸다. 그의 얼굴은 낯설지 않았다. 바로 극단 작두의 동료인 철민이었다.
“커억··· 숨 막혀 죽는지 알았다.”
“죄송해요. 너무 몰입했었나 봐요.”
성우는 고개숙여 사과했다.
정말 그 순간 그는 상황에 몰입해 있었다.
이제는 자신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흑표의 최후가 코앞이었다. 그런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철민이 그의 등을 두드렸다. 평소 웃음기가 가득하던 그의 얼굴은 진지해져 있었다.
“아냐. 그냥 한 말인데 너무 정색 좀 하지 마. 그래도 네 덕분에 영화에도 나오고 좋네.”
“다른 역은 다 캐스팅이 되어서요. 죄송해요.”
“너 이상해졌어.”
“네?”
성우는 그 말에 뜨끔했다.
혹시 자신도 모르게 뭔가 실수한 게 있는 건가 싶었다. 뜨고 나니 사람이 바뀌었다는 말은 듣기 싫었다. 뭐 아직 제대로 뜬 것도 아니었지만...
“전에는 안 그랬는데 왜 그렇게 죄송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녀? 누가 괴롭힌 거야? 감독님이야? 아니면 조 선배님이야?”
철민은 랩을 하듯 말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나직했다.
보조 출연에 불과한 그가 할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말 속에 담긴 따뜻한 마음 씀씀이를 성우가 모를 리 없었다. 그것을 들으며 성우는 잔잔히 웃었다.
최근 성우의 위상은 바뀌었다.
처음에는 낙하산이 아닌가 의심하는 이도 상당했다. 모든 이들이 그의 연기와 오디션을 본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시선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처음에는 액션만 가능한 배우라 생각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형한테나 그러죠.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오늘이 마지막 촬영이지?”
“저한테나 그렇죠. 다른 분들은 2주 정도 더 남았어요.”
“어쨌든 오늘 끝나고 뙇~! 어때? 극단 막내인 네가 위로가 필요하다면 다들 나올 텐데.”
소주잔을 꺾는 손놀림.
그것은 한잔하자는 이야기였다.
그 모습에 성우는 저절로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극단 작두의 사람들은 한결같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성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씬 105-5! 촬영 들어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씬.
카메라 너머에 선 성우는 아쉬웠다.
이제 이 장면만 찍으면 왈우의 촬영도 끝이었다. 촬영이 시작한 것이 지난 9월이었으니 벌써 7개월이 지난 것이었다.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했고 또 즐겼다.
이제는 자신의 손을 떠났고 나머지는 선배들과 스태프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성우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의 손에는 일본도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바로 조금 전에 인질이었던 철민을 쓰러뜨리며 빼앗은 칼이었다. 검을 쥔 두 손에 힘줄이 불끈 솟아올랐다. 그리고 서서히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마침내 최후의 발악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 쪽XX 새끼들아! 다 덤벼어!!!”
한바탕 칼춤을 추었다.
호쾌하게 칼을 그으며 피의 잔치를 벌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다지 오래가지는 못했다.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총소리...
그것을 들으며 성우는 와르르 무너져내려야 했다. 더는 버틸 수 없었다. 그렇게 바닥에 털썩 쓰러지며 성우는 눈을 부릅떴다. 그의 눈은 끝까지 허태식을 향해 있었다.
‘이걸로 끝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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