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끼 -40
왈우의 촬영 현장.
최근 그곳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모두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특히 배우들의 열연이 돋보였다.
조강철을 비롯해 대부분의 배우가 NG조차 내지 않고 연기를 펼치고 있었다. 오히려 나중에 메이킹 필름에 쓸 것도 없겠다며 오창석 등이 애드리브를 넣을 정도였다. 덕분에 현장은 웃음바다가 되기도 했다.
성우의 액션 씬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영화 촬영에 있어서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 액션 씬이었다. 한 번의 실수가 부상으로 이어지기에 리허설도 길었고 또 합이 어긋나면 연달아 NG가 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나 성우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NG 없이 대부분의 씬을 한 번에 오케이를 받아냈다. 물론 어쩔 수 없이 NG가 나는 경우는 있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 그가 아닌 다른 배우들 때문이었다. 조금 전에도 일본군 역을 맡은 민상이 앵글을 벗어나 밖으로 떨어져 NG가 나고 말았다.
“아고고···”
“괜찮으세요? 감독님이 5분 후에 다시 간답니다.”
“다행이네. 그나저나 문석 형은 사람 잡으시려고 작정하셨나. 이번 영화는 왜 이렇게 힘든 거야?”
홍 감독에 대한 원망이었다.
그것은 다른 액션 스쿨의 배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오늘 찍은 장면들은 대부분 평균적인 액션의 난이도보다 훨씬 높았다. 거의 무협 영화 수준에 가까웠다. 그러니 자잘한 부상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때 진수가 다가와 성우의 왼쪽 팔을 잡았다.
“팔 좀 보자.”
진수의 말에 성우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포기한 듯 직접 소매를 접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왼쪽 팔꿈치 부근이 벌겋게 부어 있었다. 언제 바닥에 쓸렸는지 핏방울도 약간 맺혔다.
“그럴 줄 알았다. 몸 좀 사리면서 해.”
“뭐 조금 쓸린 건데 괜찮아. 그런데 어떻게 알았냐?”
“내 시력이 2.0인 거 몰랐냐.”
진수는 연고를 꺼내 성우의 팔꿈치에 살짝 바르고 반창고를 붙였다. 촬영용 의복이라 오염에 주의해야 했다. 그런 그를 보며 성우는 녀석에게 자신의 매니저를 부탁했던 그 날이 떠올랐다.
“뭐 힘든 거는 없고?”
“뜬금없는 그 자상한 목소리는 뭐냐. 막 소름 돋는다.”
“언제나 네 이야기는 안 하니까 그렇지. 너는 매니저 이전에 내 친구라는 것만은 알아둬.”
“시끄럽고 촬영 준비나 해. 쉬는 시간 다 끝난 것 같다.”
그렇게 말하며 진수는 뒤로 물러섰다.
그래도 성우의 말이 싫은 건은 아닌지 얼핏 미소가 엿보였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깊게 할 틈은 없었다.
“다시 촬영 들어갑니다!”
조연출 이하윤의 목소리가 울렸다.
언제나 맑게 울리던 그녀의 목소리는 점차 탁해지고 있었다. 워낙 소리치며 다녀 조금씩 목이 망가진 것 같았다. 때때로 기침을 할 때마다 안쓰러웠다. 현장에서 거의 유일한 또래라 그럴지도 몰랐다.
‘내일은 목캔디라도 사다 줄까?’
* * *
마포구의 작은 작업실.
서윤희 작가는 큰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켰다.
오랜만에 새로운 글을 쓰려니 시작조차 쉽지 않았다. 벌써 며칠 동안 전화도 꺼놓고 글만 붙잡고 있었지만, 진도는 좀처럼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더 미룰 수는 없었다.
‘왈우’의 시나리오 초고가 끝난 것도 벌써 반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물론 그사이에 대폭 뜯어고친 것도 여러 번이지만, 너무 놀았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그런 그녀에게 추효정이 머그컵을 들고 다가왔다.
이번에 그녀가 쓰는 것은 대하 드라마였는데 혼자는 엄두가 안 나서 새로 구한 어시스트였다.
“조금 쉬면서 하세요. 작가님.”
“지금까지 몇 개월을 쉬었는데 무슨 소리야. 하아~ 그런데 좀처럼 안 써지기는 한다.”
“작가님은 글이 막히면 어떻게 하세요?”
효정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윤희는 옛날 자신의 어시스트 시절이 떠올랐다. 그 당시의 서러웠던 기억조차 추억이 된 지금이었다. 그때를 떠올리면 솔직히 자신이 버텨냈다는 것이 용했다.
“산책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 하지.”
“그러면 막 영감이 떠올라요?”
“아니 전혀. 그냥 시간 때우는 용도랄까?”
“천하의 서 작가님도 그럴 때가 있으시구나. 저만 그런지 알았어요.”
윤희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그것은 일부 천재를 제외하고 다들 똑같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 역시 보통의 범재에 해당했다. 그때 효정이 핸드폰으로 뭔가를 보여줬다.
“작가님 이거 보셨어요?”
“뭔데?”
“얼마 전에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던 건데요. 왈우의 그 유성우 배우 있잖아요.”
“성우가 왜?”
윤희의 목소리는 다급해졌다.
혹시 안 좋은 일이 벌어진 것인가 싶었다.
워낙 사건과 사고가 잦은 곳이 연예계였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심장은 벌써 떨려왔다. 이제 막 촬영에 들어갔는데 문제가 생기면 큰일이었다. 하지만 효정이 보여준 것은 예상과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아··· 난 또 뭐라고 식겁했잖아.”
“죄송해요.”
“그나저나 성우 이 친구는 정말 대단하기는 하네. 오디션 때 보기는 했어도 이 정도의 액션도 가능한지는 몰랐어.”
“그렇죠? 다들 난리가 아니었다니까요. 이번에도 천만 관객 넘길 것 같아요.”
“그거야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거고.”
괜히 설레발을 떨기 싫은 윤희였다.
기대가 크면 클수록 나중에 밀려올 아쉬움 역시 커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심 기대가 되기는 했다. 이번에 조강철은 물론이고 추 감독 역시 칼을 갈고 있었다. 더구나 그 뒤를 받치고 있는 유성우라는 배우도 기대됐다.
“그런데요, 작가님은 촬영 현장에 안 가보시나요?”
“왜? 가보고 싶어?”
“뭐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닌데요. 그냥 영화 촬영하는 현장은 어떤지 궁금도 하고...”
조심스러운 말투로 효정이 물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윤희는 그 속내가 빤히 보인다며 내심 웃음이 났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녀에게 그런 효정의 모습은 귀여운 수준의 풋내기에 불과했다.
“성우 그 녀석을 직접 보고 싶어서 그렇구나?”
윤희의 트레이드마크인 돌직구.
그것에 이미 익숙해졌는지 효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심 당돌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런 그녀의 솔직함이 마음에 들어 어시스트로 고용한 것이었다.
“그 녀석이 왜 좋은데?”
“제가 무협 소설 좋아하는 거 아시죠?”
“물론이지.”
윤희도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효정의 무협 사랑은 대단한 편이었다.
어찌나 좋아하는지 쉴 때마다 웹소설이며 중국 드라마를 보는 효정이었다. 아마 남자로 태어났으면 방송 작가가 아니라 무협지와 같은 장르 소설가가 되었을 것 같았다.
“ 그런데 유성우라는 그 배우의 액션을 보면 마치 무협 소설의 주인공이 책을 찢고 나온 거 같아요.”
“그게 전부야? 그러면 네가 잘못 봤는데.”
“네? 무슨 말씀인지···”
“성우의 매력은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거지.”
윤희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아마 영화를 보기 전까지 다들 그녀와 비슷할 것 같았다. 그때까지 액션에 최적화된 배우라 오해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기대감이 최저일 때 최고의 연기를 보면 그 감동은 배에 달할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성우의 장점.
그것은 액션이 결코 아니었다. 물론 액션에 대한 재능은 그녀 역시 인정하고 있지만, 가장 큰 장점은 배우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연기였다. 그리고 그녀의 그런 평가는 대부분은 그가 보여 줬던 연극 ‘악의’를 기반으로 내려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다른 매력이 있다고요?”
“그런 게 있어. 나중에 영화로 보면 알 거야.”
“선생님! 저한테도 비밀이에요? 완전 섭섭한 거 아시죠?”
“나중에 직접 봐.”
그건 직접 봐야 했다.
아무리 말로 떠들어봤자 느낌이 퇴색했다.
그녀가 보았던 연극 ‘악의’에서의 유성우의 광기 어린 눈빛은 진짜였고 또 강렬했다.
연기를 잘하고 못하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성우가 무대 위에 올라서는 순간부터 막이 내려갈 때까지 윤희는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확실히 성우에게는 시선을 끌어 당기는 마성의 무언가가 있었다.
‘그때의 그 짜릿함이란.’
그 순간.
윤희는 영감이 샘솟았다.
그녀는 서둘러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이미 집중력을 끌어올린 그녀는 등 뒤에서 투덜거리는 효정의 목소리 따위는 전혀 관심도 두지 않았다.
* * *
영화 촬영이 중반으로 향할 무렵.
성우는 매일 이어지는 촬영에 기진맥진해졌다. 주연급으로 올라선 것은 기뻤으나 이렇게 힘들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그였다. 특히 야간 촬영과 액션 씬이 많은 그의 역할 때문에 더 심했다.
하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그보다 스태프가 훨씬 더 고생을 많이 했고 그들보다 진수가 더 힘들어했다. 안 그래도 빼빼 마른 녀석이 퀭해진 얼굴로 자신을 태우러 올 때마다 짠한 기분이 들었다.
“그냥 우리 집으로 이사 와라.”
“부모님이 언제 오실지 모른다며? 그리고 잠이라도 편하게 자면 안 될까?”
“너희 집에서 우리 집까지 차로 30분 거리야. 이쪽으로 옮기면 조금이라도 더 잘 수 있잖아.”
“됐어. 어차피 너 촬영하는 동안 차에서 잠자잖아.”
“그 쪽잠도 잠이냐?”
둘의 실랑이는 끊임없었다.
2층 주택에 혼자 사는 성우였고 남는 방도 많았다. 부모님이 쓰시던 안방이 아니더라도 비어있는 방이 두 개나 되었다. 하지만 진수는 끝까지 싫다며 고집을 부렸다. 그런 그의 반응에 성우는 두 손을 번쩍 들 수밖에 없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차에 타. 오늘 강화도 가야 하는 거 잊지 않았지?”
“내가 뭐 챙겨갈 거는 없어?”
“그런 거 없으니 그냥 몸만 타면 된다.”
그렇게 말하며 진수는 시동을 걸었다.
오늘 둘이 향하는 곳은 왈우의 촬영 현장은 아니었다. 그들이 향하는 곳에 예전에도 함께 다녀온 적이 있었던 무연고자 공동묘지였다. 마침내 위령비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안 가볼 수 없었다.
“대표님도 오신데?”
“아니 그거는 불가능할 거 같고 오 실장님은 직접 그쪽으로 오신다고 했어.”
“우리도 반년 만에 가는 건가?”
“그 정도는 된 거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성우는 창문 너머를 바라봤다.
오늘따라 가을 하늘이 무척 높아 보였다.
아니 이제는 가을이라 하기에는 너무 쌀쌀했다. 낙엽도 이미 잔뜩 떨어져 황량한 느낌이 사뭇 들었다. 이러다 조만간 첫눈이 내릴 것 같았다. 그때 두부가 말을 걸었다.
-생각보다 늦었지만, 시기적절하게 완성되었네.
‘무주귀들은 요즘 어때?’
-안 그래도 그게 이상했거든. 며칠 전부터 엄청 조용하더라.
성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효과가 없으면 어떻게 하나 싶었던 그였다.
그런데 생각보다 효과가 제법 좋은 것 같았다. 물론 두부의 판단에 따른 결론이지만,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책은 몇 권 남은 거냐?’
-어제 본 것을 빼면 이제... 284권 남았네.
‘미치겠네. 아직도 그렇게 많이 남았어?’
-요즘 촬영하느라 바빠서 그렇지. 그거 끝내면 금방 끝낼 수 있을 거 같은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촬영 현장에서도 성우는 책을 놓지 않았다.
그저 보기만 하면 되는 거라 집중을 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직 신인 배우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선배 배우의 연기를 보고 배워야 할 시기였기에 그렇게 여유 부리고 있을 틈은 없었다. 특히 조강철의 연기는 보고 배울 것들이 무척 많았다.
성우와 두부는 오랜만에 대화를 나눴다.
대부분 성우의 궁금증을 두부가 풀어주는 방식이었다. 물론 대답하기 어려운 것을 회피하는 것은 여전했다. 그래도 두부와 보낸 시간이 제법 길었기에 성우는 에둘러 묻는 방식에 제법 적응한 상태였다.
한 시간 후.
차가 멈추는 느낌에 성우는 두 눈을 떴다.
자신도 모르게 피곤함을 못 이기고 잠이 들었던 것이었다. 그가 눈을 뜨자 먼저 도착해 있던 오만석 실장이 손을 흔들며 그들을 반겼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요즘 얼굴도 보기 힘드네. 잘 지냈어?”
“에~ 성우 얼굴 본지 1주일밖에 안 지났어요.”
진수의 지적에 만석은 그러냐며 웃었다.
성우 역시 그런 그를 무척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었다. 요즘의 하루는 과거의 이틀 정도와 맞먹었다. 하루에 불과 서너 시간을 자며 요즘 강행군을 이어가고 있었다. 계절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저게 그 위령비 맞죠?”
성우의 시야에 하얀 비석 하나가 보였다.
비석이라는 표현이 조금 어색한 것이 약 3~4m 정도 되는 크기였다. 직접 두 눈으로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무척 커 보였다. 이것을 세우는데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나왔다던 강 대표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마음에 드냐?”
“물론이죠. 이거 강 대표님한테 감사하다는 인사라도 따로 드려야겠어요.”
“전화만 해도 돼. 그리고 진짜 고마우면 이번에 천만 관객 찍어봐. 몸값이 뛰어오르면 오히려 대표님이 엎드려서 절을 할걸.”
“그런가요? 하하하.”
성우는 오랜만에 기분 좋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위령비 앞으로 향하는 이상한 옷을 입은 여자 때문이었다. 오색 찬란한 옷과 이상한 모자를 쓰고 있는 것이 TV에서나 보던 무속인과 비슷했다. 만석 역시 그 여자를 봤는지 성우에게 설명을 해줬다.
“이곳에 위령비 세운다고 하니 마을에서 무당을 불러서 굿이라도 해야 한다고 하도 말씀하셔서.”
“아··· 무당 맞구나.”
“회사에서 경기도 인근의 가장 용하다는 분으로 모셨다고 하더라.”
만석의 말에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에서 원하면 해주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 조건으로 마을 분들이 위령비 설치에 수긍하셨다니 어쩔 수 없었다. 반면 만석은 다른 생각에 잠겼다. 분명 무당을 부르기는 했는데 그 날이 오늘은 아니라고 들은 그였다.
둘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무속인 김민은 새남굿을 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새남굿은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서 전해지는 것으로 망자를 천도하기 위한 굿이다. 그런데 그것을 하려면 적어도 악기를 쳐주는 잽이가 6명은 필요했다.
원래 예정되어 있던 날은 다른 날이었다.
하지만 잽이 들과 스케줄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부득이 오늘 오후에 모이기로 한 것이었고 그중에 그녀가 제일 먼저 도착한 것이었다.
하지만 김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변의 공기가 기묘한 것이 보통의 묘지와 사뭇 달랐다. 온갖 잡귀가 득실거려야 할 이곳에 생각보다 원혼이 적어 보였다.
그러다 그녀는 멀찍이 서 있는 세 명의 남자를 발견했다. 잠시 그들을 바라보던 김민은 그 중의 제법 얼굴값을 하게 생긴 한 청년을 보고 낯빛이 새하얗게 바뀌었다. 그녀는 성우를 향해 미친듯이 달려들었다.
“이 육시랄 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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