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끼 -35
부우웅!
고속도로를 거침없이 달리는 차 안.
의자에 기댄 성우는 핸드폰을 바라봤다.
그가 지금 보는 것은 제작 발표회의 기사들이었다.
물론 자신에게 집중된 기사는 거의 없었다.
영화 왈우에 대한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그중에 자신이 조금 언급되는 수준이었다. 그런 와중에 성우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글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한 영화 평론가의 사설이었다.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영화의 흥미를 위해 상상력을 동원한다고 해도 너무 과하다는 느낌이 있다....... 신인 배우 유성우(23)가 맡았다....... 극에서 중요한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불과 4개월도 안 되는 빈약한 연기 경력은 우려될만하다....... 최근 몇 년 동안 비슷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상황이다. 관객도 이제 피로감을 느낄 것이 분명하다. 이런 악조건이 가득한 상황에서 영화 ‘왈우’는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 기대가 된다.]
조선 Cine의 최상호 기자.
제작 발표회에서 청문회 분위기를 만든 장본인이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그가 써놓은 기사는 악의적인 느낌이 가득했다.
글은 상당히 기묘했다.
영화의 성공을 걱정해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느낌일 뿐이었다. 자세히 뜯어보면 자신을 깍아내리기 바빴다. 그런 그의 사설을 보며 성우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자신과 영화 ‘왈우’에 적대감을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를 바드득 가는 성우의 모습에 옆에 앉은 오만석 실장이 말을 걸었다.
“조선 씨네에 실린 기사 본 거야?”
“실장님도 보셨어요?”
“어이가 없어서 웃음 밖에 안 나더라. 회사 홍보팀에서 알아서 처리해줄 거야.”
“이분 우리 바이올렛 엔터와 사이가 안 좋나요?”
그 말에 만석은 고개를 저었다.
조선 씨네와 바이올렛의 사이가 나쁠 이유가 없었다. 만석은 이 상황에 대해서 차분하게 설명해줬다.
“우리랑 사이가 나쁠 일은 없어. 그냥 왈우의 출연자 가운데 네가 가장 만만했던 거야.”
“네? 그게 무슨···”
“소문이 사실이라면 조강철 배우와 그쪽 회사가 사이좋은 편은 아니거든. 그리고 거기 희선 씨도 중간에 걸려있고.”
“누나는 왜요?”
“지난 연말에 방송사고가 났던 종편이 조선 씨네와 같은 계열사였거든. 완전 찍혔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래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왜 자신이 그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였다.
두 선배와 같은 소속사도 아니고 이제 처음 같이 작품을 하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그가 그런 표정을 짓자 만석은 다시 입술을 뗐다.
“생각해 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조강철이야. 아무리 위세 좋은 조선 씨네의 기자라도 직접 저격하기는 쉽지 않아.”
“반면에 저는 너무 쉽군요.”
“그렇지. 너한테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기사를 커버해줄 팬들은 없으니까.”
“팬 없는 사람 서러워서 못 살겠네요.”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되었다.
최상호라는 그 기자는 참으로 야비했다.
직접 조강철이라는 거물과 붙는 것보다 그의 주변을 깎아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상어와 직접 맞닥뜨리기 싫어 수족관의 붕어를 향해 작살을 들이대는 꼴이었다.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아닌 밤중의 홍두깨라던가?
괜히 자신만 봉변을 당한 느낌이었다.
오 실장의 말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자신의 신세는 이랬다.
‘고래 싸움에 등 터진 새우’
하지만 선배들이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사실 그럴 필요조차 없는 것이 갑에 해당하는 언론사가 배우를 일방적으로 괴롭히는 것이었다. 성우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요.”
“그게 끝이야? 나는 진수 저 녀석처럼 펄쩍 뛸 줄 알았는데.”
“제가 뭘요!”
운전하고 있던 진수가 버럭 소리쳤다.
성우는 핸드폰을 끄며 만석을 향해 차분하게 말했다.
“뭐 지금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답이 없잖아요. 제가 영향력이 큰 것도 아니고...”
“너무 현실적인 거 아냐?”
“하지만 그쪽이 더 아쉬울 때가 언젠가는 오겠죠. 그때는 실장님이 아무리 말려도 절대 사정 봐주지 않을 거예요.”
성우에 말에 만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의 위치가 되면 말리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갑과 을의 위치가 순식간에 바뀌는 곳이 바로 연예계였다. 어제 별 볼일 없던 배우가 별안간 스타로 떠오르는 경우도 빈번했다.
“다 왔습니다.”
진수가 운전석에서 외쳤다.
그러자 성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 곧 영화의 첫 촬영을 할 예정이었다. 기지개를 한껏 크게 켜고 성우는 창문 밖을 바라봤다. 그러자 스태프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아는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후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첫 단추를 잘 끼우고 싶은 그였다.
주변의 우려 섞인 시선은 실력으로 지워내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그럴 자신이 있었다. 그런 근거 없는 자신감은 모두 주변 사람들이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극단 작두의 단원들.
바이올렛 엔터의 직원들.
그리고 함께하는 왈우의 선배 배우와 제작진.
그들 모두는 한결같이 말했다.
이 역할은 너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응원과 믿음이 있었기에 지금껏 버틸 수 있었다. 그가 담담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자 옆자리에 있던 오만석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괜히 온 것 같잖아.’
그가 오늘 이곳까지 온 이유는 간단했다.
조선 씨네의 기사를 보고 영향이 있다거나 첫 촬영을 앞두고 혹시 긴장하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첫 촬영은 누구나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우려와 달리 성우는 집중력을 잃지 않고 있었다. 마치 연극 무대에 올라가기 직전의 모습과 비슷했다. 좋은 일이기는 했지만, 신인답지 않은 모습 때문에 키우는 재미가 현저하게 떨어졌다.
“재미없는 녀석.”
“네?”
“아냐. 오늘 촬영은 어떤 장면이냐?”
“오늘은 몇 씬 없어요. 희선 누나와 찍는 것들이 대부분이에요.”
둘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진수가 운전하는 밴은 촬영 현장에 도착했다.
주차하자마자 그들을 향해 누군가 다가와 차창을 살짝 두드렸다. 만석이 문을 열자 이하윤이 보였다. 그녀는 현장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여성 조연출이었다.
“오셨어요.”
“늦진 않았죠?”
“적당할 때 잘 오셨어요. 우선 분장하고 옷부터 갈아입을께요.”
“어디로 가면 되죠?”
성우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만석과 하윤이 동시에 말렸다. 그것 때문이라면 배우가 직접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성우는 예전에 ‘귀신의 집’에 아주 잠깐 출연했던 당시가 떠올랐다. 확실히 주연과 보조 출연의 대우는 천지 차이였다.
“그래도 인사는 드리고 와.”
만석의 말에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내리자 여러 스태프의 눈이 단번에 쏠렸다. 성우는 그런 그들에게 한 명 한 명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촬영 현장으로 향했다. 어느 사이에 따라 나왔는지 진수는 스태프에게 자양강장제를 한 병씩 나눠주고 있었다. 아마 오 실장님이 시킨 것으로 보였다.
“우리 성우 잘 부탁드립니다.”
나직하지만 할 말은 다 했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기에 점차 그 현장으로 다가설수록 진수는 입을 다물었다. 조그만 잡음도 민감한 현장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을 보며 성우는 진수를 다시 보게 되었다. 김이수 매니저를 따라다니면 잘 배워 온 것 같았다.
십여 명이 둘러싼 촬영현장.
그곳에서 연기하고 있는 이는 바로 조강철과 최희선이었다. 둘은 분장을 하고 완벽하게 의상을 차려입은 상태였다. 이미 그들은 배우가 아닌 그 시대를 살던 사람처럼 보였다.
특히 수더분한 하얀 도포를 입은 조강철.
그의 머리는 하얗게 백발이 되어 있었다. 불과 이틀 사이에 완벽하게 바뀐 그의 모습에 성우는 입이 떡 벌어졌다. 둘은 성우가 보고 있는 것을 모르는지 연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어딜 가신다고 그래요.”
“이거 놔!”
“나가시면 안 돼요. 지금 나가면 개죽음이라고요.”
“그러면 저렇게 죽어 나가고 있는데 그냥 보기만 하라고?”
조강철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비탄에 가득 찬 마음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 연기를 보며 성우는 역시 연기력은 국내 최고 수준이라 여겼다. 하지만 최희선의 연기 역시 만만치 않았다.
둘이 실랑이하는 장면.
그것을 보며 성우는 점차 감정이입이 되었다.
만약 자신이 저 시대에 살았으면 저렇게 뛰어나갈 수 있을까? 그것은 장담할 수 없었다. 영화에서 이 장면은 3.1 운동이 탄압당할 당시였다.
전국 참여 인원 200만.
그중에 사망자가 7509명이라 전해지고 있었다.
부상자는 무려 1만 6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기록에 따라 오차가 상당했다. 전국 단위의 기록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죽더라도 늙은이가 죽어야 하는 거야.”
“제발요.”
“앞길 창창한 저 어린 것들이 피 흘리는 꼴은 더는 못 보겠어.”
“가시더라도 이 사람들 다 고치고 가세요!”
최희선은 두 팔을 벌렸다.
그리고 조강철 아니 왈우 강우규 선생을 막아섰다.
그녀의 결연한 눈빛을 받은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자 여러 피 흘리는 동네 사람들이 보였다. 몇 명은 무척 위급해 보였다. 그것을 보니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듯 조강철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왈우 강우규 의사.
그는 어린 시절 친형에게 한방의술을 배운 한의사였다.
이미 나이도 환갑을 넘겨 어느 정도 경지에 도달했지만, 이렇게 총에 맞고 칼에 찔린 상처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가 양놈들 의사도 아니고 이걸 어째...”
“할아버지도 의사잖아요! 그럴 시간에 한 명이라도 더 살려요. 저는 지 동생 데리고 올게요.”
“홍분아... 몸 조심혀.”
그렇게 말하며 강철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바로 곁에 누워있던 이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컷!!!”
추정만 감독이 컷을 외쳤다.
그러자 촬영 현장은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마치 시간이 멈췄다가 다시 흐르기 시작한 느낌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카메라가 돌아가는 그 순간에는 모든 이들은 숨죽여 배우의 연기에만 신경 썼다.
“수고하셨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다음 장면은 씬 1-3 들어갈게요.”
모두 자신이 맡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스크립터는 혹시 모를 옥에 티를 방지하기 위해 모든 것을 기록했고 조명부는 어느새 뜨거워진 조명을 식히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인사를 하며 성우는 추 감독 앞으로 다가섰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어! 왔어? 뭐하러 이렇게 일찍 와. 아직 촬영하려면 시간 꽤 남았는데.”
“에이~ 감독님. 우리 일정이 뒤로 밀린 거예요.”
권기진 조감독이 핀잔을 줬다.
하지만 추정만 감독은 딱히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귀를 한번 후비며 딴청을 피웠다.
“그런가? 뭐 영화 찍는 게 다 그렇지. 아직 찍어야 할 것들이 꽤 있으니 준비하고 차에서 기다려.”
“여기서 보고 있으면 안 되나요?”
“일단 분장부터 마치고 알아서 해.”
그 말에 성우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조강철과 최희선을 향해 걸어갔다. 둘은 어찌나 연기에 집중했는지 땀에 범벅이 되어 있었다. 아직 날이 뜨거운 9월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지금 온 거야?”
“네. 방금 도착했습니다.”
“그럼 촬영 준비부터 해야지 뭐하러 돌아다니는 거야?”
조강철의 지적은 따끔했다.
그게 어떤 이유라도 촬영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다운 말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성우는 웃으며 답했다.
“일단 인사부터 드리고요.”
“쓸데없이 인사성만 바르네. 희선아 얘 인사하러 왔단다.”
“어머~ 선배님. 조금 전까지 성우 언제 오냐며 물어보시던 분이 왜 그렇게 퉁명스러워요.”
“크흠. 내가 언제 그랬다고! 막내가 코빼기도 안 보이니 딱 한 번 물어본 것뿐이야.”
그렇게 말하며 조강철은 헛기침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모니터링 액정을 바라봤다. 그가 보고 있는 곳에는 조금 전의 촬영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 그런 것은 처음 보는 성우이기에 신기했다. 확실히 연극 무대와는 차원이 다른 세계였다.
“와~ 찍은 다음에 바로 확인도 가능해요?”
“당연한 거 아냐?”
“신기하네요.”
“별걸 다 그러네. 인사 다 했으면 가 봐.”
그렇게 말하며 조강철은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늘진 곳에 자리 잡은 자신의 전용 의자로 향했다. 그곳에는 그의 전담 스태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땀이 흐르며 지워진 화장을 복구해야 하기에 그들의 손놀림은 무척이나 바빠졌다.
그로부터 1시간 후.
성우는 긴 기다림 끝에 카메라 앞에 섰다.
마침내 그의 첫 영화 촬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성우는 좀처럼 인상을 펴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첫 촬영이 이뤄지는 장소 때문이었다. 이미 콘티를 보았지만, 이렇게 리얼할 줄은 몰랐다. 도저히 정신이 집중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어흑! 냄새가 뭐 이렇게 심해?’
그가 앉아있는 공간.
그곳은 바로 똥간, 즉 재래식 화장실 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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