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끼 -31
문석의 다급한 질문.
그것을 들은 성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척 중요한 것처럼 느껴졌지만, 그로서는 전혀 모르는 이름이었다.
“위례검이요? 저는 처음 듣는데요.”
“분명 내가 아는 그 위례검이 맞는데... 비슷한 부분이 너무 많아요.”
“저는 권법을 했잖아요. 잘못 보신 거는 아닐까요?”
일리 있는 의심이었다.
성우가 그렇게 말하자 문석은 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목검이 몇 개가 걸려 있었다. 그는 목검 하나를 집어 다시 돌아오며 성우에게 말했다.
“말로 하는 것보다 일단 보는 것이 좋겠죠?”
목검이 허공에 휘둘러졌다.
그러자 위협적인 소리가 났다.
하지만 성우는 그보다 그의 몸놀림에 더 집중했다. 첫 동작을 보자마자 홍문석이 왜 자신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매우 익숙한 몸놀림이었다. 그와 자신의 차이는 그저 검의 유무였다. 그만큼 무사귀에게 배운 것과 흡사했다.
하지만 다른 부분도 상당했다.
그가 펼치고 있는 중간 몇 부분은 뭔가 아귀가 맞지 않았다. 중요한 것이 곳곳에서 뭉텅이로 빠진 느낌이었다.
그 순간!
성우의 눈에 낯선 풍경이 들어왔다.
예전에 무대 위에서 해솔의 전생을 보았을 때의 그 현상이 다시 시작된 것이었다.
넓은 초원 위에서 한 남자.
그는 검을 들고 빠르게 휘두르고 있었다.
성우는 본능적으로 그가 장군이라 불리는 무사귀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위로 홍문석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의 움직임은 화려했다.
그것은 칼로 추는 하나의 춤이자 피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광풍이었다. 얼핏 보면 베고 찌르는 것의 단순한 조합이라 할 수 있지만, 뭔가 복잡하고 또 오묘했다. 그는 하늘을 가르고 대지를 요동치게 만들었다.
-위례검이야. 사택천(沙宅天) 아니 장군 그 녀석이 잊고 있던 이름을 기억해냈어.
‘위례검?’
-그래. 백제 시대의 잊혀진 검술. 본래 목만치의 본국검과 쌍벽을 이루던 거지.
두부의 설명은 이어졌다.
아니 정확하게는 사택천의 말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사택천이라 이름을 밝힌 그는 백제 멸망 이후에 최후로 남은 위례검 전승자라 했다. 물론 그 외에도 위례검을 익힌 이들은 제법 많았지만, 검법의 진수를 전수받은 이는 그밖에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환영이 사라짐과 동시에 홍문석도 검을 멈췄다.
그가 펼쳐서 보여준 검법은 길지 않았다. 성우가 펼친 것의 반의반도 되지 않는 길이였다. 그는 다시 성우를 향해 다가오며 말했다.
“이제 무슨 말인지 알겠죠?”
“네. 확실히 이해했습니다.”
“제가 배운 것은 일부분밖에 되지 않아요. 정말 우연이었죠.”
문석은 아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위례검의 흔적을 처음 만난 이후. 그는 긴 세월 그 흔적을 찾아 헤맸다. 그가 이 잊혀진 검법의 일부나마 배울 수 있었던 것은 20년이 넘은 오래전의 일이었다. 한참 실전된 무예를 찾아내 그 맥을 잇겠다며 전국을 떠돌던 시절이었다.
그는 성우를 붙잡고 하소연을 했다.
꼭 위례검의 진수를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성우 역시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정리한 것은 잠자코 옆에 서 있던 진수였다.
“홍 감독님?”
그제야 홍문석은 정신을 차렸다.
둘이 찾아온 이유가 그제야 떠오른 것이었다.
바이올렛의 오 실장과 더불어 추정만 감독은 직접 전화까지 주었다.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는 신인 배우를 잘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이번 영화에서 작지 않은 역이었다.
더구나 대부분의 액션 씬은 대역 없이 찍을 예정이었다. 딱 봐도 준비할 것이 상당히 많아 보였다. 크랭크인 일정을 따져봤을 때 지금부터 부지런히 해도 모자랐다. 그런데 그런 배우를 붙잡고 엉뚱한 이야기만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흥분했네요.”
“괜찮습니다.”
“사실 제가 ‘왈우’의 무술 감독으로 참여하기로 어제 확정되었어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그 말에 성우는 정신을 번쩍 들었다.
솔직히 그에게 있어 무술 감독은 추정만 감독과 같은 급이라 봐도 무방했다. 액션 장면이 유독 많은 캐릭터이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감독님.”
“그건 그렇고 제 아들이랑 나이가 비슷한 거 같은데 말은 편하게 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성우의 말을 들은 문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장소에서 그가 존댓말을 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욕의 비율이 훨씬 높았다.
아차 하는 순간 크게 다칠 수 있는 곳이라 어쩔 수 없었다. 몸이 재산인 이들이기에 항상 긴장을 놓지 않게 해야 할 의무가 그에게는 있었다.
“그건 그렇고 앞으로 합을 짜야 해. 아까 보여준 위례검 말고 다른 거는 없을까?”
“글쎄요.”
“이야기 들어보니 오디션 현장에서 발차기를 장기로 보여줬다며?”
홍문석은 어느새 프로의 자세로 돌아왔다.
그가 지금 해야 할 것은 배우가 가능한 부분이 어디까지인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멋진 합을 짜내도 배우가 못 따라가면 쓸모가 없어진다.
잠시 후.
문석은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영화를 찍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까 위례검을 보았던 것과는 또 다른 흥분이 밀려왔다. 웰메이드 액션에 대해 항상 갈증이 있는 그였다. 그런데 유성우라는 이 배우라면 가능성이 충분히 보였다.
전적으로 무술 감독으로서의 예감이었다.
오랜 세월 활동하며 점차 말라가던 영감도 다시 충만해졌다. 그의 상상 속에 성우를 집어넣으니 무수하게 많은 합이 떠올랐다. 지금 그에게 있어 유성우라는 이 배우는 뮤즈가 다름없었다.
“오~발차기도 좋네. 혹시 주먹보다는 그게 더 편한가?”
“아뇨 딱히 가리지는 않아요. 그냥 이게 더 재미있어서 연습해본 거예요.”
“그럼 군대는 다녀왔어? 이번에 총격 씬도 제법 있던데.”
“육군 병장 만기 전역입니다.”
성우의 말에 문석은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는 안색을 굳히며 성우를 향해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냥 집에 가라.”
“네? 갑자기 왜?”
“아니 알려줄 게 없잖아. 여기 있는 얘들보다 더 잘하는데 뭘 배워. 오히려 내가 위례검을 알려달라고 졸라야 할 판인데.”
문석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자신이 알려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배우고 싶었다. 도대체 뭘 배우러 온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가진 실력이라면 따로 준비할 필요조차 없어 보였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감독님.”
성우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것을 듣던 홍문석은 시시각각 표정이 바뀌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환하게 웃으며 성우를 덥석 안았다. 마치 세상의 전부를 다 가진 표정이었다.
“오케이! 지금 이 약속 잊지 마.”
“감독님도 약속하신 겁니다.”
“물론이지!”
*
며칠 후.
성우의 일과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예정대로라면 매일 집과 헤이리 그리고 대학로를 오가야 했다. 그런데 헤이리에 있는 액션 스쿨 일정이 쏙 빠졌다. 그것은 모두 그와 홍문석이 맺은 계약 때문이었다.
“감독님. 손 더 올리세요.”
“이렇게?”
“다음은 오른발을 비스듬하게 반보.”
“그리고 그다음에는?”
“우에서 좌로 사선 베기.”
부우웅!
성우는 목검으로 허공을 베었다.
그러자 그의 뒤에 선 몇 명이 그것을 따라 했다.
그들은 홍문석 무술 감독과 액션 스쿨의 팀장급 네 명이었다. 그들 하나하나를 따져보면 한 사람이 가진 단증이 최소 십여 개 이상은 되었다. 말 그대로 괴수들이라 할 수 있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조금만 더 하면 안 될까?”
“안 됩니다. 영상 찍으셨잖아요. 그걸로 오후에 복습하시고 내일 오전에 다시 하죠.”
그렇게 말하며 성우는 목검을 내려놓았다.
진도는 꼭 필요한 만큼만 나가고 있었다. 괜히 한 번에 다 풀어 놓을 필요는 없었다. 이 검법 덕분에 집 앞에서 편하게 교육을 받고 있었다. 물론 와이어 등의 특수 장비를 교육받을 때는 가야 했지만, 어지간한 것은 이 근처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대가는 적지 않았다.
세월에 잊혀진 백제의 검법인 위례검.
그것을 전수해주는 것이 성우의 조건이었다. 그것을 홍문석은 냉큼 받은 것이었다. 물론 그 일을 꾸미기 전에 사택천에게 위례검의 전수에 대한 허락을 받아놓은 그였다.
“오늘 저는 뭐하면 되죠?”
“전방 낙법할 차례야.”
“또요?”
“낙법은 기본 중의 기본이야. 안 다치는 게 가장 중요한 거야.”
문석은 그렇게 말하며 돌아섰다.
그의 얼굴에는 안도가 가득했다. 성우가 그러하듯 그 역시 성우에게 밑천이 털릴까 봐 걱정되었다. 위례검을 다 배우기 전에 이 관계가 끝날 것 같았다. 그만큼 성우가 그의 액션 촬영 노하우를 빨아먹는 속도는 상당했다.
성우가 매트리스 위에서 끊임없이 낙법을 할 무렵.
그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한 차례 바닥에서 뒹군 성우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진수의 전화였다.
-뭐하냐?
“홍 감독님이랑 운동하고 있었지.”
-그래? 제작사에서 1시에 미팅 가능하냐고 묻는 데 갈 거지?
“무슨 미팅이래?”
-수정된 시나리오 나왔다고 하던데.
그 말에 성우는 알겠다며 답했다.
자신 때문에 시나리오를 수정한다고 했다.
바뀐 시나리오에서 그의 흑표 캐릭터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궁금했다. 다만 자신도 함께 가겠다는 진수는 그가 거절했다. 아직 김이수에게 더 많은 것을 배워올 필요가 있었다. 전화를 끊자 옆에서 듣던 홍 감독이 잽싸게 물었다.
“시나리오 나왔데?”
“네. 1시까지 오라고 하던데요.”
“그래? 왜 나한테는 연락도 안 하지? 어서 액션 콘티도 짜야 하는데.”
“글쎄요? 저 먼저 가볼게요.”
1시간 후.
성우는 제작사에 도착했다.
제작사의 미팅룸의 문을 열자 추정만 감독이 그들을 반겼다. 그곳에는 시나리오를 수정한 서윤희 작가도 함께 있었다.
“왔어?”
“안녕하세요. 감독님. 서 작가님도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무슨. 다시 쓰면서 엄청 재미있었어요.”
그렇게 말하며 서윤희는 웃었다.
하지만 미소 띤 그녀의 얼굴에는 다크서클이 어마어마했다. 평소에 쓰지 않는 굵은 뿔테 안경으로도 좀처럼 가려지지 않았다. 성우가 자리에 앉자 추 감독은 시나리오를 꺼내 앞으로 밀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빳빳한 촉감이 이제 막 인쇄된 시나리오다웠다.
“어떻게 바뀐 건데요?”
“흑표의 비중이 30% 정도 늘었어요.”
“정말요?”
“말이 조연이지 거의 주연이라 봐도 돼.”
“조 선배님이 오케이 하실까요?”
“가장 먼저 보여드렸는데 오케이했어요.”
그 대답은 서 작가가 대신했다.
사실 처음에는 조강철에게 된통 깨질 각오까지 했던 그녀였다. 자신의 출연 비중을 다른 배우에게 준다는 것은 그 어떤 배우도 싫어할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는 영화만 잘 된다면 상관없다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바뀐 시나리오가 더 사람 냄새가 난다며 좋아하기까지 했다.
성우는 그 자리에서 시나리오를 읽었다.
서윤희 작가의 말처럼 그의 비중은 상당히 늘었다.
조강철을 제외하면 분량이 2번째는 되는 것 같았다. 아니 영화를 이끌고 나가는 2 톱이라 칭해도 될 정도였다. 그만큼 그의 캐릭터인 흑표는 영화의 주요 장면에는 모두 나왔다.
“어! 저 마지막에 안 죽나요?”
“거의 다 썼는데 제작사의 입김이 들어왔어.”
“네?”
“이왕에 수정하는 거니 흑표 캐릭터에 대해서는 열린 결말로 해달라고 하더라.”
윤희는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 요청이 무슨 이유 때문인지 뻔했다.
제작사에서 바라는 것은 ‘왈우’가 대박날 경우 스핀오프 형태의 속편을 제작할 수 있게 여지를 두는 것이었다. 그만큼 흑표라는 캐릭터의 매력이 적지 않다는 것이었다.
“흐흐 저야 좋죠.”
“속편 만들어 봐야 대부분 망하는데 기대하지 마.”
“감독님이 잘 만들어 주시겠죠. 에고 제가 벌써 김칫국을 마시고 있네요.”
“그건 그렇고 우리 계약서 조금 손봐야 해. 오늘 중에 매니저 통해서 새로 준비할 거니 그렇게 알고 있어.”
“네?”
추 감독의 말에 성우는 의아했다.
그런 그를 보며 슬쩍 웃으며 추정만은 말을 이어갔다.
“분량이 이렇게 늘었는데 고작 그 돈 주고 찍으면 욕먹어. 안 그래요 작가님?”
“그건 그렇죠. 전에 비하면 2배 정도는 줘야 할 거 같은데.”
“2배요?”
처음 계약하며 받은 돈이 3천이었다.
그런데 2배면 거기에 3천을 더해 6천을 준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성우는 잠시 고민 끝에 또 다른 딜을 하기로 했다. 아마 바이올렛의 강 대표는 싫어할 것 같았다. 하지만 바뀐 시나리오라면 충분히 도전해볼 만한 내용이었다.
“계약금은 이렇게 하시는 거는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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