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친 재능의 탑스타-27화 (28/161)

광끼 -27

두부가 제시한 500권의 조건.

처음에는 쉽게 끝낼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한때 장르 소설에 꽂혀 엄청난 독서량을 가지고 있던 성우였다. 제대로 된 속독법은 아니지만, 그 나름의 방식은 가지고 있었다. 빠르게 읽으면 책 하나 정도는 1~2시간이면 충분했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꼼수도 있었다.

가장 효율적인 것은 유아용 동화책이라 생각했다. 그림이 위주인 책이라 텍스트는 몇 자 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책의 선택권이 그에게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오롯이 무사귀가 가지고 있었고 녀석이 원하는 책이 일반적인 것은 절대 아니었다. 소설책이라도 힘든 텐데 설상가상 대부분 전공 서적이었다. 난이도가 상당했고 그 분야도 무척 다양했다.

[근대적 이성과 헤겔철학]

[진보와 빈곤]

[앤더슨의 통계학]

[맥머리의 유기화학]

[세포생물학]

한 장 넘길 때마다 성우는 아찔했다.

그 역시 군대 가기 전까지 남 못지않게 공부했다.

그 덕분에 인서울 가운데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구성 대학교에 합격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문과였고 전공도 영문학이었다. 그러니 생물학이나 기타 공학 계열의 내용은 그에게는... 그냥 외계어였다.

‘어휴···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분명 한글이었다.

그러나 좀처럼 이해되진 않았다.

검은 것은 글, 하얀 것은 종이일 뿐이었다.

성우는 깊은 한숨과 함께 책을 저 멀리 던져버리고 싶었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 무사귀에 대한 분노가 이글거렸다. 이런 책을 어떻게 보라고 고르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희소식이 있었다.

-누가 너보고 이해하래? 그냥 읽으라고.

‘뭐?’

-네가 아무리 그거 잡고 끙끙거려도 그 머리로 이해나 하겠냐.

‘너 나 무시하냐? 지금?’

성우는 오랜만에 투지가 끓어올랐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보니 그제야 두부의 말이 이해되었다.

‘아하! 무슨 말인지 알겠다.’

-쯧쯧. 이렇게 아둔해서 어따 쓰누.

‘진작 말을 해줬어야지. 너 일부러 그런 거지?’

-흐음··· 노 코멘트!

어쨌든 진행 상황은 무척 빨라졌다.

그렇다고 무작정 페이지만 넘길 수는 없었다. 머릿속에 넣을 필요는 없으나 그의 눈으로 글을 봐야 무사귀가 인지할 수 있었다. 그래도 자신이 공부하듯 보던 것에 비하면 적어도 서너 배는 더 빨라졌다.

대충 걸리는 시간을 계산해 봤다.

전공 서적 1권을 읽는데 약 2~3시간이 걸렸다. 다행히 한 번 넘어간 페이지를 다시 보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한동안 서로 말없이 책을 읽다가 성우는 이 지적 호기심을 가진 무사귀가 어떤 존재인지 궁금해졌다.

‘이번에는 어떤 무사귀냐? 적어도 이름은 알려줘야지. 아니면 책을 봐야 하는 이유라도 말해 봐.’

성우의 질문에 두부는 답이 없었다.

잠깐의 침묵 이후에 녀석은 조심스레 말을 했다. 오랜만에 듣는 두부의 진지한 목소리였다. 평소에는 살아 있을 당시에 양반이었다는 말이 못 믿어질 정도로 까불던 그였다. 그래서일까? 목소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솔직히 네가 우리의 이름을 물을 때마다 난처해.

‘이름을 말하는 게 민감한 문제는 아니잖아.’

-보통 그렇기는 하지.

누군가 부탁을 할 때.

적어도 자신이 누구인지는 밝혀야 했다.

하지만 현재 무사귀 가운데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은 고작 둘 뿐이었다. 하나는 두부였고 하나는 이미 성불을 한 해솔이었다. 무예 수련을 함께하는 장군도 별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그마저도 몰랐다.

-그렇기는 한데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녀석들도 상당해.

‘이름도 기억 못 하면서 뭐 그렇게 바라는 게 많아?’

-비명횡사한 이들이야. 죽을 때 간절하게 원하던 것들은 쉽게 잊혀지지 않으니까.

두부의 말에 성우는 많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이들처럼 지금 당장 비명횡사했다고 가정해봤다. 만약 그런 상황이 오면 자신은 어떤 아쉬움과 어떤 기억이 남을지 궁금했다.

나이지리아에 계신 부모님이 떠오를까?

아니면 해솔처럼 당장 오후에 올라야 하는 무대가 떠오를까?

그것은 모조리 추측에 불과했다.

죽는 그 순간이 되어봐야 답이 나올 문제였다. 한편으로 어쩌면 오늘 아침부터 계속 생각나던 물회가 떠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음~ 물회 먹어보고 싶네. 예전에는 그런 것도 없었는데.

‘그래? 옛날에 회는 안 먹었나?’

-아니 별미로 먹기는 했지. 물론 지금처럼 바다 생선이 아니라 은어회나 붕어회였어.

‘붕어? 그걸 회로 떠먹어?’

성우는 전혀 상상되지 않았다.

붕어를 먹는 것 자체를 생각도 못 해본 그였다. 붕어찜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아직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그였다. 한동안 성우는 두부와 이야기를 하다 다시 책을 들여다봤다.

불타는 의지였다.

500권을 채우려면 서둘러야 했다.

하루라도 빨리 그리고 하나라도 더 성불하기를 바라는 그였다.

하지만 그 열의는 오래가지 않았다.

다시 책을 펼친 지 얼마 후 성우는 한 마리의 병든 닭이 되었다. 다른 것은 다 좋은데 현재 가장 그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 잠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격렬했던 장군과의 무예 수련이 문제였다. 성우의 한껏 무거워진 눈꺼풀은 스르르 감겼다. 결국, 그의 머리는 연신 꾸벅였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인사하기 시작했다. 그때 진동으로 해놓았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지이잉!

지이이이잉~!

성우는 눈을 번쩍 떴다.

입가에 흐른 침을 서둘러 쓰윽 닫아냈다.

그러자 손등이 살짝 흥건해졌다.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저 서둘러 열람실 밖으로 발걸음을 향할 뿐이었다.

액정 위에 뜬 오만석 실장.

그가 전화할 이유는 단 하나였다.

캐스팅에 관련된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어찌 된 일인지 좋은 예감이 들었다. 열람실 문을 열고 나옴과 동시에 성우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오 실장의 우렁찬 목소리가 복도에 울러 퍼졌다.

-됐어! 너 캐스팅 됐다고!

성우는 한동안 멍해졌다.

흥분한 오만석의 말이 계속 들려왔지만, 무슨 말인지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사실 그가 제출한 프로필의 경력은 ‘악의’ 밖에 없었다. 오디션 현장에서 보았던 그 쟁쟁한 이들을 뚫고 배역을 따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래서일까? 성우는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정말요?”

-방금 제작사에서 회사로 연락 왔어. 내일 계약하러 오래.

“앗싸! 그런데 어떤 배역이에요?”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자. 집은 아닌 거 같은데. 지금 어디 있어?

“지금 도서관에 있는데 밖에서 만나요.”

둘의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어차피 슬슬 나가야 할 때가 되었다. 조금 있으면 오후 공연을 준비하러 가야 했다. 그나마 요즘에는 전과 달리 오후 3시 이전까지만 가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연극도 한 달 보름 후면 끝이네.’

그가 출연 중인 연극 ‘악의’

그 무대의 끝은 9월 중순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시작부터 여름이라는 시즌 특수를 노린 공연이었다. 그리고 그 성과 역시 작지 않았다. 항간에는 조금 더 하지 왜 벌써 내리려고 하냐는 말도 들려왔다.

*

30분 후.

성우는 만석을 만났다.

그리고 둘은 점심을 먹기 위해 음식점부터 찾았다.

오늘의 메뉴는 물회였다.

올해 들어 가장 더운 하루였다. 그래서 아침부터 생각나던 것이 얼음이 동동 띄워진 물회였다.

“물회가 괜찮으세요?”

“나야 뭐든 안 가리니 괜찮아. 우리 배우님이 먹는 데로 따라가야지. 하하.”

오만석은 환하게 웃었다.

그는 지금 정말 기분 좋은 것 같았다.

그 이유는 성우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마침 물회가 가능한 횟집이 코앞에 있었다. 성우는 간단하게 주문부터 하고 가장 궁금하던 질문을 꺼냈다.

“이제 어떤 배역인지 알려주시죠.”

“맨입에 말해주기는 아쉬운데.”

“저 그냥 연극만 할까요? 그래도 상관없는데요. 어차피 내년에 복학도 해야 하고...”

“워워 알았어. 농담도 못 하겠네. 그런데 진짜 복학하게?”

성우는 요즘 그게 고민이었다.

무대에 오르든 영화를 찍든 학업을 병행하기는 어려웠다. 만약 연극영화과였다면 이야기는 다를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다니고 있는 곳은 영문학과였다.

과연 편의를 봐줄지 의문이 들었다.

특히 요즘은 연예인 특혜가 화두가 되는 시기였다. 다들 몸을 사리기 마련이었다. 더구나 자신은 교수진을 구워삶을 대중적인 인기조차 없었다.

“조금 더 고민해보고요.”

“뭐 그건 시간 많이 있으니 나중에 이야기하자. 이번에 맡은 배역이...”

“흑표겠죠.”

“어떻게 알았어? 따로 연락받은 거야?”

오만석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그제야 성우는 오디션 당시에 있었던 일들을 간추려서 말해줬다. 그 이야기를 들은 만석은 턱을 괴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런 거는 좀 말해줘라. 혼자만 알고 있지 말고. 딱 보니 거의 확정되는 분위기였구만.”

“바쁘신 거 같아서 그랬죠.”

“하긴 내가 요 며칠 정신이 없었지.”

최근 며칠 정신이 없기는 했다.

오만석이 총괄하는 파트에 속한 배우만 무려 10명이었다. 모두 제각각 따로 매니저가 있어도 아예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실제로 눈앞에 있는 성우 외에도 드라마 계약을 앞둔 배우가 둘이나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 계약하면 로드는 따로 붙여주려고 생각 중이야.”

“로드요? 아··· 매니저 말씀이시구나.”

“맞아. 내가 모든 곳을 다 따라다닐 수는 없으니까. 이번 오디션에 혼자 보낸 것도 마음에 걸리더라.”

“안 그러셔도 돼요.”

성우는 손사래를 쳤다.

매니저라니 아직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직 회사에 벌어다 주는 것도 없는데 괜히 빚만 더 지는 기분이었다. 그런 문제는 조금 더 지나서 이야기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만석의 의견은 달랐다.

“주연급 조연이잖아. 지난번 ‘귀신의 집’처럼 하루 이틀 촬영하는 게 아니란 말이야.”

“그건 그렇기는 하죠.”

“밤새워서 촬영하고 아침에 운전할 수 있어? 그러다 스타 되기 전에 황천길로 먼저 가버릴걸.”

“뭐 근처에서 자면 되죠.”

“그게 말이 되냐. 촬영 현장이 어디가 될 줄 알고. 하여튼 지금 맡아줄 사람을 찾고 있는데 마땅한 녀석이 없네. 미령이쪽의 이수가 맡아주면 딱 좋은데.”

신미령 배우의 매니저 김이수.

그는 성우도 회사를 오가며 한두 차례 본 적이 있었다. 사람도 참 좋아 보이고 괜찮았다. 하지만 걸리는 것은 따로 있었다. 문제는 그의 외모가 너무 출중하다는 것이었다. 함께 나란히 서면 자신이 오징어가 되는 기분이었고 자칫 매니저로 오해받기 쉬웠다.

“그 형은 너무 잘생겨서 제가 싫네요.”

“크크큭! 그렇기는 해. 그래서 그 친구도 남자 배우는 극구 사양하더라.”

“뭐 알아서 해주세요.”

“어느 정도 인기 얻기 전까지는 신입이 배정될 수도 있어.”

그 말에 성우는 누군가 떠올랐다.

어차피 신입이라면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그 역시 함께하고 싶은 이가 있었다. 성우는 조심스레 만석에게 의견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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