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끼 -24
브로드웨이(Broadway)
뉴욕의 블록 사이를 비스듬하게 뚫고 지나는 길. 그곳은 공연의 메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무대는 세계 최고라 일컬어진다. 성우의 꿈은 그곳으로 향해 있었다.
수십 개의 극장과 수만 명의 관람객.
그리고 세계 최정상의 배우들이 공연장에 서기 위해 끊임없이 노크하는 곳이 바로 브로드웨이였다. 비록 지금은 영화관이라는 존재 때문에 뒤안길로 밀려난 느낌이 있지만, 아직도 브로드웨이의 문화 파급력은 적지 않았다.
과연 이 꿈이 이뤄질 수 있을까?
그만큼 브로드웨이의 벽은 높았다. 그리고 동양인에게는 보이지 않은 유리천장도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꿈은 되도록 크게 가지라며 충고해주시던 부모님의 말씀이 가장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성우는 갑자기 나이지리아에 계신 두 분이 무척 보고 싶어졌다.
“브로드웨이요?”
강훈은 성우의 이야기를 듣고 당황했다.
그가 예상했던 답변들과는 거리가 상당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가 나온 것이었다. 그랬기에 성우의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몰랐다. 하지만 곧 그를 오늘 불러내야 했던 이유를 떠올렸다.
“일단 무슨 말인지 잘 알겠어요. 아이돌 합류는 거절했으니 더는 묻지 않을게요.”
“감사합니다. 대표님.”
“지난번에 오 실장 이야기를 들어보니 영화 시나리오를 고르고 있다고요?”
“살펴보고 있는데 아직 눈에 띄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 말에 강훈은 눈을 가늘게 떴다.
마침 그의 손에 들어온 영화 시나리오 하나가 있었다.
원래는 바이올렛의 다른 소속 배우인 안승우를 지목해서 들어온 것이라 오만석 실장도 아직 보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안승우의 캐스팅은 불발되었다.
이미 예정되어 있던 다른 스케줄 때문에 시간을 낼 수 없었다. 그런데 거기에 등장하는 한 캐릭터가 묘하게 유성우와 매칭이 잘 되었다.
주연은 아니었지만, 비중 있는 조연이었다.
거기에 색깔마저 강렬해 쉽게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줄 수 있을 캐릭터였다. 더구나 분량마저 상당해 어느 연기자라도 탐을 낼 자리였다.
그 배역을 따내기는 쉽지 않을거란 예상이 되었다.
하지만 혹시나 그 자리를 따낸다면 충무로의 새로운 씬스틸러로 떠오를 가능성이 충분했다. 그것을 생각하며 강훈은 성우에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액션씬 자신 있어요?”
성우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했다.
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반응한 것은 두부였다.
-우리 무술 연마하고 있잖아.
‘이야기에 끼어들지 말고 조용해!’
-어서 자신 있다고 말해.
성우는 두부에게 경고를 했다.
녀석이 끼어들지 않아도 그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은근히 이번에 무술 연습을 하며 데뷔작은 액션 영화로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참이었다. 성우는 그 어느 때보다 자신 있는 목소리로 답했다.
“자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강 대표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곧 다른 직원을 시켜 그 시나리오를 회의실로 가져왔다. 그가 내민 영화의 대본을 잠시 읽은 성우는 단번에 빠져들었다. 지금껏 봤던 어떤 시나리오보다 흥미로웠고 또 재미있었다. 그리고 강 대표가 지목한 캐릭터 역시 탐이 나는 역할이었다.
“관심 있어요?”
“네! 그런데 이거 자리가 있나요?”
“그거는 이제 성우 씨의 몫이에요. 오디션이 다음 주라고 전해 들었어요. 하지만 쉽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겠죠?”
“오 실장 네가 그동안 잘 준비시켜.”
“맡겨만 주세요!”
*
영화 [귀신의 집] 개봉 이후.
여름 극장가에 공포 영화 신드롬이 일어났다.
덕분에 정준 감독의 이름은 하루가 멀다하고 오르내리고 있었다. 대부분 오랜만에 제대로 된 국산 공포 영화가 탄생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보름 만에 100만 돌파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
이 기세대로 가면 금방 국산 공포영화 흥행성적 Top10 의 경계선인 132만을 넘을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결정적인 1초! 더위를 한 방에 날리는 공포의 묘미]
[여름 극장가의 니치 시장을 휘어잡은 공포 영화]
[수년 만에 제대로 된 공포영화가 나왔다. 여름 극장가를 강타한 ‘귀신의 집’]
성우가 출연한 그 결정적인 그 장면.
대중의 관심은 잠시 몰려 왔다가 금방 다른 곳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귀신 분장 너머에 어떤 사람이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런 반응에 성우는 솔직히 실망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그가 앉아있는 생소한 이 장소.
그리 넓지 않은 공간 안에는 긴장감이 진하게 맴돌았다.
모두가 하나같이 간절한 표정이 가득했다. 그가 오늘 찾은 곳은 새롭게 제작되는 영화의 오디션 현장이었다.
그간 운이 좋았던 것이었을까?
극단 작두에 들어간 것도 그리고 영화에 잠시나마 출연했을 때도 성우는 정식 오디션을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은 성우가 생전 처음 보는 오디션이라 할 수 있었다. 오늘을 위해 그는 오만석 실장과 함께 무수히 많은 리허설을 해봤다.
자신있게 들어섰던 것과 달리 성우는 현재 자신감이 많이 사라졌다. 이곳에는 성우와 같은 신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름은 기억 못해도 꽤 익숙한 얼굴이 종종 보였다. 그들을 보자 이 쟁쟁한 이들을 뚫고 과연 자신이 캐스팅될 수 있을지 의심되기 시작했다.
-긴장하지 말고 깊게 호흡해.
‘그게 말처럼 쉽냐?’
-무대 위에서는 긴장도 전혀 안 하던 녀석이.
‘조용히 해줄래. 대사 좀 외우게.
스태프가 그에게 쥐여준 A4 종이 한 장.
그곳에는 오늘 그가 연기해야 할 대사가 한가득 적혀 있었다. 오늘 오디션의 방식은 자유 연기가 아닌 지정 연기였다. 덕분에 며칠 동안 시나리오를 보며 집중해서 연습해온 것들은 말짱 도루묵이 된 상태였다.
‘뭐 이렇게 대사가 길어?’
그것만 문제가 아니었다.
거기에 사용하는 용어들도 무척 낯설었다.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난관은 종종 터져 나오는 걸죽한 사투리였다. 서울 토박이인 그로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아따 욕봤소잉.”
나지막하게 읊는 대사.
그것을 들은 두부는 빵 터졌다.
억양도 그렇고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고 있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웃던 두부는 결국 그의 사투리를 고치는 데 동참했다.
-거기를 높이는 게 아니라니까. 이 미묘한 차이를 모르겠어?
‘다시 한번 해봐.”
-아~따! 욕봐쏘잉~
그 시각 오디션 장소 내부.
그곳은 밖에 가득하던 긴장감이 아닌 피로감이 가득했다. 이른 아침부터 계속된 오디션에 다들 지쳐가고 있었다. 벌써 몇 시간째 잠깐의 휴식을 제외하고 갇혀있는 기분이었다.
“조금 쉬었다 할까요?”
“그렇게 하시죠. 저는 담배 피러 좀 나갔다 올게요.”
“프로듀서님 그거 아직도 못 끊었어요? 요즘 세상에 무슨 담배야.”
“마음처럼 쉽나요. 추 감독님이 독하신 거죠.”
독종이라 새로운 별명이 생긴 추정만 감독.
하루에 두 갑 정도 피던 완벽한 골초였던 그가 담배를 끊은 것은 지난 영화 때였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그놈의 입 때문이었다. 설마 천만이 동원될까 싶어 여러 공수표를 날린 그였다. 그중에 가장 큰 타격이 와이프에게 공약으로 내걸었던 금연이었다.
“내가 이번에는 절대 그런 공약은 안 한다. 하하하.”
그의 말에 모두가 함께 웃었다.
지금 그는 생의 두 번째 천만 관객에 도전하고 있었다.
몇 해 전에 천만을 돌파하며 대박을 쳤던 그였기에 제작 과정은 막힘 없었다. 오랜만에 메가폰을 들은 그에게 투자된 금액은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마음껏 찍을 수 있다는 기대감과 함께 망하면 안 된다는 적지 않은 부담감도 함께 밀려왔다.
특히 캐스팅이 문제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주연은 섭외를 마쳤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조연 두어 자리가 아직도 비어 있었다. 그곳에 넣을 마땅한 연기자가 눈에 띄지 않고 있었다. 주연 못지않게 중요한 자리라 어지간해서 감독인 그와 프로듀서에게는 성에 차지 않는 것도 한 몫했다.
“바이올렛 엔터의 안승우는 캐스팅이 안 되는 거야?”
“아쉽지만 불가능하데요. 저희 일정과 맞물려서 드라마 촬영이 예정되어 있어서 일정 조율도 할 수 없다네요.”
“그나마 기대하고 있었는데. 쯧! 액션씬이 많은 거라 어지간한 배우들은 힘들 텐데.”
“벌써 3시가 넘어가는 데 이러다가 오늘 공치는 거 아닐까요?”
권기진 조감독의 말에 다들 치를 떨었다.
오늘과 같은 오디션을 또 봐야 하는 거라면 절대 사절이었다. 그리고 슬슬 제작일정표를 만들어야 할 시기였다. 누가 해도 그만인 조,단역이라면 다시 캐스팅을 거치겠지만 적어도 주연급 조연의 자리는 어서 섭외해야 했다. 그러다 다시 들려온 권기진의 말에 추 감독은 귀가 쫑긋했다.
“어! 다음에 들어올 친구가 안승우 배우와 같은 바이올렛 소속이네요.”
“그래? 거기 강 대표가 보는 눈이 좋던데. 혹시 내가 아는 배우야?”
“아니요. 연극 하는 친구라는데요. 그리고 ‘귀신의 집’에 출연했다고 합니다.”
“요즘 상영하고 있는 거?”
추 감독의 말에 권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이쪽으로 들어온 그였다. 아무리 바쁜 와중에도 영화관에서 최신 영화는 챙겨봤다. 그런 그였기에 이미 지난 주말에 정준 감독의 신작 역시 본 상태였다. 하지만 그의 기억에서 유성우라는 이 배우는 전혀 없었다. 제아무리 프로필과 실물이 다르다고 해도 제법 눈썰미가 좋다 여기던 자신이었다.
“무슨 장면에 나왔는지 알아?”
“아마 보조출연이었던 거 같아요. 전혀 기억에 안 나네요.”
“크음··· 뭐 일단 불러볼까?”
“지금 바로요? 아직 프로듀서님 안 들어오셨는데요.”
담배를 피우러 우르르 몰려나간 몇 명의 사람들.
그들이 돌아오려면 더 기다려야 했다. 아마 건물 밖으로 나가 수다를 한참 떨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오디션을 보고 있는 제작사 건물은 모조리 금연 구역이라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먼저 본다고 문제 될 거는 없잖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