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끼 -19
책상 위에 놓인 여러 시나리오.
그것을 보며 성우는 입맛을 다셨다.
이 가운데 진짜를 찾아야 했다.
아니 그런 것이 이곳에 없을 수도 있었다.
옥석을 구별해내는 능력은 아직 그에게 없었다. 성우는 한동안 십여 개의 시나리오를 뒤적거렸다. 그러나 딱히 마음에 드는 시나리오는 찾지는 못했다. 그러자 두부가 지루했는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골라~ 골라~
‘시끄러! 여기가 무슨 남대문이냐?’
-이서인가 그 처자도 예쁘던데. 오랜만에 미인과 함께 술 좀 적시게 아까 회식하는 데 따라가라니까.
하지만 두부의 말에는 동의했다.
유해준의 딸로 출연한 한이서의 외모는 뛰어났다. 허풍을 조금 더 하면 엘프라 할 수 있었다. 나잇대도 자신과 비슷했다. 하지만 정작 시사회장에서 말 한마디조차 섞지 못한 그였다. 사실 정신없는 자리여서 그럴 분위기도 아니었다.
‘귀신 주제에 넘볼 거를 넘봐. 쓸데없는 관상 말고 천만 관객을 예지하는 뭐 이런 능력은 없냐?’
-천기누설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엉덩이에서 뿔이나 큭큭.
두부의 아재 개그에 성우는 이를 꽉 물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좀처럼 적응되지 않는 것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바로 옆에 오만석 실장이 있기에 딱히 티를 내기도 어려웠다. 그는 성우가 인상을 찡그리는 것을 보고 소파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좀 살펴봤어?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일 거야.”
“그러게요. 뭐가 좋은 시나리오인지 잘 모르겠어요.”
“내가 몇 개 골라줄까?”
“부탁 좀 드릴게요.”
만석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을 도와주기 위해 그가 있는 것이었다. 물론 자신이 찍을 작품의 선택에 대해 조언을 마다하는 배우도 많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경력이 쌓여야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시나리오 가운데 반절 이상을 한쪽으로 분류했다.
“여기 것들은 이미 중요한 역할은 캐스팅 끝난 거니 봐도 소용없을 거야.”
“그럼 이쪽은요?”
“글쎄 내정된 배우가 있다는 이야기는 아직 못 들었어.”
“그럼 여기 중에서 봐야겠네요.”
그의 앞에 놓인 시나리오는 총 다섯 개.
그 가운데 드라마는 단 하나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모두 영화였다. 만석은 그것들을 보다가 성우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떤 연기가 가장 편해?”
“글쎄요. 제가 했던 연기가 거의 다 비슷해서...”
“하긴 연극 ‘악의’와 이번에 개봉한 ‘귀신의 집’ 모두 연기가 비슷한 구석이 있기는 하네.”
확실히 그랬다.
그가 지금껏 보여준 연기는 비슷했다.
그러나 같은 연기라도 남들보다 확실히 뛰어났다.
하지만 악역만 계속할 것이 아니라면 좀 더 폭넓은 연기를 보여줘야 했다. 하나의 이미지로만 굳어지는 것은 절대 좋은 일은 아니었다.
“로맨스 가능할까?”
“글쎄요. 제가 연애는 거의 안 해봐서 잘 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뭐 유해준 씨는 아이가 있어서 아빠 연기를 하니? 다 상황에 맞춰 연기하는 거지.”
성우는 비교가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만석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배우가 모든 상황을 경험해 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로맨스는 아직 엄두가 나지 않는 그였다.
둘은 그렇게 한참 고민했다.
하지만 쉽게 답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뭔가 조언을 해주고 싶어도 만석은 아직 성우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나리오에 나오는 역할마다 배우에게 바라는 것은 모두 다른데 이 친구가 어디까지 가능한지 모르니 어쩔 수 없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었다.
액션 씬이 많은 영화에 몸치를 넣을 수 없는 일이었고 노래하는 역할에 음치를 넣을 수도 없었다. 만석은 적어도 자신의 배우가 어떤 것을 잘 하는지 정도는 파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어떤 역할이 주어졌을 때 가장 빛날 수 있을지 알 것 같았다.
“이렇게는 안 되겠다. 내일 아침 일찍 다시 와.”
“내일 아침요? 주말이라 3시부터 공연 있는데요.”
“공연 시작 한 시간 전까지만 가면 되지? 주 단장한테 미리 양해는 구해 놓을게.”
“뭘 하시려고요?”
“아무래도 네가 뭘 잘하는지 좀 체크를 해봐야겠어.”
만석의 말에 성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어떻게 체크한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성우를 앞에 두고 만석은 핸드폰을 켜서 메신저로 여기저기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뭘 하려고 저러시지?’
* * *
다음날 오전 8시
성우는 다시 바이올렛 사옥을 찾았다.
이제 겨우 서너 번 찾아왔던 곳이지만, 빌딩이 멀리 보이자 오늘따라 왠지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하아암~ 졸려.”
-그러게 밤에 좀 일찍 자라니까.
“그게 내 맘대로 되냐.”
그렇게 중얼거리며 성우는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시사회가 끝난 이후 반응을 보기 위해 밤늦게까지 인터넷 서핑을 꽤 오래 했던 그였다. 혹시 자신의 이름 석 자가 조금이라도 나올까 기대했지만, 아직 그런 기사는 찾아볼 수 없어 아쉬움이 있었다.
바이올렛 사옥의 입구에 들어서며 성우는 만석에게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냈다. 그러자 그는 별다른 말 없이 바로 3층으로 오라는 글만 남겼다.
“3층? 거기는 처음 가보네.”
바이올렛의 사옥.
5층 건물에서 그가 가본 곳은 4층이 유일했다.
그러고 보니 다른 층에는 뭐가 있는지 궁금해졌다. 성우는 1층의 경비 아저씨에게 인사를 드리고 곧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3층 버튼을 눌렀다.
띵~!
3층에 도착해 문이 열렸다.
그러자 그 앞에는 만석이 기다리고 있었다.
“왔어?”
그렇게 말하는 그의 머리는 부스스했다.
옷도 어제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아마도 회사에서 잔 것으로 보였다.
“어제 집에 안 들어가셨어요?”
“뭐 좀 준비할 게 있어서.”
“아침은 드셨고요?”
성우의 물음에 만석은 답을 못했다.
그런 그를 향해 아침부터 먹으러 가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것은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누구요?”
“어쩌면 선생님이 되어줄 사람이랄까.”
성우는 의문을 표했다.
만석은 그런 그에게 답을 주는 문을 열며 어떤 장소에 들어섰다. 그곳은 거울이 가득한 제법 넓은 공간이었다.
“3층은 처음 와보네요. 여기는 뭐하는 곳이에요?”
“아차! 회사 구경조차 안 시켜줬구나. 깜빡했네.”
“괜찮아요. 천천히 보면 되죠.”
“여기는 아이돌 지망생들이 연습하는 공간이야. 2층은 뮤지션들이 작업하는 공간이고.”
“바이올렛에 아이돌이 있어요?”
“재작년부터 키우는 얘들 있어. 엄청 시끄러운.”
만석은 그런 말을 하며 착잡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로서는 무척 반대했던 일이었으나 대세를 거스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반대로 좋은 점도 있기는 했다. 전과 달리 바로 오늘 같은 날 여러 전문가의 조언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할 무렵.
문을 열고 한 빼빼 마른 남자가 들어왔다.
대충 봤을 때 20대 후반 내지는 30대 초반은 되어 보였다. 그는 안에 오만석이 있는 것을 보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토요일에 불러내서 미안해.”
“뭐 어차피 오후에 얘들 춤 봐줘야 해서 괜찮아요. 말씀하신 분이 이분인가요?”
“맞아. 여기는 신인 배우 유성우. 그리고 이쪽은 우리 회사에서 아이들 안무를 봐주고 있는 안무 트레이너 구한솔.”
성우는 만석이 소개에 고개 숙여 인사했다.
얼떨결에 인사하기는 했지만, 왜 자신에게 이 사람을 소개시켜 주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설마 싶은 뭔가가 떠올랐다. 성우는 다급하게 고개를 들며 만석을 향해 물었다.
“설마 저 춤 배워야 하는 거는 아니죠?”
“맞는데. 딱 한두 시간만 배워봐. 몸치인지 아닌지 좀 확인하게.”
“아이돌 시키려는 음모인가요?”
강한 의심이 들었다.
만석은 그 이야기에 박장대소했다.
그리고는 비주얼이 아쉽게도 아이돌 스타일은 아니라며 절대 그럴 일은 없는 말과 함께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그가 빠지자 안무 트레이너라고 소개한 구한솔이 다가섰다.
“다치지 않게 일단 가볍게 몸부터 풀게요.”
“선생님. 저 춤 정말 못 추는데요.”
“가능성만 보는 거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하다 보면 재미있을 거예요.”
“확인 안 하셔도 되는데. 몸치 맞아요.”
“그 판단은 제가 합니다. 어서 스트레칭 따라 해요.”
한솔의 말에 성우는 죽을상을 했다.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그가 몸을 움직여 춤을 춘 적은 유치원 이후에 단 한 번도 없었다. 사실 어릴 때도 율동을 극도로 싫어하던 그였다. 하지만 단호하게 자신만 바라보는 안무 트레이너 때문에 성우는 스트레칭을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 했다
‘제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