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끼 -18
수많은 인파 사이.
성우는 그들 뒤에서 좀처럼 지나갈 틈을 찾지 못했다. 오만석 실장은 그것을 보더니 그의 손을 붙잡고 길을 만들었다. 긴 시간 매니저 생활을 했기에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잠시만 지나갈게요.”
그렇게 말하며 만석은 지나갈 틈을 만들었다.
오늘 둘이 찾은 곳은 ‘귀신의 집’ 시사회였다.
그렇게 조금씩 앞으로 나가자 여러 배우 사이에 서 있던 유해준이 그들을 반겼다.
“딱 맞춰서 왔네.”
“공연이 지금 막 끝나서요. 제가 먼저 와 있어야 하는데 죄송해요.”
“에이 뭐 그럴 필요가 있나. 옆에 계신 분은 누구?”
“이번에 계약한 기획사 실장님이세요.”
성우의 말에 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가 평소 보여주는 연기력이라면 어느 곳이라도 눈독을 안 들일 수 없었다. 그 정도로 유해준은 성우의 연기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오만석은 명함을 꺼내 정중하게 건넸다.
“바이올렛의 오만석 실장입니다.”
“아~ 바이올렛. 거기 미령이가 있는 곳 맞죠?”
“맞습니다. 요즘 미령 씨가 회사의 기둥이나 마찬가지죠.”
“우리 성우 좀 잘 부탁드려요.”
“그건 제가 드릴 말씀인데요. 하하하.”
만석의 호쾌한 웃음에 해준 역시 따라 웃었다.
유해준과는 유독 인연이 없던 바이올렛이었다. 이번 기회에 안면을 터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여긴 그였다.
그러는 사이 성우는 옆에 있던 선배 배우들을 향해 깍듯하게 인사를 드렸다. 비록 같이 촬영한 장면은 단 하나도 없었지만, 같은 영화에 출연한지라 남같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다만 동네 형과 같은 친근한 이미지의 유해준과 달리 그들은 자체 발광을 하는 것처럼 느껴져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다.
“신인 배우 유성우입니다.”
“아! 이번에 귀신 분장하고 촬영했던 그 친구지?”
“예고편 봤는데 저보다 더 많이 나오는 것 같던걸요. 반가워요.”
성우는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그래도 선배 배우들은 그를 예쁘게 본 것 같았다. 그들은 연신 성우를 향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때 정준 감독이 뒤늦게 그를 발견했다.
그는 두 팔을 벌리며 다가와 격하게 환영했다. 어찌나 반갑게 맞이하는지 주변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집중될 정도였다. 하지만 단 한 명도 성우의 정체를 알아본 사람은 없었다.
“왔구나! 잘 왔어.”
“초대해주셔서 감사해요. 감독님.”
“에이 함께 촬영한 배우인데 당연하지. 내가 설마 빼놓겠어?”
정준의 말은 고마울 뿐이었다.
배우라 인정해주는 말도 그렇고 어쩌면 조연만도 못했던 촬영 분량이었던 그였다. 잠시 후 영화 상영 시간이 다가오자 시사회를 찾은 이들은 각자의 좌석에 앉기 시작했다.
“모두 힘을 합쳐 열심히 찍은 영화입니다. 아무쪼록 잘 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자! 시사회 시작합니다.”
정준 감독의 말이 끝나자 박수와 함께 조명은 꺼졌다.
그리고 곧 그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했다. 성우는 그 시작과 함께 영상에 흠뻑 빠져들었다. 공포 영화답게 그 시작부터 음울한 배경 음악이 흘러나왔다.
“꺄아악!”
공포 영화다운 격한 추임새.
그 비명은 시작부터 여기저기서 터졌다.
그것을 들으며 정준 감독은 긴장감이 풀어졌다. 이 소리는 자신의 영화가 성공할 거란 환호성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직 본격적인 공포는 시작도 하기 전이었다. 유성우가 나오는 그 문제의 장면은 아직이었다.
“허업.”
“엄마야!”
“어이쿠···”
영화의 가장 결정적인 장면.
성우가 분장한 귀신의 모습이 서서히 어둠 속에서 나오자 객석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비명이 터졌다.
그 모습에 성우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봐도 그 장면은 확실히 남달랐다. 화면을 갑자기 전환하며 놀라게 하는 그런 유치한 공포 기법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둠 속에 있는 미지의 존재를 향해 드는 두려움이었다.
‘내가 내 모습을 보고 흠칫할 정도이니.’
시사회가 끝난 이후.
무대 위로 주연 배우들이 올라섰다.
그들은 보며 성우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다음에는 조금 더 분량이 있는 작품을 찍고 싶었다. 그런 그를 향해 유해준과 정준이 연신 손짓을 하며 올라오라고 했지만, 성우가 한사코 마다했다.
오만석의 조언 때문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는 그보다 훨씬 더 오랜 기간 힘들게 촬영에 매진했던 배우들이 더 많았다. 그런 그들을 밀어내고 유성우가 올라간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아쉽겠지만, 지금 저기에 오르는 것은 아닌 것 같아.”
“저도 알아요.”
성우는 그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성우의 뒤에 앉아있던 기자가 질문을 던졌다. 그는 다른 기자들의 일반적인 질문과 달리 색다른 것을 물어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품격있는? 그런 공포 영화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감독님이 보셨을 때 이번 작품에서 가장 애정이 가는 씬은 어떤 것이 있으신가요?”
정준은 그 말에 살짝 웃었다.
마치 기다렸던 질문이라는 듯이 깊게 생각하지 않고 곧바로 답을 내놨다.
“여주인공인 인서 씨가 귀신을 처음 마주하던 장면이 그렇습니다.”
“어떤 장면인지 알 것 같습니다. 예고편에서도 여러 차례 사용하셨죠?”
“예고편을 만든 박지원 감독 역시 저의 의견과 동일했거든요.”
“저도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그것이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분장 때문에 어떤 배우가 연기한 것인지 전혀 누군지 감이 안 오더군요. 도대체 누가 그 연기를 했나요.”
“마침 여기 왔네요. 저기 저 친구입니다.”
정준은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그것을 본 기자들은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다 성우를 발견했다. 주변의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꽂히자 성우는 어쩔 줄 몰라했다. 객석에서 이렇게 집중을 받을지는 전혀 몰랐던 그였다.
“어서 나와서 인사드려요.”
“성우야 여기로 나와.”
정준에 이어 유해준까지 나서서 재촉했다.
마치 안 나오면 다음 질문을 받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결국, 성우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서둘러 무대 위로 올라서야 했다.
“안녕하세요. 신인 배우 유성우라고 합니다.”
“처음 뵙는 것 같은데 전에 어떤 작품에 출연한 적이 있나요?”
“정준 감독님 덕분에 영화는 처음 출연했습니다. 현재는 대학로에서 극단 작두 소속으로 ’악의’라는 연극의 주연을 맡고 있습니다.”
얼떨결에 하는 첫 무대 인사였다.
그런 그의 모습을 담는 카메라는 제법 많았다.
물론 지금 당장 그에 대한 기사를 쓰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 사진이 언젠가는 나중에 써먹을 일이 있을 것이란 촉이 온 것이리라.
모든 행사를 마친 이후.
인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성우는 기진맥진했다. 유해준이 뒤풀이도 함께 하자며 그에게 제안했지만, 갈 수 없었다. 내일은 주말이라 2회 연속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중하게 거절한 성우는 만석의 차에 올라탔다.
“피곤하지?”
“생각보다 엄청 고단하네요.”
“그럼 바로 들어가서 쉴래?”
“아니에요. 회사에 들어온 시나리오 좀 있죠?”
“몇 개 있긴 하지. 피곤하면 내가 내일 극단으로 가져갈게.”
만석의 말에 성우는 고개를 저었다.
엔딩 크래딧을 보고 난 뒤에 오기가 생긴 그였다. 수많은 배우의 이름이 지나간 뒤에 겨우 자신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워낙 빨리 지나가 자칫 놓칠 뻔 하기도 했다. 성우는 만석을 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음에는 주연으로 당당하게 무대 인사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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