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끼 -14
진수와 해솔의 무덤을 다녀온 이후.
성우는 괜한 짓을 한 것은 아닌지 후회했다.
물론 해솔의 명복을 빌러 갔던 것 자체를 후회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충분히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문제는 다른 무사귀였다.
해솔이 성불한 것을 봤던 탓일까? 점점 더 두부를 통해 전달되는 요청 사항이 많아졌다. 이미 죽어 원혼이 된 주제에 뭘 그리 바라는 것이 많은지 모를 일이었다. 더구나 그 대부분 좀처럼 쉽지 않은 것들이었다.
-이 양반이 자기 자손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네.
-자기 무덤 좀 어떻게 해달래. 지금 세 명의 유골이 섞여 있다나?
-한 녀석은 이수환 콘서트를 가보고 싶다는데. 후배 가수 중에 가장 노래를 잘한데.
-굶어서 죽은 녀석이 하나 있는데 크랩 맛이 어떤지 궁금하데. 우리 먹으러 가보지 않을래?
두부의 헛소리는 끝도 없었다.
참다못한 성우는 소리를 꽥 지르고 말았다.
어차피 아직 극단에 도착한 단원은 한 명도 없었다. 그가 지른 소리는 객석 멀리까지 울렸다.
“야! 조용히 좀 안 해?”
-이게 다 성불을...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그리고 정확한 거 맞아? 무슨 성불하는데 콘서트며 맛집 타령이야?”
-해솔은 뭐 무대 위에서 성불할지 알았나?
두부는 구시렁거렸다.
만약 무사귀가 하나둘이라면 들어줄 만도 했다.
하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들이 도대체 몇인지도 두부조차 파악하기 어렵다고 했다. 최악의 경우 모두 성불시키기 전에 자신이 먼저 늙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돈 없어. 배고픈 연극 배우한테 그런 것 좀 바라지 마.”
-돈이 필요하다면 도와줄 수 있지
“뭐 다음 주 로또 1등 번호라도 점지해 주시게?”
-솔직히 그런 능력은 없어. 가장 쉬운 방법이 있긴 한데.
“그래서 그게 뭔데?”
-최가 놈이 예전에 해준 말이 있는... 쉿! 누군가 왔다.
타이밍도 참 거지 같았다.
모처럼 수다쟁이 두부가 중요한 말을 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곧 얼굴을 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작두의 홍일점이자 최연장자였고 또 언제나 자신을 동생처럼 보살펴주는 혜정이었다.
“누나 일찍 오셨네요.”
“벌써 나와서 청소 중이었어? 그런데 무슨 이야기 나누는 소리가 들려서 다들 와 있는지 알았는데 혼자야?”
“통화 중이었어요.”
“그래? 녀석들 먹을 복이 없네. 공연하기 전에 출출할 텐데 이거나 먹어.”
혜정은 가방에서 검은 봉투를 꺼냈다.
그 안에는 반짝이는 은박지로 포장된 김밥 몇 줄이 들어 있었다. 성우는 하나를 꺼내며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잘 먹을게요. 그런데 누나는 분식집에서 새벽부터 일하면 안 피곤해요?”
“피곤하지. 그래도 사장이 내 1호 팬이라 양해를 많이 해주는 편이야.”
“와~ 1호 팬! 부럽네요.”
“그 1호 팬이 친언니거든! 너야말로 엄청난 팬을 거느리고 있으면서 뭐가 부럽다고 그러냐.”
그 말에 성우는 어리둥절했다.
자신에게 그런 팬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듣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내 혜정의 말을 듣고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정준 감독님하고 유해준 오라버니. 두 양반이 SNS에서 네 연기 엄청 칭찬하더구만.”
“고마울 뿐이죠.”
“확실히 고마워해야지. 그분들 덕분에 지난 주말에 매진도 경험해 봤잖아.”
확실히 입소문은 빨랐다.
첫 주에 들어온 관객은 몇 명 되지도 않았다. 이대로 망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되는 나날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했다.
하지만 점차 관객은 늘어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두 사람의 SNS 덕분만은 아니었다. 해솔의 옛 연인인 이소원 기자의 적극적인 추천도 한몫을 했다. 하지만 가장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실제 객석에서 무대를 관람했던 이들의 호평이었다.
[내 인생 최고의 연극을 꼽으라면 연극 ‘악의’를 선택하겠다.]
[더운 여름을 식혀줄 스릴러를 제대로 느끼고 싶다면 영화가 아닌 이 연극을 보러 가세요.]
[기대 없이 들어섰다. 기가 막혀서 나왔다. 이날 나는 대학로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연극을 발견했다.]
[살인마! 주인공의 연기는 진짜다. 아니 연기가 아닐 수도 있다. 그 정도로 그의 연기는 너무 리얼했다.]
관객들의 입소문.
그것만큼 효율이 좋은 것은 없었다.
티켓을 판매하는 온라인 사이트의 평점 역시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물론 연인들이 주로 관람하는 로맨틱 코미디에 비하면 아직 갈 길은 멀었다.
“그런데 너 요즘 무슨 고민 있어?”
“아니요. 딱히 그런 거 없는데요.”
“정말? 이상하다. 나는 이런 쪽으로 감이 꽤 좋은데.”
혜정의 말에 성우는 뜨끔했다.
진수가 던졌던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올해가 지나면 다시 복학도 해야 했다. 현실 앞에 놓인 것들 때문에 요즘 여러 생각이 많은 성우였다. 한동안 말없이 김밥을 먹던 성우는 혜정은 어떻게 버틸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결국, 성우는 조심스레 운을 뗐다.
“누나는 앞으로도 계속 연극을 하실 거에요?”
“당연하지. 불러주는 무대만 있으면 언제든지.”
“힘들지 않아요?”
“나라고 안 힘들겠냐? 집에서는 매일같이 시집이나 가라며 쪼아대지 모은 돈은 전혀 없지.”
“그런데 왜 무대에 계속 오르세요?”
그 말에 혜정은 싱그레 웃었다.
그리고는 성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진지한 표정이었다.
“재미있잖아. 너는 안 그래?”
“물론 저도 재미있어요.”
“그럼 된 거지. 나는 어떤 일을 해도 지금 만큼 행복할 거 같지는 않아. 그게 내가 무대에 오르는 이유야.”
그녀의 말에 성우는 많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극장 안으로 들어서는 또 다른 인기척에 계속 그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들은 상준과 철민이었다. 그런 둘을 향해 혜정은 다짜고짜 질문을 던졌다.
“너희는 왜 연극 하냐?”
그런 그녀의 말에 둘의 잠시 벙쪘다.
하지만 그 대답이 나오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당연한 것을 왜 묻는냐는 표정이었다.
“연극 재미있잖아요.”
“이거 안 하면 뭐해요. 저는 이것밖에 몰라요.”
“오~ 철민! 네가 웬일이냐?”
“저도 이제 3년 차가 넘었다고요.”
둘의 대답에서 공통점은 있었다.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답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매일 고민의 깊은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날이 적지 않았다.
그 기간을 거쳐 여기까지 온 이들이었다.
그런 둘의 모습을 보며 성우는 조금 부러워졌다. 며칠 전에 진수가 말하던 부럽다는 느낌을 그 역시 선배들을 보며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어서 다가올 수 있기를 바랐다.
* * *
악의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이후.
대학로에는 성우에 관련된 소문이 꽤 돌았다.
연극 무대에서 제법 알려진 주이호가 주워 온 ‘천재적인 신인 배우’. 성우에 대한 이야기는 이 동네를 벗어나 일파만파 퍼졌다. 그런 이야기들이 엔터테인먼트 회사까지 흘러가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그 친구가 그렇게 연기를 잘 한다던데.”
“대표님. 아무리 그래도 이제 첫 무대라던데요.”
“그러니까 오 실장이 일단 한 번 가서 봐. 괜찮으면 남들이 채가기 전에 콱 물어오고 알지?”
오만석 실장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대표의 말처럼 될성부른 떡잎이라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그냥 연극 한 편 보고 오는 셈 치면 될 일이었다.
딱히 손해 볼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극단 작두의 단장이자 연출을 맡고 있는 주이호라면 그와 친분이 꽤 있는 친구였다. 오랜만에 회포도 풀 겸 만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오늘 당장 가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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