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끼 -11
연극 [악의]의 첫 공연 날.
좌석은 상당히 많은 사람으로 채워졌다.
하지만 그게 공연의 성공적인 첫 발자국이라 말할 수는 없었다. 좌석 대부분을 채울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초대장 덕분이었다.
이제 막 만들어진 극단이었다.
더구나 첫 작품에 초회 공연이었다. 그러다 보니 공연 후기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당연히 일반 관객이 접하기는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좌석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무시하지 못할 사람들이 곳곳에 앉아 있었다. 평소 주이호의 인맥을 보여주듯 연극배우들은 물론 다양한 사람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저기 정준 감독하고 유해준 아니야?”
“맞네. 요즘 둘 다 영화 촬영한다고 엄청 바쁘다고 들었는데.”
“아~ 맞다. 유해준도 여기 단장하고 예전에 같은 극단에 있지 않았나?”
“창작극을 위주로 공연하던 명현 무대.”
“이제 기억나네. 거기 출신들 잘 나가잖아.”
수다쟁이 동료 기자의 말.
그의 이야기에 이소원 기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현 무대는 이미 40년 가까이 명맥을 이어온 명문 극단이었다.
그곳 출신들의 활약은 확실히 대단했다.
최근 세 번째 천만 관객 영화를 찍은 송경호도 거기 출신이었다. 하지만 동료 기자의 수다는 멈출 생각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다 결국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아픈 곳을 찌르는 실수까지 했다.
“예전 남자친구도 거기 멤버 아니었어? 어쩐지 네가 직접 취재를 나온다고 하더라니.”
“언제 이야기를 하는 거야.”
“하긴 그게 벌써 십 년이 훌쩍 넘은 이야기지.”
“시끄럽고 공연이나 봐. 오랜만에 얼굴 보면서 이상한 이야기 하지 말고.”
소원의 가장 아픈 곳.
그것이 바로 옛 남자 친구의 이야기였다.
표독스럽게 변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옆에 앉아있던 동료 기자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그 정도의 눈치는 있어 다행이라며 소원은 무대 위를 바라봤다.
명현 무대 출신의 주이호.
그와 그녀의 인연은 거의 15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물론 둘이 연인 사이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와 그녀의 남자친구 그리고 주이호까지 매일 뭉쳐 다니던 멤버였다.
술 한잔에 연기를 읊조리고
술 한잔에 인생을 되뇌었다.
그들 세 명이 당시에 마신 술.
그것을 모으면 강을 이룰 정도라 주이호는 항상 떠벌리고 다녔다. 매일 벌어지는 연기에 관해 토론하며 때로는 기뻐하고 때론 슬퍼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남자친구는 사라졌다.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알 수 없었다. 덕분에 그녀와 이호가 그를 찾아다닌 세월만 1년이었다. 그 이후 자신은 연기를 포기했고 이호는 꿋꿋하게 버텼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문화부 기자가 된 것도 그들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그때가 좋긴 했었지.’
이제는 지워진 옛 추억이었다.
오랜만에 지나간 청춘을 음미하며 소원은 무대 위를 바라봤다. 이제 막이 올라갈 시간이 다가왔다. 과연 오랜 친구인 주이호가 어떤 무대를 만들었을지 기대가 되었다.
*
그 시각 무대 뒤 분장실.
밖에서 들리는 웅성거림을 들으며 성우는 심호흡을 거듭했다. 그것을 눈치챘을까? 두부는 또 헛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나 지금 떨고 있니?
‘시끄러워! 그건 또 어디서 배워가지고.’
-너무 긴장하지 말라고. 그러면 될 것도 안 돼.
‘너 같으면 안 떨리겠냐?’
그럴 만도 했다.
첫 무대에 첫 관객이었다.
지난 번에 유해준을 앞에 두고 연기를 했던 때와 또 다른 압박감이 밀려왔다.
더구나 조연도 아닌 주연이었다.
그의 어깨에 올려져 있는 책임감은 상당히 무거웠다. 무대 화장을 한 상태였지만, 그의 사색이 된 표정은 감춰지지 않고 있었다. 그것을 보다 못한 상준이 다가왔다.
“평소에 하던 데로만 하면 돼.”
“그래도 떨리는 거는 어쩔 수 없네요.”
“막상 무대 위에 올라가면 분위기가 확 바뀌는 녀석이 왜 이러실까?”
“제가 그러나요?”
“당연하지. 무대 위에서는 내가 너 때문에 무서워서 벌벌 떤다.”
상준의 말에 성우는 웃었다.
그 순간 메이크업을 마친 혜정 누나가 다가오며 말했다.
“유해준 선배님이랑 정준 감독님이 객석에 와 있데.”
“정말요?”
“그런데 우리 쭈~니랑 헷갈리게 다들 ‘준’ 자 돌림이네.”
“그렇게 부르시지 마시라니까요.”
“왜~ 귀엽잖아.”
단원 가운데 가장 연장자는 혜정이었다.
그녀의 말에 대기실은 웃음보가 터졌다. 평소 극단 작두의 분위기를 들었다 놨다 하는 분위기 메이커다운 모습이었다. 특히 그녀와 상준의 케미는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마치 톰과 제리같다고 할까? 하여튼 그 덕분에 성우는 긴장감을 일부 털어낼 수 있었다. 그 순간 주이호가 대기실에 들어섰다.
“다들 준비됐지?”
“네!”
“오늘 세상에 극단 작두의 첫 연극을 선보인다. 평생 잊지 못할 그런 무대를 보여줘!”
주이호는 배우 하나씩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형형했다. 마치 나가서 무대를 씹어먹고 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성우는 내면 깊은 곳에서 불타오르는 뭔가가 느껴졌다.
-우워~ 해솔이가 흥분했어!
‘그래서 나보고 뭐 어쩌라고’
-자기가 저 녀석에게 했던 말을 토씨 하나 안 바꾸고 그대로 했다나?
‘그건 모르겠고 이제는 좀 조용히 해줄래? 안 그래도 대사 헷갈리는데.’
그 말에 두부는 조용해졌다.
평소 수다스러운 그라도 조용해달라는 말에는 즉각 반응했다. 며칠 전에 경고를 무시하고 수다를 계속 떨다가 자신에게 된통 당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터어엉!
드디어 시작된 무대.
박수를 받으며 가장 처음 무대 위로 올라선 것은 철민이었다. 그를 향해 조명이 쏟아졌다. 그 속에서 철민은 담담하게 첫 대사를 읊조렸다.
[악의! 그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
[나는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어? 누군가 미워해 본 적이 없다고? 그것 헛소리일 뿐이야.]
[저기 저 남자를 예를 들어볼까? 저 남자는 날마다 마누라에게 증오를 퍼붓지. 왜인지 알아? 아니 이유조차 없어 숨만 쉬어도 싫데.]
철민이 손가락으로 짚은 곳은 관객석이었다.
그 손가락에 지목당한 남자는 옆 앉은 여자를 보며 아니라고 손바닥을 휘저었지만, 이미 곳곳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곧 다시 정색하며 말을 이어가는 철민의 모습에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쉿! 내가 지금부터 어떤 남자의 이야기를 해줄게.]
철민이 시작한 무대 위.
그 위로 드디어 성우가 올라섰다.
그리고 곧 연기를 통해 이 연극이 어떤 의미와 메세지를 가지고 있는지 전달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간단해도 가볍지 않았고 또 무거웠지만 음울한 것만은 아니었다.
‘어! 진수도 왔네.’
공연이 중반으로 향하던 중.
막과 막을 이어가기 위해 불이 꺼질 찰나.
성우는 관객석에서 그가 유일하게 초대했던 진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일이 바빠 못 올 수 있다고 했었는데 다행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의 옆에 앉은 한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0.5초도 안 되는 찰나.
성우는 그녀를 보고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녀는 양 볼 가득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가슴 위로 뭔가 무거운 것이 짓누르는 것 같았다.
성우는 어둠 속에 작게 표시된 형광 마커를 따라 걸었다. 비틀거리며 무대 밖으로 걸어가는 그의 모습은 위태로웠다. 그런 그의 내면에서 두부가 뭔가 소리쳤지만, 전혀 들리지 않았다.
해솔이라 불리던 남자.
그가 죽어서도 잊을 수 없었던 아련한 추억의 단편들.
그것들이 성우의 시야 가득 펼쳐졌다. 그 장면 장면마다 아까의 그 낯선 여자가 나왔다. 죽기 직전까지 다시 한번 보고 싶다고 절실하게 외치던 해솔의 목소리. 그것이 자신의 입을 통해 비집고 나올 것 같았다.
‘소원아··· 이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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