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끼 -7
일촉즉발의 상황.
그것을 무마한 것은 상준이었다.
덩치가 제법 큰 주이호와 심연빈 둘의 틈 사이.
그곳에 선 그는 고래 틈에 낀 새우 같았다.
좌우로 거침없이 흔들리는 상준의 모습은 조금 불쌍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릴지언정 그는 그 사이에서 굳건하게 버텼다.
“두 분 모두 진정하시고 떨어져요!”
상준의 호통은 극단 전체에 울렸다.
평소 발성이 부족하다고 이호에게 지적받던 그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과연 동일한 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우렁찼다. 그 소리를 듣고서야 이호와 연빈은 둘 다 씩씩거리며 떨어졌다.
‘도대체 뭐 때문에 저래?’
성우는 그런 세 명을 멍하니 바라봤다.
애초에 그는 자신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조차 몰랐다. 그래도 분위기가 무척 심각하다는 것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곧 성우는 주이호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가 그 사정을 들었다.
“아니 그걸 왜 저한테...”
주연으로 무대에 숱하게 오른 배우.
그런 그와 연기 대결을 하라니 말도 되지 않았다. 오죽하면 성우가 그게 진심이냐며 되묻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녀석들한테 자극이 되어줄 거 같아.”
“저 연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도 몰라요.”
“더도 덜도 말고 아까처럼만 해주면 돼.”
주이호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아까의 연기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 정도의 연기만 안정적으로 계속 보여줄 수 있다면 솔직히 성우를 주연으로 넣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만큼 그가 극장의 안으로 들어서며 본 연기는 충격적이었다.
“아 몰라요! 저는 못 해요.”
“이번 한 번만 부탁하자.”
“그러다 제가 이겨서 연빈이 형이 작두에서 나가면요?”
“네가 이길 수 있을 거 같기는 하니?”
솔직히 이호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심연빈은 결코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녀석이라면 뽑지도 않았을 것이다. 무대 위에서 구른 짬밥이 적지 않은 배우였다. 이를 갈고 무대에 오르면 이호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연기력을 가졌다. 문제는 그 상태까지 만들어 놓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죠. 무슨 망신을 주시려고.”
“자! 그럼 이렇게 하자. 너 연극 하는 거는 몰라도 보는 거는 좋아하지?”
“그렇죠. 안 그러면 이 퀴퀴한 냄새 풍기는 지하실에 제가 여기 놀러 오지도 않죠.”
성우가 별 뜻 없이 던진 말.
그것을 듣고 이호는 자신도 모르게 울컥했다.
이 공간을 구하기 위해 살던 집까지 팔아치운 그였다. 현재 주이호는 말 그대로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첫 연극부터 대박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선방을 해야 다음 연극도 올릴 가능성이나마 있었다.
“지가 좋다고 놀러 올 때는 언제고.”
섭섭한 마음을 담아 이호가 중얼거렸다.
그제야 성우는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소라면 그가 절대 입에 담지도 않을 말이었다. 그만큼 지금의 상황에서 가장 당황스러운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성우였다.
“그냥 없던 일로 하시죠. 저 진짜 못해요.”
가능하다면 안 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조금 전에 그 연기는 자신이 직접 했다고 하기도 애매했다. 무사귀들의 장난에 그저 맞춰줬던 것이 전부였다. 다시 하라고 해도 똑같이 할 수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이번에 도와주면 이기던 지던 평생 작두에서 하는 공연은 공짜로 볼 수 있게 해줄게.”
“정말요?”
“내가 언제 헛소리하는 거 봤어? 나는 내가 뱉은 말은 꼭 지킨다고.”
이호의 제안은 솔깃했다.
성우는 자신도 모르게 그러자고 외칠 뻔 했다. 현재 그의 내면에서는 이성과 감성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곧 이런 생각이 들었다.
‘뭐 손해 볼 거는 없잖아.’
사실 욕심도 났다.
한 줄기 조명 아래 서 있는 느낌.
그때의 두근거림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다.
그 순간의 성우는 세상의 단 하나뿐인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그 황홀한 기분은 아직 여운이 남아 있었다.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 네가 설 곳은 여기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가 느끼고 있는 이 희열.
그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기에 두려움이 들었다.
혹시 무사귀 중의 하나인 해솔 때문인지 모를 일이었다. 결국, 성우는 일단 부딪혀 보는 것을 선택했다.
‘해솔인가 뭔가 그 사람이 도와주겠지.’
*
며칠 후.
극단 작두의 내부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오늘은 중요한 결정이 내려지는 날이었다.
주연 자리를 걸고 신인 유성우와 기존 주연인 심연빈이 혈투를 벌일 예정이었다. 덕분에 몇 명 되지도 않는 조연들은 죽을 맛이었다.
“혜정이 누나. 나 왜 이렇게 떨리지?”
“그냥 평소에 하던 대로만 해. 어차피 그 두 명은 1부와 2부로 나눠서 들어온다며.”
“그래도 심 선배님 요즘 너무 무서워요.”
철민이 툭 뱉은 말에 혜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심연빈의 히스테리는 그녀가 봐도 상당했다. 조금이라도 무대 위에서 틀리면 욕설부터 나왔다.
무대 위에서 그런 거친 선배를 한두 번 겪어본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대부분 연기를 더 잘하라는 의미였지 이렇게 감정 섞인 타박까지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타깃은 애꿎은 철민을 향해 있었다. 혜정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철민을 바라보며 다독였다.
“네가 고생이 많다.”
“이거 이러다가 뒤집히는 거는 아니겠죠?”
“그런 게 한두 번이냐? 초연 올릴 때까지 긴장 풀지 마.”
“또 뒤집어지면 안 되는데요. 저 무대에 못 올라간 지 벌써 6개월이 넘어가요.”
철민은 그게 두려웠다.
무대에 서고 싶다는 마음이 지워질 것 같았다.
현실과 꿈의 사이에 서 있는 존재이기에 더할 수 있었다. 극 중에서 비중도 별로 없는 조연이었다. 그나마 그가 버틸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무대가 주는 희열 때문인데 그것마저 요즘은 희미해지고 있었다.
“오늘 과연 누가 이길까요?”
“성우 그 친구는 아직 주연급은 아니던데.”
“그러게요. 한눈에 봐도 심 선배와 비교가 안 되던데.”
“더구나 연기하는데 편차가 조금 심해. 잘할 때는 엄청 잘하는데 아닐 때도 많고.”
“솔직히 왜 그런 내기를 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쉿! 연출님 들어오신다.”
주이호가 들어선 이후.
극단 작두의 단원은 모조리 무대 위로 올랐다.
그래 봐야 다섯 명이 전부였다.
그 가운데 오늘 한 명의 배우는 극단을 떠날 운명이었다. 물론 대부분은 유성우의 패배를 점치고 있었다. 그것은 심연빈의 자신 있는 표정에서도 나타났다. 마치 덤빌 테면 덤비라는 오연한 표정마저 서려 있었다. 주이호는 그들을 한차례 둘러보고는 무덤덤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이 어떤 날인지 알지?”
“네!”
“그동안 두 배로 고생한 거는 잘 알고 있어. 오늘 하루만 더 힘내자.”
그렇게 말하며 이호는 자리에 앉았다.
주연이 두 명인 바람에 연기를 맞춰주느라 상준과 조연인 혜정과 철민이 상당히 고생이 많았다. 그것은 연출인 그도 충분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를 보며 심연빈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을 걸었다.
“설마 직접 주연을 결정하시는 건가요?”
“내가 연출인데 그러면 안 되는 건가?”
“불공평하다고 생각됩니다.”
“걱정하지 마. 연기를 보고 판단해줄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이호의 말이 끝나는 순간.
극장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환한 빛 사이로 들어오는 두 명의 남자를 본 순간 단원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생각지도 못한 이들이 온 것이었다. 이호는 그들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오늘을 위해 특별히 부른 이들이었다.
“시간 딱 맞춰서 왔네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형이 부르면 언제든지 튀어와야죠.”
“주이호! 형이 그렇게 말렸는데 결국 일을 저질렀구나.”
영화계의 씬 스틸러라 불리는 유해준 선배.
그리고 여전히 연극계를 거쳐 드라마에서 단숨에 스타로 오른 주지헌이 그들의 정체였다. 그들 두 명은 격하게 이호와 인사를 나누고 무대를 바라봤다. 둘 다 잠깐 옛 생각에 만감이 교차하는 듯했다. 그리고는 곧 유해준이 단원을 둘러 보며 외쳤다.
“이호가 자랑을 엄청 하던데. 오늘 기대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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