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끼 -5
얼마나 지났을까?
성우는 시간이 가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 무대 위의 조명이 단숨에 꺼졌다. 그제야 성우는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미안. 오디션이 생각보다 길어졌네. 많이 기다렸지?”
마침 그의 곁으로 주이호가 다가왔다.
그를 보며 성우는 괜찮다며 미소 지었다. 그것은 그의 진심이기도 했다. 지금껏 살면서 이렇게 무언가에 집중했던 것은 처음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보고 싶었다. 왜인지 모를 일이지만, 저 무대가 그리 낯설어 보이지 않았다.
“뭐 먹을래?”
“형이 이 근처 잘 아시니 추천해주시는 거로 먹을게요.”
“그럼 저 위에 고기가 죽여주는 곳이 있는데 거기로 가자.”
그렇게 말하며 이호는 앞장섰다.
성우는 아쉬운 눈초리로 옆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조명이 꺼진 텅 빈 무대가 쓸쓸하게 있었다. 하지만 곧 그의 뒤를 따랐다. 잠시 후 둘이 향한 곳은 대학로 부근의 허름한 고깃집이었다. 이호가 들어서자 그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사장이 그를 격하게 반겼다.
“어! 요즘 안 보이더니 다시 공연하는 거야?”
“이번에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모아서 근처에 새로운 극단 하나 만들었어.”
“결국, 연출로 직접 뛰어든 거야? 극단 이름이 뭔데?”
“극단 작두.”
“뭐 이름이 그래?”
“이 육중한 몸으로도 작두 타더라도 대박 나는 창작극 한 번 찾아보려고.”
이호의 말에 사장은 웃으며 반겼다.
근처에 극단이 하나 더 생긴다는 것은 희소식이었다. 최근 극단이 점차 사라지는 것도 아쉬웠다. 대학로가 대학로 다워지는 것에는 그들의 역할이 무척 컸다. 더구나 제아무리 대학로에 많은 사람이 오가더라도 이 외진 가게에 오는 단골은 대부분 극단의 사람들이었다.
“그렇구나. 그럼 이 친구가 단원?”
“잠깐 놀러 온 동생이야. 배우처럼 보여?”
“훤칠하니 잘 생겼구만. 이 외모로 배우 안 하면 뭐해.”
고깃집 사장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의 말에 주이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성우는 그들이 봐도 조각 미남까지는 아니더라도 잘 생긴 편이었다. 성우는 그 말에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그리고 곧 사장은 그들의 상차림을 위해 사라졌다.
“연극 무대는 오늘 처음 본 거야?”
“어떻게 아셨어요?”
“대충 반응을 보면 뻔하지. 오늘 본 느낌이 어때?”
“좋았죠. 기회가 되면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싶을 정도로요.”
성우의 말에 이호는 피식 웃었다.
오늘 무대에 오른 이들의 연기력은 크게 흠잡을 곳은 없었다. 다들 이를 갈고 올라온 것으로 보였다. 새로운 극단은 기회를 뜻하기도 했다. 조연에 머무는 이들은 주연으로 단숨에 치고 올라갈 커다란 찬스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직 그의 성에 차는 배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오늘 네가 본 배우 중에 누가 가장 좋았는데?”
“저는 햄릿 연기를 한 배우요.”
“아~ 최민혁이··· 연기는 제법 잘 하지.”
그도 인정하는 몇 안 되는 배우.
최근 연극계의 라이징 스타가 최민혁이었다. 만약 그에게 여유가 있다면 어떻게든 데리고 오고 싶은 배우 가운데 하나였다. 연기력도 좋고 티켓 파워도 상당해서 조만간에 이 판을 떠나 영화나 드라마 쪽으로 캐스팅될 것으로 보였다.
더구나 이번에 스케줄도 맞았다.
그래서 최민혁도 오늘 오디션에 참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극단 작두의 여건상 그를 데려다 세울 만큼의 여유는 없었다. 성우도 그런 기색을 눈치채고 곧 다른 질문을 꺼냈다.
“그런데 극단은 직접 만드신 거예요?”
“맞아. 돈 들어갈 데가 하나둘이 아니네.”
“아니 극단도 하시는 분이 보조 출연은 왜 가신 거예요?”
“뭐 기분 전환도 하고 용돈도 만질 겸 가는 거지. 일단 한잔하자고.”
주이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직접 냉장고에 가서 소주를 하나 꺼내왔다.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직접 꺼내 먹는 그 모습은 가게의 종업원 같은 느낌이 났다. 하지만 그 모습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럼 이번에 햄릿이 올라가나요?”
“아니. 창작극이 올라갈 건데. 아직 대본을 보여주지 않았으니 자유 연기로 오디션을 본 거지.”
“어떤 연극인지 기대되네요.”
“아마 흥행하기는 어려울 거야. 엄청 무거운 주제거든.”
그렇게 말하며 이호는 씁쓸해졌다.
로열티를 주더라도 조금 더 대중적인 연극으로 시작하라는 선후배의 충고는 모조리 무시한 그였다. 그만큼 이번에 올릴 판의 대본은 그의 마음에 쏙 들었다.
물론 흥행에 실패할 수 있다.
그 압박감 때문에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그였다. 하지만 대참패를 당할지언정 첫 무대만큼은 고집을 피우고 싶은 주이호였다. 어쨌든 이제 와 바꿀 수도 없었다.
잠시 후.
그들의 테이블에는 고기가 익는 소리가 잔잔하게 울렸다.
지글거리며 익는 그것을 보자 성우는 저절로 침이 고였다. 그리고 마침내 고기가 다 익자 이호는 어서 먹자며 젓가락을 들었다.
하지만 성우는 그럴 수 없었다.
두부와의 약속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성우는 고기 한 점을 집어 바닥에 던지며 중얼거렸다.
‘고수레’
-기억하고 있었구나. 고마워!
‘조용하게 있어서 주는 거야.’
-이호인지 일호인지 너 지켜보고 있다.
성우는 그 말을 듣고 움찔했다.
자신이 봐도 요즘 세상에서 그것도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고수레를 하는 인간은 별종이었다. 하지만 정작 이호는 그런 그의 모습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그래도 궁금했는지 그 표정은 감출 수 없었다.
“뭐 한 거야?”
“고수레요. 제가 미신을 좀 믿어서요.”
“뭐 상관없어. 우리 극단 이름도 작두인데 잘 어울리네. 하하.”
* * *
그날 이후.
성우는 극단 작두를 매일같이 찾았다.
거의 출근하다시피 했지만, 이호는 딱히 말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특별히 하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성우는 그곳에 도착하면 멍하니 무대만 바라봤다. 하지만 남들 눈에만 그럴 뿐이었다. 사실 그는 두부와 노가리를 까느라 심심할 틈도 없었다.
-오늘도 또 여기야?
‘별로 가고 싶은 곳이 없어.’
-그래도 매일 오는 것은 민폐잖아.
‘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거 같던데.’
-클럽 뭐 이런 곳에 갈 생각은 없어? 그런 곳에도 가보고 싶은데.
‘전.혀.’
핑곗거리는 많았다.
복학하려면 아직 멀었다. 더구나 아르바이트도 그리 급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시간은 남아돌았다. 딱히 평소에 즐기는 취미도 없었고 극단에 있으면 시간 하나는 쏜살같이 지났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너의 정체를 꼭 밝혀내고 말겠어! 이 악당, 이 악마! 그 두꺼운 얼굴 너머의 추악함을 내가 모를 것 같아?]
[기만하려고 하지 마. 너라고 나와 다를 것 같아? 세상 누구라도 마음속 깊은 곳에는 악마 하나쯤 모두 가지고 있지. 그 속삭임이 안 들려? 아니 안 들리는 척을 할 뿐이야. 남들의 시선, 남들의 평가 그런 것이 무슨 필요야.]
[어떻게 연쇄 살인범이 너와 같을 수 있다는 거지? 그 궤변은 곧 교수대에서 끝나게 될 테니 기다려.]
[으흐흐. 마음대로 해! 일단 증거부터 가져오라고! 그런다고 너의 가슴 속의 그 악마가 사라지지 않을 테니.]
[이미 모든 것은 준비가 끝났어. 너는 이제 정의의 심판을 받고 그 목숨을 내놓아야 할 거야.]
[그것 봐! 너도 나와 별반 다른 것이 없다니까. 법의 테두리 안에서 숨어있는 네가 더 현명했을 뿐이야. 어쩌면 나보다 더 무서운 존재지. 정의라는 탈을 쓰고 사법의 힘을 빌려 태연하게 살인을 벌이고 있는 것은 바로 너야!]
연쇄 살인자의 이야기.
이번 무대에 오를 주제는 그것이었다.
현재 성우는 이 이야기에 흠뻑 빠져 있었다. 광기 어린 살인자를 통해 인간의 본성과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연극을 잘 모르는 그가 봐도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대본은 치밀했고 또 본질을 잘 잡고 있었다. 하지만 두부는 새로운 무대를 보여주기 위해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 배우를 보며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발성도 그렇고 저 연기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
‘네가 뭘 안다고 지적질이야?’
-아! 내가 한 말이 아니라. 옆에서 하는 말을 옮겨준 거야.
‘그게 누구길래.’
-이 친구도 한때 연극을 했다고 하던데. 이호 저 친구와도 같은 무대에 선 적도 있다네.
그 말에 성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가 잘 안 되었다. 하지만 성우는 곧 두부의 말이 크게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한 말과 똑같은 말을 이호가 지적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