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끼 -3
하지만 그딴 생각을 할 여유는 없었다.
상황은 급박했고 몸은 이호를 향해 기울어 있었다. 이미 무게 중심이 옮겨 갔기에 이제 와 마음을 바꿔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려고 제대한 것은 아닌데’
그 짧은 순간.
성우는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민간인이 된 첫날부터 별의별 일이 다 생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질주를 멈추지 않는 말은 지척에 다가왔다. 시야에 들어온 말의 가슴 근육은 무척 우람했다. 자신 역시 근육이 짱짱했지만, 그것과는 결코 비교 불가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있었다.
말보다 자신이 먼저 도착한 것이다. 이호의 바로 옆에 서 있던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성우는 두 손에 온 힘을 다해 이호를 당겼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중력을 거스르지 못하고 앞으로 튕겨 나갈 수밖에 없었다. 둘의 위치는 그 순간 완벽하게 바뀌었다.
“성우야!”
멀리서 들려오는 진수의 목소리.
그것을 들으며 성우는 바닥에 엉덩방아를 찍었다. 최악의 자세였다. 도저히 여기서 박차고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는 사이 이미 말은 바로 코앞에 도달했다. 그 순간 다시 그 정체 모를 목소리가 들렸다.
-다리 벌려!
-고자 되기 싫으면 벌려.
-어서!
연달아 외치는 목소리.
그 소리에 성우는 엉겁결에 다리를 벌려야 했다. 그 외침 가운데 유독 ‘고자’라는 말이 신경 쓰인 탓이었다. 아직 제대로 한번 써보지도 못한 그만의 소중이였다. 이렇게 허무하게 보낼 수 없었다.
타닥! 타닥!
두 사리 사이를 찍고 지나가는 말굽.
그것을 보며 성우는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간발의 차이였다.
말굽이 찍으며 나타난 바닥의 흔적은 선명했다. 가랑이와 겨우 몇 cm 정도 차이였다. 한 치만 빗나갔어도 큰일 날 뻔한 그였다. 말은 그대로 그의 위를 달려 몇 미터를 지나친 후에야 겨우 멈췄다. 그것을 멍하니 보던 이호와 진수는 다급하게 달려왔다.
“야야! 괜찮아?”
“유성우! 다친 데 없어?”
둘은 성우의 몸 곳곳을 살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찾는 것 같았다.
하지만 흙먼지를 뒤집어쓴 것을 제외하면 아무렇지 않은 그였다. 괜찮다는 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진수는 그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치며 나무랐다.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예나 지금이나 눈물이 참 많은 녀석이었다.
“그러게 거길 왜 뛰어들어!”
“나도 모르게 그만. 이호 아저... 아니 형은 괜찮아요?”
“괜찮지. 덕분에 하나도 안 다쳤어.”
“다행이네요.”
성우는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그런 그를 향해 촬영장의 사람들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다들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정말 큰 사고가 날 위기였기에 그럴 만도 했다. 그제야 감독을 비롯해 연출부의 사람들이 뛰어왔다.
“이봐 괜찮은 거야?”
“아까 그 자식 어디 갔어. 찾아!”
“없어졌어요. 옷 갈아입고 벌써 튀었어요.”
그 난리가 벌어진 이후.
성우는 포졸 3의 복장을 벗어야 했다.
큰 사고가 날 뻔한 그를 그대로 카메라 앞에 다시 세우기 어렵다는 연출부의 판단이었다. 문제의 그 장면은 스턴트맨 위주로 다시 촬영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에게 좀처럼 보기 힘든 조기 퇴근이 주어졌다.
“미안하다. 오늘은 먼저 들어가서 쉬어.”
“그런데 나만 이렇게 먼저 가도 되나?”
“괜찮아. 내가 알아서 출연비는 다른 보조 출연자랑 똑같이 처리되게 해줄게.”
진수는 그렇게 말하며 어서 가라며 재촉했다.
연출부에서 그렇게 결정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사고가 날 뻔한 당사자가 현장에서 계속 있어 봤자 좋을 것이 하나 없었다. 괜히 분위기만 어수선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주이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됐다.
“뭐 그러면야 나야 좋지.”
“못 모셔다 드려서 죄송해요. 서울 가는 차 타는 곳은 아시죠?”
“당연하지. 내가 잘 데리고 갈게.”
“그럼 부탁드릴게요.”
“진수가 네가 고생이 많다. 또 연락 줘.”
그렇게 말하며 이호는 일어섰다.
성우는 그런 그를 따라 민속촌 밖으로 나섰다. 나가는 길에 살짝 고개를 돌리니 반장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진수가 보였다. 쩔쩔매고 있는 그 모습을 보니 짠했다. 살이 안 찌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것을 보고 이호가 담담하게 말했다.
“친구잖아. 그냥 모른 척해.”
“원래 촬영 현장이 다 이런가요?”
“워낙 다 제각각이라 뭐라 말하기 힘들지. 그래도 저 정도는 예전에 비하면 많이 나아진 거야.”
“이해가 안 가네요.”
이호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영화계는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그들만의 룰이 있었고 사회의 일반적인 상식이 통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 역시 그것이 불만일 때가 많던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성우에게 그것을 하나하나 까발릴 필요는 없었다.
그러는 사이 둘은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마침 버스가 멀리서 오는 것이 보였다. 버스가 도착하기 전에 이호는 성우에게 제안 하나를 했다.
“빨리 끝났는데 술이라도 한잔 할까?”
성우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 역시 평소라도 마다치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오늘같이 다사다난한 하루라면 더 절실했다. 하지만 그보다 조금 쉬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가 망설이는 표정을 짓자 이호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만 날은 아니지. 연락처 아까 줬지?”
“네 아까 핸드폰에 저장해 놨어요.”
“시간 될 때 연락해. 엄연히 생명의 은인이잖아. 적어도 밥 정도는 사줄 수 있게 해줘.”
“그럼 이번 주중에 연락드릴게요."
“나는 저 버스 타고 간다. 연락해.”
덩치 큰 주이호는 그렇게 사라졌다.
버스가 툴툴거리며 사라지자 정류장에는 오롯이 그밖에 없었다. 밤늦어가는 시각이라 당연했다. 민속촌은 이미 영업 시각이 지나 문을 닫은 지 오래였다. 언제 올지 모르는 차를 기다리며 성우는 핸드폰을 꺼냈다. 하지만 배터리가 떨어져 켜지지도 않았다.
‘음악도 못 듣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가방에 넣었다.
그 순간 멀쩡하게 정류장을 비추던 가로등이 깜빡였다. 마치 공포 영화의 한 장면과 같았다. 그리고 아까의 그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봐. 이제 이야기 좀 가능할까?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
그것을 들으며 성우는 닭살이 쫘악 돋는 느낌이었다.
아까 다급하던 상황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였다. 다른 보조 출연자의 목소리를 착각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그 목소리는 정확하게 귀가 아닌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누구야!”
-오랜만이네. 그동안 많이 컸구나.
“누군지 모르겠지만, 장난 그만하고 어서 나와.”
-우리도 나가고 싶은데 그게 불가능하단다.
성우는 다시 주변을 돌아봤다.
하지만 그곳에는 여전히 그밖에 없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사람의 인적은 보이지 않았다. 버스 정류장은 탁 트인 곳에 있었기에 누군가 숨어있을 곳도 없었다.
-13년이나 네 안에 함께 있었잖아. 기억나지 않아?
“이게 어디서 헛소리야? 기생충도 아니고.”
-기..생충? 회충을 말하는 겐가. 그렇게 험한 소리를 하다니.
“시끄러워! 정체를 밝히라고!
-우리의 존재는 이미 사라졌어. 그리고 그 흔적만 남아 있을 뿐.
도대체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존재가 사라지고 흔적이 남았다는 말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곧 성우는 그 목소리를 찾는 것을 포기했다. 도저히 듣기 싫어 귀를 막아도 그 목소리가 뚜렷하게 들리는 것을 확인한 이후였다. 제대하자마자 미치다니 그야말로 미칠 노릇이었다.
“나한테 도대체 왜 이래. 계속 있었다며 왜 갑자기 나타난 거야?”
-그 망할 할망구가 채워 놓은 팔찌 때문이지.
“팔찌?”
그 순간 성우는 팔찌를 급하게 찾았다.
가방에서 꺼낸 그것은 여전히 끊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목소리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거 다시 차면 사라지는 거야?”
-아니 소용없어. 그 안에 깃들어 있던 기운이 사라져 효과가 다 했거든.
“어쨌든 비슷한 거라도 구하면 되잖아?
-글쎄. 아마 구하기 힘들 거 같다만...
성우는 기억하지 못하는 옛날.
무당 할머니가 그에게만 몰래 했던 말이 있었다. 그 팔찌를 감아주며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했다. 마치 천기누설이라도 하는 듯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게 벌써 12년 전의 일이었다.
[이게 너를 무사귀로부터 보호해줄 거야. 하지만 정확하게 12년 후에는 효과가 없어져. 그 이후에는 나뿐만 아니라 그 어떤 누구도 어쩔 수 없단다. 아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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