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끼 -2
오전 11시 45분.
사당역에 도착한 성우는 주변을 둘러봤다.
약속했던 시각이 안 된 까닭인지 아직 진수는 보이지 않았다. 성우는 잠시의 틈을 타 그 거리에 서서 햇살을 즐겼다. 이제 막 제대해서 그런지 보통 날의 평범한 풍경조차 새롭게 느껴졌다.
“와 사람 많긴 하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과 자동차.
고층 빌딩 너머로 보이는 햇살마저 사랑스러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배치받은 부대가 있던 곳은 오지에 가까웠다. 지나가는 사람마저 보기 어려운 산골이었다. 그렇게 시골 촌놈처럼 두리번거리던 와중에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성우야! 이 자식 와줬구나.”
빼빼 마른 진수였다.
그는 달려와 왈칵 그를 껴안았다. 그런 그의 갸냘픈 몸을 느끼며 성우는 혀를 찼다. 어제도 느꼈지만, 점점 더 말라가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그렇다고 입이 짧은 편도 아니었다.
먹기는 엄청 잘 먹는 녀석이었다. 그것들이 도대체 다 어디로 가는지 신기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거는 그거고 따질 거는 따질 일이었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안 받으면 되냐? 안 되냐?”
“여러 군데 통화하느라 못 받았어. 정말 미안하다.”
“미안하면 다야? 민간인이 된 첫날부터 일하게 만들다니 양심도 없는 놈.”
“놀면 뭐해. 이번 촬영만 잘 끝나면 내가 고기 쏠게.”
진수는 웃으며 어깨동무를 했다.
예나 지금이나 미워할 수 없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 이야기하고 있을 시각은 없었다. 그의 주변에는 속속 보조 출연자들이 모여들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턱수염이 인상적인 덩치가 제법 큰 남자였다.
“이호 형님! 와주셔서 고마워요. 저 정말 큰일 날 뻔 했어요.”
“진수 부탁이면 내가 안 들어줄 수 있나. 그런데 오늘은 어디서 촬영해?”
“민속촌이요. 저희 차 어디에 주차하는지 아시죠? 어서 타세요.”
“그래. 오늘도 잘 부탁해.”
그는 허허 웃으며 어딘가로 향했다.
먼저 걷기 시작한 털보의 뒤를 따라가라며 진수는 성우의 등을 떠밀었다. 곧 둘이 도착한 곳은 골목길에 주차된 봉고차였다. 그곳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차 문을 열며 털보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젊은 친구는 처음 보는 거 같은데?”
“오늘이 처음이에요.”
“그래? 내가 훨씬 나이가 많은 거 같은데 말 놔도 되지?”
“편한 대로 하세요.”
성우는 웃으며 답했다.
그가 봐도 털보는 형이라 부르는 것보다 아저씨라 부르는 것이 편할 나잇대였다. 적어도 40대 초반으로 보였다. 이른 나이에 사고를 쳤으면 자신이 아들뻘이었다.
“싹싹하네. 가끔 지가 무슨 연예인이라도 되는 듯이 구는 밥맛 없는 핏덩이도 참 많은데.”
“그런가요?”
“특히 연영과 다니는 얘들이 가끔 알바하러 올 때가 있어. 그런데 몹쓸 헛바람이 많이 들어있지. 혹시 친구도 그쪽인가?”
그렇게 말하며 그의 시선은 성우를 훑었다.
그 시선에 성우는 잠깐 불편했지만, 그 정도는 참을만 했다. 그러더니 그는 곧 말을 이어갔다.
“비주얼은 맞는 거 같은데.”
“감사한 말씀이지만, 저는 영문학과를 다니고 있어요.”
“그래? 인물이 아깝네.”
털보는 자기의 이름을 주이호라고 소개했다.
그리고는 성우가 마음에 들었는지 형이라 불러도 된다고 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생각보다 그의 나이는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30대 중반이라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였다.
“설마 나이를 속이겠어? 안 믿겨?”
“하하 그럴 리가요.”
“오늘 내 곁에만 딱 붙어 있어. 그럼 자다가도 떡이 떨어져.”
그렇게 이호는 호언장담했다.
그러지 않아도 성우는 그러려고 했다.
군대와 마찬가지로 눈치껏 줄을 잘 서야 하는 것이 사회생활이었다. 그 정도는 이미 아는 나이였다.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봉고차는 보조 출연자로 가득 채워졌다. 그리고 차는 사당을 출발해 용인으로 빠르게 달렸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촬영장.
그곳에서 성우는 그저 이호만 따라다녔다.
멈추라면 멈추고 뭘 쓰라고 하면 썼다. 군대와 비교해서 별로 특별할 것이 없었다. 그때 진수가 다가왔다.
“심심하지?”
“이럴 줄 알았으면 보조 배터리라도 챙겨올 걸 그랬다.”
“뭐 다음에 그러면 되지.”
“장난하냐? 다음은 절대 없다. ”
성우의 말에 진수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그의 곁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는 사이에도 촬영은 계속되었다. 멀리서 컷과 액션을 외치는 감독을 보며 진수에게 물었다.
“원래 이렇게 기다리는 게 길어?”
“당연하지 조연도 아니고 배경이나 다름없는 그저 보조 출연인데.”
“서럽네.”
“기다리는 시각도 다 돈으로 들어오니 그냥 멍 때리면 돼. 오늘은 날씨도 좋으니 별로 힘들지 않을 거야.”
그 말에 성우도 동의했다.
날씨도 따뜻한 5월이었다. 아직 별로 힘들 것이 없기에 꿀알바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주어진 역도 별거 없었다. 진수의 말과 같이 병풍에 가까운 병졸 3이 그것이었다. 바로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주이호가 병졸 2였다.
“여기 오시는 분들은 다들 연기를 배우신 분들인가?”
“대부분 아니지. 간혹 옆에 이호 형님처럼 연극계에 계신 분도 오기는 하는데 그렇게 많지는 않아.”
“그렇구나. 뭐 주눅이 들 필요는 없겠네.”
“그래도 보조 출연 경력만 몇 년이 넘은 분들이 많으니 항상 깍듯하게 알지?”
“내가 언제 그런 실수하는 거 봤냐?”
그렇게 이야기 나누던 중.
해가 저물어갈 때 정도가 되자 드디어 그들이 나갈 차례가 되었다. 그들이 나오는 장면은 간단했다. 저잣거리를 빠른 속도로 달리는 말을 가로막는 척을 하다 허겁지겁 피하는 역할이었다.
“자! 다들 아셨죠? 정신 차리셔야 안 다쳐요.”
한차례 설명이 끝난 이후.
보조 출연을 하는 이들은 각자의 자리로 향했다. 저잣거리가 배경인 만큼 병졸 1,2,3을 비롯해 주민 1,2,3 등의 여러 사람이 동원되었다. 거의 십여 명 이상은 되는 사람들이 모이니 그만큼 여러 상황 때문에 촬영 진도는 쉽게 나가지 못했다.
“거기 너무 튀잖아요! 시계나 귀걸이 다 뺐죠?”
“조연출아! 빨리 좀 어떻게 안 되냐?”
“네! 다 됐습니다. 그렇게 멍 때리다 진짜 다쳐요. 이번에는 진짜 갑니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고성.
특히 반장이라 불리는 사람은 폭풍 지적질을 하며 다녔다. 그것을 들으며 성우는 정신이 멍해졌다. 군대에서 보았던 조교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물론 그 역시 지적을 당한 처지였다.
반장이 지적한 것은 그의 팔찌였다.
사극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그 소리에 성우는 마뜩잖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발목으로 옮겨 차면 될 것 같았다. 군대에서 종종 그런 식으로 팔찌를 몸에서 떨어뜨리지 않은 그였다.
두드득.
그가 손을 댄 순간 팔찌는 끊어졌다.
워낙 긴 시각 그의 손목을 감고 있던 끈이 헤질 대로 헤졌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보여 성우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언젠가 그럴 거 같았지만, 그게 오늘일지는 상상도 못 한 그였다. 급한 대로 너덜거리는 팔찌를 주워 주머니에 넣는 순간 감독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레뒤~ 액션!”
그 소리에 성우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촬영장에 울리는 그 신호에 따라 멀리서 말 한 마리가 질주해 왔다. 흙먼지를 날리며 달리는 그 모습은 박진감이 있었다. 그것을 보며 성우는 창대를 쥔 손에 점차 힘이 들어갔다. 은근히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저 말을 피하는 것.
그것이 병졸이 맡은 역할이었다.
별로 위험할 것은 없었다. 어느 정도 거리가 되면 옆으로 빠지면 되는 일이었다. 위험한 지역은 스턴트맨 두 명이 자리 잡고 가장 최후에 몸을 날려 피하기로 약속된 상황이었다. 다만 그 과정 중에 다른 이들도 허겁지겁 피하는 연기는 이어가야 한다는 것을 반장은 신신당부했었다.
‘3…2…1!’
성우는 타이밍을 재고 옆으로 피했다.
말은 넉넉한 여유 폭을 두고 길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갔다.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곧 감독은 컷을 외치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그것을 들은 반장이 와 타박을 놓았다. 그나마 중앙에 가깝게 서 있던 병졸 1이 너무 빨리 움직인 것이었다.
“아저씨 좀 제대로 합시다.”
“죄송합니다.”
“안 되겠네요. 거기 이쪽하고 자리 바꿔요.”
반장이 지목한 사람은 성우였다.
그러자 병졸 1의 보조 출연자는 다시 한 번 기회를 달라며 사정했다. 괜히 중간에 낀 성우는 난처한 마음에 뒷머리만 긁적일 뿐이었다. 잠깐의 실랑이 끝에 반장은 마지막 기회를 주기로 했다.
다시 촬영이 진행되는 현장.
말은 여전히 힘이 넘치는지 거칠게 달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아까의 그 병졸 1이 문제였다. 어찌나 겁이 많던지 아직 거리가 한참 남았음에도 몸을 움찔움찔하고 있었다. 연기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결국 그는 다른 모두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몸을 뺐다. 그것으로 NG가 난 것뿐이라면 다행이었다.
“으억!”
바닥에 한 사람이 쓰러졌다.
그는 바로 성우 곁을 지키고 서 있던 털보 아저씨 주이호였다. 병졸 1이 몸을 빼다 그와 뒤엉켰는데 두 사람 가운데 이호가 하필 말이 뛰어드는 방향으로 쓰러진 것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이미 말은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을 것 같았다.
배우 대신 말을 타고 있는 스턴트맨도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성우는 그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몸을 날렸다. 그러면서 왜 자신이 이런 행동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오늘 처음 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몸이 반응했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생전 처음 듣는 거친 저음의 목소리였다.
-조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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