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렘마스터-242화 (242/244)

[골렘마스터]  115   # 절망과 희망의 미묘한 차이[4]

"황제 폐하. 저희들이 저지른 엄청난 죄를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명하신다면 지금 즉시 여기서 죽을 각오도 되어 있습니

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지금의 저희들로선 더욱 고통스러

우니 말입니다. 하지만 다이티 라무스. 저를 길러주셨던 그 분

이 저지른 죄를 제가 고통스럽게 살아가면서 씻고 싶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이것뿐인 듯 합니다."

소신 있고 진실 되게 말을 끝마친 미사엘 역시 겉으로 입고

있던 용기의 신의 로브를 벗어 바닥에 잘 내려놓은 뒤, 목을

길게 드리워 바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방금 전까지 그에게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며 마구 소리를 지르던 신관들마저 그

의 행동에 따라 숙연해졌다. 병사들과 기사들도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황제 폐하의 결정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공작이 황제에게 가까이 다가가 다른 사람들은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때까지도 미스티의 얼굴에

는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하며 평정을 잃은 모습이었다. 어떠

한 결정이 내려지던 간에 모두는 그녀의 결정에 따르겠지만.

곧 생각을 정리한 미스티가 고개를 들어 바닥에 무릎을 꿇은

두 존재를 내려다보았다. 힘겨운 시련. 그리고 그 시련 속에

서 고통스럽게 살아남은 목숨. 미스티는 지난 날 완전히 기억

을 잃었을 때가 생각이 나 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게다가

은색 팔찌의 정령을 통해 자신도 모르게 그 둘의 눈빛에 악의

가 서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일어나세요. 두 사람 모두."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모두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

다. 그녀의 행동은. 그리고 모두들 만족스런 황제 폐하의 결정

에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키는 두 사람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폐하……."

두 사람의 떨리는 목소리. 감정이 격해진 듯 얼굴이 붉어졌

고, 눈시울 역시 뜨거워졌다. 어느새 그 뜨거운 액체가 얼굴

을 따라 흐르고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두 사람의 감

정은 혼란스러웠다.

"두 사람 모두 아무 소리하지 말아요. 일단 성으로 들어와 휴

식을 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루미니 공작, 이 두 사람에게

방을 내어주세요. 그리고 체력과 정신력이 모두 회복될 때까

지 극진한 대접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두 사람에 대한 처벌

은… 나보다는 하늘에 계신 신들께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는 생각이 드는군요."

미스티는 그렇게 결정을 내린 뒤, 뒤로 돌아보지 않고 다시

황성의 내성 쪽으로 몸을 돌렸다. 공작은 잠시 멍해져 폐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급히 다른 수하들에게 자신에게 내

려진 명을 똑같이 명한 뒤, 그 뒤를 따랐다.

테이란 스플랜. 고대 마도 제국과 비밀리에 투입된 마족의 능

력이 총 망라된 그 거대한 골렘의 봉인이 풀린 지도 벌써 일주

일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대륙의 사람들은 그 사실

을 부정이라도 하는 듯이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사람

들도 막연한 상상으로 테이란 스플랜과 마족을 떠올려 볼뿐이

었다. 오히려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자주 변화가 이는 기후 때

문에 골치가 아팠다. 대지의 모든 것들이 타 들어갈 정도로 뜨

겁게 달아오를 때가 있는가 하면 또 모든 것이 얼어붙을 정도

로 기온이 떨어질 때도 있다. 게다가 바람이 강하게 불어 모

든 것을 날려버리는가 하면 또 언제는 바람 한 점 없이 비가

우수수 떨어져 모든 것을 물로 덮어버릴 때도 있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지상계의 생명체들은 당연히 막연한 상상 속의 존재

들인 테이란 스플랜과 마족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현실적으로

와 닿는 기후 문제에 대한 두려움으로 몸을 사릴 뿐이다.

하지만 정확한 사실을 알고 또 앞으로 닥쳐올 엄청난 일들을

예견하는 각 국가의 수뇌급 인물들과 지도자, 그리고 능력자

들은 조용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도 잔뜩 긴장하여 상황을 주

시했다. 일단 마족을 이끄는 어둠의 마왕 타크니스가 제국을

제 1 타켓으로 선포했다고는 하지만, 곧 그 제국이 멸망을 하

면 불똥은 주변으로 튈 것이 분명했기에 나름대로 반반의 준

비를 갖춘 각 국가는 제국의 움직임과 마족의 움직임을 조금

이라도 빨리 포착하여 서로 노력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물론 건국이래 가장 큰 위기에 처한 퓨티아 제국의 수도 에리

아 시의 움직임도 심상치자 않았다. 마족의 선전 포고에 당황

한 시민들의 동요는 일단 대책을 강구했다는 황제의 선언으

로 인해 조금 수그러들긴 하였지만, 아직 사람들 내면에는 죽

음에 대한 깊은 공포가 드리워져 만약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생각되는 일이 일어난다면 폭동이 일어나게 될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급히 에리아 시에 병력이 배치되어 반란 시민들

을 제압할 준비를 마치긴 하였지만, 그것으로 본질적인 것이

끝나진 않는다. 결국은 테이란 스플랜과 타크니스. 그 둘의 대

한 확실한 결말을 내야 하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세 마계 중 두 개의 마계. 즉. 어둠의 마

계를 제외한 절망와 욕망의 마계의 주인인 두 마왕이 소멸했

다는 화이엘의 말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마계

의 마족들이 총 동원되는 사태까지는 다다르지 않게 되었다

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절망 속의 기다림. 그리고 작은 희망. 이러한 악순환이 반복

되면서 지루한 기다림의 끝은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  *  *

엄청난 바람이었다. 붉은 빛을 띈 기분 나쁜 피의 바람이 모

든 것을 집어삼키고 갈가리 찢어놓는 살풍이 되어 도시의 한

쪽 부분을 휩쓸어버렸다. 고요한 적막감이 내려앉은 도시에서

는 다행히 비명 소리와 같은 처절한 생명의 울부짖음 따위는

들려오지 않았지만, 몇 번의 시련을 겪고 재건되었던 에리아

시 자체를 놓고 본다면 엄청난 타격이자 절망이었다.

이곳은 제국의 수도 에리아의 북쪽 외각 성문 지역. 이미 자

리했던 건물들은 흔적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한 줌

의 재로 화해버렸고, 성벽도 녹아내려 그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테이란 스플랜과 타크니스는 그 만족스런 결

과물을 놓고도 그리 좋은 표정을 짓지 않았다.

『크으. 선전 포고 따위에 사람들을 대피시킨 건가? 하지만

어차피 이곳이 정리되면 다음 차례 역시 지상계의 생명들이

살고 있는 땅이 목표가 될 것이다. 언제까지 도망 다닐 셈이

지? 크하하하하!』

타크니스의 괴소가 터지면서 손에 들린 아크 스태프가 더욱

환한 푸른빛을 띄었다. 그 빛의 파장은 그가 밟고 있던 마도

병기 테이란 스플랜에게 강한 자극을 주었고, 골렘의 핏빛 주

먹에서 다시 한번 거대한 피의 폭풍이 쏟아져나갔다.

쿠구구구궁!

피의 바람. 적살풍에 의해 휩쓸린 일직선상 위에 있던 지역

의 건물들이 순식간에 재로 화해 스러졌다. 후각을 자극하는

강렬한 냄새가 코로 전해졌지만, 타크니스는 얼굴 하나 찡그

리지 않은 채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아크 스태프가 들

려있지 않은 빈손을 앞으로 내밀면서 강한 어둠의 신성력을

순수한 그 자체로 내뿜었다.

슈슈슈슈슝!

그의 다섯 개의 손가락에서부터 갈라져 나온 어둠의 신성력

줄기가 사방으로 휘몰아치면서 주변의 건물들을 산산조각 냈

다. 테이란 스플랜의 적살풍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파급 효과는 더 뛰어난 모양인지 기운이 스치고 지나간 주변

의 건물들까지 피해를 입고 무너져 내렸다.

『너무도 조용해. 다들 어디 간 거지! 날 막지 않을 셈이냐!』

자신의 도발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 제국의 녀석들에게 화

가 치민 타크니스가 양손을 들어올려 시커먼 빛의 기둥을 발

포했다. 양 갈래로 갈라져 쇄도한 어둠의 기둥이 공간까지 흔

들며 에리아 시의 북쪽 지역을 완전히 삼켜버렸다.

쿠어어어어어!

테이란 스플랜 또한 반복되는 무미건조한 파괴 행동에 질린

모양인지 거대한 포효 소리와 함께 100베타에 달하는 몸을 움

직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텅텅 빈 건물들 뿐. 그것들을 부순다

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겠다고 판단한 타크니스는 골렘을 제

국의 황성 홀리 캐슬로 몰았다.

샤아아아아앙!

막 홀리 캐슬이 사정권 앞으로 잡히려는 순간, 마왕의 눈앞에

서 강렬한 섬광이 터졌다. 반사적으로 그의 몸 주변으로 베리

어가 형성되었지만, 이어지는 기습은 없었다.

『크하하하하. 이제야 나타나면 어쩌자는 거지?』

타크니스는 자신을 막으려고 나타난 듯한 존재. 백색의 무형

날개를 휘날리는 붉은 머리 소녀를 눈에 담고 흥분에 찬 목소

리로 외쳤다. 하지만 곧 그녀의 등뒤에 말없이 서있는 존재,

황금빛 미청년을 확인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결국 파괴신 때와 마찬가지로 신과 드래곤이 힘을 합친 건

가?』

타크니스는 아크 스태프를 몸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막 화이

엘이 그에게 뭐라 말을 하는데 그라디우스가 막아서며 말을

가로챘다.

"한 가지 묻겠다. 절망의 마왕 티스페어와 욕망의 마왕 테자

이어는 네가 죽인 거냐?"

무시 못할 드래곤 피어의 파장이 마왕의 머릿속을 정신 없이

울렸다. 하마터면 손에서 아크 스태프를 떨어뜨릴 뻔한 타크

니스의 얼굴에선 웃음이 사라졌다.

『모든 것은 순리대로 행해진다. 쓸모 없어진 쓰레기들은 당

연히 버리는 것이 순리이지. 난 나의 주군의 뜻을 받들어 그

어둠의 신성력을 낭비하는 녀석들에게 심판을 내렸을 뿐이

다.』

말은 길었지만, 결국 '그렇다.'와 똑같은 의미였다. 그리다우

스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한쪽

손을 들어올렸다.

"궁금증이 풀렸다. 이제 남은 건 서로의 존재를 놓고 벌이는

전투뿐. 신룡의 경지를 이룩한 나 그라디우스의 위대한 힘을

보여주마."

그러면서 그라디우스의 손이 하늘로 치솟았고, 황금빛 마나

가 터져 나와 그의 몸을 순식간에 덮어버렸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테이란 스플랜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드래곤의 형상. 날카로운 손톱과 얼굴 사이로 드러난

이빨이 테이란을 갈가리 찢어놓을 것만 같았다. 그 강인한 드

래곤 로드의 비늘을 상하게 할 존재가 몇이나 있을지. 하지만

그러한 상식 또한 테이란 스플랜. 신에게 도전하는 존재에게

까지 통하는 것은 아니다.

『크하하하하. 이런 순간을 기다렸다. 너무 무의미하게 파괴

를 하는 것은 재미가 없거든. 이렇게 날 막아서는 존재를 무너

뜨리면서 주군의 뜻을 행하는 것이 최고의 재미이자, 나의 기

쁨이다!』

"엔젤 나이트 대원들 즉시 합류하라."

화이엘의 외침으로 곧 엔젤 나이트까지 등장하여 타크니스

와 테이란 스플랜의 거대한 몸체를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황

금빛 거체 그라디우스는 황성 쪽으로 퍼질 파장에 대비하여

그쪽을 막아섰고, 엔젤 나이트들과 화이엘은 그 나머지 빈 공

간을 가득 메웠다. 하지만 이 상황을 즐기는 듯한 타크니스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그저 아크 스태프를 쥔 손에 힘을 가해 테

이란 스플랜이 활동하기 편한 형태의 마나장을 형성하였다.

『테이란 스플랜! 나의 의지가 담긴 너희 힘을 보여라!』

쿠어어어어어!

진홍의 존재. 황혼보다 더 붉은 자의 의지가 발하였다. 테이

란 스플랜의 거대한 손이 허공을 가름과 동시에 피의 폭풍. 적

살풍이 일어 모든 것을 녹이려는 듯 쇄도하여 드래곤의 거체

를 덮쳐갔다.

"드래곤 일족을 잡은 적이 있다고 해서 우리 일족을 얕보지

마라. 게다가 난 그들을 대표하는 신룡급의 존재이다! 크아아

아아!"

과거의 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아픔이 묻어나는 말로 자신을

격려한 그라디우스의 거대한 입이 벌려지면서 주변의 공기가

빨려 들어가는가 싶더니 이내 황금빛 기둥으로 화하여 쏘아졌

다. 그 황금빛의 브레스는 허공을 가르며 적살풍과 부딪혔고

곧 어마어마한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아아아앙!

엄청난 마나 임팩트가 폭풍이 되어 휘몰아쳤다. 하지만 화이

엘을 비롯한 엔젤 나이트의 노력으로 그 파장은 근방을 벗어

나지 못했다. 황량한 대지 뒤에 우뚝 솟은 홀리 캐슬도 아직

은 무사해 보였다.

"치잇. 전력을 다한 브레스로도 겨우 막아낼 정도구나. 다른

마왕들이 그렇게 쉽게 소멸한 이유를 알겠다."

그라디우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급히 날개짓을 하여 상공으

로 날아올랐다. 두 번째 적살풍이 날아든 것이다. 하지만 곧

그는 아래쪽을 바라보고 흠칫하여 빠른 속도로 하강할 수밖

에 없었다.

"크윽. 너무 불리하군. 홀리 캐슬을 등지고 싸워야 하다니. 바

람을 지배하는 자, 그를 지배하는 나 드래곤 일족의 이름으로

그의 힘을 빌리고자 한다. 나의 의지는 곧 바람. 허리케인 스

토머!"

빠르게 하강하던 그의 날개짓 속에서 강렬한 바람이 뿜어졌

다. 그 바람은 매서운 기세로 하늘을 뒤덮었고 날아드는 적살

풍과 한데 어우러졌다.

쉬이이잉.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의외로 적살풍이 쉽게 소멸한

것이다. 바람의 힘을 막기 위한 힘이라면 역시 대지의 힘이 정

석인 상황에서 그러한 놀라운 사실이 드러난 이상.

"역사적으로 기록될 한 가지 기막힌 것이 드러났다! 타크니

스 너에게 감사해야겠군!"

그라디우스가 웃고 있었다. 아니 드래곤의 형상이었기에 표

정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만약 폴리모프 상태라면 그럴 것

이라 생각될 정도로 그의 음성에선 환희가 느껴졌다.

『크하하하하하. 적살풍을 막아내다니, 과연 신룡급의 드래

곤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 테이란 스플랜의 공격이 끊긴다

면 신에게 도전할 수 있었을까? 바보 같군. 소환, 샤이닝 브레

이커.』

적살풍이 막히게 된 이 상황에서도 타크니스는 평정을 유지

한 채 그라디우스를 비웃는 여유까지 보여줬다. 그리고 테이

란 스플랜의 앞쪽 공간이 무너지면서 아공간에서 소환된 거대

한 크기의 빛의 검. 엔젤 나이트인 화이엘은 그 검을 확인하

는 순간 경악하여 입을 벌렸다.

"샤이닝 브레이커. 과거 하급의 신조차 갈랐다고 하는…."

---

후아~ 즐독하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