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렘마스터] 114 # 절망과 희망의 미묘한 차이[3]
식당에는 이미 샤우드 백작과 루미니 공작이 먼저 와서 일행
을 기다리고 있었다. 백작을 수행하기 위해 따라온 나이츠 또
한 식당의 커다란 식탁의 한쪽에 자리하고 있다가 복도에서부
터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
다. 백작과 공작도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나이츠와 같이 몸
을 일으켜서 문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직 요리사가 준비한 음
식은 나오지 않은 듯 식탁 위는 깔끔하게 깔린 하얀 식탁보와
화려한 금색의 촛대, 그리고 간단한 컵과 식기도구를 제외하
고는 아무 것도 올려져 있지 않았다.
덜컥.
곧 나이츠의 예민한 감각대로 문이 열리면서 반가운 사람들
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두에는 아투와 그의 연인이자 제국의
황제인 미스티가 들어왔고, 그 뒤를 따라 궁중 마법사 실피스
와 그를 돕는 흑마법사 소울드, 그리고 폰네스 후작님이 들어
왔다.
"꽤 늦으셨군요."
나이츠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한쪽 팔을 가슴으로 가져갔
다. 미스티는 그의 인사에 답하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마침 샤우드 백작이 내어주는 최 상석. 즉 황제의 의자에 다가
가 앉았다. 아투는 그녀의 뒤를 따르다가 오른편에 앉았고, 다
른 세 사람은 그의 반대편에 붙어 앉았다.
"흐음. 어떻게 일은 잘 해결됐습니까, 폐하?"
루미니 공작과 함께 아투의 옆에 자리를 잡던 샤우드 백작이
물이 반쯤 담긴 물컵을 들어 목을 축이며 물었다. 마음 아픈
질문에 어두운 표정이 된 미스티가 막 입을 열어 정황 설명을
하려 하는데, 뒤늦게 따라온 일행이 문을 통해 식당으로 들어
왔다.
"나는 어디 앉으면 되지? 물론 음식은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지
만, 그래도 이런 자리에 한번쯤은 참석하고 싶었다."
왠지 씁쓸한 기분이 남는 내용의 말을 중얼거리며 들어오던
바주크에게 식당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키메
라. 감정이 없을 줄만 알았던 그가 그런 말까지 내뱉다니. 분
명 지금 그의 얼굴에 잠깐 스쳐간 감정은 쓸쓸함. 고독함. 그
러한 것들이었다.
"바주크. 이리로 와서 앉아. 저기 루미니 공작님 그리 해도 될
까요?"
"으음? 으음. 그렇게 하게나. 내가 옆으로 옮기겠네."
잠깐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게 하는 키메라의 행동에 멍해
졌던 루미니 공작이 괜찮다고 손을 흔들며 샤우드 백작의 왼
편으로 옮겨가 앉았다. 바주크는 지금 자신이 저지른 일이 귀
족들 사이에서는 큰 실례가 된다는 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 무
표정한 얼굴로 아투의 배려로 그의 오른편에 자리를 잡았다.
덜커덕.
바주크에 의해 벌어질 뻔한 작은 소동이 정리되는가 싶었는
데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화이엘과 그라디우스가 식당으로 들
어왔다. 그런데 사람들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평상시의 것
과는 아주 딴 판이었다. 될 수 있으면 서로 붙지 않으려 노력
하며 쌀쌀맞게 굴던 그 둘이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찰
싹 붙어서 나타난 것이다.
"화, 화이엘. 너 혹시 어디 아픈 거야?"
생소한 모습을 보이는 두 사람 때문에 아투가 당황했다.
"호호호호호. 내가 아플 리가 없잖아. 난 항상 명랑 쾌활 소녀
라고."
과장된 웃음과 함께 새겨지는 그녀의 얼굴의 여유로운 미소.
분명 그녀는 정상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행동은 정말로
아투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엔젤과 드래곤이 어
떻게 갑자기 저렇게 가까워질 수가 있을까. 다른 사람들도 그
와 같은 생각인 모양인지 입을 살짝 벌리고 멍하니 바라보기
만 할 뿐이다.
"일단 앉지."
그라디우스가 어색한 상황을 정리하고 화이엘의 어깨를 살
짝 밀어 한쪽으로 인도했다. 그 둘은 소울드의 오른편으로 자
리를 잡았다.
"으음. 일은 잘 해결되었냐고 물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잘
되지 않았다. 방대한 양의 서적을 뒤졌지만 우리들이 원하는
정보는 나오질 않았지. 흐음. 드래곤의 지식으로서도 도저히
테이란 스플랜의 약점이나 단점에 대해 기억나는 것이 없다.
그만큼 마도 병기는 철저하게 비밀에 싸여진 채, 존재했다."
잠시 이상한 상황 속에 묻힐 뻔했던 샤우드 백작의 질문에 성
의껏 답하는 그라디우스의 눈빛이 바로 옆에 앉은 화이엘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일행들의 관심은 무겁게 흘러나오
는 그의 말보다는 그 둘의 묘한 관계에 쏠렸다.
"그럼 어떡하죠? 지금이라도 당장에 타크니스가 공격해온다
면 정말 말 그대로 끝장일 텐데."
"호호호호호."
걱정스럽게 묻는 아투의 말에 갑자기 화이엘이 목까지 젖히
며 웃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일행 모두가 침울해졌
을 때도 항상 밝은 모습을 보였고, 방금 석실에서도 역시 전
혀 좌절하거나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렇다면
혹시 무언가 묘책이라도 알고 있는 건 아닐까? 아투를 비롯한
일행의 기대에 찬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로 쏟아졌고, 괜히 그
라디우스가 헛기침을 해댔다.
"무슨 방법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폰네스 후작과 루미니 공작이 동시에 그런 질문을 던졌다.
"호호호호. 우린 지금 너무도 어리석은 짓을 했어. 괴거 지상
계 존재들이 써놓은 자료들만에 의존하여 일을 해결하려했
지. 물론 바보 같은 행동이었기에 좋은 결과를 낳지 못했어.
이제는 우리들의 힘으로 해쳐나갈 때라고 생각해. 과거의 자
료나 역사 따위에서 내려지는 결론을 무시하고 지금의 상태에
서 우리들이 무언가를 생각해내는 거지. 일단 테이란 스플랜.
그 존재가 어떤 존재지? 바로 마나를 중심으로 하여 마왕들의
힘을 이어받아 탄생한 마도 병기야. 과연 마나와 어둠의 신성
력이 잘 융합했을까? 이런 의문을 가져가면서 하나 하나를 따
져본다면 분명 좋은 대안을 강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데…. 어때, 내 생각이?"
너무나도 시원스런 대답에 모두들 어안이 벙벙하여 말을 꺼
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곧 머릿속이 환해지는 듯한 충격을 받
으며 환희의 미소를 머금었다. 그랬다. 그녀의 말처럼 지금 아
투 일행은 모두 스스로의 능력으로 일을 해결하려 하지 않고
그저 과거의 자료를 이용하려 했을 뿐이다. 스스로의 능력을
너무도 과소평가하고 소심하게 행동을 했던 것이다.
"허허허허."
무언가를 깨닫게 된 실피스가 털털한 웃음을 터뜨리며 수염
을 쓸어 내렸다. 9서클 마도사. 인간들 중에서는 그나마 최고
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불리는 존재가 고작 마도 병기에게 겁
을 먹고 있었다니. 속으로 스스로를 강하게 질책한 그는 이미
마음을 다부지게 고쳤다.
"정말 우리들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소울드 역시 지상계 전 대륙에서 최고라 불리는 흑마법사. 테
이란 스플랜이 마족과 고대 마도 제국의 모든 것이 총 망라된
것이라고는 하지만 지레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바주크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대검의 검날을 만지작거렸
고, 폰네스 후작도 역시 식탁의 촛불을 촉매로 하여 불의 정령
을 불러낸 뒤 무언가 생각에 빠졌다.
"그렇다면 일단 식사부터 하면서 얘기를 하는 것이 어떨까?
난 이미 밤새도록 여러 가지를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그렇게 하는 게 좋겠군. 다들 배가 고플 테니 말이다."
화이엘의 말에 웬일로 그라디우스가 동의를 하며 나섰다. 일
행을 모두 무언가를 깨닫고 환해진 표정을 짓고 있다가 다시
그들의 행동에 실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사자
인 그 둘은 왜 그러한 눈빛으로 바라보냐는 듯이 사람들을 대
충 훑어본 뒤, 무심하게 고개를 돌려 식당에서 대기 중인 하녀
를 불렀다.
'뭐가 어떻게 되어 가는 건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왠지
좋은 느낌이 드는 걸?'
아투는 두 존재의 태도 변화를 보고 편안하게 결론을 짓기로
했다.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지기에 앞서 엄청난 존재 테이란 스
플랜과 마왕 타크니스를 막아야 하기 때문에.
아침과 점심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어중간한 시간대에 시
작된 식사는 그렇게 웃지도 울지도 못할 미묘한 분위기 속에
서 이어져갔다.
똑똑똑.
"네? 들어오세요."
여러 가지 국가적인 사안이 적힌 서류를 검토하고 있던 미스티의 귀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
의 앉은키보
다도 높이 쌓여있던 서류들이 순간 바람에 흔들려 무너질 뻔
했지만, 간신히 손으로 잡아 불상사를 면한 미스티의 시선이
넓게 자리한 자신의 집무실 문으로 옮겨졌다.
철커덕.
닫혀있던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면서 낯익은 얼굴을 가진 남
성이 갑옷 차림에 반 무장을 한 채 들어오는 게 보였다. 미스
티는 이제 버릇처럼 되어버린 팔찌 만지작거리기를 계속하면
서 푹신한 의자에서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죠, 네이팜드?"
"화, 황송하옵니다. 저의 이름을 기억해주시다니."
"훗. 뭐 자주 보는 얼굴인데요. 그나저나 무슨 일인데 그렇게
땀까지 뻘뻘 흘리며 달려온 거죠?"
미스티의 질문에 네이팜드라 불린 병사가 가볍게 예를 갖춰
그녀의 앞에 살짝 무릎을 꿇었다. 과연 미스티의 말처럼 그의
얼굴에서 땀이 흘려내려 고급의 카페트에 방울 방물 맺혀 떨
어졌다.
"지금 홀리 캐슬 성문에 반동 세력이었던 용기의 신의 하이
프리스트 미사엘과 전 교황 비밀 기사단인 붉은 화염 기사단
의 기사단장 막스윈이 나타났습니다. 급히 채포를 하려고 했
지만, 저항을 하면서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싶다고 횡포를 부
리기에 이렇게 보고를 올리는 것입니다."
덜커덕.
미스티가 두 존재의 이름을 듣고 놀란 표정을 짓기도 전에 갑
자기 병사의 뒤를 이어 누군가가 뛰어들어왔다. 망토를 두르
고 공작에 어울릴 만한 고급의 옷을 걸친, 허리에 검을 찬 루
미니 공작이었는데 그의 얼굴에는 미스티의 얼굴에 떠오른 감
정과 비슷한 것이 떠올라 있었다.
"폐하. 미사엘과 막스윈이 나타났다고 들었습니다. 빨리 군사
와 기사들을 풀어 그들을 잡으셔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죄를
물어 그들을 극형에 처해 제국의 위상을 바로 잡으셔야 할 것
입니다."
황제에게 인사조차 올리지 않은 공작의 음성에선 단호함이
묻어났다. 병사 네이팜드는 황제 다음으로 손꼽히는 세력가
루미니 공작님의 등장에 당황하여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
다.
"내가 나가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
이유를 직접 듣고 싶습니다. 주군을 잃은 두 사람이 왜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지, 그리고 또 위험한 줄 알면서도 적진 속인
이곳 에리아 시에 나타났는지를 말입니다."
단호함이 베어있는 공작의 태도에 미스티도 무언가 느낀 점
이 있는 모양인지 그에 못지 않게 단호함을 내보이며 끊어서
말했다. 공작은 이내 황제의 말에 놀라면서 뭐라 말을 하려 했
지만, 그 분의 얼굴에 서린 무시 못할 위엄 때문에 곧 입을 다
물고 결정에 따라 황제 폐하를 모시고 밖으로 나갔다.
과연 병사의 보고대로 사제복을 입은 미사엘과 붉은 갑옷을
입은 막스윈이 제국의 황성 수비대원과 기사들에게 둘러 쌓
여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소식을 듣고 달려온 용기의 신 신관
들도 한쪽을 차지한 채, 비난의 손을 높이 쳐들어 미사엘을 욕
하고 있었다.
"황제 폐하의 길을 열라."
긴장감이 팽팽한 그 자리에 루미니 공작이 폐하를 직접 인도
하며 검을 빼들고 소리쳤다. 그러자 곧 그와 폐하를 알아본 제
국의 기사와 병사들이 그 둘을 보호하면서 길을 내주었다. 신
관들 역시 그 분의 등장에 비난의 목소리를 줄이고는 침묵했
다.
"미사엘."
"용기의 신 브레이브를 섬기는 작은 아이, 미사엘이 신성 제
국의 현 황제 미스티 폐하께 인사를 올립니다."
"현 황제 미스티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하얀 정장 차림의 위엄 있는 표정을 지은 미스티가 인사를 하
며 무릎을 꿇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사제복을 입었다고는
하지만 미사엘의 옷은 그동안의 겪은 일을 대변하듯 거의 알
아보지 못할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고, 그를 보호하고 있는 기
사 막스윈의 붉은 갑옷 역시 금이 가거나 깨진 곳이 많았다.
다이티 라무스의 세력 중에서 그 둘만 살아남은 것일까? 그리
고 어떤 일을 겪었기에 저 둘의 모습이 저렇게나 초췌한 것일
까. 여러 가지 의문에 휩싸인 미스티가 약간 표정을 구겼지
만, 이내 평정을 되찾고 루미니 공작의 수호 아래 입을 열었
다.
"왜 이곳에 왔습니까?"
"주군의 뜻이 틀렸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충을 져버리지 않게
위해 싸웠고, 또 후회는 없습니다. 하지만 주군은 최선을 다하
시다가 영광스런 죽음을 맞으셨고, 저는 이렇게 불명예스럽
게 살아남았습니다. 물론 저도 주군을 따라서 죽으려고 했습
니다만, 이렇게 새로운 주군이신 미사엘님께서 저를 맞으셨
고, 또 질긴 목숨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앞으로 살아나가면서
속죄의 길을 걷자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속죄의 길을 걷기도 전에 안타까운 사실. 테이란 스플
랜을 봉인에서 푼 마왕 타크니스가 제국을 노리고 있다는 소
문을 듣고 이렇게 급히 달려온 것입니다. 물론 저의 죄를 잘
알고 또 여기 새로운 주군이신 미사엘님의 죄 또한 큰 것을 알
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속죄의 길로 마음을 굳힌 이상 피하
고 싶지 않아서 목숨을 걸고 이곳에 왔습니다. 결정은 모두 황
제 폐하께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푸른색의 짧은 그의 머리칼이 유난히 슬프고 차갑게 보였다.
붉은 화염 기사단. 다이티 라무스의 충실한 수하로 알려진 막
스윈의 손에서 그의 주군이 하사했을 붉은 용형의 검이 바닥
으로 떨어졌다. 진심 어린 표정을 지은 그는 검을 놓자마자 갑
옷까지 풀어 바닥에 내려놓았고, 무릎을 꿇은 채 목을 길에 드
리워 바닥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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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이제 곧 완결입니다.
아무래도 골렘마스터 6권은 페이지가 한 340은 되지 않을까
싶네요. -ㅁ- 출판사만 돈 나가는거죠 뭐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