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렘마스터] # 다시 찾은 파괴의 힘[4]
"자네는 영웅심에 빠져 목숨을 헛되이 하려 하고 있어. 이건
인간들이 나서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 내 말대로 그냥 물러
가게."
아트란이 좋은 말로 설득하려 했지만, 그라디우스의 태도는
완강하기만 했다. 화이엘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하하. 그것도 쉽지 않겠는데요? 저길 보세요, 모두. 창조 3
대신들을 도와 싸우고 있는 인물들. 바로 폰네스 후작과 실피
스 스승님이세요!"
그때 아투가 뜬 금 없이 엉뚱한 말을 꺼내 시선을 한 몸에 받
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진지하기 그지없었고, 왠지 모를 미
소가 서려있었다. 때문에 이상한 느낌을 받은 드래곤들과 화
이엘이 창조신과 파괴신의 접전이 펼쳐지는 장소로 고개를 돌
렸고, 역시나 그들의 얼굴에는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아투가
본 것이 옳았던 것이다.
쿠구구구궁!
엄청난 파장력이 접전지에서부터 한참이나 떨어진 이곳까지
퍼져와 파동을 일으켰다. 드래곤들의 수장들은 급히 보호막
을 펼쳤고, 그라디우스도 가볍게 한쪽 손을 내밀었다. 화이엘
은 잠시 공간을 노려보는 것만으로도 그 파장을 막아낼 수 있
었지만, 평범한 인간에 속하는 아투와 아트란, 그리고 소울드
는 힘겹게 각각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올려 신성력의 폭풍 속
에서 몸을 보호했다.
"큰일이군! 저들이 어디로 사라졌나 했더니,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버린 거였나?"
그라디우스가 다급하게 소리를 치며, 지금껏 아트란을 비롯
한 남은 인간들을 돌려보내려던 수고도 잊고는 몸을 돌려 격
전의 장소로 몸을 띄워 날아갔다. 그의 뒤를 이어 각 속성 드
래곤의 수장들이 줄을 지어 쫓았다.
"으휴. 정말 일이 꼬여도 한참 꼬이네."
화이엘도 급히 격전지로 날아가려 했지만, 아직 남아있는 아
투와 다른 사람들 때문에 쉽게 움직이질 못했다. 아투는 그녀
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얄밉게 그 점을 이용하여 마음을 돌
리려 입을 열었다.
"화이엘. 이렇게 멍하니 있다가는 실피스 스승님과 폰네스 후
작이 위험에 처할지도 몰라. 일단 저쪽 상황부터 어떻게 해결
하고 얘기하자고."
그러면서 아투는 아버지에게 눈을 깜빡이며 신호를 주었다.
역시나 피가 통하는 관계가 아니랄까봐, 재빨리 눈치를 챈 아
트란은 골렘의 발 부근에 서있는 흑마법사를 급히 골렘의 손
바닥 위로 올리고 격전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15베타라
는 엄청난 신장의 덕분으로 성큼성큼 내딛는 발걸음이 시원스
럽게 뻗어가고 있었다.
"으윽. 왠지 당한 기분인 걸? 어쨌든 난 잘못 없어. 분명 아투
가 내려가지 않는다고 한 거니까. 알아서 목숨 관리 잘 하라
는 얘기야. 알아들어?"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엔젤 나이트의 수장인 그녀로서도 딱히
말릴 방도가 없어 남은 사람들을 지상계로 돌려보내는 일을
포기하는 듯 했다. 다만 아투를 걱정하는 마음은 여전한지 그
에게 한 가지 확답을 얻으려 그런 얘기를 꺼낸 것이다. 하지
만 그런 면에서는 둔한 모습을 항상 보여왔던 아투였기에, 역
시나 지금도 그녀의 말뜻을 깊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작은
힘이나마 보탤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그녀의 말
은 한 귀로 흘려듣고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좋아. 그럼 내가 저곳까지 이동시켜줄게. 마나의 운용을 줄
이고 자연스럽게 신성력을 받아들여. 거부했다가는 아투나 가
이트리아가 큰 타격을 입을 지도 모르니까."
"네, 알겠습니다. 대장님!"
익살스럽게 그녀의 토라진 기분을 풀어주려 대답한 아투는
가이트리아와 함께 마나의 운용을 최대한 줄이며 그녀의 신성
력이 뻗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곧 무형의 백색 날개를 펼쳐낸
그녀는 날개를 천천히 확장시켜 가이트리아의 주변을 둘러쌌
고, 일순 그 범위를 줄여 골렘의 거대한 몸을 휘감았다. 잠시
마나와 반응한 신성력이 반발을 일으키며 퉁겨지려 했지만,
다행히 미리 경고해둔 대로 마나의 운용이 최대한 줄여진 상
태라 무리를 할 정도의 반발은 없었다.
우우우웅!
신성력이 골렘을 둘러싼 채 공명하며 서서히 무거운 가이트
리아의 몸을 띄웠다. 화이엘은 그 모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었지만 곧 무표정 속으로 감춘 뒤, 격전의 장소를 바라보았
다.
이미 그곳에 당도한 드래곤들이 크게 힘을 발휘하여 파괴신
을 일순 밀어붙이고 있었다. 다행히 아직은 실피스와 폰네스
후작도 9서클 마법과 정령왕의 힘으로 잘 버티고 있었고, 창조
신들의 상태도 괜찮았다. 이제 곧 엔젤 나이트들까지 합류하
게 되니, 잘하면 예상외로 쉽게 끝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화이엘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아투와 골렘을 이끌고 비행
을 시작했다.
세상이 멸망할 것이다. 아니, 이미 멸망의 길로 접어든 것만
같았다. 대지는 온 몸을 떨며 구슬피, 그리고 처절하게 울었
고, 매 순간마다 깊은 상처만 더해졌다. 하늘도 역시 '우르르'
화를 내며 자극적인 섬광을 번뜩였고, 칼날 같은 바람과 신의
눈물 같은 비와 눈을 흩뿌렸다.
아름답기만 하던, 고요하고 성스러움을 발산하던 녹색과 푸
르름의 대지 천공섬 이카루스. 지금은 예전의 그런 모습을 찾
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황폐
해져 있었다. 녹색의 초원은 갈색의 텁텁한 사막으로, 수정보
다도 더 맑은 호수는 이제 탁한 빛을 발하는 회색의 죽음의 물
로. 심지어 하늘과 닿을 듯이 도도하게 서있던 거대한 고대수
들 역시 그 자체의 신성력을 잃고 파괴의 힘에 의해 시들어갔
고, 천공섬에서만 생활하는 영물들 역시 기괴한 비명을 지르
며 죽어갔다.
당연 천공섬의 그런 변화에 가장 민감한 것은 이 섬을 창조해
내고 항상 유희를 즐기러 들리곤 하던 창조신들과 엔젤. 바로
천상계 존재들이었다. 샤이트리아를 비롯한 브레이브와 러브
샤는 현재 본체로 현신하여 얼굴이라는 물질화된 것이 드러나
진 않았지만, 분명 마음에 얼굴은 찌푸려져 있을 것이라 생각
됐다. 그들이 발하는 빛과 바위와 안개의 공격성이 더욱 상승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엔젤 나이트들을 지휘하며 파괴신의
힘을 분산시키는 역할을 맡은 화이엘 역시 완전히 폐허로 변
한 신의 공간을 바라보면서 눈에 띄게 얼굴에 노기를 내비쳤
다. 표정만큼이나 속마음도 감추질 못하고 엔젤 나이트들을
닦달하면서 파괴신을 공격하라며 무모하게 느껴지는 행동까
지 보였다.
반면 천상계 존재들과는 달리 지상계 존재들은 차분하게 상
황을 파악하며 전술적으로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드래곤 로드인 신룡급 드래곤 그라디우스는 드래곤들에게 본
체로 폴리모프할 것을 명해 완벽한 드래곤의 힘을 끌어낼 수
있는 형태로 바꾼 지 오래였고, 고룡급 수준의 브레스와 각종
고서클 마법을 난무하면서 파괴신의 힘을 절반 정도나 분산시
켜 맡았다.
아투를 비롯한 인간들도 상당히 잘 싸워주고 있었다. 일단 골
렘술사인 아투와 아트란은 골렘의 거대한 몸을 이용하여 날아
드는 파편을 저지했고, 흑마법사인 소울드와 9서클 마도사인
실피스가 그들의 보호 아래서 효과적으로 마법을 사용했다.
폰네스 후작도 이미 소환해낸 대지의 정령왕으로 파괴신의 신
경을 자극했고, 바주크도 골렘들을 도와 날아오는 파편을 막
으며 활약하기에 이르렀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지 못하고 계속 신
성력만 낭비하고 있는 꼴이 된 파괴신만이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일순 분노의 기운까지 몰아 파괴의 폭풍을 녀석들에
게 몰아붙였지만, 3대 창조신과 엔젤 나이트. 지상계 드래곤
수장들과 인간 능력자 몇 명까지 합세한 그 세력을 쉽사리 제
압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상대적으
로 힘을 가장 많이 소모하는 것은 파괴신이 되니, 오히려 시간
은 빛의 사도들의 편이 됐다.
"아빠. 아빠는 왜 안 내려가시는 거예요? 만약 자리를 피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을 엄마
가 알기라도 하는 날에는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은데."
막 브레이브의 공격을 파괴신이 폭풍의 기류로 쳐내자 신성
력의 파장에서 벗어난 무수히 많은 바위들이 이곳으로 쇄도해
왔다. 아투는 급히 가이트리아에게 명해 다크 바스타드로 그
것들을 일일이 베어냈다.
"하하하. 그러는 아투 너는 왜 안 내려갔지? 네 엄마가 이 사
실을 알면 아마 넌 외출 금지령이나 용돈 금지령에 처해질지
모르는데 말이다."
아트란도 넉살 좋게 웃음으로 대꾸하면서 날아드는 바위를
와이더반에게 명해 주먹으로 박살을 내버렸다. 확실히 가이트
리아와는 신장에서 큰 차이를 보였기에 처내는 수가 훨씬 더
많았다.
후우우우웅!
엄청난 대검이 골렘들의 무기와 손에 맞고 비가 되어 떨어지
는 돌들을 쳐내는 소리였다. 바주크는 한 차례 검으로 돌 비
를 막아내면서 한숨을 내쉬고 호흡을 조절했다. 이미 체력 소
모가 심했지만, 뒤쪽의 소울드나 실피스, 그리고 폰네스 후작
을 보호하기 위해선 한 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시간을 지체시킨다면 파괴신의 무한한 신성력도
그 한계를 드러낼 것이다. 물론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곧 한계
점에 다다르겠지만, 다른 창조신들이나 드래곤, 그리고 엔젤
나이트들은 우리의 도움 덕분에 많은 힘이 남은 상태다. 분명
이 싸움은 이길 수 있다.』
가이트리아가 아투의 용기를 북돋으며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
여 다시 한번 흑대검을 휘둘렀다. 순간 골렘보다도 더 거대한
바위가 날아들어 모두들 뭉개버릴 기세로 떨어졌었지만, 그
일격에 갈라지면서 양쪽으로 방향이 틀어졌다. 틀어진 바위
는 실피스가 가볍게 화염 마법으로 산산조각을 내버렸다.
"허어. 나이가 나이인지라 마법을 난사하니 힘이 빠지는군.
소울드. 나는 잠시 마나를 회복하는 시간을 가질 테니, 자네
가 조금 더 분발해주게나.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게야."
방금 막 익스플로션 마법으로 바위를 부셔버린 실피스가 철
푸덕 바닥에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그의 말에 소울드는 알
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휘청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지
탱시켰다.
'별 수 없군. 위험한 상황에서는 절대 소환하지 않으려 했지
만.'
소울드는 눈앞이 흐릿해지는 극도의 체력 소모 현상을 느끼
면서 하는 수 없이 머리 속에 한 존재를 각인시켰다. 온통 검
은 빛을 발산하며, 죽은 것들을 다스리는 자들의 왕. 상급 마
물인 리치였다.
"나와의 계약에 따라 이 자리에 나타나라."
간단한 소환 주문과 함께 소울드의 옆으로 거대한 마법진 하
나가 그 형태를 갖췄다. 특이하게 원형이 아닌 사각과 오각의
진으로 이뤄진 고도의 마법 문자가 새겨진 마법 서클이었는
데, 정확히 중앙에는 낫을 든 어둠의 그림자가 쓸쓸히 서있는
게 드러났다.
슈우우우웅!
그때 갑자기 마법진의 그 죽음의 사신 그림에서부터 맹렬한
바람이 일어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동시에 인간의 마법진 치
고는 방대한 양의 마나가 폭발하며 공간이 뒤틀렸고, 그 틈으
로 어떤 존재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그루나시엘의 설득으
로 인간사에 합류한 지성을 겸비한 상급 마물, 바로 독특한 성
격의 이단아 리치 그였다.
『정말 오랜만에 전투에 부른 것 같소. 앞으로는 자주 불러
도 좋으니, 나에게도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오.』
리치는 다짜고짜 소환되자마자 하는 얘기가 그거였다. 소울
드는 이런 다급한 상황을 보고서도 자신이 해야할 얘기는 해
야만 직성이 풀리는 듯한 리치를 보며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
다.
"그런 점은 정말 미안하게 됐군. 흠. 그럼 일단 파괴신을 견제
하는 정도로만 싸워주게. 무리해서 소멸의 상태까지 가면 나
로서도 어찌할 수 없네. 무한의 나락으로 떨어질 각오를 하지
않는 이상, 위험한 행동은 말고 명령에 따라주길 바라네."
소울드는 그렇게 명을 해놓고 실피스를 따라 바닥에 주저앉
아버렸다. 극심한 마나의 소모, 그리고 몇 시간 동안 흑마법
을 난사하며 소모한 체력 덕분에 녹초가 된 까닭이다. 다행히
리치와의 계약은 서로의 합의 하에 이뤄진 자유 계약이기 때
문에 마나의 공급이 필요 없었음으로 그 점을 염려할 필요는
없었다.
명을 받고 소환자를 잠시 바라보던 리치는 서서히 어둠의 마
력을 끌어올리며 허공으로 치솟아 파괴신의 폭풍 근처까지 날
아가 견제를 시작했다.
"후우. 그나저나 나도 잠시 마나장을 거둬야겠어. 몇 시간 내
내 전개하고 있었더니 소모가 심해서 말이야. 아, 그러고 보
니 아빠. 아빠는 별로 피곤한 기색이 아닌데요?"
휴식을 취하기 시작한 두 마법사를 보며 극심한 피로를 느끼
게 된 아투 역시 가이트리아에게 동의를 구하며 마나장을 조
심스럽게 거뒀다. 물론 골렘의 움직임이 방금 전보다 둔해지
긴 했지만, 바위 정도마저 놓쳐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하하하. 내가 이래 뵈도 8서클이란다. 그리고 특별히 공격에
나선 것도 아니고, 그냥 바위만 차단하고 있는 소극적인 움직
임만을 유도하고 있는데, 빨리 지칠 이유가 없지. 지금 아투
너는 마나의 운용을 잘못하여 쓸데없이 힘을 낭비한 꼴이란
다."
"뭐 그래요. 아빠는 참 잘났네요."
이런 상황에서도 잘난 척을 해대는 아빠를 보며 아투는 살짝
삐치면서 비꼬는 말로 대꾸하고 고개를 돌렸다. 물론 마음 속
으로는 '살아서 지상계로 돌아간다면 꼭 골렘술을 더욱 갈고
닦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슈슈슈슈슉!
하지만 인간 능력자들이 휴식을 시작하자, 갑자기 잠잠했던
파괴신의 공격이 되살아났다. 잠시 주춤하던 녀석의 폭풍 기
류가 더욱 거세진 채, 주변을 휩쓸었고 대지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적지 않게 방심하고 있던 창조
신들도 갑자기 총력을 다해 밀어붙이는 녀석의 힘에 밀려났
다. 특히 3대 창조신들 중에서 비교적 공격력과 방어력이 떨어
지는 러브샤는 그 갑작스런 일격에 의해 본체에 큰 손상을 입
어 분홍색의 안개가 희미하게 흐려질 정도였다.
『파괴의 힘은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본능이다. 그런 마
음속의 욕망을 저버리고 나에게 대항하는 인간들이나, 드래곤
들이나, 또 그런 녀석들의 도움을 받는 창조신들이나 다 똑같
다. 이제는 더 이상 나의 무능력함을 보여주지 않기로 했다.
나의 진정한 힘을 느껴보거라!』
---
이번 1부 완결 6권에서는 유난히 전투신이 많습니다.
스토리 상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전투신이 많은 것이 썩 내
키지는 않는군요. 양해구합니다. 즐독.
146 [골렘마스터] # 다시 찾은 파괴의 힘[5] 내용 추가판
엄청난 크기의 잿빛 회오리 속에서 파괴신의 섬뜩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하지만 주변의 모든 것을 갈가리 찢어내는 바람
의 소리에 금새 묻혀버렸다. 지옥의 소나타를 연주하는 바람
은 삽시간에 모든 것을 덮었고, 빛의 본체를 비롯한 엔젤 나이
트들의 주변을 가득 메웠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녀석의 힘
을 분산시키는 임무를 띄고 활동하던 인간들도 역시 그 여파
에 휘말려버렸다.
물론 신들은 그 엄청난 파괴신의 힘에 대항하여 성스러운 힘
을 최대한 끌어올리려 노력했다. 아니, 이미 최대로 발휘되는
신성력이 파괴신의 폭풍과 대항하며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
런 어려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강렬한 바람에 머리가 휘날
리는 것도 무시한 채, 몸 안의 신성력을 긁어모으듯 끌어올린
화이엘과 엔젤 나이트 대원들 역시 갑자기 총력을 다하는 파
괴신의 행동에 당황하면서 대항하고는 있었지만, 조금씩 밀려
나고 있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드래곤들 역시 본체로 현신
하여 막강한 힘을 발휘했지만 곧 전세를 뒤엎는 파괴신의 힘
에 밀려 설 자리를 찾지 못했다.
아투 역시 힘겹게 바람을 막으려 대지의 마법을 읊어 가이트
리아에게 매직 아머로 입혔다. 다크 바스타드로 칼날 같은 기
류를 가르며 실피스와 소울드 그리고 폰네스 후작을 보호한
채, 뒤로 물러났지만, 신의 힘을 막는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는
지도 모른다. 한 차례 잠잠해지는가 싶던 기류가 거대한 해머
처럼 쇄도하면서 가이트리아의 가슴에 정확히 틀어박혔다.
콰과과과과광!
엄청난 굉음과 함께 바람에 떠밀린 아투와 골렘이 허공에 붕
떠올라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거리를 날아 뒤쪽의 바위에 처박
혔다. 그 바람에 실피스와 소울드 폰네스 후작의 앞에 나서 파
괴신의 폭주의 파장을 막아주는 존재는 아트란과 그의 골렘
인 와이더반만이 남게 됐고, 곧 양쪽에서 들이닥치는 폭풍에
휘말렸다. 두 대의 골렘으로서도 감당하지 못하는 힘을 어떻
게 와이더반 홀로 막아내겠는가. 역시 예상대로 아트란과 와
이더반의 몸도 허공을 날아 바위틈이 처박히는 꼴이 되었다.
슈슈슈슈슈슉!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게 된 폭풍 기류가 잿빛의 어둠을 뿌리
며 허공을 갈랐다. 완전 녹초가 된 실피스와 소울드, 폰네스
후작의 앞으로 최후 방어선이라 할 수 있는 키메라 바주크와
리치가 나서서 앞을 지켜 섰다. 하지만 바주크 역시 이미 키메
라의 무한 체력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를 드러낸 상태였기 때
문에 호흡이 고르지 못했다. 몇 번은 대검을 휘둘러 바람을 갈
라 막아냈지만, 정확히 다섯 번째로 쇄도하는 폭풍 기류는 막
지 못하고 그대로 휘말려 볼 품 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내가 막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소. 하지만 최선을 다해보겠
소.』
소울드의 앞을 웅장한 성곽처럼 막아선 리치가 어둠의 기가
잔뜩 쏠린 양손을 들어올리며 반구의 방어막을 형성했다. 다
행히 억지로 몸을 일으켜 이곳으로 달려온 바주크의 노력으
로 실피스 또한 방어막의 안전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폰
네스 후작도 이미 힘이 다했는지 정령을 부리는 주문을 거두
고 방어막 뒤로 몸을 숨겼다.
쿠구구구구궁!
곧 들이닥친 잿빛의 어두운 바람이 검은 반구와 부딪혀 크게
흔들렸다. 반구에 의해 갈라진 회색의 칼날은 좌우로 빗겨나
가 모든 것을 부셔버렸다. 숨이 턱턱 막힐 듯한 먼지가 사방에
서 피어오르며 주변은 순식간에 회색 안개에 뒤덮인 것처럼
변했다. 그 엄청난 힘에서도 잘 버티고 있는 리치를 발견한 파
괴신은 속으로 가볍게 코웃음을 치고 있었지만.
『버틴다고 될 일이 아니지! 파괴신이라고 해서 오로지 스스
로의 힘만을 믿고 파괴를 일삼는 건 아니다. 다 모든 대우주
의 원리를 이용하는 것이지!』
파괴신은 힘겹게 자신의 힘을 막아내는 천상계 창조신들과
엔젤들. 그리고 지상계에서 그나마 실력이 있어 뽑혀 올라온
듯한 몇몇의 인간들을 바라보면서 더욱 폭풍의 기세를 올렸
다. 아직도 완전히 발하지 않은 파괴의 기운이 파괴 본능을 강
하게 작용하면서 꿈틀거렸지만, 힘을 온전히 되찾은 것이 아
니기 때문에 부작용이 염려되어 극상의 기운까지 사용하지는
않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파괴신의 힘은 태초의
시절부터 창조신들의 힘을 능가할 정도였고 대우주 코스모스
도 위협할 정도로 강했다. 녀석의 의미심장한 말이 떨어지자
마자, 강렬한 잿빛 폭풍의 기류가 대기와 하늘, 그리고 지표면
을 갈기갈기 찢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지하로 파고들기 시
작했다.
쿠가가가강!
대지를 뒤흔드는 강렬한 소음이 천공섬에 퍼져갔다. 창조신
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녀석의 행동을 주시했지만, 저지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는 없었다.
대지를 파고는 잿빛의 바람은 마치 지진이라도 일으키는 듯,
안 그래도 엄청난 싸움에 휘말려 상처 입은 슬픈 땅을 관통하
며 지나쳤다. 모든 천상계의 역사를 간직한 대지가 차례차례
파괴신의 권능에 의해 뚫렸고, 이윽고 그 권능의 끝이 대지의
최저까지 닿게 됐다.
『저 성가신 인간들만 없다면 일은 쉬워지지. 어리석은 창조
신의 도움을 여기서 받게 될 줄이야. 천공섬 따위를 지상계와
흡사하게 만들겠다는 바보 같은 생각으로 붉은 악마까지 이렇
게 땅속에 묻어주니 참으로 고맙다.』
"서, 설마 천공섬에도 모든 것을 녹여버리는 엄청난 자연의
힘, 마그마가 흐르고 있는 건가!"
간신히 바위에 처박힌 상태에서 벗어나 골렘을 몰고 제자리
를 찾은 아투가 뜻밖의 소리를 내뱉은 파괴신의 폭풍을 바라
보면서 망연자실해졌다. 마그마. 붉은 악마라 불리는 막을 수
없는 자연의 재앙. 토네이도, 홍수, 가뭄 등등보다 훨씬 더 강
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 그것. 파괴신이 땅속으로 날카로운
기류를 퍼뜨린 것은 바로 깊은 대지에 잠들어있을 그것을 깨
우기 위한 것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쿠하하하하하!
하지만 이제 와서 탄식을 하며 절망에 빠져든다고 해서 누가
생명을 지켜주는 것도 아니며, 마그마의 분출을 막아주는 것
도 아니었다. 천상계 존재들이야, 마그마의 힘을 충분한 막아
낼 수 있고 또 드래곤들이야 강한 비늘로 몸을 보호할 수 있다
고는 하지만, 인간들은 그게 아니었다. 전력을 다해야지 겨우
겨우 목숨을 보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늘 뿐이다.
이미 잿빛의 기류로 인해 뻥 뚫려버린 대지의 한복판에서 새
하얀 수증기가 분출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모두 힘들다는
생각을 한 모양인지 입을 굳게 다물며 묵묵히 능력을 끌어 올
렸다. 그나마 힘이 남는 아투와 아트란이 골렘을 몰고 앞으로
나섰지만, 수증기 분출의 뒤로 이어진 붉은 암석 덩어리들은
끈적거리는 피의 바다와도 같이 느릿느릿하게 퍼지면서 모든
것을 녹였다. 마나와 합쳐진 강한 재질의 골렘들이라고 하지
만, 그런 마그마의 열기 앞에선 무용지물과 다름없었다.
"아투! 하늘로 날아! 날아오르란 말이야!"
엔젤들을 지휘하던 화이엘이 대지 위로 분출한 붉은 악마의
기세를 보고 크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
의 몸을 보호하던 신성력의 막이 큰 허점을 드러냈고, 파괴신
의 기류가 그 틈을 파고들어 무형의 빛의 날개를 갈가리 찢어
놓았다.
"화이엘!"
방심한 틈을 노린 파괴신의 일격에 큰 타격을 입고 다른 엔젤
에게 부축을 받아 겨우 자세를 잡는 그녀를 보며 아투가 걱정
스럽게 이름을 불렀다. 그렇다고 코앞까지 다가온 마그마의
강을 보며 멍하니 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아빠에게 신호를 주
며 크게 마나를 운용하여 비행 마법으로 골렘의 몸을 띄웠다.
"리치. 우리를 하늘로 띄워주게."
소울드 역시 폰네스 후작과 실피스, 그리고 바주크를 가리키
며 리치에게 명령 아닌 부탁을 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리
치의 손이 그들에게 향해졌고 곧 약간은 어두운 기운과 함께
비행 마법을 읊은 것처럼 그들 역시 허공으로 떠올랐다.
『어리석군! 마그마에 비해 나의 힘은 견딜만하다는 것이
냐!』
파괴신은 냉소하는 듯이 소리치면서 거대한 잿빛 폭풍을 신
들과 드래곤, 엔젤들에게서 거두어 인간들에게로 향했다. 이
미 지상계는 마그마로 온통 뒤덮여 수증기가 피어올랐고, 모
든 것이 녹아들며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붉은 악마의 힘. 자
연의 재앙이 그 절대적인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상태로 파
괴신의 엄청난 폭풍의 힘을 직접적으로 맞게 된다면 비행 마
법이고 뭐고 다 끝장이었다. 사지가 찢겨나가 죽던, 마그마의
열기에 온 몸이 오그라들어 죽던, 죽는 것은 똑같았다.
슈우우우웅!
날카로운 잿빛 바람이 아투의 옷자락을 추켜올렸다. 마른침
을 꼴깍 넘기면서 마나를 운용한 아투는 급히 마나 보우로 잿
빛 태풍의 눈을 찾기 위해 냉철하게 눈을 굴리기 시작했
다. '신이라고는 하지만 소용돌이의 형태를 띄고 있으니, 그
소용돌이의 중점을 찾아 소멸시키면 끝나지 않을까'하는 막연
한 생각…… 다른 방법은 떠오르질 않았다.
푸카앙!
활시위가 퉁겨지면서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마나가 응축된
화살 하나가 파괴신의 소용돌이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역
시 무리였다. 한 차례 강풍이 마나 애로우를 휩쓸자 온데간데
없이 소멸해버렸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기대를 걸었던 사
람들의 표정도 덩달아 사라졌다.
『나의 눈에 그렇게도 띄고 싶어하는 걸 보니 먼저 죽고 싶
은 모양이구나. 나의 파괴의 힘을 만끽하며 저승으로 사라져
라! 영혼까지 멸해주겠다!』
'끝인가?'
파괴신의 소용돌이에서 보이지 않는 시선이 쏟아져 나를 향
하는 느낌이다. 아투는 그러한 기분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눈
을 질끈 감았다.
쉬이이이이.
바람이 귓가를 울리며 지나갔다. 아투는 자신이 파괴신의 바
람에 휘말려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곧 가
이트리아의 몸도 분쇄될 것이고, 골렘의 몸이 사라지면 바로
자기의 차례가 될 것이라는 심정으로 아투는 떨리는 두 손을
골렘의 어깨 손잡이에 가져갔다.
『믿어라.』
순간 뜨거운 열기가 온 몸을 휘감는 것과 동시에 가이트리아
의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그 한 마디가 의식 속을 파고들었
다. 하지만 그 짧은 한 마디조차 이내 전신을 갉아먹는 듯한
엄청난 열기과 압력에 의해 잊혀졌고, 이미 탈진 상태에 접어
들었던 아투는 외부의 그런 이상한 기운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모든 이의 염원이 담긴 시선이 수만 가지의 변화를 일으키는
하늘로 향해져 떨어질 줄을 몰랐다. 불안감에 젖어 신들에게
기도를 올리는 평범한 신성 제국의 국민들과 신관들. 보강 작
업에 한창이던 드워프들조차 붉게 물들기 시작한 하늘을 보
며 시선을 고정했다. 존귀한 귀족들에서부터 지위가 낮은 서
민들에 이르기까지, 하늘을 바라보며 그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귀족과 평민이라는 그러한 경계를 떠나 일치하고 있었
다.
"괜찮을까요? 아투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늘을 향해 염원의 눈길을 보내고 있던
미스티는 갑자기 하늘이 붉어짐에 이상한 느낌을 받고는 떨리
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옆에 서서 보호하듯 자리를
잡고 있던 샤우드 백작과 루미니 공작은 함께 고개를 끄덕거
렸다.
"아투는 강합니다. 게다가 인간은 예전부터 신을 능가해온 전
례도 있습니다. 파괴신이라고 하지만 창조신들과 드래곤, 엔
젤들까지 합세한 싸움에서 아투가 위험하지는 않을 겁니다."
생소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하지만 미스티는 그 남성의 목소
리를 듣고 한없이 편안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잠시 동안 자신
의 육체를 마족에게 빼앗겼던 가련한 존재. 그의 이름은 나이
츠였다.
"그럴까요?"
"그렇습니다, 황제 폐하. 걱정하지 마시고, 이대로 그저 기도
만 하시면 됩니다."
나이츠는 다시 한번 그녀를 안심시켰다. 제국의 황제가 아
닌, 친구의 연인을.
미스티는 그에게 살짝 미소를 보여준 뒤, 다시 하늘로 눈동자
를 옮겼다. 붉게 물든 하늘이 이제는 핏빛으로 변해갔고, 검
은 점들이 무수히 많이 퍼져가고 있었다. 나이츠와 다른 사람
들이 모두 긍정적으로 말을 해주긴 했지만, 그녀는 아무래도
이상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어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저 붉은 하늘을 보면서 왠
지 불길한 예감이…. 미스티는 문뜩 그 얘기를 입 밖으로 낼
뻔했지만, 급히 자제하며 살짝 주위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
게 입을 막았다.
'아투…. 제발 무사해야 해요. 만약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면 난 영원히 아투를 증오하게 될 지도 몰라요.'
미스티는 입에서 손을 떼어 가슴으로 양손을 꼬옥 모았다. 다
른 사람들도 그녀의 행동을 쫓아하는 듯 거의 동시에 손을 모
아 간절한 바람이 이뤄지도록 기도를 시작했다. 시민들 사이
사이에 낀 신관들은 그들의 기도를 모아 하늘에 올렸고, 거리
와 성 안 곳곳에서 작은 빛의 기둥이 솟아 붉은 하늘을 가르
며 위쪽으로 이어졌다.
…….
죽은 걸까. 하지만 아직 몸의 체온이 느껴진다. 아니 주위로
부터 엄청난 열기가 느껴져 내 온 몸이 녹아드는 기분이다.
아투는 쉽게 눈을 뜨지 못했다. 극도의 인내력으로 뜨거움의
고통을 참으며 눈꺼풀에 온 힘을 집중했지만, 놀랍게도 미세
한 틈조차 벌려지질 않았다.
"후우."
결국 그는 눈을 떠 정황을 파악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편히 어떠한 존재에게 몸을 맡겼다. 그 존재의 품은 포근했
고, 또한 친근했기에 거부감이 없었다. 한없이 편안해지는 기
분을 만끽하며 아투는 그렇게 서서히 또렷한 정신을 되찾아갔
다.
『서로를 믿을 수 있을까?』
그를 안아주는 존재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크게 각인되었다.
목소리를 들게 된 아투는 흠칫하며 동시에 눈꺼풀에 반사적으
로 힘을 주어 눈을 뜨려 했지만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
다. 게다가 목소리에 이어 자신의 몸을 감싸는 그 존재의 손
을 느끼며 아투는 다시 한번 마음을 진정시켰다.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믿음이란 게 존재할까?』
다시 한번 알 수 없는 내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믿음이
라…. 아투는 눈을 감은 채 편안한 마음으로 그 단어를 가슴속
에 새기면서 그저 끌리는 대로 이런 저런 생각을 떠올렸다.
믿음. 주인과 종. 골렘과 나. 그리고 친구와 친구의 사이. 거
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연스레 아투의 두 손에 힘이 불끈 들
어갔다. 평온하던 마음의 한 구석에서부터 알 수 없는 뜨거운
열정이 생겨났다. 온 몸을 압박하는 강한 열기와 압력도 모두
잠재워버릴 듯한 그러한 열정이 몸 안에서 솟구치며 전신으
로 퍼졌다.
"믿음이란 존재할 거야. 아니 적어도 난 그렇다고 확실할 수
있어."
저절로 그의 입이 열리며 머릿속으로 떠올린 생각이 술술 흘
러나왔다. 비록 눈이 감겨 보이지는 않았지만, 질문을 던진 자
는 만족스러워하는 듯이 느껴졌다. 아무런 움직임도, 기운도
피부로 전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그럴 것이라는 확신
이 들었다.
『드래곤 하트의 힘을 완전히 개방하여 주인, 아투 너의 마나
와 융합하겠다. 지금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그
것뿐이다. 물론 자칫 잘못하면 방대한 양의 마나가 너의 몸을
잠식하여 영혼 자체를 소멸시킬 수도 있다. 지금이라도 원치
않는다고 말하면 이대로 편히 영혼의 세계로 갈 수 있게 도움
을 주겠다. 자 선택하라 주인이여. 나를 믿고 너 자신을 믿어
마지막 방법을 택하겠는가, 아니면 평온한 저 편의 세계로 떠
나겠는가.』
이제야 아투는 알 수가 있었다. 자신을 주인이라 부르는 유일
한 존재. 믿음이란 단어로 질문을 던진, 그리고 따스하고 포근
한 품을 제공한 그 주인이 누구인지를.
"가이트리아…."
『시간이 없다. 빨리 결정해라.』
"나의 대답을 기다릴 필요는 없어. 너의 선택이 곧 나의 선택
이 될 수 있고, 나의 의지가 곧 너의 의지가 될 수 있으니까.
진정으로 날 주인으로 여긴다면… 지금 내가 하고자하는 일
을 알 수 있을 거야. 난 골렘 가이트리아 너를 믿겠어."
눈을 뜨는 것만큼이나 입을 여는 것도 힘들었지만, 아투는 힘
겹게 입술을 들썩이며 자신의 뜻을 밝혔다.
『알았다. 너의 뜻을 받아들이겠다. 명은 올바로 수행될 것이
다.』
꾸오오오오오!
어렴풋이 들려오는 소리. 분명 골렘의 포효소리일 것이다. 반
가운 그 음성에 아투는 손을 들어올리려 했지만, 이제는 의식
만이 깨어있는 상태일 뿐, 손은커녕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었다. 눈을 뜰 수도 없고, 입도 열 수 없는, 그러한 정적, 그
리고 부동. 하지만 아투의 마음은 한없이 편했다. 가이트리아
의 포효소리를 듣고 나니 훨씬 더 마음이 가라앉았다.
서서히 주변의 열기도 익숙해졌다. 온 몸을 짓누르는 압력도
이제는 가벼운 안마처럼 느껴졌고, 오랫동안 쌓였던 근육과
정신적 피로가 동시에 눈 녹듯이 사라졌다. 육체를 뛰어넘어
영혼조차 태워버릴 듯한 주변의 열……. 이제 아투는 그 열기
를 스스로의 몸으로 받아들이며 오히려 자기 자신을 느끼는
하나의 매개로 삼았다.
『명은 이뤄질 것 같다. 다행히도 창조 3대신들과 드래곤, 그
리고 엔젤들의 모든 능력이 우리에게 전해졌다. 미약하긴 하
지만 위험에서 벗어날 수는 있을 것 같다. 이제 곧 믿음은 이
뤄지리라.』
주변의 모든 기운을 편히 받아들이고 있는 가운데 다시 한번
골렘의 목소리가 의식을 파고들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일
까. 그리고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어디일까. 알 수가 없었고, 또
한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골렘이 아직 곁에 있다는 것 하
나만으로 큰 믿음이 됐고 위안이 됐다. 포기하긴 이르다. 파괴
신의 기류에 휘말렸지만, 내가 아직 죽지는 않았다. 나를 생각
하는 사람들이 슬픔에 잠기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죽어서도
억울할 것이다. 아투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한번 주먹을
불끈 쥐기 위해 힘을 주었다. 놀랍게도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전
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던 손가락이 굽혀졌고, 억지로 뜨려 하
던 눈도 저절로 떠졌다. 동시에 갑갑했던 호흡을 고르려 다물
어진 메마른 입술도 열렸다.
"믿어."
아투는 눈앞이 환해지는 환영을 보면서 계속 마음속에 갈무
리하던 말을 내뱉으며 그대로 빛의 무리 속으로 빨려 들어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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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독하세요. 에휴. 힘들군요. 공부하랴 글쓰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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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추가했습니다. 여기서 소제목을 바꿔야 하기 때문에,
급히 써서 추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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