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렘마스터] # 빛의 창조신들의 에이전트[3]
휘이익.
『흐음?』
익스플로션 랜드의 마나 애로우를 받아내려던 가이트리아가
약간 이상하다는 듯이 소리를 내며 화살이 향하는 곳으로 고
개를 옮겼다. 마법 화살은 골렘의 몸통을 향하지 않고 녀석의
앞쪽에서 살짝 꺾이어 바닥으로 쇄도하고 있었다.
샤아아앙!
강렬한 갈색의 빛과 함께 마법 화살. 익스플로션 랜드의 힘
이 담긴 그것이 골렘의 바로 발 밑의 대지에 스며들었다. 동시
에 대지로 스며든 마나의 기운이 주문의 효과를 내면서 대지
를 크게 폭발시켰고, 골렘이 딛고 있던 땅이 크게 함몰되어버
렸다.
콰과과과광!
『이, 이게 무슨 짓이지!』
가이트리아는 크게 손을 하늘로 뻗으면서 함몰된 지역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땅속 깊숙이 스며든 마
법의 기운이 일으킨 폭발은 가이트리아의 거대한 신장을 완전
히 가려버릴 정도로 대지를 함몰시켰기에, 빠져나오기가 쉽지
는 않아 보였다.
『치사하군!』
크게 패인 구덩이에서부터 골렘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투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크게 유동시켰던 마나를 천천히
운용한 뒤, 가이트리아가 빠진 구덩이 쪽으로 다가갔다.
"가이트리아. 웃기는 소리 좀 하지 마. 분명 이건 너의 실수였
어."
꾸오오오오오! 콰과과과과광!
아투가 정곡을 찌르자 구덩이에 빠진 골렘이 벽에 마구 주먹
을 휘두르는 것 같았다. 땅이 크게 흔들리며 구덩이 주변의 약
간 흙덩이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래 봤자야. 이미 너의 신장과 힘 등을 다 계산 하에 두고
마법을 시전한 거니까. 그곳에서 너희 힘으로 빠져나온다는
것은 무리야. 자, 이제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 어때?"
『크으으으. 패배를 인정할 수 없다. 나에게 검을 줘라. 너도
마나 보우라는 무기를 사용했듯이 나 또한 다크 바스타드로
싸우겠다.』
골렘은 인정할 수 없다며 으르렁거렸다. 절대로 그 기세가 수
그러들지 않을 것 같아 자연스레 아투의 얼굴이 구겨졌다. 골
렘이 검까지 들고나선다면, 게다가 이미 한번의 기습 공격이
들통이 나버린 터에 또 다시 똑같은 조건에서 대결을 벌인다
면 이길 자신이 없어서였다.
하지만 이번 대결로 꼭 자존심과 주인으로서의 입지를 회복
하고 골렘에게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될 거라 다짐했던 아투는
잔뜩 긴장하면서 녀석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억지로 자
신의 승리를 강요한다면 골렘이 이번 일을 인정하지 않고 또
다른 때와 다름없이 행동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좋아. 하지만 검을 주고 난 후 벌어진 대결에서도 내가 승리
한다면 넌 나를 진정한 주인으로 인정해줘야 해. 또다시 말을
번복할 때에는 그라디우스님에게 너의 행각을 직접 말씀드리
는 수밖에 없어."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으며 골렘에게 이번 대결의 조건을 확
실히 각인시킨 아투가 바닥에 박힌 거대한 흑검을 목표로 무
중력 마법을 시전했다. 그러자 땅 깊숙이 박힌 대검과 그 주변
의 대지 자체에 중력이 완전히 반대로 바뀌면서 대기가 없어
진 것처럼 무거운 검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바람의 분노, 윈드 캐논!"
마나 보우를 매개로 하여 아투가 대검의 뒷부분을 향해 강한
공기포 마법을 쏘아냈다. 일직선으로 쇄도한 바람이 검을 거
세게 밀었고, 허공에서 주르륵 밀려나던 검이 골렘이 빠진 구
덩이 위에서 멈춰, 곧 효력이 사라져 제대로 돌아온 중력에 의
해 아래로 떨어졌다.
『좋다! 약속은 지키겠다!』
쿠구구구궁!
기쁨에 찬 목소리와 함께 땅이 크게 울리며 순간 구덩이에서
부터 갈색의 거체가 솟구쳤다. 검을 벽에 박고 그 반발력을 이
용해 몸을 솟구친 영리한 골렘, 가이트리아였다. 바깥으로 빠
져나온 골렘은 여유를 두지 않고 재빨리 그림자 보법을 사용
해 아투에게로 접근해갔다.
"그래, 와라! 나도 이제 편법 같은 걸로 이기려고 하지는 않겠
다!"
그도 자세를 고쳤다. 마나 보우를 쥔 손에 서서히 마나를 집
중시키자, 무형의 푸른빛의 활 전체에 서리며 출렁였다. 익스
플로션 랜드를 화살로 매겨 사용한 불과 몇 분 전과는 또 다르
게 성장한 마나 운용의 모습. 가이트리아도 드래곤 하트로나
마 어느 정도 아투의 주변으로 형성된 엄청난 마나장을 느끼
고는 크게 긴장하며 달려가는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다크 바
스타드를 양손으로 감싸쥔 채, 살짝 검을 틀어 아투를 노리고
멈춰 섰다.
…….
적막감이 감돌았다. 둘 다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서로 한쪽
이 먼저 움직이기만을 기다리는 듯 했다. 아투는 숨이 턱턱 막
히는 긴장감 속에서 침을 꼴깍 삼키며 끌어낼 수 있는 모든 마
나를 마나 보우에 실었다. 방어 따위는, 그리고 다음 공격 따
위는 생각지 않기로 했다.
'이번 일격으로 가이트리아를 제압하고 주인으로서 인정을
받고 싶어.'
한편 가이트리아도 평소와 다르게 강한 투지를 불사르는 주
인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됐다. 우유부단, 항상 주변의 의견
을 따르며 자신의 의견을 내세울 줄 모르는 사람이었던 그가
오늘만큼은 정말 살아있는 눈빛으로 대결에 임하고 있었다.
게다가 무시 못할 정도의 마나장까지 골렘의 드래곤 하트를
흥분시켰다.
『이제야 눈을 뜨게 된 것이냐, 주인이여.』
골렘은 그렇게 혼자서 중얼거리며 조금 걸음을 옮겨 그에게
다가섰다. 움직임을 파악한 아투는 다시 일정 거리를 유지하
려 뒤로 발을 뺐고, 그 순간을 노리고 있던 가이트리아가 순식
간에 마나를 집중하여 그림자 보법을 사용해 빠르게 접근했
다. 대지 위로 그림자가 스쳐가듯, 전광석화처럼 쇄도한 골렘
이 굵은 팔을 들어올린 뒤, 손에 쥔 다크 바스타드로 모든 것
을 두 동강 낼 듯한 기세로 휘둘렀다. 뜨거운 공기를 가르며
허공에 검은 호선이 그려졌다.
후우우우웅!
"이게 너의 뜻이냐, 가이트리아!"
무섭게 쇄도하는, 그리고 떨어지는 검을 보며 아투는 크게 숨
을 들이키고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어찌나 힘을 주었던지 입
술이 찢어지면서 피가 배어 나왔다.
"흐아아압! 모든 것을 짓누르는 대지의 힘, 자연력의 강대함
을 그에게 선사해라! 라운드 그라비티!"
마나를 끌어올리고 남은 힘을 짜낸 그가 뒤쪽으로 최대한 몸
을 날리면서 힘겹게 활시위를 손에서 놓았다. 그러자 시위에
모여있던 엄청난 양의 푸른 무형의 마나가 바로 코앞에 다다
랐던 골렘의 머리 위로 솟구치더니 거대한 신장을 그림자로
가릴 정도로 넓은 원형의 막이 생성됐다. 그리고 순식간에 원
형의 막이 아래쪽으로 하강하면서 막 아래에 있는 모든 것들
에게 엄청난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 이 마법이 어떻게 이런 힘을 나에게 가할 수 있는 것이
냐!』
골렘이 크게 당황하여 원형의 막 바깥으로 몸을 빼려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짓누르는 엄청난 중력의 힘. 그 중압으로 인
해 골렘의 몸이 계속 지면에 박혀들며 땅마저 깊숙이 꺼졌다.
하는 수 없이 모든 마나를 팔뚝에 집중하여 다크 바스타드로
위쪽에 뜬 원형의 막을 소멸시키려 했지만, 그것도 뜻대로 되
질 않았다. 중압의 영향으로 아예 몸이 마비된 듯 움직이지 않
게 된 것이다.
쿠구궁.
결국 가이트리아의 거대한 몸이 원형의 막에서 가해지는 중
압을 이기지 못해 쓰러졌다. '大'자로 뻗은 골렘의 몸이 계속
해서 땅속으로 박혀들며 이제는 얼굴의 절반 가량밖에 드러나
지 않게 됐다.
다행히 중압 마법은 곧 모든 마나를 소진한 아투가 탈진 상태
로 접어듦과 동시에 사라졌다. 하지만 어이없이 두 번이나 손
도 써보지 못하고 당할 꼴이 된 골렘은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
지 않고 계속 쓰러져 있었다. 마법을 시전한 아투 역시 바닥
에 드러누워 눈만 간신히 뜨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후우."
그는 입을 크게 벌리고 심호흡을 시작했다. 어느 정도 시간
이 지나고 충분한 산소가 공급되자 마나가 다시 차 오르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리 빠른 속도는 아니었기에, 하루 정도의
요양은 필요할 듯 싶었다.
쿠궁.
골렘이 몸을 일으키는 소리인 것 같았다. 땅이 한번 크게 울
리더니 그 뒤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아투가 누워
있던 자리에 순간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뜨겁게 달아
오른 태양 빛이 그림자에 가려지자 달아오른 몸이 조금 식으
며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바보 같기는.』
마인드 스피커를 통해 골렘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
다. 아투는 고개를 좀 더 젖혀 가이트리아의 얼굴로 시선을 옮
겼다.
『자, 일어나라. 머무는 방이 있는 성 입구까지 데려다 줄 테
니.』
의외로 차분하고 친절한 어조로 말을 걸어온 골렘이 손가락
을 쫙 펴서 아투의 손이 있는 부근까지 뻗었다. 왠지 평소답
지 않은 녀석의 행동을 보며 표정 관리가 쉽지 않은 모양인
지, 아투는 일단 손을 뻗으면서 고개를 땅으로 향한 뒤, 골렘
의 도움으로 몸을 일으켰다.
"후우. 아직도 내가 골렘술사. 아니 너의 주인으로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
몸을 일으키고 골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그가 다리가 풀
려 다시 바닥에 주저앉으며 물었다. 골렘 역시 그와 마주보는
자세로 바닥에 앉으면서 답을 했다.
『역시…… 그 때 내가 했던 말 때문에 꿍 해있었던 모양이
군. 하지만 지금이라도 알아둬라. 그 때 주인인 너에게 했던
말은 나 스스로가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아 괜히 심술을 부
린 것뿐이었다. 나중에 사과를 하려 했지만, 그 때는 이미 네
가 사라진 뒤였고 말이다.
흠흠. 어쨌든 아투, 넌 나의 주인으로서 충분한 자격을 가졌
다. 이번 대결에서도 드러났듯이 너는 모든 마음만 먹으면 해
낼 수 있다는 그런 믿음이 있고, 또 타오르는 투지가 있다. 그
리고 그런 것들을 뒷받침해줄 실력과 재능도 물론 있고. 내가
잠시 다크 바스타드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답답함 때문에 주
인인 너에게 실수를 했지만, 다시는 나약하게 다른 이들에게
나의 한계에 대해 투덜거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주인
이여, 힘이 쫙 빠진 얼굴을 하지 말고 웃어라. 그게 너에게는
어울리는 표정이다.』
가이트리아는 왠지 따뜻한 어조로 주인을 격려, 그리고 위로
한 뒤 약간 머뭇거리는 가 싶던 손바닥을 뻗어 아투에게 내밀
었다. 잠시 골렘의 말을 듣고 멍해져 있던 그는 거친 골렘의
손바닥을 잠시 어루만지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위로 올라
갔다.
"지금 그 말…… 창조된 이래로 계속해서 날 주인으로 인정하
고 있었다는 말로 이해해도 되겠지?"
골렘의 도움으로 편히 탈 수 있는 어깨까지 오른 아투가 손잡
이를 가볍게 쥐며 물었다. 그의 얼굴은 어느새 회색이 돌아 밝
게 빛났다.
하지만 가이트리아는 잠시 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회피하
는 듯 바닥에 놓쳤던 다크 바스타드를 반대편 어깨로 짊어진
후,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곧 대답을 재촉하려고 주인
이 입을 열려 하자, 가이트리아는 역시나 평소다운 행동으로
커다랗게 포효를 내지르며 큰 공터를 가로질러 달리기 시작했
다.
"호호호호호."
골렘과 아투가 공터에서 모습을 감추는 것을, 하늘을 날며 끝
까지 지켜보던 존재. 붉은 머리 소녀 화이엘. 무형의 백색 날
개를 펄럭이며 유유히 상공을 가로지르던 그녀는 예상외로 빠
르게 화해에 성공한 두 존재를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
다. 잠깐 전환점의 시기를 맞았던 두 존재. 이제 그 둘은 더욱
더 가깝고 잘 통하는 사이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샤아아아앙!
화이엘은 새롭게 커 가는 영웅들의 뒷모습이 완벽히 사라지
자, 아쉬운 듯 고개를 돌린 후 백색의 섬광을 일으켜 상공에
서 모습을 감췄다.
* * *
파괴신이 부활하고 벌써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몇 차
례에 걸친 대륙 전역을 대상으로 한 수색 작업에서는 그 어느
곳에서도 파괴신과 타천사, 그리고 어둠의 종족들의 행방을
찾을 수 있는 단서가 나오질 않았다. 마치 지상계 내에서 증발
해버린 듯 아무 것도 없이 깨끗했다. 파괴신이 부활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그런 평온이 유지될 뿐이
었기에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더욱 더 불길함을 느꼈다. 이대
로 시간이 지난다면 완전한 힘을 회복한 파괴신이 활동을 개
시할 것이고, 그렇게 일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다면 지상
계 인류. 그리고 다른 생명들 역시 끝이었다. 천상계 신들, 아
니 대우주 코스모스까지 나서지 않는 이상은 그 엄청난 일이
쉽게 잡히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이번 일과 관련된 모든 사람
들의 표정에선 요즘 들어 아무런 기쁨과 희망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 현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만 갔다.
아투와 미스티는 오늘도 역시 씁쓸한 분위기 속에서 아침 식
사를 하게 되었다. 예상외로 홀리 캐슬의 동쪽 성 복원이 오
래 걸릴 지도 모른다는 드워프들의 말은 파괴신 때문에 한 숨
도 이루지 못하고 요 몇 일 계속해서 뜬눈으로 밤을 새운 제
국 황성의 사람들. 특히 미스티의 기분을 최악으로 만들었다.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면 몸이라도 편해야한다고 누가 그랬던
가. 현재 미스티는 몸도 마음도 전혀 편하지 못 했기에, 누군
가가 살짝만 건드려도 폭발할 듯한 그런 상황에 놓여 있는 것
이다.
달그락.
언제나 맛있게 느껴지던 황실 주방장이 노력해서 만들어온
음식도 요즘 그녀에게는 그저 죽지 못해 먹는 그러한 것에 지
나지 않았다. 아투 역시 항상 맛있게 먹었던 식빵이 오늘따라
아주 퍽퍽하게 느껴져 목이 매여 음료를 마셔댔지만, 그러한
기분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 계속 기분 나쁜 감촉이 입에서부
터 느껴졌다.
---
후우. 요즘 출판사에서 교정 원고 받아서 수정하느라...
소설을 못 썼더니, 비축분이 다 떨어졌군요. -0-;;
오늘부턴 열심히 써야겠네요. 조금 나태해진 느낌이라눈...
홀홀. 내일 드디어 결전의 날입니다.
한국 VS 포르투갈.
모두 우리나라가 이기도록 응원합시다!
짜작작작작 대~한민국!
131 [골렘마스터] # 빛의 창조신들의 에이전트[4] 5권 끝
칼칼한 기분에 목 언저리를 매만지며 그는 약간 가라앉고 갈
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후우. 정말…… 시간은 계속 가고 있지만, 하는 일은 없으
니, 답답한 노릇이야."
"정말 그러네요. 몇 일 동안 계속 모든 인원을 동원해서 대륙
곳곳을 뒤지고는 있지만, 파괴신은커녕 그 존재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으니. 혹시 천상계로 그냥 올라가 버린 것은 아닐까
요?"
미스티 또한 답답한 심정은 마찬가지인 모양인지 살짝 물 한
모금을 머금으며 목을 축였다.
"그건 말도 안 돼지. 원래 파괴신은 천상계 신들. 빛, 어둠 할
것 없이 모든 신들에게 미움을 샀고, 또 예전에는 엄청난 파괴
신의 능력으로 인해 신들 전체가 단결하여 녀석과 대항했을
정도였다고 하잖아. 코스모스까지 나서서야 겨우 일이 정리됐
다고 하는 존재를 천상계에서 받아들이겠어? 그리고 파괴신
이 자신을 그렇게 증오하는 신들만 모여있는 천상계로 올라
갈 리가 없잖아. 뭐 정신이 약간 이상하다면 모를까."
미스티의 싱거운 말에 아투는 고개를 양옆으로 저으며 피식
웃었다.
"훗. 하긴 그렇겠죠? 역시…… 파괴신이 마음을 단단히 먹고
숨어버렸으니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찾기 힘들 것 같네요. 이
제 엔젤 나이트와 드래곤들을 믿는 수밖엔 없겠어요."
"그래, 엔젤 나이트의 수장인 화이엘도 신들에게 조언을 구하
러 다시 천상계로 올라갔고, 드래곤 로드인 그라디우스님도
다시 한번 드래곤 회의를 소집하여 무언가 방책을 세우신다
고 했으니까 기다리는 수밖엔 없겠지. 정말 최악의 상황까지
치달아 파괴신의 본래의 힘을 되찾고 지상계를 파괴하기 시작
한다고 해도 난 절대 포기할 생각은 없어. 우리 인간들은 지금
껏 살아오면서 불가능하다고 했던 일들을 많이 이룩해왔으니
까."
아투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손에 들고 있던 빵 조각을 접시에
내려놓았다. 아직 허기가 가신 것은 아니지만, 목에서는 음식
을 강력히 거부하고 있었기에 더 이상 먹고픈 생각이 들질 않
았다. 무언가 가슴을 꽉 막고 있는 듯한 그런 답답함 때문인
듯 했다.
식사를 대충 끝낸 아투와 미스티는 식당에서 나와 에리아 시
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탑으로 올랐다. 시원한 바람이라도
쐴 겸, 그리고 재건축 작업이 한창인 도시의 전경도 감상할
겸 한번 오르자는 아투의 권유였다.
탑의 꼭대기는 원래 존재했던 고성 홀리 캐슬에서 또한 천장
이 뚫려 있었는데, 저번에 새로 건축된 홀리 캐슬의 탑 또한
마찬가지였다. 높이가 거의 250베타에 가깝기 때문인지 탑 꼭
대기에는 항상 시원한 바람이 규칙적으로 불어왔다. 막 꼭대
기까지 오른 아투는 얼굴로 불어오는 바람에 마치 세수라도
하는 듯한 동작으로 얼굴을 쓱쓱 문지르면서 조금 걸음을 옮
겨 탑 꼭대기 공간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확실히 드워프들의 솜씨가 좋지?"
요즘 들어 미스티와 사적인 얘기를 한 적이 없다고 생각한 아
투가 어두운 분위기를 조금 바꿔보기에 위해서 화제를 밝은
쪽으로 돌려 말을 꺼냈다. 처음에는 말없이 그의 옆으로 다가
가 살짝 팔짱을 끼고 얼굴을 기대오던 그녀가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훗. 드워프들의 솜씨는 예전부터 많이 들어왔던 거지만, 눈
으로 보니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아투의 친구인 기스뮬이란
분도 대단하고요. 파괴신과 관련된 모든 일이 정리되고 대륙
이 안정을 되찾으면, 기스뮬의 연구에 모든 원조를 아끼지 않
을 생각이에요. 아직 그가 생각하는 것들이 빛을 발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단기간 내에 우리 퓨티아 제국을 크게 발전시
킬 수 있는 무언가를 개발해낼 것이라는 좋은 느낌이 들어요."
"그래, 기스뮬의 솜씨는 드워프 족 내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정도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물론 증명이 된 것은 아니지
만, 내가 보기에도 그는 정말 대단한 것 같아. 항상 엉뚱한 것
만 생각에서 그렇지, 그가 열정적으로 덤벼드는 것이 있다면
그건 분명 성공할 거라고 믿어. 아마 이번에 모든 열정을 쏟
게 될 마법 과학 또한 마법사들의 후원만 있다면 큰 발전이 있
을 거야."
그러면서 아투는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넓은 에리아 시를 눈
에 담았다. 한창 건축 공사가 한창인 저기 어딘가에 기스뮬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언제쯤 우리도 이런 골치 아픈 일에서 벗어나 서로에게 솔직
해질 수 있을까요?"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미스티가 부드러운 손길로 아투
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따스하면서도 두근거리는 느낌. 얼굴
에 홍조를 띈 그녀는 더욱 깊이 아투의 품에 기대며 몸을 맡겼
다. 차가운 바람이 그들을 시기하듯 옆을 스쳐 지나갔지만,
두 사람의 따뜻한 열기를 식힐 순 없었다.
"곧 그런 날이 오겠지. 나도 골렘술에만 전념하면서, 또 개인
적인 그러한 날들을 즐기면서 지내고 싶어. 요즘 들어 그러는
건데, 다른 소년들이 한창 놀 때에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건
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 그만큼 지금 상황이 어렵기 때문
에, 자꾸 딴 생각이 드는 건가?'
"훗. 그거야 나도 마찬가지예요. 갑작스럽게 기억 봉인을 당
한 채 쫓기고, 또 전 황제셨던 아버지조차 암살을 당하셔 이
세상이 없으시니. 게다가 이제부터 제국을 이끌어나가야 할
존재가 되어 있다는 게 솔직히 부담스럽고 걱정이 되요."
"하하하하. 뭐 그거야 미스티가 빨리 결혼을 해서 황제의 자
리를 남편에게 넘기면 그만 아니겠어?"
순간 아투가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누가 들었더라면 황
제의 자리를 탐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당장에 따지고 들었을
테지만, 그 말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인물
인 미스티. 그녀는 의외로 장난스럽게 말해오는 아투 때문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어쩌면 이게 프로포즈일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들자 달아오른 얼굴이 식을 줄을 몰랐다.
하지만 아투는 그녀가 그 정도의 반응을 보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오히려 자기가 당황하면서 뭐라 말을 꺼내려 했다.
그런데,
샤아아아앙!
갑자기 황금색의 빛이 탑 꼭대기 전체를 물들이며 태양처럼
빛났다. 동시에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막대한 마나가 꼭대기
전체를 휘감으며 아투와 미스티를 압도했다.
빛이 천천히 사라지며 모습을 드러낸 존재에 아투와 미스티
의 시선이 쏠렸다. 하지만 원래 그런 등장에 익숙해있던 터라
그리 놀란 표정은 아니었다. 백색의 섬광이 아닌, 황금빛의 섬
광이라면 역시 그 분일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시야에 들어온
존재를 확인하고 자신들의 예상이 맞아떨어졌음에 어색한 웃
음을 보였다.
"두 사람 사이가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 허허. 정말 인간
젊은이들은 알다가도 모르겠군."
금빛 청년 그라디우스가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말투로 두 사
람에게 말을 걸어왔다. 다행히 그 분의 표정이 밝은 것을 확인
한 아투가 그를 의식하고 미스티와 살짝 거리를 두며 멀어졌
다.
"가셨던 일은 잘 된 건가요?"
"흐흠. 큰 변동 사항은 없었지. 파괴신이 소멸하는 그 순간까
지 우리 드래곤들은 인간들과 협력하기로 확정적인 결론이 내
려졌다."
"정말 잘 됐어요. 위대하신 드래곤 종족이 협력한다면 본래
힘을 되찾지 못한 파괴신 정도는 문제없을 테니까요."
미스티의 얼굴에도 희색이 돌았다. 이제 드래곤들의 협력 문
제는 완벽히 해결됐으니, 엔젤 나이트의 수장 화이엘만 돌아
와준다면 모든 준비는 끝나게 된다. 파괴신과 타천사, 그리고
어둠의 종족의 행방이 묘연하긴 하지만, 드래곤과 엔젤들의
권능을 빌리면 어느 정도 진척은 보일 수 있을 것이다.
"후. 그럼 일단 내려가서 자세한 얘기를 듣도록 하죠."
아투는 미스티에게 조금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한쪽 손으로
감싸며 그라디우스에게 말했다. 잠시 한 쌍의 연인을 지켜보
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던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
며 탑 가운데로 뚫린, 아래쪽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걸어갔다.
샤아아아앙!
그런데 또다시 밝은 섬광과 동시에 맑고 청아한 소리가 사방
으로 퍼지면서 한쪽 공간이 크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는 그라디우스가 가장 먼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막 층계
를 밟으려던 아투와 미스티도 몸을 틀었다.
이번에는 분명 백색의 섬광이었다. 백색 섬광이 터지면 항상
모습을 드러냈던 존재는 역시…….
"호호호호호."
붉은 머리의 정열적인 여성. 하지만 속으로는 한없이 냉철하
기만 한 존재, 엔젤 나이트의 수장 화이엘 그녀였다. 그녀는
무형의 날개로 잠시 허공에 떠서 아투와 미스티를 묘한 눈빛
으로 내려다보다가 이내 한쪽에서 날카로운 기운을 뻗쳐오는
드래곤 로드를 발견하고는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화이엘. 어떻게 됐어? 신들의 말씀은 들은 거야? 물론 그분
들께 무언가 도움이 될 만한 얘기는 들었겠지?"
그녀를 확인한 아투는 다짜고짜 천상계에서의 일을 다그치
듯 물었다. 그 거센 기세에 당황한 천하의 화이엘이 반사적으
로 눈을 깜빡였다.
'가이트리아와 사이가 다시 좋아지더니, 기세가 살아난 거
야?'
마음속으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 화이엘이 날개를 다시
보이지 않게 숨기며 평범한 인간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잔뜩 기대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아투에게 다
가가 말했다.
"호호호. 걱정 마. 예상했던 것보다 수확이 컸어. 아니, 컸다
는 표현도 너무 약할 정도야. 대박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지금부터 내가 소개할 존재들을 보고 놀라지나 마라."
자신만만,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화이엘 덕분에 쳐져있던 분
위기가 화사해졌다. 역시 분위기 메이커인 그녀의 영향력이
상당한 모양이다.
누군가를 소개하겠다는 그녀의 말에 아투는 잠시 의아한 눈
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그녀 혼자 탑 위로 나타난 것
이지 다른 존재들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스티도 그라
디우스, 아투, 화이엘만이 보이는 탑 위를 한참 두리번거리더
니 양손을 올려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다만 위대한 권능을
소유하고 이미 신룡급에 다다른 그라디우스만이 주변으로 가
득 차 오른 기분 나쁜-물론 신성력과 상극인 마나를 잔뜩 지니
고 있는 드래곤으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신성력에 이마를
찌푸리고 있었다.
"호호호. 정말 놀라지 말고 잘 봐. 자, 이제 나오셔도 됩니다."
웬만한 존재가 아니면 항상 반말을 쓰던 그녀가… 그라디우
스를 제외하고 오랜만에 다른 상대에게 존댓말을 쓴 것이다.
아투와 미스티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샤아아앙!
다시 한번 백색의 섬광. 꼭 누군가가 나타날 때에 벌어지는
그 빛의 폭발 현상이 다시 한번 일어났다. 하지만 엔젤이나 드
래곤이 등장할 때의 효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공간
자체가 상당히 뒤틀리면서 탑 꼭대기 공간의 일부가 아예 다
른 차원으로 변해버린 듯 기이한 형상이 자그맣게 펼쳐졌다.
그리고 그 빛의 무리 속에서 흐릿한 그림자 세 개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빛의 무리 속에서 따스한 햇살로 몸을 노출시킨 존재는 역시
나 그림자의 수처럼 세 명이었다. 그들이 완전히 공간에서 빠
져나오자 일그러졌던 탑의 공간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크윽……."
세 명의 얼굴을 노려보던 그라디우스가 갑자기 가볍게 신음
하면서 고통스럽게 얼굴을 찡그렸다. 전신을 속박하는 신성
력 때문인지, 아니면 모습을 드러낸 자들과 무슨 연관이 있는
모양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이 정도로 당황할 정도라면 무
슨 사연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투는 차분하게 마음
을 가라앉히며 화이엘이 불러낸 세 명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일단 오른쪽으로 보이는 존재는 외모로 따진다면 미스티보
다 두 세 살 정도 어려 보이는 소녀였다. 얼굴도 창백했고, 시
릴 정도로 차갑게 비쳐지는 청색의 긴 머리칼은 그런 소녀의
병약한 이미지를 더했다. 가녀린 몸매, 원피스 같은 옷자락 바
깥으로 살짝 드러난 가느다란 팔과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다
만 생명력과 신성한 기운을 잔뜩 머금은 커다란 눈이 깜빡이
면서 소녀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가운데에서 확인된 존재는 전신을 갑옷으로 가리고 있는 은
빛 기사였다. 키도 훤칠했고 갑옷 바깥으로 드러난 팔뚝의 두
께도 대단했다. 전형적인 힘의 무장이라 불릴 수 있는 그 기사
의 얼굴은 날카로우면서도 강직한 인품이 묻어났다. 굳게 다
문 입에서도 그의 고집스런 성격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다만 이상하게도 기사라면 차고 있어야할 검이 없어 허리가
허전해 보였다.
마지막으로 왼쪽의 존재……. 놀랍게도 그 존재는 자그마한
생명체. 하지만 인간과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으며, 등에는 얇
고 투명한 네 쌍의 날개를 펄럭이는 요정족의 일원 페어리인
것 같았다. 자그마한 몸으로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던 페
어리는 자신을 뚫어져라 관찰하고 있는 귀엽게 생긴 소년에게
로 날아가 그의 주변을 맴돌다가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호호호. 그렇게 놀라지 말고 내 얘기를 다 들어야지. 이제부
터 내가 할 얘기를 듣고 놀라도 늦지 않으니까."
화이엘은 멍해져버린 아투와 미스티, 그리고 신음하며 당황
하고 있는 그라디우스를 향해 그렇게 중얼거린 뒤, 세 명의 존
재에게 다가갔다. 가장 먼저 페어리를 조심스럽게 가리킨 그
녀가 놀랄만한 존재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냈다.
"이 분은 사랑의 신인 러브샤의 에이전트. 지금은 러브샤님께
서 직접 강림하셨어."
!
빛의 3대 창조신들 중 하나인 사랑의 신 러브샤. 그 이름만 들
어도 놀랄 정도인데, 그 분의 에이전트. 아니 그분이 강림한
에이전트가 지금 이곳에 나타나다니! 아투와 미스티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하
지만 화이엘의 놀라운 소개는 계속됐다.
"그리고 여기 기사분은 용기의 신 브레이브님의 에이전트. 역
시 지금은 브레이브님이 직접 강림한 상태야. 아, 그리고 여
기 소녀분은 모든 신들의 지도자를 맡고 있는 빛의 신 샤이트
리아님의 에이전트야. 물론 다른 에이전트들과 마찬가지로 현
재는 샤이트리아님께서 직접 강림하셨어."
얘기를 마친 화이엘은 보라는 듯이 세 존재를 가리키면서 얼
굴 가득 웃음을 띄었다. 하지만 정작 소개를 받은 아투와 미스
티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얼굴에 경련까
지 일으키고 있었다.
---
한국은 승리한다!!! 꼬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옥~!!!!!
132 [골렘마스터] # 신과 드래곤의 화합[1] 6권 시작
신과 드래곤의 화합
화이엘의 말대로라면 그들은 신이라는 소리가 된다. 그것도
창조 6대신들 중 빛의 계열 3대 신 모두가 현재 지상계로 내려
와 퓨티아 제국의 황성에 서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투와 미스
티가 놀라는 표정을 짓긴 했지만, 신의 강림 소식이 그리 실감
이 나질 않았다. 무엇보다도 신의 힘을 받아들인 에이전트들
의 외모가 특별히 신이라고 보일 정도로 남다르지 않았기 때
문이다. 병약한 소녀도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그러
한 외모였고, 은빛 기사 역시 그러했다. 페어리가 약간 특이하
다고는 하지만, 신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상당히 멀었다.
물론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믿
어지진 않았지만, 신들이 직접 지상계로 내려와 힘을 빌려준
다고 하니, 아투와 미스티. 아니 지상계 모든 존재들로서는 안
도의 한숨을 내쉬어야 할 정도로 상황이 좋아진 것이었다. 그
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드래곤 로드 그라디우스와 그를 따르는 드래곤
들이었다. 원래 신들은 그들에게 도전하는 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반대로 신에게 도전하는 자들 또한 신을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 게다가 신들은 드래곤들이 지상계에서 행하
는 일들을 좋지 않게 보고 있었기에, 강력한 신성력으로 항상
드래곤들이 발견해낸 마나에 제재를 가해왔다. 막강한 힘을
지녔다는 드래곤들조차 신의 힘을 빌리는 신관들을 슬금슬금
피해 다닐 정도로 드래곤들과 신들의 대립은 모든 존재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당연히 지상계로 강림하여 힘을 빌려
주겠다고 하는 신들을 곱게 볼 드래곤 로드 그라디우스가 아
니었다. 비록 인간의 모습을 하고는 있었지만, 이빨을 드러내
며 드래곤처럼 으르렁거렸다. 불쾌한 심기를 전혀 감추려하
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라디우스님. 종족을 둘러싼 감정을 앞세우지 마시고 조금
냉철히 생각하세요."
탑 꼭대기에서의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황제의 임시 집무
실로 자리를 옮겼던 아투 일행과 지상계로 강림한 창조신들.
성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그라디우스를 설득하기 위
해 화이엘이 나섰지만, 금빛 청년의 일그러진 표정은 쉽게 풀
리지가 않았다. 아투와 미스티 또한 그의 마음을 돌려보기 위
해 계속 말을 건넸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난 절대로 신들과 힘을 합쳐 파괴신에게 대항하지 않겠다.
신들은 예전부터 우리의 강대함 때문에 강한 신성력으로 우리
를 괴롭혀왔지. 그런데 지금은 파괴신이라는 존재 때문에 그
런 옛 일을 모두 잊고 힘을 합치라고? 어림없는 일이다. 그 잘
난 이 세 명의 신들이 직접 사과를 하지 않는 이상, 나는 몰라
도 다른 드래곤 일족은 절대로 협조에 응하지 않을 것이다!"
버럭 화를 내며 그라디우스가 막 임시 천막을 박차고 밖으로
나가려 몸을 움직였다. 엔젤 나이트의 수장인 화이엘도 뭐라
그를 말리지 못하며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아투와 미스티
가 나선다고 그의 마음이 달라질 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이대
로 일이 틀어지나보다, 이런 안타까운 마음으로 금빛 청년의
살벌한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빛의 계열 창조 3대
신 중, 빛의 신 샤이트리아가 강림한 에이전트가 몇 발자국 앞
으로 걸어나오며, 모습을 드러낸 뒤 처음으로 입을 열어 그 음
성을 흘렸다.
『위대한 지상계의 지배자, 드래곤 로드 그라디우스. 나는 빛
의 신 샤이트리아입니다.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
데, 신들에게 도전하는 드래곤들을 막기 위해 신들이 신성력
으로 제약을 가한 적은 없습니다.』
가냘픈 체구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였지만, 성스럽고 경건
한, 그리고 위엄이 서려 있는 음성이었다. 막 천막의 입구를
막은 천을 젖히고 반쯤 밖으로 몸을 내밀었던 그라디우스가
어느 정도 그 음성에 위압을 느끼고 슬쩍 고개를 돌려 뒤를 돌
아보았다. 다행히 그가 멈춰 서자, 아투와 미스티의 입에선 안
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지금에서야 발뺌을 할 셈인가? 하지만 난 똑똑히 알고 있다.
신들이 신관들에게 신성력을 제공함으로서 드래곤들의 힘을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것이 아니라면 왜 우리들이 지금
껏 신관들을 슬슬 피해 다녀야 했지?"
완전히 몸을 돌린 그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엄청난 마나
가 실린 드래곤 피어가 그대로 개방되어 천막 안의 대기를 울
리며 소용돌이쳤다. 그 엄청난 성량에 흠칫한 아투가 귀를 막
으면서 고통스럽게 얼굴을 구겼지만, 드래곤과 신 이 두 존재
모두 이곳에 존재하는 인간족 두 명은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
다. 다만 화이엘만이 신들의 행동을 대신 사과하며 아투를 다
독였다.
"험험. 역시 그라디우스, 자네는 뭔가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이
확실하군. 우리의 신성력을 가끔 신관들에게 빌려주는 것은
지상계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서라네. 만약 우리들의 신성력
이 지상계에 전달되지 않고, 또 신관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가장 좋아할 종족이 누굴까? 그건 역시나 바로 자네들 종족인
드래곤이지. 만약 자네들이 지상계에서 모든 것을 이뤄낼 수
있는 그런 막강한 종족이 된다면, 현재의 지상계 모습을 유지
하고 있었을까? 그건 아니라고 보네. 분명 드래곤들의 세상으
로 바뀌어져 있겠지. 그래서 우리 신들은 드래곤들과 다른 지
상계 종족들과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신관들. 또 백마법사
들과 빛의 힘을 사용하는 자들에게 신성력을 빌려주고 있는
것이라네. 절대로 신들을 위협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드래곤들
의 힘을 제약하는 것은 아니니, 너무 화만 내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게나. 지금은 우리끼리 다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는
가.
비록 우리 3대 빛의 창조신들이 지상계로 강림까지 했다고는
하지만, 우리 창조신들은 지상계에서는 본래의 힘을 발휘할
수 없네. 파괴신과 비교해 지금 따져보자면 굳이 유리한 입장
이 아니라는 걸세. 우리 세 명의 신들. 그리고 드래곤 일족의
고룡들. 심지어 지상계의 능력자들까지 힘을 합쳐야 겨우 막
강한 파괴신의 폭주를 막아낼 수 있다는 말이네."
은빛 갑옷의 기사. 용기의 신 브레이브가 강림한 에이전트가
샤이트리아와 자리를 맞추며 앞으로 걸어나와 말했다. 가녀
린 소녀의 눈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그라디우스는 다시 옆
으로 고개를 돌려 브레이브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의 진심을
확인하려는 듯이 날카로운 눈매로 그의 심중을 꿰뚫었다.
"그래요, 그라디우스. 여기 샤이트리아와 브레이브. 빛의 신
과 용기의 신의 말이 맞아요. 저희 신들은 절대로 드래곤들의
힘을 시기하여 그런 행동을 하지는 않았어요. 이건 지상계 중
립을 목적으로 코스모스의 힘에 의해 창조된 엔젤 나이트들
이 증명해줄 수 있는 문제 같은데, 원한다면 지금 당장 여기
화이엘이나 다른 엔젤들을 불러 확인해봐도 좋아요."
작은 빛의 가루를 뿌리며 페어리가 허공을 날아 그라디우스
의 주변까지 다가와 빙그르르 맴돌았다. 그녀가 뿌리는 가느
다랗고 미세한 빛의 입자 하나 하나가 모두 강대한 신성력을
머금은 것이었기에, 가루에 내려앉은 부분이 강한 생명력을
흡수하여 반짝였다.
"그래요. 그라디우스님. 신들께서 거짓말을 하실 리도 없고,
또 정 못 믿으시겠다면 엔젤님들에게 확인하셔도 되잖아요.
그러니 지상계의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잠깐만 뜻을 굽히시면
안될까요?"
아직도 신이라는 존재의 등장에 얼떨떨한 기분을 가라앉히
지 못한 아투였지만, 그나마 드래곤의 태도가 조금 바뀌려한
다는 것을 파악하고는 최대한 공손한 어조로 상황을 수습하
기 위해 나섰다. 다행히 그의 아버지의 친구이기도 한 그라디
우스는 그의 말을 무시하지 않고 받아드리려는 듯 했다.
"흐음."
잠시 눈을 감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그라디우스가 획
하니 몸을 돌려 천막의 입구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한번의
설득이 통하지 않자 자존심이 상한 신들은 뭐라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고, 약간 곤란하다는 표정만 지어 보였다. 왠지 좋
은 느낌을 받고 어느 정도 안심한 채, 미스티를 돌아보려던 아
투의 얼굴도 다시 크게 구겨졌다.
"그, 그라디우스님! 제발 한 번만 다시 생각해보시면 안 되나
요?"
결국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있던 제국의 황제, 아니 황제이
기에 앞서 사춘기 소녀에 가까운 미스티가 입을 열었다. 순간
걸어나가던 그라디우스가 그 음성을 듣고 멈춰 섰고, 잠시 용
기 있는 모습을 보이던 미스티의 몸이 딱딱히 굳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는 그라디우스의 표정은 예상과는
달랐다.
"지금 당장 각 드래곤 종족의 수장들을 불러오겠다. 아무래
도 그들까지 함께 해야 뭔가 일의 진척이 있을 것 같다. 신들
까지 합세했으니 파괴신의 행방은 곧 찾을 수 있겠지. 어쨌든
한 시간 안에 갔다올 테니, 그동안 만반의 태세를 모두 갖춰놓
거라. 일단 다른 국가의 연락하여 소수의 능력자들만 뽑아 언
제라도 움직일 수 있도록 해두는 것이 좋다고 일러두는 것도
좋지. 그럼 금방 갔다오마."
의외의 말을 남기며 옅은 미소까지 보인 그라디우스가 그렇
게 황금색의 빛에 휩싸여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미스티는
잠시 그가 남긴 말을 곰곰이 되새겨보다가 긍정적인 반응이었
음을 깨닫고는 크게 기뻐하며 자신도 모르게 옆에 있던 아투
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야호! 됐어요, 아투! 그라디우스님께서 마음을 돌리셨으니,
이제 여기 계신 창조신분들과 함께 힙을 합치실 거예요. 그렇
게 되면 파괴신이라 해도 문제없겠어요!"
그녀의 태도를 보면서 창조신들은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다.
화이엘도 샤이트리아가 강림한 가녀린 소녀의 옆으로 다가가
기뻐하는 아투와 미스티를 반짝이는 눈 안에 가득 담았다.
* * *
빛을 강력히 거부하는 곳. 심연의 어둠만이 존재하며 모든 빛
을 흡수하여 무로 되돌리는 마의 공간. 나이츠의 몸을 빌려 지
상계에서 최상의 능력을 끌어내 종횡무진 목적을 수행했던 중
급 마족 섀도우 나이트는 온통 어둠뿐인 길을 걷고 있었다. 어
두운 공간은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고, 아무런 소리도 들려
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의 마계에 이미 익숙해있는
섀도우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손에 들린 지팡이를 내
려다보았다.
그의 손에 들린 지팡이는 대략 1베타 정도 길이로 되어 보이
는 상아빛 막대기의 형태였다. 특별한 세공으로 만들어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 특유의 맑은 상아색 빛이 어둠의 공간을
옅게 비추며 빛났다. 게다가 막대기 끝 부분에 달린 작은 구슬
은 아주 깨끗한 순백의 빛을 띄었는데, 진주라고 하기에는 재
질이 판이하게 달랐다.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그러한 신
비한 보석이나 금속인 듯 했다.
"아크 스태프……."
섀도우가 잠시 손에 쥔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어둠의
길의 끝이 나왔다. 약간 자그마한 통로의 입구를 나선 섀도우
의 눈에는 마계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존재. 타 마계
의 마왕까지도 두려워하는 힘을 가진 어둠의 마계의 지배자
타크니스가 들어왔다. 악마형의 기이한 검을 차고 의지를 지
닌 듯한 흐물거리는 망토를 두른 그의 모습이 오늘따라 유달
리 위엄이 있어 보여 섀도우는 일단 그에게 가까이 다가서지
않고 아래쪽 공간에서 예를 갖춰 무릎을 꿇었다.
"타크니스님. 다녀왔습니다."
"돌아온 것을 보니, 임무를 완수한 모양이구나."
"네, 그렇습니다. 여기 아크 스태프가 있습니다."
섀도우는 고개를 숙인 채, 양손을 내밀어 스태프를 그에게 보
여줬다. 그러자 보이지 않는 기운이 스멀스멀 퍼져와 그의 손
에 들린 막대기를 조심스럽게 받쳐 가져갔다. 손이 허전해짐
을 느낀 섀도우 나이트는 그제야 슬쩍 고개를 올리고 타크니
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과연…… 진짜로 메션 왕국의 왕에게만 전해진다는 그 아크
스태프구나. 잘했다. 과연 섀도우 나이트. 신성 제국의 황제까
지 암살할 정도의 힘을 지닌 존재다. 너의 활약으로 인해 내
목적이 곧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자, 이제 너를 편히 쉴 수
있게 해주겠다. 다만……."
갑자기 흥에 취해 말하던 타크니스가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한참 칭찬을 받아 기쁜 표정을 짓고 있던 섀도우는 마왕의 이
상한 태도에 다급해진 마음으로 다음 말을 재촉했다.
"다만 무엇입니까? 제가 무얼 잘못한 것입니까?'
"그건 아니다. 다만 너에게 휴식을 주기 전 마지막으로 시킬
일이 하나 있지."
"그게 무엇입니까? 당장 수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잘 듣거라. 마지막으로 내릴 명령은 바로 제국의 수도
황성 홀리 캐슬로 가서 현재 파괴신이 숨어 있는 장소를 그들
에게 알려주고 오는 것이다. 현재 파괴신이 숨은 장소는 천공
섬 이카루스. 이 단어만 그곳 사람들에게 던져주고 오면 된
다."
---
후아. 이번 글 전편 가셔서 다들 확인하세요. 뒷부분의 짤린
거 추가했습니다. 즐독하세요^^
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