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렘마스터-171화 (171/244)

[골렘마스터]  # 마계로 소환된 사람들[8]

리치는 바로 소파의 옆에 살짝 기대어 서 있었다. 얼굴을 드

러내지 않으려는지, 검은 후드를 깊게 눌러쓴 상태였고, 중앙

으로 황금색 실로 일정한 문양이 수놓아진 검은색의 로브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루나시엘 일행이 찾으러온 파괴의 조

각 중 하나인, 어둠의 왕관은 보이질 않았다.

『그대들이 원하는 것 역시 어둠의 왕관이겠지…….』

리치가 자조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에겐 상당히 안 된 일이지만, 별 수 없는 일이지. 우리

는 꼭 어둠의 왕관을 가져가 어떤 무모한 자의 야망을 막을 생

각이네. 만약 우리가 순순히 물러가도 다른 어떤 이들이 들이

닥쳐 힘으로 빼앗으려 할걸세."

『큭큭. 이 날이 올까봐 두려워 이런 높은 산 속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었던 것이었건만…. 정말 세상은 불공평한 곳인 것

같군.』

리치는 다시 한번 자조적인 의미를 담아 중얼거리면서 스르

르 걸음을 옮겨 그루나시엘에게서 가까운 곳까지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창을 꼬나 쥔 티탄과 검을 잡은 스플리터, 얀이 뛰

어나와 막아섰지만, 그루나시엘은 그들을 제지하고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어둠이 왕관이 없다면 당신은 다시 마계로 돌아가야 하는 건

가?"

『당연한 일이오. 고작 상급의 마물인 내가 어떻게 스스로의

힘으로 이곳에서 정착할 수 있겠소. 그나마 어둠의 왕관의 힘

으로 몇 백년을 평화롭게 보낼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감사할 뿐

이오.』

"흐음."

『고민할 필요 없소. 물론 내 처지를 듣고도 동요할 사람들

이 아닌 걸 알지만. 어쨌든 나는 나의 본능에 따라 당신들과

싸울 수 밖에 없을 것이오. 하지만 지금 내가 하려는 싸움의

의도가 꼭 본능을 쫓는 것만은 아님을 알아준다면 고맙겠

소.』

리치는 알 수 없는 어려운 말을 남기고는 갑자기 힘을 사용

해 허공으로 떠올랐다. 동시에 그의 주변으로 검은 구름이 뭉

게뭉게 피어올라 천장 전체를 덮어버렸다.

"싸우고 싶지만 않지만, 폐하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겠군. 리

치 당신의 부탁은 꼭 들어주겠네."

그루나시엘도 싸울 준비를 마친 리치를 보며 허리에 찬 검을

뽑아들었다. 검날이 보통인 장검이었는데, 백색으로 빛나는

검날의 한쪽 면은 신성 문자로 보이는 문양들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손잡이는 사용자가 잡기 편하도록 고급의 천이 불규

칙하게 감겨져 그루나시엘의 손에 딱 달라붙었다.

"성스러운 빛의 힘을 부여하라! 샤이닝 블레이드!"

그가 짧은 주문을 외치자, 그의 몸 안에 잠재된 신성력이 검

으로 스며들어 검기와 비슷한 기운을 형성했다. 리치는 그 모

습을 보면서 잠시 어깨 부근을 들썩거렸지만, 이내 잠잠해졌

다.

"티탄 경. 리치는 암흑 마법과 이상한 사술에 능하니, 섣불리

행동하지 말고 기회를 노리게. 스플리터 경과 얀 경도 마찬가

지일세."

"네, 알겠습니다."

"네, 그루나시엘님."

기사들은 짧게 굵은 목소리로 답을 한 후, 조금씩 거리를 두

고 떨어져 자리를 잡았다. 리치는 싸울 준비가 마쳐진 인간들

을 내려다보며 한쪽 손을 들어올렸다. 검은 로브 속에 가려졌

던 비쩍 마른 뼈다귀 손이 드러나면서 그 손바닥으로 모여지

는 검은 구체가 모양을 갖춰갔다.

『어둠은 태초의 근원, 광멸암흑탄. 다크니스 볼!』

순간 리치의 입에서 터져 나온 주문과 함께 녀석의 손바닥에

맺혔던 검은 구체가 맹렬한 기세로 쏘아졌다. 대기를 진동하

며 날아든 구체는 정확히 그루나시엘의 가슴팍을 노렸다.

'직선적인 공격이다. 이상한데…….'

그루나시엘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신성 주문을 머금어 흰

빛을 발산하는 검을 들어올려 구체를 막아냈다. 검날의 면에

부딪힌 어둠은 빛과 동화하여 소멸하였다. 그와 동시에 옆에

서 지켜보고 있던 티탄이 날씬한 형태의 창을 꼬나 쥐고는 땅

을 박차고 도약했다. 순식간에 십 베타 정도를 뛰어오른 그의

창 끝이 리치의 목을 꿰뚫듯 쇄도했다.

슈슈슈슉!

『어둠의 결계. 루나틱 실드.』

순간 노란빛을 살짝 머금은 암흑의 막이 리치의 앞으로 생성

됐다. 티탄은 자신의 창이 그 막에 퉁겨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바닥에 착지하여 자세를 잡았다. 스플리터와 얀은 아직

자신들의 실력이 그루나시엘이나 티탄에 비해 한참 모자람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기회를 노리는 중

이었다.

『더 이상 봐주지 않도록 하겠소. 누가 죽어도 죽어야 하니

말이오.』

왠지 리치의 음성이 슬프게 들려왔다. 그루나시엘은 선뜻 힘

을 다해 싸우고픈 마음이 들지 않아 동요했다. 그가 이상한 행

동을 보이자, 대충 상황을 파악한 티탄이 창에 순수한 내부의

마나를 불어넣고는 검기를 맺었다.

『어둠의 창, 다크 스피어!』

리치가 양손을 앞으로 내밀자, 천장을 가득 메우고 있던 검

은 구름 속에서 무수히 많은 검은색의 창들이 쏟아져 바닥을

향했다. 티탄이 창을 멋지게 회전시키며 몸을 날린 것도 그와

동시의 일이었다. 스플리터와 얀은 힘겹게 어둠의 창을 검으

로 막아내면서 믿을 수 없는 로얄 가드 티탄의 실력을 눈으로

새겼다.

"다른 나라라면 모르겠지만, 우리 신성 제국에선 너처럼 사악

한 마물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아!"

높이 도약한 티탄의 손이 왼쪽으로 물 흐르듯 흘러갔다. 유려

한 창의 끝에 달린 칼날 부분이 미세한 회전을 보이며 빠르게

리치의 가슴을 노리고 날아갔다. 리치는 놀랍게도 맨 손으로

기가 실린 창칼을 손으로 막아내 버렸다. 그리고 반대편 손을

앞으로 내밀며 뭐라고 중얼거리자, 검은 구름 속에서 또다시

어둠의 창이 쏟아져 내렸다.

"흐아아아아압!"

티탄은 급히 공중에서 몸을 빙그르 돌리면서 창을 머리 쪽으

로 향한 뒤, 손목의 반동을 이용해 창을 크게 휘둘렀다. 티탄

그를 노리고 날아들던 어둠의 창 대부분이 크게 늘어나는 검

기에 닿아 소멸했지만, 그도 한계가 있었다. 몇 개의 어둠의

창이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가 혈선을 남겼다.

"치잇. 제법이군."

다시 자세를 잡고 바닥에 착지한 티탄은 연이은 공격에 대비

하여 기를 극도로 집중시켰지만, 이상하게도 녀석은 이런 틈

을 노리지 않았다. 더구나 리치 녀석에게선 빈틈이 하나도 찾

을 수가 없었다. 스플리터와 얀은 힘겨운 싸움을 보면서도 딱

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조바심만 났다.

"리치. 차라리 이러는 것이 어떤가? 어둠의 왕관을 우리에게

넘겨주는 조건으로 해서 누군가 한 명과 계약을 맺게 해주겠

네. 물론 자네의 자유를 보장하고 말일세. 그럼 우리도 좋고,

자네도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서로 이렇게 원치 않는 싸움을

하며 눈치만 보지말고. 내 제안이 어떻지?"

잠깐동안 말없이 서있던 백색 기사 그루나시엘이 검에 걸었

던 주문을 지워버리며 물었다. 일행은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어리둥절해했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기 때문

이다.

하지만 리치는 그의 말뜻을 알아듣고는 상당히 놀라는 듯 보

였다. 후드 속에 가려져 있긴 하지만, 분명 놀랐을 것이라고

여긴 그루나시엘은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말했다.

"자네는 다른 어둠의 왕, 리치들보다 훨씬 더 지적이고 인간

들과 가까운 점이 있는 것 같네. 게다가 지금껏 인간이나 타종

족에게 피해를 주었던 일도 없던 것 같은데, 어떤가. 이 기회

에 나와 함께 지상계 저 생활력 있는 곳으로 나아가 살아볼 생

각은 없는 건가? 내 말이 모두 사실임을 내가 섬기는 빛의 신

샤이트리아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네."

신이 내려준 디바인을 손으로 짚으며 말을 하는 그의 제안은

거절하기에는 너무나 달콤했다. 리치는 애써 태연한 척 보이

려 했지만, 사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벌써 백색 기사의 말에

따르라는 외침이 커져가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하지? 저 인간

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신의 이름으로 맹세를 한다 면이

야…. 결국 긍정적으로 생각한 특이한 성격의 리치는 백색의

기사에게 여러 가지 조건을 내세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상급 마물인 리치와의 전투. 역사상 가장 허무했던 싸움으로

남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마물도

다 악한 마음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루이슨 산 정

상에서 생활하던 리치가 곧 대마물 백과사전에 새로운 성격

의 이단아로 등록될 것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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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치^^* 홧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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