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렘마스터] # 파괴의 신, 디스트로이어[2]
헤르테미스는 어느 정도 아투 일행이 상황을 파악하고, 이해
를 하자 그곳 유적에서 보관 중이던 전설의 내용 일부를 스스
로 읊어주기 시작했다.
『세상 모든 것들의 순수한 물로 나의 죄가 씻겨지고, 어둠으
로 가득 찬 검은 하늘에 죽음의 진이 나타나는 그 때가 되면,
나는 흩어진 파괴의 조각들을 모아 영혼의 문을 열고 부활하
리라.
나, 마지막 파괴의 의지를 꺾어 나의 영혼을 중간의 땅으로
보내나니, 코스모스의 대원칙을 어긴 자들이여. 그대들은 기
억하라. 파괴는 무에서 유를, 유에서 무를 창조하는 성스러운
결정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멸하지 않는 한, 나 또한 멸하
지 않으리라.
후세에 존재할 자들이여. 무한의 공간을 살아갈 그대들이여.
빛과 어둠은 무를 막을 수 없고, 또한 유를 막을 수 없으니,
그 끝은 파괴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으리라. 순리는 자연스런
흐름을 따라 흐르니, 나의 영혼을 받아들인 자에게 영원한 축
복을 내리노라. 잊지 마라, 파괴의 사자여. 무와 유를 창조하
는 나의 권능과 의지를…. 그리고, 때가 오면 나를 기억하고
받아들여라.』
파괴의 힘. 아투가 헤르테미스의 입에서부터 술술 흘러나오
는 전설을 듣고는 문뜩 떠오르는 존재가 있었다. 그냥 사람들
이 만들어낸 얘기인 줄로만 알고 있던, 또 하나의 고대신. 바
로 창조신들과 대립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무로 돌리려
했던 존재. 파괴의 신, 디스트로이어. 하지만 전해지는 성서에
는 그 신의 대한 것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머리가 복
잡해진 아투는 고개를 들어 대현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파괴의 신. 그건 정말로 있었던 일이었습니까?"
『적어도 내가 알기론 그렇지.』
"그렇다면 마족이 그 서적을 가져간 것을 단지 다이티의 부탁
을 들어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안될 것 같아."
화이엘은 얼굴이 반쯤 질려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
다. 파괴의 신. 그에 대한 전설. 그녀 역시 잘은 알지 못했지
만, 아투보다 몇 가지 더 알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지금 헤르
테미스의 입에서 흘러나온 전설은 파괴의 신이 언젠가는 부활
하는 때를 맞이한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녀는 일부러 그런
중요한 사실을 아투에게 알리지 않으며 헤르테미스에게로 시
선을 돌렸다.
"그렇다면 마족이 왜 그 서적을 가져가서 다이티에게 넘겼을
까…. 서적을 딱 보면 다이티 역시 신이 되는 방법과는 거리
가 멀다는 걸 알게 될 텐데."
복잡한 머리 때문인지 마음까지 답답해졌다. 아투는 쿵쿵 뛰
기 시작한 가슴을 가라앉히기 위해 쉼 호흡을 하며 숨을 골랐
다. 헤르테미스는 또 뭔가 기억 속을 더듬기 시작한 듯, 눈을
감고 조용히 명상을 시작했다. 화이엘은 어느 정도 헤르테미
스에게 기대를 거는 마음으로 홀로 중얼거렸다.
"다이티, 그가 속고 있는 것일 수도 있어…."
* * *
따뜻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자그마한 방. 이미 밖은 어둑어
둑 밤이 찾아와 고요했지만, 방안은 작게 밝혀진 등불로 인해
은은한 빛이 가득 차 있었다. 비록 가구들과 각종 생활에 필요
한 물건들이 모자라다 느껴지는 풍경이었지만, 그 방의 사용
자인 다이티는 오히려 정신을 잘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방이
만족스럽기까지 했다.
지금 다이티는 밤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등불 앞 책상에 앉
아서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중이었다. 풍성한 회색의 잠
옷 사이로 드러난 가느다란 팔목이 왠지 처량했다.
슥. 스슥. 슥.
펜이 움직일 때마다 하얀 종이 위에 검은 글씨가 남았다. 다
이티는 눈이 피로함을 느끼고 자꾸 눈을 깜빡였지만, 쉽게 몸
을 일으키지 못하고 무언가 빼곡이 쓰여진 책을 넘겨가면서
열심히 다른 종이에 글을 쓰고 있었다.
"흐음. 이제 어느 정도 해석은 다 된 것 같군. 일단 가장 먼저
필요한 성수는 아주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다음으
로 필요한 것은…."
다이티는 펜을 내려놓고 뻐근한 손목을 주물렀다. 신관으로
서의 나름대로 수행을 쌓아온 그였지만, 연륜을 이길 순 없는
모양인지,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어 허리와 어깨가 쑤셔왔
다.
"죽음의 낫. 어둠의 왕관. 그림자의 로브. 파멸의 장갑. 심연
의 부츠. 허허. 정말 대단한 물건들밖엔 없군요."
다이티는 탄식을 하듯 자신이 써놓은 종이를 읽어보고는 등
받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성수는 어떻게 운이 좋아 그 실체
를 알아내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남아 있는 준비
할 품목들은 정말이지, 엄청난 것이었다. 일단 이미 사람들에
게 널리 알려져 있는 죽음의 낫부터 생각해봐도 앞이 암담해
졌다.
"사신의 힘을 지닌 상급 마족. 데스 크라이의 손아귀에 있는
이것을 어떻게 빼앗는단 말인가."
지금 죽음의 낫은 상급 마족. 죽음을 관장하는 데스 크라이라
는 마족의 손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생명체가 죽
은 후, 영혼을 수습해 가는 것이 데스 크라이 그 존재였기 때
문에, 분명 그 마족이 사신의 힘을 주는 죽음의 낫을 소지했
을 가능성이 높았다.
"흐음. 역시 타천사들을 회유하는 수밖엔 방법이 없겠군."
다이티 교황은 일단 죄를 지어 지상계에서 벌을 받고 있는 타
천사들을 끌어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그 도도한 존재들을 상대
하려 자처하는 인간은 지금껏 없었다. 물론 다이티 스스로도
자신이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 구석에선 그런 엔젤들
조차 깔보게 만드는 존재감이 느껴졌다. 다이티 스스로도 흠
칫 놀라게 만들 정도였지만, 그는 괜히 신경을 쓰는 탓이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흐음. 일단 회유한 다른 종족들의 대표를 시켜 의식에 필요
한 제물을 모아달라고 부탁해야겠군요. 그동안 나는 타천사들
이 벌을 받게 된다는 수행의 동굴로 갔다 와야겠어요."
다이티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그 미소
는 광기 어린 괴소로 변했다. 그리고 정말 놀라운 말이 새어나
왔다.
"크크크크크. 이제 모두 파멸이다. 때가 다가오고 있어."
…….
"아, 왜 내가 이렇게 멍하게 있었을까요."
방금 어마어마한 말을 내뱉은 다이티였지만, 전혀 기억을 하
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담담한 표정을 지은 그는 이내 등불을
끄고는 아담한 크기의 침대 속으로 파고들었다.
대현자, 헤르테미스.
사실 그가 어렸을 적에는 딱히 대현자라 불릴 정도로 대단한
면모를 보여주진 못했다. 그저 남들보다 뛰어나게 학문에 대
한 열정이 대단했을 뿐이지, 그렇다고 온 대륙 사람들의 칭송
을 받게 되는 대현자의 자질을 보이진 않았다. 사람들은 언제
나 학문을 들이 파고 연구하는 어린 꼬마 헤르테미스를 보며
그냥 국가적으로 이름 정도나 날리는 현자가 될 것이라 생각
했었다.
헤르테미스는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다. 또한 마법에
대한 관심이 많아 여러 가지 밝혀지지 않은 마법을 연구했고,
나름대로의 마법 지식으로 발전시켰다. 서서히 그는 현자 정
도의 지식과 능력을 가지게 되었고, 그 무렵 신생 국가로 발전
하던 카미나아 공국의 군사로 발탁되었다.
카미나아 공국에서의 그의 활약은 정말 대단했다. 일단 신생
국가답게 수많은 전투를 치러 영토를 확장하고, 또 지켜내야
했는데, 모든 전투에서 사용된 헤르테미스의 전략은 실패라
는 단어를 모르고 공국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 상대국들은
아예 헤르테미스를 전쟁의 신이라고 칭하며 더 이상 카미나
아 공국와 맞서기를 두려워했고, 급기야는 대부분의 나라들
이 그 작은 공국과 앞다투어 동맹을 맞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또한 헤르테미스의 공은 전쟁에서만 세워지지는 않았다. 여
러 가지 학문을 연구하여 발전시켰으며, 공국 전역에 쉬운 마
법들을 전파하여, 마법을 일반화, 보급화하는 것에 힘썼다. 또
한 여러 가지 고대 서적들을, 특히 고대 마도 제국의 서적들
을 해석하는 것을 좋아했고, 또 그 해석본을 따로 공국의 도서
관에 기증까지 하였다.
허나… 이런 뛰어난 그였다고는 하지만 대현자. 모든 도를 깨
우치고, 극상의 위치에 오른 존재를 칭하는 대현자가 될 수는
없었다. 그에겐 비록 열정은 있었지만, 그 열정을 뒷받침해주
는 생명이 얼마 남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어느 정도
현자 이상의 경지에 이르게 되어 마법과 세상의 모든 이치를
깨닫는 단계에 이르렀을 때, 그의 앞에 누군가가 찾아왔다.
바로 전 세대의 대현자. 모든 도를 깨우치고, 코스모스의 대
법칙을 깨달았으며,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일들을 알고 있는
존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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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