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렘마스터-139화 (139/244)

[골렘마스터]  # 또 다른 시작[4]

화이엘은 그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서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엔젤 특유의 성스런 존재감은 사라지지 않아 계속해

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심지어는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

들과 하인들도 그녀의 성스러운 미모에 끌려 자꾸 이곳에 머

물려 할 정도였다. 메션 왕국의 3대 미인 중 하나로 손꼽히는

라일라 백작부인도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로, 정말 엔젤의 미

모는 천상의 것이었다.

달그락 달그락.

드디어 음식을 실은 작은 수레가 주방으로 이어진 통로를 따

라 들어오기 시작했다. 통로 쪽으로 가장 가까이 앉아 있던 아

투와 미스티는 곧 코를 자극하는 맛 좋은 향의 취해 멍한 눈빛

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하지만 기다린 시간이 아깝지 않

게 생각될 정도로 맛있는 음식들을 준비해왔으니, 기대하십시

오."

저택의 집사 크런티가 수레를 식탁 바로 옆까지 끌고 왔다.

그의 뒤쪽으로는 전에 보았던 젊은 하녀 둘이 따라왔다.

"자, 크런티. 오늘은 어떤 요리지?"

그라디우스가 빨리 먹고 싶어 안달이 난 어린 아이처럼 성급

하게 물었다. 그 모습을 봐서는 과연 그가 정말로 드래곤 로드

라는 위대한 존재일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천진난만했다.

그의 친구인 아트란은 인간의 생활이 조금씩 몸에 배고 있는

드래곤 친구를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의

옆에서 라일라도 밝게 미소지었다.

"그라디우스님이 가장 기다리셨던 모양이군요. 자, 일단 수프

부터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음식들도 다 준비해 수레에

싣고 왔지만, 이것도 다 순서가 있기 때문에…. 어쨌든 수프부

터 올리겠습니다."

크런티는 가볍게 설명을 마친 뒤, 자신을 따라온 하녀들에게

신호를 주었다. 그러자 검은색의 메이드 복을 깔끔히 차려입

은 젊은 하녀 둘이 종종걸음으로 앞으로 나와서는 수레 제일

위층에 올려진 수프 접시를 내려, 개인 당 한 접시가 돌아가도

록 식탁 위로 올렸다. 아직도 그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우

윳빛 수프를 내려다보던 화이엘이, 침묵을 깨고 궁금한 듯 물

었다.

"저기 크런티씨. 이렇게 음식을 미리 다 가져오면 가장 나중

에 먹게 될 음식은 식지 않나요?"

"물론 보통의 집에선 그러하겠지만, 저희 저택에서 사용하는

모든 식기들은 주인이신 아트란 백작님께서 마법을 걸어두셨

습니다. 각 음식의 특성. 최소한 그 음식에 알맞은 온도를 유

지하도록 하는 마법입니다."

크런티는 아트란 백작에 대해 말을 하면서 스스로 자부심을

느꼈다. 위대한 마법에 못지 않게 집안 일에 신경을 쓰며 생활

적인 마법을 사용하는 아트란 백작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다

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큰 자랑이었던 것이다. 화이엘은 그

의 설명에 곧 수긍하며 식탁 위에 냅킨으로 싸여진 수저를 집

어들었다. 우윳빛 수프는 지금까지 지상 생활을 하면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조심스럽게 수프를 떠서 수저를 입안으로 가져간 그녀는 강

하게 식욕을 자극하는 뛰어난 맛과 향을 느꼈다.

"아아! 이 수프 도대체 어떤 재료를 써서 만든 거죠?"

"하하하. 화이엘님. 음식은 재료가 중요한 것이 아니랍니다.

물론 재료도 어느 정도 역할을 하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

은 음식을 만드는 사람의 마음가짐이지요. 그저 돈을 벌려 음

식을 만드는 요리사는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

다. 하지만 먹는 이의 행복을 생각하는 요리사는 그의 실력을

뛰어넘은 엄청난 요리들을 선보여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준답

니다."

"행복이라…. 음식으로 행복을 선사하는 직업, 요리사. 생각

해보니 요리사도 멋진 직업 같군요. 호호호."

여느 때의 성격을 회복한 그녀는 아트란의 설명을 듣고는 과

장된 웃음을 터뜨리며 연신 숟가락을 움직여 수프 접시를 비

워냈다. 이미 이곳 요리사의 음식 솜씨를 잘 알고 있던 그라디

우스와 아투, 그리고 미스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재빨리 수

프를 먹어치운 뒤였다. 확실히 음식을 기다리기 전보다 수프

를 먹고 나니 더욱 식욕이 생겨났다.

"자, 그럼 제 1코스는 오카린 피네소스입니다."

크런티는 하녀들을 시켜 빈 접시들을 식탁에서 내렸다. 그리

고는 음식 수레의 제일 위층을 하나 떼어낸 뒤, 그 밑에 놓여

진 커다란 접시를 직접 식탁 위로 올렸다. 접시 위쪽이 둥근

뚜껑으로 덮여 있어 음식 모양은 알 수 없었지만, 이름처럼 상

당히 화려한 것이 예상됐다. 그라디우스를 비롯한 다른 사람

들이 모두 침을 삼키며 음식 공개를 기다리는 사이, 하녀들은

잽싸게 그들 앞으로 새로운 접시를 올려두었다.

"자, 공개합니다. 이것이 오카린 피네소스입니다."

이윽고 크런티의 손에 의해 음식 접시의 뚜껑이 열려졌다. 그

의 진지한 소개와 함께 드러난 음식의 모습. 화려하고 아름다

운 모습을 기다하고 있던 사람들의 분위기가 축 쳐져 버렸다.

예상과는 달리 그저 밋밋한 느낌의 채소들로 이루어진 샐러드

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특이하게 오색

으로 빛나는 소스라 할까?

"그런 표정들 짓지 마시고 일단 한번 드셔보세요. 생각이 확

달라질 거예요."

라일라가 환희 웃으며 속마음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손님들에

게 말했다. 그 밋밋한 음식의 진정한 맛을 아는 아투와 그의

가족은 일단 향기롭게 풍겨오는 향을 맡으며, 젓가락으로 샐

러드를 먹기 시작하였다.

"훗. 일단 향은 상큼하면서도 좋은데요?"

맛있게 먹기 시작한 아투를 보며 젓가락을 집어든 미스티도

앞에 놓여진 작은 접시로 샐러드 조금을 덜어다가 시식을 시

작했다. 그라디우스와 화이엘도 곧 푸짐하게 올려진 샐러드

중 일부를 덜어, 입으로 옮겨갔다.

"허허허허허. 이거 정말 보기보다 맛있군. 그냥 텁텁한 채소

맛이 날 줄 알았는데, 자연 속의 생명력이 그대로 넘쳐나고 있

어. 상큼한 향을 내는 것은 아마도 이 오색 빛깔의 소스가 원

인인 것 같은데…."

그라디우스는 순식간에 샐러드를 비어내고는 만족스럽게 말

했다. 화이엘도, 미스티도 모두 접시를 비워냈을 때는 이미,

아투 가족과 그라디우스가 재빠른 동작으로 오카린 피네소스

전부를 먹어 치운 뒤였다.

"아, 그나저나 아투야. 요 몇 일간 계속 저택을 돕고 있는 그

덩치 큰 사람은 누구냐?"

아트란이 무릎 위에 놓인 냅킨으로 입가의 음식물을 닦으며

물었다.

"아…, 그 사람 갈 데도 없고 해서 그냥 우리랑 함께 다니기

로 합의를 본 사람이에요. 사실은 사람이 아니라, 키메라죠.

아마도 다른 대륙의 마법사가 만든 존재 같은데, 그 마법사가

불의의 사고로 죽은 모양이에요. 생긴 건 조금 무섭지만, 마음

은 순수한 것 같으니 잘 대해주세요. 아빠."

아투는 가볍게 대꾸하며 크런티 집사를 그윽한 눈길로 바라

보았다. 빨리 다음 코스. 즉 주 코스라 할 수 있는 제 2 코스 음

식을 내어달라는 뜻이었다. 그라디우스도 감히 저항할 수 없

는 압박감을 담은 눈으로 집사를 노려보듯 했고, 미스티도 사

랑스런 눈길로 음식 수레에 눈을 고정시켰다. 화이엘은 음식

에 상당히 집착하는 그들을 보며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

거렸지만, 행동과는 다르게 그녀의 눈빛도 다음 음식을 기다

리고 있는 듯 하였다.

"그럼 다음 음식입니다. 제 2 코스로 육류를 준비했습니다."

육류! 잔뜩 기대를 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제야 배를 든든히

채울 수 있는 음식이 나온다는 소리에 귀가 솔깃했다. 다들 숟

가락을 올려놓고는 양손에 나이프와 포크를 하나씩 들고는 음

식 확보를 미리부터 준비하여 서로를 경계했다.

"잠깐. 일단 앞으로의 일부터 결정한 뒤, 먹도록 하는 게 어떨

까요?"

하도 육류 음식에 대한 경쟁이 치열한 양상을 보이자, 아투

가 긴장을 늦추기 위한 한 가지 방법으로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항상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지내 이번 음식에도 역시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아트란과 라일라는 차분한 태도로 아

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 어제 아투, 네가 말해주어 퓨티아 제국의 전 교황인 다

이티 라무스가 신이 되려 한다는 것은 알고 있어. 게다가 우

리 왕국의 고대 유적을 파괴하고 서적을 빼내간 것도 그가 확

실한 것 같더군. 어쨌든 지금 고대 마도 제국의 비밀 서적은

다이티의 수중에 있다는 말이겠지?"

아트란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매만졌다. 아직 이해를

잘 하지 못하고 있던 라일라도 신이 되려 한다는 소리에 뭔가

느끼는 바가 있는 모양인지, 자못 심각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 자의 손에 서적이 넘어간 것은 확실하네. 내 눈으로도 직

접 확인했지. 분명 마계의 마왕 타크니스가 수하를 시켜 서적

을 훔쳐낸 뒤, 교황에게 넘겼어."

그라디우스가 아트란의 물음에 답했다. 그러자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을 찾아낸 아트란이 다시 낮게 깔린 어조로 되물었

다.

"마족? 마족은 지상계 활동에 크나큰 제약이 따르지 않나? 게

다가 하급 마족 정도라면 나 혼자서도 자네가 선물한 마나 애

로우의 힘으로 상대할 수 있네. 나에게 저주를 퍼붓고 죽은 마

족이 그 전적인 예가 되지. 그렇게 힘의 대부분을 제약 당하

는 마족인데, 고대 신전을 관리하던 마법사와 기사들의 감시

를 뚫고 신전 자체를 날려버릴 수가 있다는 말인가?"

---

쩝...;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프다눈...;;;

[골렘마스터]  # 또 다른 시작[5] 3권 끝

"자네는 아직 모르겠군. 하지만 난 지상계 전체의 모든 신성

력을 미약하게나마 느낄 수 있네. 또 마족의 힘을 제약하는

그 미묘한 기운도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지. 하지만… 근래

에 들어 그런 힘들이 너무도 약해졌어. 물론 상급과 중급 마족

이 힘을 제약하는 기운은 달라진 것이 없지만, 하급 마족의 힘

을 제약하는 기운은 크게 줄어들었네. 내 생각이지만, 이 정도

라면 하급 마족의 본래 힘 중 삼분의 이 정도는 발휘되리라 믿

네."

"그라디우스님의 말씀이 맞아요. 다이티 교황, 아니 이제는

교단에서 영원히 파문을 당한 다이티와 마왕 타크니스의 계약

이 유지되고 있던 그 때, 다이티 교황은 믿을 수 있는 빛의 신

관 몇 명, 그리고 어둠의 신관들과 사설 기사들을 풀어 클라미

디 대륙의 모든 하급 성물들을 파괴했지요. 때문에 마족들이

지상계에서 가질 수 있는 입지는 더욱 커졌고, 이제는 인간들

도 쉽게 하급 마족을 건드리지 못하게 된 상태예요."

믿을 수 없다는 듯 불신 어린 표정을 짓는 아트란을 향해 화

이엘이 부드러운 어조로 덧붙여 설명했다. 그라디우스뿐만 아

니라, 천상계 엔젤인 그녀까지 나서서 사실을 곧 수긍하는 눈

빛을 보인 아트란은 정말 심각한 표정으로 모두가 듣도록 목

소리를 높여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마족은 다이티를 이용하여 하급 마족의 입지를 높

였다는 말이 됩니다. 대신 그에게 신이 되는 비기가 담긴 서적

을 넘겨주면서 말입니다. 허나 타크니스가 과연 마족과 상반

되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신. 바로 그 존재가 될 수 있는 서

적을 빛의 신관인 다이티에게 넘겼다는 것은 뭔가 꿍꿍이가

있다고 밖에 생각되질 않습니다. 아무리 신이 되려 자처하는

자라고 해도 그는 빛의 신관이니 분명 빛의 신 계열을 택할 것

이 분명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아빠. 분명 다이티 교황은 이미 그 서적을 넘겨받았

음이 확실해졌어요. 이미 그의 수하들이 신이 되기 위한 의식

에 필요한 제물들을 모으기 시작했으니까요."

아투는 금단의 지역에서 만났던 용기의 하이 프리스트 미사

엘과 그의 동료들을 떠올렸다. 골렘술사들은 용병으로 일하

는 사람들 같았지만, 분명 기사 둘은 붉은 화염 기사단의 제 1

단장, 2단장을 맡았던 사람들이 틀림없었다.

"제물? 그렇구나. 신이 되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지. 만

약 신에 가장 가까운 문화를 이루었다는 고대 마도 제국의 서

적만 아니라면 그 어떤 사람도 믿지 않을 것이다. 신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아트란은 긍정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뭔가를 떠올

리고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렇구나. 이미 서적이 그 야심에 찬 다이티에게 넘어갔

다고 해도, 우리는 서적 없이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

이 있다. 고대 마도 제국의 전 서적을 머리 속에 간직하고 계

신 심오한 뜻에 도달한 분. 대현자 헤르테미스님이라면 신이

되는 금기의 서적 내용 또한 기억하고 계실 것이다. 그러면 다

이티가 필요로 하는 제물들을 미리 알아내어 막을 수 있다는

얘기지."

"아, 맞다. 우리 메션 왕국에는 모든 것을 통달한 자, 대현자

헤르테미스님이 계셨지!"

아투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역사 속의 인물을 기억 속에서

뒤적거려 떠올렸다. 지금까지 물아일체의 정신을 지키며 자연

과 동화되어 여러 서적만을 옆에 끼고 산다는 고인. 헤르테미

스. 지금까지 살아있는 300살의 엄청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아예 전설상의 인물이 되어 대현자의 칭호를 얻은 존

재였다. 미스티가 사는 퓨티아 제국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사

람이 그였고, 드래곤인 그라디우스도 상당히 꺼림칙하게 여기

는 존재 또한 그였다. 심지어는 천상계 엔젤인 화이엘도 그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 기억 속을 뒤적거리는 중이었

다.

"그럼 일단 교황의 야망을 저지하기 위해선 필히 그 분을 만

나 뵈어야겠군요."

미스티. 제국의 황제인 그녀가 아투 가족과 일행들이 주고받

는 얘기에 끼어 들며 중얼거렸다. 이번 일에서 절대 빠지지 않

겠다는 마음을 살짝 드러내는 말이었다.

"뭐 일단 상황은 그렇게 정리되나?"

그라디우스는 잠깐 식사시간 중에 말이 딴 곳으로 샜음을 깨

닫고는, 그 주도자인 아투를 쏘아보면서 말했다. 그들이 나누

는 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

고 있던 크런티는 이내 심각한 대화가 끝났음을 확인하고는

입을 막고 하품을 해댔다.

"그럼 이제 제 2코스가 나가도 되겠습니까?"

"하하하하. 그래. 일단 먹고 다시 얘기해도 문제는 없겠군. 크

런티. 음식을 올려놓게나."

아트란의 허락이 떨어지자, 지루하게 몸을 비틀던 하녀들이

잽싸게 몸을 움직이며 수레 한 층을 분리시켜 밑으로 내렸다.

그 위로 드러난 커다란 원형 쟁반을 하녀 둘이 힘겹게 들어올

려 식탁 위로 옮겼고, 때를 기다리고 있던 크런티가 무게가 상

당량 나가는 쟁반 뚜껑을 힘차게 열려 했다.

그, 그런데 그때! 갑자기 뜻하지 않은 마나의 움직임이 있었

다. 그것은 바로 식당 한쪽 구석으로 모여들었고, 이내 공간

이 잠깐 출렁였다. 밝은 빛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누군가가 텔

레포트 마법을 시전하여 모습을 드러냈다.

"으, 으아아아앗!"

아투는 이내 한쪽 구석에서 모습을 드러낸 자의 얼굴을 확인

하고는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넘어지는 순간에도 그는 무의

식적으로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며 혹시나 날아들지 모르는 지

팡이 공격에 대해 대비했다.

"으구구구구! 이 칠칠맞은 녀석!"

소리도 없이 다가온 그 존재가 손에 쥐고 있던 나무 지팡이

를 세차게 휘둘렀다. 바람을 쉑쉑 가르는 소리와 함께 아투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아니, 당신은 누구요! 감히 누군데 남의 저택에 들어와서 행

패를 부리는 거요?"

아트란이 갑자기 나타난 존재를 보며 퍼뜩 놀랐고, 또한 자

기 아들의 머리통을 내려치는 모습을 보며 경악했다. 만약 텔

레포트 마법의 사용 도중, 뭔가 사정이 생겨 원치 않게 들어왔

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그 괴상한 존재. 그 노인은 분명 실수

하여 들어온 사람 같지는 않았다.

"아하. 이거 실수를 해버렸나? 나는 퓨티아 제국의 궁중 마법

사를 다시 맡게 된 실피스라고 하네."

실피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름이었다. 막무가내로 화를

내려던 아트란은 그 무게감이 실린 단어를 듣고는 잠깐 머뭇

거리며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 기억 속을 헤맸다.

"으윽. 스승님. 왜 여기까지 온 거예요?"

심각하게 기억을 더듬는 아빠를 외면한 채, 사부에게 관심을

돌린 아투는 슬쩍 가장 난처한 입장이 되 버린 미스티를 돌아

보았다. 과연 그의 예상대로 그녀의 얼굴은 반쯤 질려서는 푹

꺼져 있었다. 당연히 그럴 만도 했다. 그녀가 실피스에게 했

던 짓이 있으니….

"아, 그래! 실피스. 신성 제국 퓨티아 제국의 유일한 9서클 마

도사!"

그제야 실피스에 대해 생각이 난 아트란은 존경의 뜻이 담긴

눈빛으로 9서클 마도사를 바라보았다. 바로 아래단계의 그도

9서클 마도사라는 존재는 선망의 대상임이 확실했다.

"허허험. 이제야 날 알아보는 모양이군. 어쨌든 갑자기 찾아

와서 미안하긴 하네. 아, 특별한 용건이 있어서 그랬지. 황제

폐하!"

찌릿!

미스티는 자신을 부르는 실피스의 외침에 화들짝 놀라 다른

쪽으로 향했던 시선을 어색한 미소와 함께 옮겼다. 실피스는

그동안 황제의 자리를 대신하느라 상당히 고생한 모양인지 이

마를 잔뜩 찌푸리며 그녀를 쏘아보았다.

"제게 뭔가 하실 말씀은 없는지요. 황제 폐하."

"아, 저, 그게 그러니까. 실피스…. 나름대로 나에게도 사정

이 있었어요."

"허허허험. 그런 사정은 일단 수도로 돌아가서 듣도록 하지

요. 자, 이리 오십시오."

실피스는 행여나 그녀가 또 도망가는 것을 걱정하는 듯, 재빨

리 옆으로 다가가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원래부터 스승

에게 잡혀 사는 제자인 아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측은한

시선으로 미스티를 바라볼 뿐이었다. 궁중 마법사와 황제의

묘한 대화가 이어지자, 타 왕국의 사람인 아트란과 라일라는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눈치만 봤다.

"실피스. 조금만 더 나를 대신해 황제 자리를 맡아줄 순 없어

요?"

"허험.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오늘은 꼭 황제 폐하를 수도

로 모실 것입니다."

"흥! 그렇다면 저에게도 생각이 있어요!"

미스티는 갑자기 강하게 그의 손길을 뿌리치며 앙칼진 목소

리로 다시 외쳤다.

"황제의 권한으로 말합니다. 나는 당분간 개인적인 사정으로

수도를 떠날 것입니다. 더 이상 거기에 토를 달지 마세요. 모

든 황제 권한은 오늘부터 내가 돌아가는 날까지 실피스에게

전임하는 바입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이제 됐다는 표정을 짓고는 여유 만만하게

실피스를 눈에 담았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실피스

는 더욱 더 밝아진 표정으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눈치였다.

"흐흠. 황제 폐하…."

"훗. 왜 그래요?"

"그런 협박이 9서클 마도사인 제게 먹혀들 것이라 생각하십니

까?"

"그, 그건……."

순간 미스티는 당돌한 실피스의 말에 말문이 막혀 입만 뻐끔

거렸다. 아투와 화이엘을 돌아보며 구원의 눈빛을 건넸지만,

그들도 괴팍한 실피스에게 트집이나 잡히지 않기 위해 몸을

사렸다.

"자, 그럼 실례가 많았네. 아트란 백작. 나중에 언제 시간이

있으면 또 한번 만나도록 하지. 내 제자의 아버지 입장으로 말

이네."

실피스는 아무 말도 못하고 꼬리를 내린 황제 폐하를 단단히

붙들고는 식당의 한쪽 벽으로 다가갔다. 천천히 그의 손에 들

린 지팡이에서 마나가 흘러나왔다.

"아, 그리고 아투. 이놈아. 넌 안 따라올 셈이냐?"

"아, 스승님. 저는 몇 일 정도 더 이곳에 머물러야 할 것 같아

요. 교황이 입수해간 그 고대 마도 제국의 서적에 관해 잘 알

고 있는 분을 만나서 조언을 좀 얻어보려고요. 하하하."

갑자기 화제가 자신에게로 돌아오자, 흠칫한 아투는 과장되

게 손을 휘저으며 어색하게 행동했다. 다행히 실피스가 원래

노린 사람은 황제 폐하인 미스티 뿐이었는지, 더 이상 따지고

들려하진 않았다. 아투는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그라디우스님과 화이엘님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거의 텔레포트를 사용 가능할 정도의 마나를 끌어올린 실피

스는 마지막으로 말없이 서있는 두 위대한 존재를 향해 물었

다.

"내가 퓨티아 제국의 속한 존재도 아닌데, 뭐 하러 그곳을 또

가겠느냐."

"저도 일단은 아투와 함께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

마 몇 일 간은 저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신들의 호출이 있었

으니까요."

그라디우스와 화이엘 모두 같이 가지 못한다고 했다. 미스티

는 아쉬운 듯 그들을 바라보았지만, 실피스는 머뭇거리지 않

고 마지막 인사를 하며 지팡이를 허공에 들어올렸다.

샤아아아앙!

밝은 빛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그 두 사람의 신형이 빛에 휩

싸였다. 그리고 서서히 빛이 사라짐과 더불어 그들의 모습도

사람들의 눈에서 사라져버렸다.

---

에구구. 결국 미스티는 실피스의 눈 밖에 나버렸습니다.

황제가 궁중 마법사에게 잡혀 살아야 하는 불쌍한...;;

3권 연재 끝입니다.

[골렘마스터]  # 대현자 헤르테미스[1] 4권 시작

대현자 헤르테미스

갑자기 나타난 실피스의 독단으로 제국의 황제인 미스티가

제국 수도인 에리아로 돌아간 후, 그라디우스도 요즘 드래곤

들 사이에서 작은 분란이 조짐이 보인다며 나중에 또 보자는

말을 남긴 채 사라졌다. 이제 아투와 함께 할 수 있는 동료는

천상계 엔젤 화이엘과 키메라 전사 바주크. 그리고 언제나 함

께 하는 존재인 우드 골렘 가이트리아가 전부였다. 조금은 적

은 수의 구성이었지만, 전력 상으론 크게 우려할 정도는 아니

었다. 일단 천상계 존재가 함께 한다는 것이 그러했고, 또 반

재생능력을 지닌 거구의 키메라 전사가 골렘술사인 아투를 보

조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는 훨씬 더 강해진 전력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몇 일 후.

아투는 일행을 잠시 저택에 남겨두고, 저주에서 풀려 완쾌된

아버지와 함께 왕성인 아크로드로 입성했다. 전설의 인물이

라 불려지는 헤르테미스의 거처는 현재 메션 왕국의 국왕인

프리스탄만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헤르테미스를 만나려면 국

왕부터 만나야 하는 게 원래부터 정석이었다.

일단 프리스탄 국왕은 오랜만에 왕성에 얼굴을 보이는 아트

란을 반갑게 맞이했다. 왕국의 총 군사력의 상당량을 차지하

는 아트란 판드리엘 백작. 거인 기사단을 책임지는 기사단장

이기도 한 그는 프리스탄 국왕의 신임을 얻은 사람 중 하나였

다.

게다가 프리스탄 국왕은 흔쾌히 대현자가 사는 거처를 알려

주었다. 자세한 이유도 묻지 않고 그저 아트란에게 가진 믿음

을 바탕으로 말이다. 프리스탄의 곁에서 떠나지 않고 아부를

해대던 문무대신들은 이번을 기회로 하여 아트란이 전권을 장

악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여 크게 반발했지만, 결단력

있는 국왕의 뜻을 꺾을 순 없었다. 게다가 프리스탄 국왕은 장

래가 있어 보이는 뛰어난 골렘술사 아투도 눈여겨봤다. 그 아

버지의 그 아들이라고, 아투 또한 상당한 실력을 지니고 머리

또한 비상한 소년 같았다. 프리스탄은 그 둘 부자를 보고는 앞

으로 왕국의 미래가 밝다고 생각했다. 조금만 시간이 흘러 소

년이 좀 더 성숙해진다면, 자기의 딸인 타나샤 공주와 엮어줘

도 되겠다고 생각한 국왕이었다.

아트란은 일단 대현자의 거처. 즉 그가 생활하는 곳을 알아

낸 뒤에서야 국왕에게 중요한 사실을 전했다. 이미 메션 왕국

의 영토를 수호하는 하급 성물이 파괴되어 하급 마족이 빈번

히 등장할 것이라는 얘기. 또 요즘 갑자기 증가한 마물 또한

그것의 영향이라고 보고하자, 크게 놀란 국왕은 일단 그 사실

을 타국에도 알려야겠다면서 급히 다른 국의 지도자 앞으로

전갈을 보냈다. 그리고 메션 왕국 내부적으로도 자구책을 마

련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트란이 아직 다이티의 야망을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그 사실이 국왕의 귀에 들어가고 대륙

모든 사람들의 전체적 문제로 부각된다면 큰 혼란만이 야기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트란은 아들의 부탁도 있고, 스스로도

생각하는 바도 있어 일단은 말하지 않았지만, 때를 봐서 국왕

폐하께 꼭 말해드려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마지막으로 프리스탄 국왕은 긴급 회의장으로 가기 전, 아트

란과 아투에게 뜻 깊은 물건을 하나씩 하사했다. 아트란에게

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인다면서, 대륙에서 이름을 떨치는

영양식인 허브 허니 한 세트를 내주었고, 그의 아들인 아투에

게는 마법 용품 중 하나인 언리미트 벨트를 내려주었다. 선물

을 받은 아트란과 아투는 크게 기뻐하며 국왕 폐하의 은총에

감사했다.

그리고 프리스탄 국왕과 아트란. 또 알현실에 정돈하여 갈라

서 있던 문무 대신들 중 중요 인물들이 긴급 소집된 회의에 참

석하기 위해 왕성 회의실로 사라졌다. 아투는 국왕 폐하께 하

사 받은 마법 허리띠를 기쁜 마음으로 허리에 두르고는 화이

엘과 바주크가 기다리고 있는 저택으로 향했다.

"아투야. 또 떠나는 거니?"

라일라는 몇 일 머물지도 않고 다시 집을 떠나려하는 아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느새 아들이 이렇게 훌쩍 커버렸을까.

예전에는 그녀의 허리에도 겨우 미치던 아들이, 이제는 그녀

의 머리를 훌쩍 뛰어넘어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왠지 아

들이 점점 멀어지는 것만 같아, 어머니의 입장에 선 라일라의

눈망울이 촉촉해졌다.

"엄마. 이번 일은 어차피 제가 깊이 관여했어요. 지금 와서

나 혼자 몸을 빼낼 수도 없잖아요. 또… 저 스스로도 원하고

있어요. 대륙 사람들 전체의 안전을 위해 싸우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꿈꿔오던 일이니까요."

아투는 눈물을 흘리던 엄마를 애써 외면하며 태연한 척 말했

다. 그러자 눈물을 훔친 라일라도 애써 감정을 조절하며 강해

져 가는 아들에게 힘을 북돋아주었다.

"그래. 아투. 지금처럼 겉으론 평화롭지만, 속은 굉장히 혼란

스러운 이 시점에서… 사람들은 영웅을 원하고 있을 거란다.

난 네가 그 영웅의 길을 걷는다고 생각하겠어. 우리 아들, 나

중에 포기하면 안 되는 거 알지? 한번 마음먹은 것은 꼭 끝을

내야한다. 그 전엔 돌아올 생각도 하지말고."

"엄마……."

엄마의 심정을 이해한 아투는 잠시 그녀의 품에 안기며 무언

의 말을 교환했다. 푸근하고 따스한 엄마의 품속. 정말 오랜만

에 느껴지는 그런 감촉에서 아투는 떨어지고 싶지가 않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하는 작은 욕심까지 생겼다.

"호호호호. 부인.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 알아서 챙겨드리

겠습니다."

아투와 라일라의 보기 좋은 모습에 괜히 질투를 느낀 화이엘

은 과장된 웃음소리와 함께 둘 사이를 껴들었다. 키메라 바주

크는 그냥 놔둘 것이지 왜 그러냐는 식의 눈빛을 건넸지만, 화

이엘은 획 하니 고개를 돌려버렸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일행을 돌아본 아투는 아쉽지만 엄마

의 품에서 떨어지며 인사를 했다.

"자, 엄마. 그럼 저 다녀올게요. 아마 대현자님을 만나 뵙고

나서는, 퓨티아 제국으로 향하게 될 것 같아요."

"그래. 지금 얻은 칭호. 가디언 나이트의 직무를 다하기 위해

선 제국으로 가야겠지. 하지만 아투야."

"네?"

뭔가 중요한 말을 하려 하는 어머니를 보며 아투가 되물었

다.

"한 나라에 속해있다고 생각하면 큰 사람이 될 수 없단다. 넌

이 세상 사람이 되야 하지, 특별히 어떤 왕국을 위한 사람이

되선 안 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니?"

라일라는 따스한 눈빛으로 아들과 눈을 맞췄다. 그녀의 마음

속 모든 감정들이 그 눈빛을 통해 아들에게 전달되는 느낌이

었다. 아투는 깊이 있는 엄마의 눈 속을 들여다보다가 뭔가 깨

닫는 바가 있던 모양인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그럼 저 정말로 가볼게요. 보이지 않는 대륙의 위기가

사라지면, 꼭 엄마한테 효도하러 돌아올 테니 기다리세요."

보이지 않는 대륙의 위기. 다이티의 야망을 상징하는 단어로

그것을 택한 아투는 다시 고개를 꾸벅 숙이며 엄마에게 작별

의 인사를 전했다. 라일라도 이제 더 이상 아들을 붙잡을 수만

은 없다고 생각하며 그대로 아들을 보내주려 했다. 세상이 아

들을 원하고 아들이 세상의 구원을 원하는 이상, 엄마인 입장

으로서 보내줘야만 하는 것이다.

"자, 잠깐! 도련님! 아투 도련님!"

저택에 입구에 서있는 사람들을 보며 급히 문을 박차고 뭔가

를 들고 나온 집사 크런티가 큰 소리로 외쳤다. 다행히 아직

아투가 떠나지 않은 것을 본 그는 재빨리 저택 입구로 달려가

서는 손에 든 무언가를 건넸다.

"이, 이게 뭐예요? 크런티 아저씨."

아투는 분홍색 보따리를 받아들며 눈이 휘둥그래졌다. 뭔가

묵직한 게 만져지는 것이… 여행에 필요한 뭔가 중요한 물건

인 것 같다고 생각한 아투가 눈빛을 빛냈다. 크런티는 아투의

표정이 밝아지는 것을 보고 만족감을 느꼈는지 가슴을 두드리

며 말했다.

"제가 정성껏 만든 도시락입니다. 피로를 들어주는 허브를 삶

아서 속을 채웠으니,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도시락. 아투는 순간적으로 실망감을 느꼈지만, 여행을 떠나

는 자신을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도시락을 쌌을 크런티 아저

씨의 정성을 생각해서 고맙게 받아들였다. 화이엘은 이제 어

느 정도 떠날 준비가 갖춰진 것 같아, 뒤쪽에서 소리쳤다.

"자, 시간을 끌수록 우리가 불리한 입장이 되어버려. 빨리 출

발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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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아~~ 또 여행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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