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렘마스터-104화 (104/244)

[골렘마스터]  # 눈을 떠라, 가엾은 소녀여[1]

눈을 떠라, 가엾은 소녀여.

클라미디 대륙의 북동쪽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 국가

퓨티아 제국. 약간의 북쪽으로 치우친 느낌이 드는 커다란 수

도 에리아는 지금 건국 이래로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

다. 바로 지방과 각 영지에서 몰려든 귀족 연합 세력이 수도

를 지키려는 교황 측의 신관 전사들과 용병들, 그리고 붉은 화

염 기사단과 까마귀들을 상대로 어마어마한 전투를 치르고 있

기 때문이다. 다행히 수도 내부는 미리 선수를 쳐 귀족 세력

쪽에서 시민들을 빼왔기 때문에 먼지만 날리고 있었지만, 항

상 성벽 부근에서는 큰 함성 소리와 칼 부딪히는 소리가 떠나

질 않았다.

그나마 양 세력 측의 군사 피해가 접전을 벌인 회수와 비교

해 비교적 적다 할 수 있는데, 그건 양쪽 모두 큰 싸움을 회피

하는 듯 소극적인 대처를 하고 있어서였다. 귀족 세력은 일단

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줄 미스티 공주가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라고 할 수 있겠지만, 교황 측

의 소극적인 태도는 웬만한 이론으론 설명조차 되지 못했다.

만약 교황과 현재 손을 잡고 있는 마족들이 그에게 힘을 빌려

준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급 마족의 완벽한 힘이 발휘되는

이곳 퓨티아 제국의 땅에서 귀족 세력들은 허수아비 쓰러지

듯 패배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마족은 교황 측의 세력에서 좀

처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간혹 보이는 마족들도 지성을 지니

지 못한 하등한 마물일 뿐이었기에, 귀족 세력의 참모를 맡고

있는 현자와 마법사들은 한편으론 마족이 등장하지 않음에 있

어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일단 전력 상으론 상당한 이득이 됨

을 인식하고 기뻐하였다.

하지만 마족이 지금까지 등장하지 않았다고 해서 계속 그러

리라는 법은 없다. 참모들은 그 점을 깨닫고는 섣불리 군사를

움직여 맹렬히 수도를 공격할 수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질질

끌리는 분위기로 바뀌어가자, 가장 먼저 새로운 의견을 제시

한 사람은 루미니 공작의 부탁에 응해 다시 세상으로 모습을

드러낸 퓨티아의 대마도사이자, 아투의 스승인 실피스였다.

비록 괴팍한 말투로 비꼬듯이 말을 하긴 했지만, 그가 제시한

방법은 아주 간단히 수도를 장악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

게 할 정도로 대단했다.

그의 의견은 이것이었다. 마족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 때문에

인간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그것도 퓨티아 제국의 편에 서줄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엔젤들의 힘을 빌려보자 라는 것. 하

지만 교황 측의 마족들이 움직이지 않는 현 상황에선 엔젤들

도 쉽게 움직일 수 없다는 게 엔젤 나이트의 수장 화이엘의 대

답이었다. 그리고 엔젤들은 항상 중립에 서서 일을 처리한다

고 덧붙여 다른 기대감 또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 날 밤. 화이엘과 엔젤 나이트의 부단장을 맡고 있는 레이

엘을 제외한 모든 엔젤들이 퓨티아 제국의 영토에서 돌연 모

습을 감췄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된 귀족 세력들은 섭섭함

을 감추지 못했지만, 대놓고 엔젤에게 따질 처지도 되지 못했

다. 어쨌든 이번 수도의 쟁탈을 위한 싸움의 끝은 뻔히 보였

다. 수도에 발이 묶여 고립되어 있는, 다른 세력과의 접촉도

없고 수도 내부의 세력이 전부인 교황으로서는 시간만을 벌

수 있을 뿐, 싸움의 결말은 바꾸지 못한다는 게 참모 대부분

의 의견이었다. 물론 마족의 개입 여부를 완전히 부정한다는

전제 하에서의 얘기일 뿐이지만.

*  *  *

이미 해가 중천이다. 맑은 햇살이 천장에 뚫려있는 작은 환

기 구멍을 통해 쏟아졌다. 그리고 그 맑은 햇살보다 더욱 찬란

히 빛나는 얼굴을 가진 소녀가 작은 막사 안에 설치된 간이 침

대에 누워 있었다. 얼굴빛이 창백한 걸로 봐서는 어딘가 몸이

좋지 않거나, 선천적으로 백옥 같은 피부를 타고 난 것 같았지

만 아름답다는 사실에는 변함을 주지 못하였다.

그 소녀를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는 소년 또한 막사 안에 작

은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있었다. 소년의 왼쪽에는 납작한

대야에 물이 가득했고, 대야 안에는 흰색 수건이 여러 장 잠

겨 있었다. 막 대야에 잠긴 수건 하나를 손에 쥔 소년이 정성

껏 수건을 접어 침대에 누워있는 소녀의 이마에 올려놓았다.

"미스티…."

아투는 죽은 듯이 고요하게 누워있는 미스티를 바라보며 잠

시 말이 없었다. 미스티의 곁에 머물며 밤새 그녀를 간호한

듯, 그의 눈동자가 불그스름하게 보였다.

사실 아투도 몇 일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녀 못지 않

게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물론 기억까지 봉인 당한 그녀보

다야 심하지 않을 테지만, 어쨌든 교황의 음모를 듣고 난 이

상, 게다가 마왕이라는 위대한 존재와 엔젤이라는 고귀한 존

재와 대면한 이상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할 지도

모른다. 심하게 충격을 받은 미스티는 결국 정신을 차리지 못

하고 지금까지 누워 있었고, 아투도 거의 망연자실하여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간호에만 열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여기 있었군."

아투가 미스티의 이마에 얹혀진 물수건을 잠시 뒤집고 있는

데, 막사의 입구를 가리고 있는 장막이 걷히며 밝은 빛이 쏟아

져 들어왔다. 비교적 어두운 곳에만 머물던 아투가 눈살을 찌

푸리며 뒤로 고개를 돌렸고, 곧 정신을 번쩍 나게 하는 존재

를 확인하고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엔젤님."

"역시 이럴 것 같아서 처음부터 정체를 밝히지 않았었는데,

결국은 사이가 멀어져 버렸네."

화이엘, 바로 그녀였다. 지금은 날개를 감추고 평소의 명랑하

고 쾌활한 외모를 하고 있었지만, 이미 드러난 코발트빛의 차

가운 눈빛마저 감춰지진 않은 모양이다. 아투는 그녀의 눈동

자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속마음을 읽히는 느낌 같은 걸

받고는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미안. 허락도 받지 않고 아투의 마음을 들여다봐서."

그녀가 약간은 거리감이 느껴지는 말투로 사과했다.

"괜찮습니다. 엔젤님. 엔젤님을 만난 것 자체가 저에게는 축

복입니다."

아투가 언제부터 신을 숭배하는 존재가 되었을까. 평소에는

입에도 담지 않을 신자 같은 말을 내뱉으며 형식적으로 대답

했다. 평소처럼 편하게 대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을 보는 화이

엘의 얼굴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괴로움이 떠올랐다.

"미스티는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거야?"

화이엘은 아투의 태도를 돌리는 것을 일단 보류하고 간이 침

대로 다가서며 물었다. 그러자 아투가 딱딱한 태도로 시선을

딴 곳으로 옮기며 입을 들썩였다.

"그렇습니다. 충격이 컸던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비록 기억을 되찾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기

아버지가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어떻게 충격을 받지 않겠어?"

"저기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어색한 대화를 나누던 도중, 아투가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

고 말꼬리를 흐렸다. 뭔가 부탁을 하려는 듯한 그의 태도를 읽

고 화이엘은 밝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 아투. 그냥 평소처럼 나를 대해주면 안 될까? 평소

우리 사이라면 부탁을 하려해도 쉽게 말할 수 있잖아."

"그렇긴 하지만, 어떻게 감히 인간이 엔젤님과 그런 사이가

될 수 있겠습니까?"

"글세…. 그건 세상 존재들의 머리 속에 틀어박힌 고정관념

에 지나지 않을까 싶은데."

화이엘은 아투의 그런 형식적인 태도에 잠깐 씁쓸하게 웃어

넘기더니, 이내 그가 흐린 말을 되물었다.

"그래. 뭐 어쨌든 나에게 뭐 부탁하려던 거 아니었어?"

"사실은 교황이 미스티의 기억을 봉인한 것 때문에……."

"그러니까 아투가 하려고 한 말은 미스티의 기억 봉인을 어떻

게 좀 풀어줄 수 없냐는 거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빙빙 돌려 말하던 아투는 시원스럽

게 정리를 해버리는 그녀를 보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

치 어린 아이처럼 과장된 동작을 보이는 아투 때문인지 화이

엘은 얼굴에 밝은 미소를 띄더니, 이내 장난스럽게 말하였다.

"이걸 어쩌지. 교황이 신의 힘을 직접 빌려서 행한 일은 엔젤

이라도 할 수 없는데."

"그, 그럴 수가. 그렇다면 미스티의 기억은 어떻게 되는 겁니

까? 교황이 직접 나서서 풀지 않는다면 영영 기억을 잃은 상태

로 살아야 합니까?"

화이엘은 그저 장난을 한번 걸어볼 생각으로 짓궂게 답한 것

뿐인데, 아투는 또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얼굴이 어두워

졌다. 워낙 반응이 진지해서 되려 당황한 화이엘은 장난스럽

게 짓던 미소를 지우고는 상황을 수습했다.

"아투. 그냥 장난 한번 쳐본 거야. 교황이 할 수 있는 일을 나

엔젤이 해결 못 하겠어? 사실은… 이미 내가 엔젤임이 밝혀지

는 그 순간에 미스티의 기억을 봉인하고 있는 힘을 해제시켰

어. 그래서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거야."

"그, 그게 무슨 말씀인지 저는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으구. 잘 생각해봐. 이제 기억을 되찾을 수 있는 모든 조건

이 갖춰졌어. 그녀의 정신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교황의 신성

력은 이미 사라졌다는 말이야. 하지만 지금까지 미스티가 정

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건, 그녀의 과거 기억과 현재의 기억

이 충돌을 일으켜서 그래. 과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자아확

립이 되지 않고 혼란을 겪고 있는 셈이지."

---

룰루~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