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듣는 회사원-223화 (223/223)

<기억을 듣는 회사원 223화>

224. 이렇게 든든한 사람들이 옆에 있는데

7년 후.

푸른 잔디가 깔린 한강 공원.

시원한 강바람이 내 얼굴을 스쳐 갔다. 차가운 에어컨 바람에 익숙해져서인지, 오늘따라 이 바람이 너무도 좋았다.

공원 곳곳에서 들려오는 행복한 웅성거림.

손끝으로 전해지는 잔디의 포근한 촉감과 그 안에 담긴 수많은 사람의 행복한 기억들.

내 입가에 미소가 번져 갔다.

모든 것이 좋았다.

부족한 것 없이 모두가 좋았다.

“엄마! 엄마! 밥! 바압!”

“유빈이 또 배고파?”

“우웅!”

사랑스러운 우리 딸 원유빈.

요즘 들어 요리 실력이 부쩍 좋아진 아내 지영이.

잔디 위에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머리를 양 갈래로 딴 유빈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 무릎에 앉았다.

“유빈아, 너는 왜 맨날 아빠 무릎에 앉아?”

“여기가 좋아요.”

나를 걱정하는 지영이의 질문에 유빈이는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아빠 피곤하시잖아. 그냥 내려와서 먹자.”

“시러!”

유빈이는 입술을 삐쭉 내밀며 고개를 한쪽으로 틀었다.

엄마와 똑 닮은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나는 씩 웃으며, 내 무릎에 앉아 콧노래를 부르는 아이를 끌어안았다.

“그냥 둬. 유빈이가 좋다잖아.”

“자꾸 그러면 애 버릇 나빠진다고.”

“아직 어린데, 뭐.”

“힘들지도 않아? 어제는 도대체 몇 시에 들어온 거야?”

“2시였나?”

“미쳤다. 미쳤어. 진짜 순천까지 갔다 온 거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 지영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준비한 유부초밥을 입 안에 넣었다.

“응.”

“정 이사는?”

“같이 갔다 왔지. 오랜만에 장거리 운전도 하고 재미있었어.”

“운전도 했어?”

“정 이사님 혼자 힘들잖아. 반반 나눠서 운전했어.”

“내가 진짜 못 산다. 못 살아.”

금요일 오전.

순천 블루베리 농장에 사고가 생겼었다.

정진택 이사는 별일 아니라고 둘러댔지만, 회색 곰팡이병으로 모든 과실을 폐기해야 한다는 그의 기억을 들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정진택 이사와 함께 농장으로 내려가 피해 사항을 직접 확인하고, 인근의 농장들과의 새로운 계약을 맺어 왔다.

“뭐가?”

“세상에 어떤 대표가 그렇게까지 해? 그것도 회사 근처도 아니라 순천까지 내려가서.”

“왜? 난 좋던데?”

“그리고 순천이면 그냥 비행기를 타지, 왜 차를 끌고 간 거야?”

“오는 길에 광주랑 세종, 마트도 둘러볼 겸 해서.”

내 말에, 지영이는 양손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후…… 내가 졌다. 졌어. 원지훈이 고집을 누가 이겨.”

“맞아. 누가 이기겠어.”

나는 씩 웃으며, 김밥을 손으로 잡았다.

그러자 그녀는 내 손등을 살짝 내려치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젓가락 쓰라고!”

“알았어. 어휴 아파라.”

내가 미간을 구기자,

무릎에 앉아 있던 유빈이가 내 손을 잡고, 호 불어 줬다.

고사리 같은 그 손이 얼마나 귀엽던지.

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환하게 웃었다.

“와. 우리 유빈이 덕분에 하나도 안 아프네.”

그렇게 아이와 내 모습을 보던 지영이도 고개를 돌려 피식 웃었다.

그녀는 결혼하고 6개월 만에 대표이사직을 내려놓았다.

덕분에 내가 대표이사로 선임됐고, 그해 여름, 우리가 목표하던 국내 최고 커머스라는 타이틀을 따냈다.

하지만 우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동안 꿈만 꾸던 기획들을 하나씩 현실로 만들어갔다.

그렇게 공략한 동남아 시장.

베트남에 모바일 전용 커머스를 오픈해 알바오와 아마존을 따라잡겠다는 큰 목표를 세웠다. 한국처럼 새벽 배송을 할 수는 없었지만, 먹어 본 제품만 판매하겠다는 신념은 그곳에서도 똑같이 통했다.

* * *

월요일 오전.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내가 일어나는 소리에 눈을 게슴츠레 뜬 지영이는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몇 시야.”

“5시. 더 자.”

“벌써 나가려고?”

“응. 그냥 일찍 눈이 떠졌네.”

“더 자고 천천히 나가지.”

“그냥 잠이 안 와서.”

지영이는 눈을 비비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토스트랑 주스 갈아 줄 테니까, 간단하게라도 먹고 가.”

“괜찮아. 피곤할 텐데 더 자.”

“그냥 먹으라면 먹어. 그렇게 가면 내가 미안하단 말이야.”

지영이는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을 챙겨 줬다.

무려 7년이라는 시간을…….

사실, 그녀의 기억을 들은 나는 그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현장을 좋아하는 내가 자신을 대신해 대표직을 맡은 것을 미안해한다는 것을.

하지만 괜찮다.

대표이사로 취임하고도 내 생활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 * *

식사를 마치고 도착한 회사.

텅 빈 주차장에 주차하고 올라가려는 순간,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안녕하십니까!”

우렁찬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군기가 바짝 든 20대의 남자.

우리 직원이었나?

처음 보는 얼굴이다.

나는 그의 목에 걸린 사원증을 보고서야 이번에 새로 들어온 인턴임을 알았다.

“정호남 씨? 일찍 출근했네요.”

“네.”

“MD 사업부는 어때요?”

“좋습니다.”

“에이, 거짓말하지 말고. 거기 마성근 부장님 히스테리가 그렇게 심하다면서요?”

“아닙니다!”

“정말요?”

“네. 한 번도 싫은 소리 안 하셨습니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소리치는 남자.

나는 그의 어깨를 한 손으로 감싸며,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듣게 된 기억.

<천유 레토르트들은 5퍼센트만 다운시키면 재고 털 수 있을 것 같은데.>

<파히타와 타코 매출이 올랐는데, 왜 특판에 넣지 않을까?>

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유 공장 설비들 상태가 좋지 못해요. 단가를 다운시키면, 물량을 맞추지 못할 거예요. 다음 분기에 천유 쪽 일부 설비를 우리가 투자하기로 했으니까 그때까지만 조금 기다려 보죠.”

“……네?”

깜짝 놀란 표정의 인턴사원.

나는 열린 엘리베이터 문을 가리키며 안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그리고 하나 더. 파히타와 타코는 아직 대중적이지 못해요. 본인이 그걸 좋아한다고 다른 사람도 좋아할 거라는 생각은 금물입니다.”

“그…… 그런가요?”

“네. 필요하면 도재문 차장한테 얘기해 둘 테니까 데이터들 받아 봐요.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도대체 고개를 몇 번이나 숙이는 건지.

나는 그를 일으켜 세우며 어색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그만. 그러다 허리 부러지겠네요.”

“아…… 아닙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나는 인턴에게 내려도 된다는 손짓을 했다. 그러자 그는 가방에 있는 책 한 권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저…… 죄송하지만 이거.”

“네?”

고개를 숙여 그가 내민 책을 봤다.

보라색 표지에 내 얼굴이 큼지막하게 그려진 책.

아버님의 권유로 억지로 쓴 내 책이다.

“실례가 아니라면, 회장님 사인을 받고 싶습니다.”

“후…….”

“회장님 책은 100번도 넘게 봤습니다. 그리고 꼭 마켓 프레시의 MD가 되고 싶었습니다.”

나는 마지못해, 그가 내민 책과 펜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 책에서 들려오는 기억들로 그가 정말 이 책을 많이 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최구열 이사의 자서전을 보고 MD가 된 것처럼.

나는 미소를 지으며 안쪽에 사인한 책을 그에게 건넸다.

* * *

23층.

복도를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나를 보고 고개를 숙이며 환하게 웃었다.

“회장님은 오늘도 일찍 나오셨어요?”

“그래도 여사님보다는 늦었네요.”

“에이. 회장님이랑 저를 어떻게 비교해요?”

손을 허공에 휘휘 저으며 웃어 보이는 아주머니.

가끔 자신의 돈으로 산 녹즙을 내 책상 위에 몰래 올려놓고 가는 좋은 분이다.

“다 똑같죠.”

“하여간 회장님도 참…… 책상 위에 녹즙 올려놨으니까 꼭 드시고 일하세요.”

“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생각보다 선선한 사무실.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미리 에어컨을 틀어 놓으셨나 보다.

나는 그녀가 책상 위에 올려 둔 녹즙을 뜯어 컵에 따르고, 노트북의 전원을 켰다.

오전 11시 임원 회의.

“이번 시즌 키워드는 모던 앤 클래식입니다. 작년의 발랄했던 분위기와 다르게 이번엔 좀 더 차분한 색상이 인기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미 유명 제조사들은 겨울에도 똑같은 체크 패턴이 유행할 것으로 판단하고 제품을 생산하고 있으며, 저희 PB를 생산하는 공장에도 유사한 패턴을 주문해 놨습니다.”

그렇게 패션 카테고리 오하나 부장의 발표가 끝났다.

곧바로 뷰티, 식품, 해외사업부, 특판 사업부 등의 발표가 이어졌고, 길었던 회의가 그렇게 끝이 났다.

모두가 제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지금.

우린 언제나 다른 커머스들에 비해 앞서는 것이 당연했다.

내가 회의실 밖으로 나오자, 김명진 이사가 내 옆으로 바짝 붙었다.

“회장님.”

“그 회장이라는 소리 좀 그만하면 안 돼?”

“왜요?”

“너무 나이 들어 보이잖아.”

“그럼 뭐라고 해요? 그냥 형이라고 부를까요?”

“맘대로 해. 근데 무슨 일 있어?”

“아까 회의 중에는 말씀 못 드렸는데, 핫딜 쪽 대규모 인력 충원이 있답니다.”

“그래?”

“네. 아무래도 김동연 이사가 직접 베트남 쪽을 공략할 모양입니다.”

국내 최고의 커머스에서 두 번째로 밀려난 핫딜.

그들은 우리를 넘어서기 위해 쉬지 않고 도전했다.

배달 앱과 제휴를 맺어 3시간 배송을 만들어 냈고, 더 좋은 식품을 찾기 위해 우리처럼 전국을 돌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우리가 기반을 다져 둔 동남아 시장까지 넘보는 것이다.

“김동연 이사가 직접?”

“네. 한종우 이사가 투자자들을 찾는다는 소문은 기억나시죠?”

“응.”

“아마 6개월 이내에 정식 발표를 할 분위기입니다.”

“그래? 이거 재미있겠는데?”

내 말에, 김명진 이사는 뒤로 물러나며 미간을 좁혔다.

“이게 재미있습니까?”

“왜? 재미있잖아. 명진 이사는 재미없어?”

“네. 하나도 재미없습니다. 우리가 베트남 진출할 때 다들 뭐라고 했습니까? 미친 짓이라고 했잖아요.”

“맞아. 당신들이 그 미친 짓을 성공으로 만들었잖아.”

“핫딜 애들이 보도 자료 뿌렸던 거 기억 안 나십니까? 국내 소비자에게 소홀한 마프라고 뿌렸던 놈들입니다!”

왜 기억이 안 나겠는가?

그때 김명진 이사와 박대영 부장이 달려가서 언론사를 뒤집어 놨는데.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기억나지. 그때 신문사에 손해 배상해 준 돈이 꽤 됐지 아마?”

“그건 또 왜 기억하십니까?”

“장난이야. 장난. 아 그리고, 태하 이사한테는 알려 줬어?”

“네. 어제 전달했습니다.”

동남아 사업의 메인인 김태하 이사.

국내는 좁다며 동남아 시장을 공략하자는 것은 그의 아이디어였다. 그리고 현재는 베트남과 태국, 싱가포르의 커머스를 총괄하고 있다.

임기응변이 능한 그라면 핫딜의 도전을 잘 막아 낼 것이다.

“배고프다. 명진 이사 점심 약속 있어?”

“아니요.”

“그럼. 밥이나 먹으러 가자. 감자탕집 새로 오픈했는데, 거기 국물이 죽여.”

“회장님은 걱정 안 되세요?”

앞으로 우리에게 도전하는 커머스는 많을 것이다.

이번에는 핫딜이지만 다음에는 누가 도전을 할지 모르는 법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우린 최선을 다해 맞서 줄 것이다.

왜 마켓 프레시가 최고의 커머스라는 소리를 듣는지를 직접 느끼게 해 줄 것이다.

나는 씩 웃으며, 김명진 부장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내가 왜? 이렇게 든든한 사람들이 옆에 있는데.”

(기억을 듣는 회사원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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