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219화>
220. 한 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기회
사람이 없는 작은 카페.
낡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이현아 대표와의 약속 시간이 1시간이나 지난 지금.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겁을 먹은 것인가?
하긴 그럴 만도 하다. 기업 사냥꾼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그녀는 평소와 달리 차가운 내 전화 목소리에 놀랐을 수도 있다.
순진한 그녀는 이런 일과는 맞지 않는 사람이니까.
나는 피식 웃고 남은 커피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표정이 거의 없는 이현아 대표가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예상외인데?”
몰라보게 달라진 그녀.
뒤에 따라온 수행 비서가 아니었다면 몰랐을 것이다.
평소 즐겨 입던 요란한 옷 대신 차분한 정장을 입었고, 짧았던 머리를 길러 단정하게 뒤로 묶었다. 색조가 많이 들어간 화장을 하지도 않았으며, 덕지덕지 큐빅을 붙였던 손톱도 단정하게 자른 상태였다.
“뭐가?”
“원 이사님이 날 1시간이나 기다려 주고. 내가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었나?”
“원 이사님?”
그녀는 평소 날 오빠라 불렀다.
뭔가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그녀의 말투에 나도 모르게 적응했었나 보다.
“…….”
“앉아.”
이현아 대표는 자리에 앉으며 손가락을 까딱했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그녀의 수행 비서가 커피를 주문해 왔다.
수행 비서를 저렇게 부리는 것.
그녀의 할머니인 김선녀 여사에게 자주 봤던 모습이다.
나는 씁쓸한 표정을 한 채로 그녀를 응시했다.
“많이 변했구나.”
“먹고 살려면 변해야지.”
“…….”
“시간 없으니까 최대한 짧게 해 줬으면 좋겠어.”
차가운 목소리의 이현아 대표.
오빠라 부르며 치근덕거리던 예전의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나는 180도 변한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 상의 안주머니에 있는 종이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차가운 표정을 하고 물었다.
“네 작품인가?”
이현아 대표는 내가 내민 종이를 펼쳐 보고, 입꼬리 한쪽을 살짝 올리며 답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최두영 이사는 이 정도 물량을 사들일 자본이 없어.”
“그래? 그럼 뭐 날 의심할 만도 하네.”
“…….”
“그런데 어쩌지? 난 아니야.”
종이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이현아 대표.
나는 그녀가 조금 전까지 쥐었던 종이를 다시 움켜잡았다.
<……늦었어…….>
앞뒤가 잘린 기억.
내가 내민 종이를 보기 전부터 이미 무언가를 생각했었기에 기억의 일부만 들려온 것이다.
늦었다라…….
정말 최두영 이사의 뒤에 이현아 대표가 있는 것인가?
그녀의 자본으로 이 모든 일이 벌어졌다는 말인가?
“정말 아니야?”
“아니야.”
“만약 네가 조금이라도 연관되어 있다면 크게 다칠 수도 있어.”
“그건, 이길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
“그럼 한번 해 봐.”
그녀는 내 눈을 피하며 답했다.
속도 많이 변했구나.
속을 읽을 수 없는 눈빛을 가진 계산적인 사업가로.
김선녀 여사와 똑 닮은 기업사냥꾼으로.
내가 알던 이현아 대표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할머니와 달리,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남몰래 보육원에 나가 봉사를 했고, 자신의 수익 일부를 어린이 단체에 기부하기도 했었다.
그랬던 그녀가 참 기특했는데…….
할머니와 다르게 정직하게 일하려던 그녀가 참 보기 좋았는데…….
무엇이 이렇게 변하게 하였을까?
나는 점점 멀어지는 그녀의 등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 * *
늦은 오후 사무실.
한번 해 보라는 이현아 대표의 목소리와 표정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늦었어`라는 잘린 기억은 뭘까?
정말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자본으로 시작된 일일까?
내가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내 방의 문이 열리고 차분한 표정의 최구열 이사가 들어왔다.
“원 이사님.”
“네.”
“아무래도 저는 다음 주에 항저우로 넘어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마성근 차장과 함께 가려고 하는데 괜찮겠죠?”
“네. 마 차장에게 전달해 놓겠습니다.”
“그래요. 벤더나 제조사들은 만나 보셨습니까?”
만났던 규모가 큰 밴더들과 제조사들은 평소와 같았다. 특별히 제품의 생산이나 사입 물량을 늘리는 곳은 한 곳도 없었다.
“네. 다들 똑같더군요.”
“흠……. 그거 이상하군요. 알바오에 들어가려면 지금쯤은 제품을 수급해야 할 텐데……. 아 참, 이현아 대표는 만나 보셨나요?”
“네.”
“어떻던가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최구열 이사는 내 말을 듣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쉽게 인정하지 않겠죠. 인정하면 다른 투자자들이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요.”
“다른 투자자요?”
“네.”
회의 테이블 앞 의자에 앉는 최구열 이사.
그는 내게 맞은편에 앉으라는 손짓을 하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현재 김선녀 여사 쪽 현금은 모두 디몰에 묶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많은 제품을 사들일 현금은 어디서 융통했을까요?”
“…….”
“다른 자본가들입니다. 알바오에 제품을 넣는다는 것은 성공이 보장되지만, 막강한 자본력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사업입니다.”
그의 말이 맞다.
알바오의 정산주기는 2개월.
사입할 돈이 없다면 절대 시작도 할 수 없는 사업이다.
또한, 아무리 빨리 제품들을 사들여도 1개월 이상이 걸리기에, 최소 3개월 정도는 돈이 묶여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다.
김선녀 여사가 직접 앞에 나서면 더 많은 자본가가 따랐을 텐데, 왜 최두영을 앞세운 것일까?
“그렇다면 왜 김선녀 여사 자신이 직접 안 나서고, 최두영을 세운 걸까요?”
“할머니는 움직이지 못해도, 최두영은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네?”
“김선녀 회장을 믿는 자본가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이현아 대표는 어떤가요? 누가 그녀를 김선녀 회장의 후계자로 생각하던가요? 이현아 대표는 자신보다 더 인지도가 높은 인물이 필요했을 겁니다. 투자자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인물이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최두영 이사는 이미…….”
내가 말을 하려 하자, 최구열 이사는 한 손을 올려 내 말을 끊어 냈다.
“네. 망가졌죠. 그것도 아주 심하게 망가졌죠. 그래도 최두영입니다. 많은 커머스 사업들을 성공한 최두영입니다. 투자자의 입장에서 할머니를 대신해서 나선 철부지 스무 살 아가씨와 산전수전 다 겪은 최두영. 누가 더 매력적일까요?”
“……!”
“이번 사업은 불안요소가 많습니다. 우리가 가만있지 않을 것도 뻔하고, 꽌시를 중요하게 여기는 알바오 담당자도 쉽게 믿음이 가지 않았을 겁니다. 그 모든 것을 한 방에 해결해 주는 사람은 최두영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이현아 대표밖에 없습니다.”
역시 그녀인가?
오전에 잠깐 들었던 그녀의 기억과 최구열 이사가 설명하는 정황들이 모두 맞아떨어진다.
하지만 믿고 싶지 않다.
순진하고 착한 그녀가 이 모든 일을 꾸몄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자, 최구열 이사는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을 이었다.
“원 이사님이 이현아 대표와 꽤 친했다고 들었습니다.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사람은 누구나 변하기 마련이니까요.”
“…….”
“이사님이 왜 최두영의 뒤를 찾는지 잘 압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 졌습니다. 누가 시작했는지보다는 어떻게 막아 낼지에 집중하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내가 이 싸움의 시작을 찾으려는 이유는 하나다.
시작한 사람을 찾아, 길어질지도 모르는 싸움을 빨리 끝내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사님.”
내 말에 최구열 이사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내일, 미국에서 로펌이 넘어올 겁니다. 원 이사님이 만나서 현재 상황을 좀 설명해 주셨으면 하는데, 괜찮을까요?”
“……네. 그렇게 하죠.”
* * *
며칠 후.
우린 차분히 소송을 준비했다.
미국에서 넘어온 로펌은 100% 승소할 것이라 자신감을 보였고, 최구열 이사가 중국의 알바오 본사에 넘어가 직접 경고까지 했다.
그리고 난 최두영 이사에게 수차례 전화를 했지만, 그는 나를 만나주지 않았다. 기억을 듣기 위해 그의 손을 거친 물건들까지 살폈지만, 이 싸움의 자본을 댄 인물을 알아낼 수는 없었다.
자본금만 틀어막으면 모든 것을 쉽게 막을 수 있을 텐데…….
누굴까?
정말 이현아 대표일까?
최두영 이사를 만나서 약간만 떠보면 바로 알 수 있을 텐데…….
지이잉. 지이잉.
책상 위 울려 둔 휴대전화의 진동이 울렸다.
“네. 부장님.”
- 저……. 이사님. 신제품 출시를 좀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덕산의 송민호 부장.
이번에 새롭게 출시할 친환경 채소 스낵은 그가 지난 6개월 동안 심혈을 기울인 걸작이다. 그리고 준비도 다 끝났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 있나요?”
- 이번에 마늘 값이 너무 올라서요. 이대로 생산 들어가면 소비자가를 올려야 할 지경입니다.
“그래요? 잠시만요.”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우리가 보유한 신선식품의 재고를 확인했다.
그리고 마늘이 생각보다 적은 것을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재고 확인해 봤는데, 저희도 마늘이 많지는 않군요.”
- 네. 그러겠죠. 바론이 이번 분기에 갈릭 베이컨 엄청나게 찍는다고 했으니, 마프도 수급이 어려울 겁니다.
갈릭 베이컨은 바론의 오래된 스낵 브랜드.
예전에는 인기가 많았으나 지금은 마트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제품이다.
“갈릭 베이컨이요? 그거 아직도 팔아요?”
- 잘 안 팔죠.
“근데 왜, 그 제품을 더 찍는데요?”
- 출시 15주년 기념이라나 뭐라나……. 하여간 그거 수요도 뻔한데, 뭘 그렇게 찍어 내는지 이해가 안 가더라고요. 의성 마늘만 미친 듯이 사들이는데, 아주 씨가 마를 정도입니다.”
“우리가 계약한 생산자는요?”
- 위약금까지 주면서 계약을 파기했습니다. 스낵에 마늘을 넣어 봤자 얼마나 넣는다고 그렇게 사들이는지…….
잠깐.
송민호 부장의 말이 맞다.
스낵에 들어가는 마늘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올해는 마늘의 생산량이 유난히 많았다. 한마디로 굳이 사들이지 않아도 충분히 목표한 생산량을 맞출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바론이 마늘을 사들였을까?
그것도 가장 비싼 의성 마늘을.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새로운 한국적인 레토르트의 생산.
그래서 마늘을 평소보다 더 많은 양을 사들인 것이다.
알바오에 판매하기 위해서.
바론의 지인과 접촉한 김재열 이사는 분명 최두영 이사와 바론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졌다고 했는데…….
그래서 이를 의심하지 않았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바론쪽 사람을 함께 만나볼걸.
나는 통화를 마치고, 재빨리 김재열 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사님!”
- 응. 지훈아.
“그전에 바론 재무팀장을 만났다고 하셨죠?”
- 나도 의심해 봤는데, 거긴 아니야. 바론은 알바오랑 거래 못하잖아.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몇 년 전, 바론은 홍콩의 인기 스낵을 그대로 베껴서 만들었다. 이는 법정 분쟁으로 이어졌고, 현재도 재판 진행 중인 것으로 안다.
“만약 다른 브랜드라면요?”
- 바론이 다른 법인을 세워서 알바오에 판매한다고?
“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 에이 설마. 강석호 회장이 어떤 사람인데. 지금도 재판하면서 알바오라면 이를 가는데.
“그래서 최두영을 세웠겠죠. 가장 버리기 쉽고, 버려도 탈이 나지 않을 카드니까.”
- 설마……. 아니야. 아닐 거야. 강 회장이 최두영을 얼마나 싫어하는데? 그냥 네 희망 사항 아니야?
“아니요. 맞을 겁니다.”
만약 최두영 이사의 뒤에 강 회장이 뒤에 있다면 이는 얘기가 쉬워진다.
알바오도 현재 소송 중인 바론을 곱게 보지 않으니까.
이건 기회다.
한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기회.
나는 전화를 끊고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