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듣는 회사원-218화 (218/223)

<기억을 듣는 회사원 218화>

219. 다음 그림도 그려 놨을 겁니다

월요일 오전.

고개를 푹 떨군 채로 내 방문을 여는 마성근 차장.

표정이 좋지 못했다.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있었고, 평소 팽팽함을 유지하던 멜빵끈도 느슨해져 있었다.

“저…… 알바오에서…….”

마성근 차장은 말을 잇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내밀었다.

그리고 나는 종이의 내용을 보기도 전에 모든 사실을 파악했다. 출력한 종이에서 쉴 새 없이 들려오는 그의 기억으로.

<알바오가 한국에 법인을?>

<그 전에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내 잘못이야. 미리 알고 보고했어야 했어.>

<저번에 큰 소리를 낸 것 때문에 이러는 걸까? 참을걸. 그냥 참을걸.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큰일도 아니었는데…….>

<바보 같은 놈. 차장 달고 신나서 그랬던 거잖아. 이 바보, 등신, 머저리.>

<지금이라도 사과해 볼까?>

심하게 자책하는 마성근 차장.

나는 그를 안쓰러운 표정으로 보다 고개를 숙여 종이를 확인했다.

알바오에서 보낸 내용 증명의 내용은 정말 이가 갈릴 정도였다. 우리가 제조사들을 설득해 공급가를 속이고 알바오에게 줘야 할 수익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손해 배상 요구액만 무려 200억.

그리고 가장 밑에 적혀 있는 법인명과 대표자 이름은 바로…….

최두영 이사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은 분명 그의 머릿속에서 나왔을 것이다.

더군다나 알바오의 몇몇은 우리와 거래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들의 약점을 쥐고 시작한 일이었으니까.

내 실수다.

알바오의 담당자를 교체하고 진행했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안일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걸이에 걸린 상의를 걸쳐 입었다.

“일단 대표님께 보고 드리겠습니다.”

“…….”

“차장님은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자리로 돌아가 계세요.”

“죄송합니다. 저 때문입니다. 제가 평소에…….”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떨구는 마성근 차장.

나는 그의 양쪽 어깨를 잡아 고개를 들도록 했다. 그리고 초점을 잃은 그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요. 차장님은 잘못한 것 없습니다.”

“…….”

“약한 모습 보이지 마세요. 차장님을 따르는 팀원들이 주눅이 들지 않도록 당당하게 행동하셔야 합니다.”

“…….”

“하실 수 있죠?”

“……네.”

그제야 마성근 차장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책임자가 흔들리면, 그를 따르는 팀원들도 흔들릴 수밖에 없는 법.

무조건 죄송하다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태도는 옳지 못하다.

나는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다.

* * *

대표이사실.

공문을 확인한 김지영 대표는 곧바로 최구열 이사를 불러들였다.

그렇게 1시간 정도가 지나.

니트와 청바지 차림의 그가 대표이사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떻게 된 겁니까?”

“알바오가 최두영을 대표로 세운 데이홀딩스라는 법인을 만들었습니다. 아마도, 최두영이가 알바오에 제안한 것 같습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현재 상황을 설명하는 유화성 이사.

최구열 이사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내용은 뭡니까?”

“그동안 우리가 제조사들과 결탁해 비싼 금액으로 제품을 공급했으며, 이에 손해 배상을 요구하겠다는 내용입니다.”

“얼마를 요구합니까?”

“200억입니다.”

“하…… 해도 해도 너무하는군요. 계약을 파기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싸움까지 걸어오다니…….”

“어차피 재판을 걸어와도 그들이 이길 확률은 낮습니다. 우리가 제조사들과 결탁하지 않았다는 증거들이 차고 넘치니까요. 제 생각에는 알바오가 계약 파기를 위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 이번 소송을 준비하는 것 같습니다.”

“유화성 이사님. 그 말,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

무서운 표정으로 묻는 최구열 이사.

유화성 이사는 그의 기세에 눌려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법무 법인은 어딥니까?”

“창연입니다.”

“창연? 그런데도 그런 말이 나옵니까?”

최구열 이사의 말이 맞다.

알바오에서 창연을 고용했다면, 이는 이기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국내에서 가장 큰 로펌 창연.

정치인이나 대기업 총수를 주요 고객으로 둔 그들은 무패라 불리는 정도로 막강한 조직이었다.

최구열 이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앞에 놓은 다 식은 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대표님.”

“네.”

“우리 쪽 로펌은 제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미국의 로펌을 데려와야 할 것 같습니다. 국내에서 창연을 상대할 만한 곳은 없습니다.”

“……!”

“이대로 두면 아마존도 똑같아질 수 있습니다. 비용이 얼마가 들건 반드시 그들을 응징해야 합니다.”

“원 이사님 생각은 어떠세요?”

김지영 대표는 고개를 돌려, 내게 물었다.

나는 그녀와 최구열 이사를 번갈아 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

“저도 최 이사님과 생각이 같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지영 대표는 내 얘기를 듣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하다, 결심했는지 최구열 이사에게 말했다.

“좋아요. 해 보죠. 최 이사님, 당분간 회사에 나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그러겠습니다.”

“원 이사님은 제조사들을 좀 확인해 주세요. 최두영이 알바오에 제안한 것이라면, 다음 그림도 그려놨을 겁니다.”

김지영 대표의 말이 맞다.

알바오는 우리와의 거래로 꽤 많은 이익을 얻었다. 욕심 많은 그들이 K푸드, K뷰티와 같은 상품을 절대 포기할 리 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네. 알겠습니다.”

“유 이사님은 남양주 마트에 더 집중해 주세요. 혹시나 이번 일 때문에 일정이 늦어지면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긴급회의가 끝나고.

이사들이 모두 나가자, 김지영 대표는 밖으로 나가려는 내 팔을 잡았다.

“지훈아.”

“응?”

“이건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뭔데?”

“……우리 결혼 말이야. 아무래도…….”

이건 기억을 듣지 않아도 안다.

그녀가 다음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말이다.

“아니, 날짜는 변경하지 않을 거야. 그 전에 어떻게든 마무리 지을게.”

“…….”

나는 그녀를 끌어안고 귀에 대고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 금방 끝날 거니까.”

“그래.”

* * *

“최두영 이 새끼가…….”

회사 인근의 카페.

김재열 이사는 20분째 심한 욕을 내뱉고 있었다.

나는 한 손을 들어 흥분한 그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욕한다고 뭐가 달라집니까?”

“넌 화도 안 나?”

“나죠. 미칠 듯이 화나죠.”

“…….”

“참는 겁니다. 삭히고 또 삭혀서 몇 배로 돌려줄 방법을 찾는 겁니다.”

“후…… 그래. 나도 이런데 네 속은 썩어 문드러지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이 새끼는 타고났다. 여기저기 기웃대면서 분탕질하는 건, 진짜 우주 최강이다.”

“요새 이상한 말 들은 거 없으시죠?”

“응. 없다니까! 알았으면, 내가 먼저 얘기했겠지.”

김재열 이사는 자신의 가슴을 세게 치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나는 그의 눈을 뚫어지게 보며 말을 이었다.

“최두영은 굉장히 치밀한 사람입니다. 분명 다음을 생각해 두고 이런 일을 벌였을 겁니다.”

“그렇겠지. 최두영이 그놈은 그러고도 남을 놈이니까.”

“근데, 더 이상한 건 벤더나 제조사 중에 그럴만한 곳이 없다는 겁니다.”

“제조사나 벤더들을 다 만나 봤어?”

“아니요.”

“그런데 어떻게 확신해?”

“알바오에 제품을 공급할 정도의 사이즈를 가진 업체는 몇 없잖아요. 그런 큰 회사들은 분명 소문이 먼저 퍼지기 마련인데, 이번엔 너무 조용했어요.”

“그래. 조용했지. 너무 조용했어.”

알바오의 물량을 커버할 정도의 기업은 많지 않다.

유통하는 벤더는 다섯 중 하나일 것이고, 제조사들 또한 열을 넘지 못할 것이다.

“일단 이사님은 제조사나 벤더들을 더 알아봐 주세요. 최두영 이사가 제조사와 미리 짜고 이번 일을 벌였다면, 분명 어딘가 흔적이 남아 있을 겁니다.”

“그래. 난 바론부터 하나씩 치고 들어가 볼게.”

“네. 전 벤더들을 돌아볼게요.”

내 말을 들은 김재열 이사는 갑자기 뭔가 생각이 났는지, 자신의 무릎을 내리치며 급하게 말했다.

“그래 김선녀…….”

“네?”

“그 할망구를 먼저 보는 건 어떨까?”

“김선녀 회장이요?”

“응. 아직 디몰에서 투자금도 회수 못 했잖아. 분명 뭔가 있어. 내 정확한 촉이 그쪽으로 가는 거 보니까, 분명 뭔가 있어.”

기업 사냥꾼 김선녀 여사.

그녀 또한 최두영처럼 우리와 등을 진 사람이다. 그리고 이 정도 일에 자본을 대 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네요.”

“너, 그 할망구 연락처 있지?”

“네. 제가 연락해 보겠습니다.”

“그래. 조심해. 그 할망구 악에 받쳐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네.”

나는 곧바로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

- 오랜만이군요.

낮게 깔린 음성의 김선녀 여사.

목소리만 들었을 때는 방금 잠에서 깬 것 같았다.

“네. 잘 지내셨습니까?”

- 우리가 그런 안부를 물을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요? 용건이 뭡니까?

“최두영 이사와 관련된 일입니다.”

- 그 사람을 왜 저한테 물으십니까?

“…….”

- 모릅니다.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투자금은 회수하셨습니까?”

- 제가 그걸 원 이사님께 보고해야 합니까? 끊겠습니다.

“저, 회장님!”

- 뭐죠?”

“만약 최두영 이사의 뒤에 회장님이 계신다면, 우리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싸울 겁니다.”

- 더 들어 주고 싶지 않군요. 그만 끊겠습니다.

차가운 말투로 전화를 끊는 김선녀 여사.

아직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그녀는 모르는 눈치다.

만약 지금의 일 뒤에 그녀가 있었다면, 모른다는 것이 아닌 다른 말로 감추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투자금 회수에 대한 내 질문에 이렇게 화를 낼 이유가 없다.

또한, 방금 일어난 듯한 목소리.

주변이 조용한 것을 보니 건강이 좋지 못해 또 병원에 입원한 것 같다.

“뭐래?”

김재열 이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모른다네요.”

“그래서 그걸 믿어?”

“아니요. 믿지는 않아요. 근데 주변이 조용한 게 꼭 병원 같더라고요.”

“병원이라…… 그 손녀딸은? 있잖아. 쪼그만 애.”

“이현아 대표요?”

“응. 걔 말이야. GB 화학에 구창연 이사라고 있는데, 그 사람이 그랬어. 이현아 그 아이가 망할 할망구랑 똑 닮아서 자기네 압박한다고.”

내가 본 이현아 대표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겨우 6개월 전.

그녀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정의롭다는 것이 아니라, 아직 그런 일을 하기에는 미숙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이현아 대표가요?”

“그래. 얼마나 악랄한지, 할망구를 이미 뛰어넘었다고 하더라.”

“그래요?”

“응. 한번 만나 봐. 어쩌면 그 꼬마가 할망구를 대신했을 수도 있으니까.”

“네. 일단 그래 보죠.”

인간은 극한의 상황에서 초인적인 힘을 내는 존재.

어쩌면 김재열 이사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병원에 있는 할머니를 대신해, 그녀가 이 모든 것을 꾸몄을 수도 있다.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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