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217화>
218. 우리 가족이 된 기분 말이야.
김상만 회장의 저택.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 간 자리는 축제 같았다.
드넓은 정원을 가득 메운 친인척들과 뷔페식으로 차려진 음식들이 긴 테이블에 가득했다.
“원 서방! 우리 자알 생긴 사위! 꼭 나 젊었을 때를 보는 거 같다니까. 하하하.”
“형님. 취하셨습니다.”
“오늘처럼 기분 좋은 날은 많이 취해도 돼!”
김상만 회장, 아니 아버님은 벌써 취하셨다.
“원 이사. 아니, 이제 매제라고 불러야 하나?”
능글맞은 표정으로 나를 부르는 BO 푸드의 김지욱 회장.
매제라는 말이 입에 붙지 않는가 보다.
그 모습에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네. 형님.”
“오. 우리 매제는 형님이라는 말이 딱 달라붙나 보네. 역시 넉살 하나는 대한민국 최고야.”
“감사합니다.”
“정신없지?”
“아니요. 좋은데요.”
“이게 좋아?”
“네. 아주 좋습니다.”
“그래. 뭐 좋다니 다행이네. 그리고 원…… 아니 매제, 아버지가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을 초대했는지 알아?”
사실, 그게 가장 궁금했다.
결혼 승낙을 받으러 가는 자리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자네 마음이 변할까 봐 그런 거야. 가족들 앞에서 발표하면 자네가 창피해서라도 결혼을 무를 수 없을 테니까.”
“하…….”
나는 정원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둘러봤다. 그리고 그때,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왔다.
“매형!”
누구였더라?
내가 잠시 멈칫하자, 옆에 있던 김지욱 회장이 그를 소개해 줬다.
“여긴 라온 홀딩스 장근우 대표. 막내 고모 큰아들이야.”
“아…… 네. 원지훈입니다.”
장근우는 내 손을 꽉 잡으며, 몸을 내 쪽으로 가까이 붙였다. 그리고 내 귓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장근우입니다. 제가 한 살 더 많지만, 앞으로 매형으로 깍듯이 모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매형은 지영이 누나의 뭘 보고 결혼까지 생각했어요?”
나는 멀찍이서 손님을 맞이하는 지영이를 보며 답했다.
“예쁘잖아요.”
“뭐. 그건 인정. 누나가 자기 관리 하나는 끝판왕이죠. 누가 누나를 40대로 보겠어요?”
“네.”
“그나저나 마켓 프레시 마트는 좀 어때요? 완전 대박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생각보다 괜찮습니다.”
“2호점은 남양주라고 했죠?”
“네. 그쪽 창고 부지 옆자리를 매입해 놨습니다.”
“다음은 부산이랑 전라도 광주고?”
“네.”
“그럼 그다음은? 계획해 둔 곳 있어요?”
“이직이요.”
“그래요? 그럼 마침 잘됐네.”
“네?”
“오늘 매형은 저를 만나서 정말 행운인 줄 아세요.”
“…….”
“세종 어때요? 세종시 쪽에 5천 세대 대단지 아파트가 계획 중인 부지가 있는데?”
장근우는 재빨리 와인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리고 지도를 검색해서 자신이 말한 땅의 위치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기…… 이 도로가 시내로 나가는 길인데, 한 번 봐요. 8차선대로가 그냥 직선으로 파악! 서울로 가는 고속도로도 여기서 차로 10분만 가면 됩니다.”
나는 그가 내민 휴대전화의 끝을 살짝 잡았다.
그렇게 듣게 된 기억.
<마트만 들어오면, 바로 준공 승인받아 낼 수 있어.>
아직 아파트 건설이 확정 난 부지는 아니구나. 하여간 부동산하는 사람들의 뇌피셜은 알아줘야 한다.
내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자, 김지욱 회장이 먼저 나섰다.
“야! 장근우! 어디서 약을 팔아? 그거 오른쪽에 그린벨트 아니야?”
“아니거든요. 작년에 풀렸거든요.”
“진짜?”
“네. 제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돈을 뿌려 댔는지 알아요? 지역구 의원이랑 시장 사돈에 팔촌까지 얼마나 싹싹 빌었는데요.”
“그래서 거기 아파트가 들어온다고?”
“당근이죠.”
“건설사는?”
“주스코 아니면 대면 건설. 얘네 둘이 싸우는데, 요즘은 제가 돌아 버릴 지경입니다.”
“진짜?”
“형님은 속고만 사셨나. 내가 가족한테 사기를 치겠습니까?”
“근우야. 그럼 나도 그 근처에 땅을 좀 사 둘까?”
“역시 우리 형님. 결단력 하나는 최고라니까. 제가 몇 군데 집어서 월요일에 가져갈게요. 그리고 이건 엄마한테는 절대 비밀입니다.”
“응. 고맙다. 고마워.”
귀가 얇고 순진한 김지욱 회장.
내가 알기로 그는 아버지 몰래 꽤 많은 부동산에 투자했다. 하지만 손대는 곳마다 손해를 봤고, 현재 묶여 있는 돈도 상당히 많은 거로 안다.
장근우는 눈썹을 아래위로 올렸다 내렸다 하며 나에게 답을 요구했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오프라인은 제 담당이 아니라서요.”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우리 매형이 까라면 까야지. 곧 있으면 마켓 프레시 회장님이 되실 분인데.”
“아직 멀었죠.”
“에이…… 그러지 말고 힘 좀 써 줘요. 매형.”
내 팔을 끌어안으며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장근우.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팔을 떼어 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버럭 화를 냈을 텐데…….
그에게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가족이라는 그 말.
그 두 글자 때문에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때, 멀찍이 서 있던 지영이가 천천히 걸어와 장근우의 뒤통수를 살짝 내려쳤다.
“야! 장근우!”
“아 왜?”
“내가 다 들었거든? 너 자꾸 그럴래?”
“뭐가? 가족끼리 좀 돋고 살자는데 왜?”
“너 한 번만 더 그러면 고모한테 말해서 호적에서 확 파 버리라고 한다.”
“내가 뭐! 다 우리 가족 좋자고 이러는 거잖아.”
“아휴 이걸 그냥 콱!”
지영이가 주먹을 꽉 움켜쥐자, 그는 재빨리 몸을 틀었다. 그리고 뒷걸음질 치며 내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매형! 다음에 둘이 술 한잔해요. 꼭이요!”
내가 씩 웃으며 손을 흔들자, 지영이는 내 손을 급하게 잡아 내리며 말했다.
“왜 손은 흔들어?”
“가족이라고 하잖아.”
“가족?”
“응. 가족…….”
지영이는 누구보다 나를 잘 안다.
그래서 내가 가족이라는 단어에 얼마나 더 목말라 있었는지를 알 것이다.
그녀는 안쓰러운 눈으로 나를 보다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하여간 절대로 쟤는 따로 보지 마. 쟤는 진짜 돌연변이야. 원래 우리 가족 중에 저런 사기꾼은 없는데.”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내 어깨를 감싸는 따뜻한 손.
아버님이었다.
술에 취한 그는 내 어깨에 몸을 지탱하며 조용히 속삭였다.
“어떤가?”
“네?”
“우리 가족이 된 기분 말이야.”
“좋습니다.”
“그래. 그래서 다들 초대했네. 내가 지금까지 살 비비며 살아왔던 가족들 모두를 자네에게 꼭 보여 주고 싶었어.”
가족이라는 말.
정말 오랜만에 들어 보는 말이다.
그리고 꼭 다시 듣고 싶었던 말이기도 하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래. 잘 왔어. 참 자알…… 왔어.”
* * *
“후…… 결국, 가는구나.”
청첩장을 받아 들고 고개를 푹 숙인 양지푸드의 함중식 대표.
그는 앞에 있는 나를 무시하고 허공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진짜 가는구나. 가.”
“대표님. 자꾸 왜 그러세요?”
“그냥 자유로운 영혼 하나가 이렇게 어린 나이에 떠난다니까 슬퍼서 그렇지.”
“왜요? 전 좋기만 한데.”
“잘 생각해 봐. 식장 들어가기 전까지 넌 총각이니까. 얼마든지 무를 수 있다고.”
“이미 많이 생각해 봤습니다.”
“그리고 우리 딸한테는 뭐라고 하지? 혜리가 얼마나 자네를 좋아했는데.”
이제 막 2학년이 된 함중식 대표의 딸.
그는 매번 장난을 칠 때마다 나를 예비 사위라 불렀었다.
“농담을 뭘 또 그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하세요?”
“이거 농담 아니야. 저번에 원 이사가 입학 선물 주러 온 날 있잖아. 그날 기억나?”
“네.”
“하여간, 그날 우리 혜리가 원 이사한테 시집간다고, 그렇게 좋아하던 식스틴 탈덕까지 했어.”
“그만하시죠. 뻥인 거 다 알거든요?”
“뻥 아니라니까! 아…… 우리 딸한테 뭐라고 하나.”
요즘 좀 심심했나 보다.
나는 계속해서 장난을 거는 함중식 대표를 보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서보미 실장이 씩 웃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축하드려요. 이사님.”
“고맙습니다. 결혼식 때 오실 거죠?”
“네. 꼭 가야죠.”
“고맙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답을 하고, 여전히 허공을 응시하는 함중식 대표에게 물었다.
“대표님도 오실 거죠?”
“뭐 한 번쯤 경험해 보는 것도 좋겠지. 요즘 돌싱은 흠도 아니라니까.”
“대표님! 아직 시작도 안 한 결혼에 자꾸 초 치실 겁니까?”
내가 미간을 구기자, 함중식 대표는 한 손을 허공에 휘휘 저으며 답했다.
“그냥 그렇다는 거지 뭐.”
“하여간 그날 뵙겠습니다.”
“총각파티는 안 해?”
“그런 걸 왜 해요?”
“그런 거라니! 원 이사. 그 파티는 성대한 의식과도 같은 거야. 결혼해서 아들, 딸 낳고 잘 살려면 꼭 해야 하는 거라고.”
“하면 오시게요?”
“그럼. 당연히 가야지. 나 말고 다른 절친이 있어?”
눈썹을 위아래로 올렸다 내렸다 하는 함중식 대표.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번호부를 찾으며 말했다.
“그럼, 형수님께 허락을 좀 받아 볼게요.”
“야! 야! 그렇다는 거지. 그게 그냥!”
* * *
보글보글 끓는 찌개와 가지런히 담긴 반찬들.
식탁 앞에 앉은 김재열 이사는 분주하게 젓가락을 움직이며 식사를 했다.
“야! 네 덕분에 제대로 된 집밥을 먹는다. 진짜 이게 얼마 만이냐.”
“형수님 음식 잘하시잖아요.”
“아니. 요즘은 거의 안 해. 맨날 레토르트 사서 돌려 먹어.”
한쪽으로 고개를 틀어 눈물을 닦는 여자.
김재열 이사의 아내로, 내겐 형수님과도 같은 분이다.
“뭘 그렇게 울어?”
김재열 이사는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형수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눈물을 훔쳐 내며, 고개를 들어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음식은 잘해요?”
“네?”
“결혼할 그 여자분이요.”
“아니요. 전에 몇 번 얻어먹어 본 적이 있는데, 형수님 솜씨에 비하면 한참 부족합니다.”
형수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베란다 밖으로 나가 하얀 보자기로 감싼 것들을 들고 왔다.
“이게 다 뭐야?”
김재열 이사가 물었지만, 형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식탁 밑에 보자기를 풀어 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안에 있는 반찬 통을 하나씩 꺼내며 내게 말했다.
“이건 장조림. 마프에서 소고기 산 건데, 고기가 좋아서 맛이 좋아요. 다 떨어지면 꼭 와서 더 받아 가요. 이건 오이김치고, 저번에 보니까 오이김치 잘 먹는 거 같아서 좀 넣었어요. 이건 콩자반, 이건 무생채인데 아직 덜 익었으니까 가면 냉장고 넣지 말고 밖에 놔요. 그리고 이건…….”
“그게 다 뭐야? 그럴 시간에 남편이나 좀 챙기지?”
“조용히 못 해!”
“내가 내 입으로 말도 못 해?”
“어제는 뭐 했어? 뭐 했길래 새벽에 기어 들어온 거야?”
“말했잖아. 중요한 미팅이 있어서.”
“요즘 미팅은 술집 가서 하나 보지?”
“그게 나 혼자 좋자고 하는 건가? 다 우리 가족을 위해서 하는 거잖아.”
“어이구. 그래도 뚫린 입이라고…… 내가 영수증 가져와 봐?”
“무…… 무슨 영수증…….”
“어제 술 처먹은 영수증! 200만 원이 어느 집 개새끼 이름도 아니고!”
“와. 진짜. 아니라니까. 그거 내가 안 냈어.”
“그럼 주머니에 있던 건 뭔데?”
“주머니에 뭐! 지훈아. 넌 이걸 보고도 결혼하고 싶냐?”
김재열 이사는 참 눈치가 없다.
이럴 때 그냥 조용히 있으면 본전이라도 가는데, 굳이 말을 해서 일을 키운다.
이제 나도 이들처럼 살 것이다.
때론 함께 웃고, 때론 티격태격하며 살 것이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