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216화>
217. 결혼해 줘
토요일 늦은 오후 한적한 카페.
“아무래도 식품판매 진열대를 한 칸 더 위로 올리는 게 좋겠지?”
“그래.”
“그나저나 주차장 입구는 넓힐 수 없을까? 매번 차 들어가는 입구가 막히잖아.”
“한 번 알아봐야겠네.”
“아……. 그리고 당분간 길 건너편 공터를 임대하는 건 어때? 임시 주차장으로 쓰면 딱 좋을 거 같아서 말이야.”
“건너편 공터? 그거 좋은 생각인데?”
“저번 주 주말에 오프라인 매출 봤어? 나 보고 깜짝 놀랐잖아.”
“응. 봤어. 나도 좀 놀랐어.”
지영이는 쉼 없이 조잘거리는 내 말에 일일이 맞장구를 쳐줬다.
나는 요즘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다.
오프라인 마트의 운영이 한 달이나 지난 지금.
매출은 우리의 예상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숫자로 모든 성과를 판단할 수는 없는 법.
오프라인 마트를 통해 일어난 추가적인 성과는 우리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가장 돋보이는 것은 정기 구독 서비스였다.
우유와 달걀, 생수 등을 정기 결제로 배송받는 회원이 무려 15%나 증가했다. 그동안 인터넷을 하기 어려웠던 50~60대층과 온라인 구매를 망설이던 잠재 고객이 구매로 이어진 것이었다.
또한, 온라인 몰의 매출도 3% 이상 상승했다.
이는 장거리에서 온 고객들이 오프라인 마트를 경험하고 우리의 제품을 믿어 준 결과였다.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지영이는 내 말을 다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생각해도 요즘은 좀 심했다.
단둘이 차를 마신 것도 한 달 만인데, 일 얘기만 하고…….
나는 그녀가 화장실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그녀가 만지던 커피잔과 테이블에서 기억을 들었다.
<많이 좋은가?>
<밝은 모습 보니까 좋네.>
<하긴, 오프라인은 처음이라 재미있겠지.>
<요새 자주 밤을 새우던데, 약이라도 지어 줄까?>
나에 대한 생각뿐이다.
그녀는 언제나 나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내 일정에 자신의 일정을 맞췄고, 내 취미에 자신의 취미를 맞춰 줬으며, 내 말에 언제나 미소를 지어 줬다.
오늘은 그런 그녀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다.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화장실에서 돌아오는 그녀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잡았다.
“가자.”
“어디?”
“밥 먹으러.”
“어디 갈 건데?”
“회사 건너편에 레스토랑 알지? 거기 예약해놨어.”
“거기까지 가자고?”
“응. 이상하게 오늘은 거기 스테이크가 먹고 싶네.”
“그래. 그럼 가자.”
지영이는 오늘도 내 뜻에 맞춰 줬다.
* * *
하루 전, 금요일 오후 7시.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태하의 팔을 잡았다.
“지금 퇴근하는 거야?”
“왜?”
“내일 약속 있어?”
“토요일?”
“응.”
“당연히 있지. 나 주말이 더 바쁜 거 몰라?”
“중요한 약속이야?”
태하는 내 표정을 보고 잠시 멈칫하며 물었다.
“아마존 데이터는 올려놨어. 다음 달 특판 제품도 다 올려놨고.”
일 때문인지 알았나?
하긴, 지난주 토요일에도 출근했으니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만하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더 중요한 일이야.”
“뭔데?”
“나올 거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너밖에 없어.”
태하는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 물었다.
아마 오늘도 약속이 있어 서둘러 퇴근을 해야 하는 것 같았다.
“토요일 몇 시?”
“8시.”
“아침?”
“아니 밤.”
표정이 좋지 못한 김태하.
요즘 연애를 하니 더욱 그런가 보다.
“왜? 안 돼? 10분이면 돼. 아니, 1분.”
내 애절한 표정에 태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후……. 그래 알았다. 어디로 가면 돼?”
“여기. 사무실로 오면 돼.”
“사무실로 오라고?”
“응. 아주 간단해. 내가 전화하면 사무실 불만 켜 주면 돼.”
“뭐야.”
“와서 비웃지 말고.”
태하는 내 말에 게슴츠레 눈을 뜨며 물었다.
“뭔 짓을 하려고?”
“그런 게 있어. 그냥 토요일에 대기하다가 내가 불 켜달라고 톡하면 그냥 켜 주기만 하면 돼.”
“뭔데?”
“그냥 그런 게 있다고!”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하라는 말인가?”
“알면서 왜 물어?”
그 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태하는 안으로 들어가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남아 있는 장선영 차장의 옆으로 다가갔다.
“선영 차장님. 많이 바빠요?”
“왜요? 더 시키실 일 있으세요?”
“아니요. 불금인데 일찍 일찍 들어가시라고요. 맨날 늦게까지 야근하면 연애는 언제 합니까?”
내 말에, 장선영 차장은 눈을 흘기며 되물었다.
“제 연애는 신경 끄시고, 이사님 연애 먼저 챙기시죠?”
“전 아주 잘하고 있습니다.”
“그건 이사님 생각이죠. 대표님은 좀 다를걸요?”
“네?”
“여자에게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요? 아무리 둘이 죽고 못 살아도,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면 말짱 꽝이라는 말입니다.”
나도 잘 안다.
요즘 들어 부쩍 우울해진 지영이가 무엇 때문인지 말이다.
“알아요.”
“알긴 뭘 알아요? 지금도 많이 늦은 거 같은데. 저 같으면 이사님 같은 사람은 절대 안 만났을 겁니다.”
자신의 연애사를 건드렸다고 계속해서 핀잔을 주는 장선영 차장.
나는 씩 웃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 밑.
포스트 잇이 가득 들어 있는 상자를 보고 큰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이걸 준비했나?
과연 이걸 다 할 수 있을까?
나는 팔을 걷고 자리에 앉아 포스트 잇 뒷면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 * *
토요일 오후 7시 30분.
다행히 차가 막히지 않아 예정한 시간에 정확히 도착했다. 우린 창가의 자리에 앉아 음식을 주문하고 서로를 마주 봤다.
“여기 스테이크가 그렇게 먹고 싶었어?”
눈웃음을 지으며 묻는 지영이.
나는 사랑스러운 그녀의 표정을 보며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도 참 유별나다. 역시 식품 MD는 다른가 봐.”
“다르지. 암 다르고말고. 내가 우리 지영이는 평생 맛있고 몸에 좋은 것만 골라줄게.”
내 말에 지영이는 잠시 멈칫하다 씩 웃어 보였다.
“갑자기 훅 들어오면 어떡해? 나 막 심쿵하잖아.”
“그랬어? 그럼 우리…….”
내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려 하자, 지영이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결혼 얘기가 나올까 봐 돌린 것이다.
“……나 저번 주에 가족이랑 여기 왔었어.”
“알아. 태하한테 들었어. 그때 회사에 있다가 아버님이 부른다고 급하게 나갔거든.”
“아……. 그랬구나.”
지영이는 답을 하고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불이 꺼진 우리 회사건물을 보며 말을 이었다.
“오늘은 아무도 안 나왔나 보네.”
“왜? 섭섭해?”
“아니.”
“그럼 왜?”
“지난주에 불 켜져 있는 거 보면서 미안했거든. 대표라는 사람은 여기서, 밥이나 먹고 말이야.”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는 지영이.
난 고개를 돌려 불이 꺼진 우리 회사를 보며 답했다.
“그랬구나.”
“응. 적당히 쉬면서 일해야지. 꼭 일 때문에 사는 사람들 같잖아.”
“그게 왜? 다들 목표가 있어서 열심히 하는 건데.”
“그래도 그렇지. 지훈아. 난 가끔 네가 일에만 몰두하는 거 보면 너무 무서워. 그러다 네 건강 해치는 건 아닐까 해서 말이야. 그리고…….”
지영이는 끝까지 말을 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마주한 테이블에서는 그녀의 조금 전 하지 못한 말이 들려왔다.
<널 잃을까 봐. 일 때문에 널 잃을까 봐, 너무 무서워.>
난 누구보다 지영이를 잘 안다.
그녀는 한 회사의 대표가 아닌 평범한 삶을 꿈꿨었다. 좋은 남자를 만나고 그 남자와 아이를 낳고, 함께 늙어가는 것이 그녀의 꿈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평생 함께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도 주저하고 있었다.
나이라는 벽 뒤에 숨어 도망치기에만 급급했다.
이제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오늘 꼭 답을 듣고 말 거니까.
지영이는 내 뒤편으로 앉은 여자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자 손을 올려 둔 테이블에서 그녀의 기억이 들려왔다.
<3살? 4살? 아이가 참 예쁘네.>
아이가 예뻐 보일 때가 결혼적령기라는 말.
협력사의 나이 많은 대표들이 내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했던 말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아이를 보고, 다시 고개를 돌려 지영이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아이가 참 예쁘네.”
“응. 예쁘지?”
“우리 지영이 딸도 저렇게 예쁠 텐데.”
“피. 또 그 소리다.”
그때, 아이가 창밖을 가리키며 크게 소리쳤다.
“엄마! 엄마! 저기! 저기 저거 뭐야?”
“응?”
“저기! 창문에 노란 거!”
“어머!”
“뭔데? 뭔데?”
“아 저건 누가 결혼하자고 프러포즈하는 거야.”
“프러포즈가 뭔데?”
설마?
고개를 돌려 재빨리 창밖의 우리 사무실을 바라봤다.
빌어먹을 김태하…….
아직 톡을 보내지도 않았는데 불을 켜 버렸구나.
이놈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나는 재빨리 지영이의 표정을 확인했다.
눈가에 눈물이 고인 그녀는 창밖을 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회사 창문에 빼곡하게 붙어 있는 노란 포스트 잇.
금요일 밤에 커다란 창문에 도안을 그리고 토요일 새벽까지 포스트 잇을 붙인 것이다. 무려 5시간 동안.
식사를 마치고 준비한 반지와 함께 보여 주려 했는데…….
태하 놈 때문에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지영이의 표정을 살폈다.
창밖을 말없이 보던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고,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떨어졌다.
불이 꺼졌다 켜졌다 하는 사무실.
이건 내가 시킨 적이 없다.
태하가 포스트 잇을 보고 장난을 치는 거다.
하지만 그의 장난 덕분에 내가 포스트 잇으로 새겨 둔 큰 글씨가 더 도드라지게 보였다.
`결혼해 줘`라는 글씨가.
나는 지영이의 떨리는 손을 꽉 움켜잡고, 준비한 반지를 테이블 위로 꺼내 놓았다.
“같이 자고, 같이 밥 먹고, 같이 산책도 하고, 같이 TV도 보고. 난 너랑 다 같이하고 싶어.”
“…….”
“답 안 줄 거야?”
내 말을 들은 지영이는 고개를 아래위로 크게 끄덕였다.
여전히 눈물을 펑펑 쏟아 내며.
그러다 뭔가 생각이 났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상의를 걸쳐 입었다.
“어디 가려고?”
“회……. 회사에.”
내가 이래서 8시에 불을 켜 달라고 한 건데…….
“아무도 없으니까 밥 먹고 가자.”
“아니. 지금 꼭 가고 싶어. 지금 꼭 보고 싶어.”
* * *
MD 사업부 사무실.
지영이는 커다란 전면 유리창에 붙어 있는 포스트 잇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곳에 쓰여 있는 내 편지를 조심스럽게 읽어 갔다.
첫 번째 내용을 읽은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두 번째 내용에서는 소리 내 펑펑 울었다.
울고 웃기를 수십 번 반복한 지영이.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뒤로 다가가 뜨겁게 끌어안았다.
“고마워.”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내 심장이 크게 날뛰기 시작했다.
“…….”
“우리 잘할 수 있겠지?”
“응. 우리 잘 할 거야. 그래. 잘 할 거야.”
내 말에, 지영이의 가녀린 몸이 파르르 떨려 왔다.
두려울 것이다.
나 또한 세상의 시선과 뒤에서 들려올 곱지 않은 말들이 두렵다.
하지만 그렇게 도망칠 수는 없다.
내가 원했고, 그녀도 날 원했으니까.
나는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개며, 뜨겁게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