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듣는 회사원-215화 (215/223)

<기억을 듣는 회사원 215화>

216. 우리 직원도 아닌데요?

마트 매대 중 가장 많은 사람이 지나는 곳.

그곳은 바로 시식 코너다.

일부러 많은 사람이 지나는 곳에 위치한 것도 있지만, 진한 음식 냄새와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의 유혹을 피해 갈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 귀한 자리를 얻기 위해서 제조사들은 지난달부터 행사를 신청했고, 우리가 선정한 몇몇 업체들만이 매출이 보장되는 시식 코너의 자리를 잡았다.

그중 가장 길게 늘어선 줄.

바로, 청년 고기에서 특별히 준비한 미국산 프라임 등급 소고기 시식 코너였다. 마블링이 훌륭한 등심을 구워서 그런지, 줄을 선 사람만 스무 명이 훌쩍 넘었다.

고기를 굽는 20대 청년은 작은 화로에서 뿜어내는 열기에도 상냥한 미소를 잃지 않고, 부지런하게 고기를 구웠다.

그리고 이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정진택 차장이 내게 속삭였다.

“저 친구 잘생겼죠?”

“아는 사람이에요?”

“네. 장문영 팀장 친동생입니다. 저번에 같이 밥 먹은 적 있어요.”

“오…… 미래의 처남이라 이건가?”

옆에 있던 마성근 차장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러자 정진택 차장은 미간을 구기며 마성근 차장의 옆구리를 찔렀다.

“재미없으니까 그만하시죠.”

“왜요? 난 충분히 재미있는데?”

“저 친구 마장동 청년 고기 매장에서 일해요. 오늘은 중요한 행사라서 직접 나온 거라고요.”

“하여간 셋이 같이 식사했잖아요.”

“업무차 먹은 겁니다.”

“정 차장님은 좋겠네요. 업무도 보고, 처남도 챙기고.”

“마 차장님!”

버럭 소리를 지르는 정진택 차장.

그 소리에 시식 코너 앞에 줄을 서 있는 고객들이 모두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이에 창피했는지, 마성근 차장은 정진택 차장의 등을 쓰다듬고 재빨리 자리를 떠났다.

“이사님 다시 얘기하지만, 그런 거 아닙니다. 진짜로요.”

정진택 차장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내게 조용히 속삭였다.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았어요. 알았어.”

“진짜죠?”

“네. 전 2층에 좀 올라갔다 오겠습니다.”

“예.”

그때, 정육 시식 코너에서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거 덜 익었잖아! 똑바로 안 해?”

접시 위의 고기를 가리키며 소리치는 50대 여자.

온몸에 주렁주렁 달린 액세서리와 명품 핸드백을 든 그녀는 딱 봐도 제법 사는 집의 사모님 같았다.

“소고기는 이 정도 굽기로 드시는 게 좋습니다.”

“내가 싫다고 하잖아! 다시 구워.”

“…….”

“손도 느린 게 눈치까지 없어. 이러니까 이런 데서 고기나 굽고 있지.”

이런 데서 고기나 굽고 있다고?

이건 좀 심하다.

아니, 많이 심하다.

내가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정진택 차장이 나를 한 손으로 막아서며 자신이 다가갔다.

미래의 처남에게 점수를 따려는 건가?

나는 뒤로 물러나 정진택 차장의 다음 행동을 지켜봤다.

“저, 고객님.”

“뭐요?”

“여기 직원 말처럼 등심은 이 정도 굽기가 딱 좋습니다. 더 구우면 육즙이 빠져나가서 퍽퍽해집니다.”

“아니. 내가 싫다니까! 이거 먹고 탈 나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고객님 시식 코너의 식품의 경우 이미 충분한 검증을 거쳐서 안심하고 드셔…….”

여자는 정중하게 설명하는 정진택 차장의 말을 끊어 내며, 이쑤시개에 꽂았던 고기를 불판 위로 올려 버렸다.

“시끄럽고. 그냥 다시 구우라면 구워.”

“네. 더 구워드리겠습니다.”

그런 그녀의 몰상식한 행동에도, 청년은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하지만 정진택 차장은 달랐다.

그는 붉어진 얼굴로 허공에 연신 거친 숨을 내쉬며, 최대한 진정하려 애를 썼다. 이를 본 여자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뭐? 어쩌라고?”

이제 선을 넘었다.

정진택 차장의 폭발이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상현 씨. 잠깐 나와 봐.”

정진택 차장은 팔을 걷고, 매대의 뒤로 걸어갔다. 그리고 고기를 굽던 청년을 옆으로 살짝 밀어내며 직접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이것이 사랑의 힘인가?

정진택 차장이 저렇게까지 대응하다니…….

잠시 후, 그는 유난히 바짝 구워진 고기를 접시에 내려놓았고, 여자는 승자의 표정을 지으며 작은 고기 한 점을 입 안에 넣었다.

그리고

“뭐 이렇게 짜? 그러니까 시즈닝할 때 골고루 해야지.”

“…….”

“이거 미국산이지? 미국산이니까 이렇게 퍽퍽하지.”

“이건 많이 구워서 퍽퍽해진 겁니다. 한우도 오래 구우면 똑같습니다.”

“하여간 미국산이잖아!”

“…….”

“마켓 프레시는 좀 다를지 알았는데, 똑같네. 이러면 코스트랑 뭐가 달라? 가격도 거기보다 더 비싼 거 같은데?”

“저, 고객님 다음 분 시식을 위해 조금만 옆으로 나와 주시겠습니까?”

정진택 차장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이제 한계점에 다다른 것이다.

하긴 오래 참았다.

평소의 그라면 바로 들이받았을 것이다.

나는 더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그들이 있는 매대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때, 진열대를 점검하던 장문영 팀장이 재빨리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고객님. 죄송합니다. 쇼핑 중 불편함이 있으시면 저희 쪽에서 다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당신이 여기 책임자야?”

장문영 팀장의 아래위를 훑어보는 여자.

정진택 차장은 이에 완전히 터져 버렸다. 그는 장문영 팀장을 일으켜 세우며, 화가 난 표정으로 소리쳤다.

“장 팀장님이 뭘 잘못했다고 사과합니까?”

높아진 언성에 일제히 휴대전화를 꺼내 드는 사람들.

요즘 사람들에게는 참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이런 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동영상을 찍어 자신의 SNS에 올린다. 그냥 재미있는 일이라며 SNS 친구들의 관심을 끌어 보려는 것이다.

이제 정진택 차장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하지만 별로 말리고 싶은 생각이 없다.

나는 매대의 앞으로 다가가 50대 여자가 대충 던져 놓은 이쑤시개를 집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때 들려온 기억.

<토마토 상태가 좋네. 맛있어. 주머니에 좀 넣어 갈까?>

<여긴 양지 군만두가 파네. 이거 비싸니까 많이 먹어 놔야지.>

<닭발은 뭐 이렇게 조리 시간이 길어? 치즈는 눈곱만큼 잘라 주고.>

참 많이도 다녔다.

그리고 저 이쑤시개 계속 들고 다니며 시식을 했구나.

가장 인기가 많은 고기 시식 코너는 과연 몇 번이나 왔을까?

나는 고개를 돌려 고기를 굽던 상현이라는 남자에게 물었다.

“상현 씨. 여기 이 고객분 몇 번째 오신 거죠?”

“제 기억이 맞는다면, 다섯 번째입니다.”

“힘들었겠네. 그때마다 이렇게 구워 달라고 했어요?”

“…….”

시식 코너의 직원들은 사람의 얼굴을 잘 기억한다.

여러 사람을 상대해 기억하지 못할 것으로 아는데, 판촉을 동시에 해야 하기에 사람을 잘 기억해야 한다.

특히, 상현이라는 이 사람처럼 실제 매장을 운영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자 우리의 대화를 들은 줄 서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여자를 비난하는 것이다.

그런 목소리와 여기저기 들린 휴대전화에 50대 여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나는 여자가 끌고 있던 카트를 옆으로 살짝 밀어내며 말을 이었다.

“다 드셨으면, 다시 뒤에 가서 줄을 서 주세요. 다른 분들도 드셔야 하니까.”

“…….”

그리고 카트의 손잡이에서 들은 기억.

<이건 이따 계산 전에 빼고, 사은품만 떼 가도 모르겠지.>

나는 황급히 이곳을 떠나려는 여자에게 다시 소리쳤다.

“고객님! 그거 사은품에도 바코드 처리해 놨습니다. 사은품만 가져가시면 계산대에서 경고음 울릴 겁니다.”

내 말에 줄 서 있던 사람들이 키득거렸다.

“키키키“

“사은품도 떼 가려 했나 봐?”

“카트 안에 있는 거 봤어? 다 사은품들 붙어 있는 거였잖아.”

“저 여자, 아까부터 시식 코너만 돌더라.”

정진택 차장은 그제야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상현이라는 남자에게 물었다.

“상현 씨. 저 아줌마 여기만 다섯 번 온 거야?”

“네.”

“왜 진작 말 안 했어?”

“그럼 차장님이 화내셨을 거잖아요.”

“그럼 그냥 둬?”

“네, 고객님이시잖아요.”

온라인에서는 이런 고객을 직접 만난 적이 없다. 걸려 오는 전화도 CS 센터에서 다 처리하기에 MD가 직접 상대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고객님이라는 이름 아래로 각종 갑질을 자행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고객 센터에서 반쯤 먹은 치킨을 환불하려는 사람도 있었고, 셀프 포장대의 상자를 다 집어 간 사람도 있었다. 가격을 흥정하려는 사람도 부지기수였으며, 심지어 절도 중에 적발된 사람도 있었다.

나는 당장에라도 여자를 쫓아갈 것 같은 정진택 차장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좌우며 그를 말렸다.

“후…….”

긴 한숨을 내쉬는 정진택 차장.

그리고 그는 뭔가 생각이 났는지, 시식 코너 앞에 줄 서 있는 여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저, 고객님.”

“네?”

“아까 영상 찍으셨죠?”

“아…… 그거요?”

“네.”

“지울까요?”

“아니요. 그 귀한 걸 왜 지웁니까? 그건 알아서 하시고, 저도 좀 보내 주실 수 있을까요?”

황당한 요청에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네?”

인터넷에 올릴 생각인가?

정진택 차장은 여자를 설득해, 기어코 영상을 받아 냈다. 그리고 내게 다가와 씩씩대며 입을 열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고 하셨죠?”

“올리려고요?”

“네. 제가 아는 모든 사람의 SNS를 동원할 겁니다. 저런 사람은 아주 개망신을 당해 봐야 압니다. 이사님 괜찮죠?”

“뭐. 맘대로 하세요.”

역시 정진택 차장답다.

나는 씩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치고 등을 돌렸다.

* * *

그렇게 길다면 길었던 시간이 지나갔다.

시범 운영을 한 것은 겨우 3시간.

하지만 매장 곳곳에 빈 진열대가 보일 정도로 성과는 좋았다.

특히, 신선 코너는 다른 마트에 비해 10퍼센트 이상 비싼데도 제품 대부분이 팔려 나갔다.

“이사님!”

김경일 차장이 나를 부르며 다가왔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그는 그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들고 있던 문서를 내밀었다.

“응? 이게 뭐야?”

“직접 보세요. 오늘 총 매출입니다.”

“그게 벌써 나와?”

“네. 포스기에 찍힌 거 그냥 합산해서 가져온 겁니다.”

9억 6천여만 원.

단일 매장의 경우 하루 매출이 3~6억 선이 평균이며, 잘 나오는 곳은 10억을 훌쩍 넘기도 한다.

우린 겨우 3시간만 오픈했다.

그런데도 9억이 넘었다면, 온종일 오픈했으면 12억은 충분히 넘을 수준이었다.

“이거 진짜야?”

“네. 진열대 빈 거 못 보셨어요? 내일 당장 추가 물량 받아야 할 판입니다.”

“수고했어.”

흥분한 표정의 김경일 차장.

그가 이렇게 환하게 웃는 것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직원들 데리고 회식이라도 좀 해.”

“네.”

“그리고 말이야.”

“네?”

“오늘 근무한 직원들 특별 수당 산정해서 품의 올려 줘.”

“특별 수당이요?”

“다들 고생했잖아.”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우리 쪽 직원 말고 제조사에서 나온 알바들, 연락처 다 있지?”

“시식 알바들이요? 근데 그건 왜요?”

“그 사람들도 이번 특별 수당에 포함해 줘.”

“우리 직원도 아닌데요?”

“우리 마트에서 일했잖아. 그리고 그동안은 우리 직원이었던 거고.”

“알겠습니다.”

내 뜻을 이해한, 김경일 차장은 환하게 웃으며 등을 돌렸다.

나는 분주하게 청소하며 마무리를 짓는 직원들을 둘러봤다.

특별 수당이라고 해 봤자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직접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우리가 당신들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당신들의 노력에 항상 감사하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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