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209화>
210. 경력이 권력이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진짜 이러셔야겠어요?”
전략 기획부 사무실.
빈 책상에 내 짐이 담긴 상자를 내려놓자, 김중신 부장이 바짝 옆으로 붙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왜요? 이러면 빨리 친해지고 좋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사님이 어떻게 그냥 사원 자리를…….”
“자리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이건 사이즈도 1400짜리 책상이라…….”
“걱정 마요. 저, 짐 얼마 없으니까.”
“그리고 중역용 책상도 아닌, 일반 책상이라…….”
“걱정 마요. 이 색이랑 분위기, 본드 냄새까지 싹 마음에 드니까.”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다. 현재 상황만 점검하고, 최대한 최구열 이사가 만든 프로세스를 유지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회의를 끝내고 절실히 느꼈다.
멀리서 지켜본다면 상급자들은 갈수록 나태해질 것임을.
내게 떠넘기고 간 최구열 이사가 원망스럽지만.
어쩌겠는가?
또, 내가 할 수밖에.
내 말을 들은 김중신 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손짓을 하자, 자리에 앉아서 눈치만 보던 직원 하나가 다가왔다.
“이사님. 이건 제가 하겠습니다.”
나는 그의 목에 걸린 사원증을 확인하고 환하게 웃었다.
“종혁 씨는 바쁠 텐데, 업무 보세요.”
“아닙니다. 이사님 짐 풀어 드리고 해도 됩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 짐이 담긴 상자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나는 고개를 틀어 그의 모니터 안 화면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거, 저번 분기 IR 자료죠?”
“아…… 네.”
“이번엔 제대로 하네.”
“네?”
“아닙니다. 주주들에게 IR 자료 고지하려면 빨리해야 할 텐데. 그거 먼저 하세요.”
“아닙니다. 내일까지 마무리하면 됩니다.”
“그럴 시간에 한 자라도 더 보고, 더 수정하세요.”
나는 그의 손을 밀어내며, 고개를 돌려 김중신 부장을 불렀다.
“김 부장님!”
“네?”
“아까부터 저만 따라오시는 거 보니까, 지금은 한가하신가 보죠?”
“아…… 그게.”
“그러지 말고 부장님이 좀 도와주세요.”
쭈뼛거리며 다가오지 못하는 김중신 부장.
그러자 하종혁이라는 사원은 눈치를 보며, 거의 울상이 되어 버렸다. 나는 그의 어깨를 툭 치며 괜찮다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부장님이 먼저 도와주러 오셨잖아요. 종혁 씨는 가서 업무 봐요.”
“그래도…….”
“여기 김 부장님이랑 같이하면 됩니다. 짐도 얼마 되지 않는데, 뭐 셋이나 붙어서 해요?”
“…….”
“안 그래요. 부장님?
내가 다시 묻자, 김중신 부장은 비굴한 미소와 함께 다가왔다.
“무…… 물론이죠. 제가…… 도와야죠.”
“고맙습니다. 부장님. 전 밑에 상자가 하나 더 있어서 가져올게요. 노트북 선만 좀 연결해 주세요.”
“아…… 네네.”
마지못한 표정으로 답하는 김중신 부장.
나는 게슴츠레 눈을 뜨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다른 직원들 다 바쁜 거 같은데, 떠넘기시면 안 됩니다.”
“무…… 물론이죠.”
* * *
이곳은 MD 사업부와 달랐다.
전화를 받는 사람도,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사람도 없었다. 키보드를 치는 소리와 마우스를 딸깍거리는 소리가 전부였다. 가끔 들려오는 직원들의 목소리도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아 갈라져 있을 정도였다.
오후 12시 10분.
점심시간이지만, 전략기획실 모두가 내 눈치를 보며 일어나지 못했다.
특히 내 앞자리에 앉아 있는 김중신 부장은 더더욱 그랬다. 계속 시계를 보며 다리를 부들부들 떠는 것이 내게로 전해질 정도였다.
나는 기지개를 켜고 옆자리에 앉은 하종혁에게 물었다.
“식사 안 해요?”
“아…… 해야죠.”
“혹시 저 때문에 안 하는 거예요?”
“그…… 그게.”
“맨날 그게야. 그게가 여기 유행어인가?”
내 말에 김중신 부장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옷걸이의 코트를 걸쳤다. 그리고 앉아 있는 자신의 사업부 직원들에게 소리쳤다.
“자자! 이사님 식사하러 가시죠.”
“네. 그러죠.”
그러자 김중신 부장의 근처에 앉은 직원 7명이 동시에 일어났다.
마치 이 말을 기다린 사람들처럼.
나는 그들을 둘러보며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다 같이 먹는 거예요?”
“네.”
“여기 일곱, 아니 부장님이랑 저까지 아홉이 같이 먹어요?”
“우린 식구잖아요. 하하핫“
김중신 부장 혼자만 크게 웃었고, 다른 일곱 직원의 얼굴에는 쓴웃음이 지어졌다.
식구라 같이 먹는 다라…….
뭐 워낙 업무 중에 말이 없으니 나쁜 의도는 아니다. 하지만 강압적으로 식사까지 함께한다면 이는 점심시간도 업무의 연장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다.
나는 김중신 부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식구라…… 그럼 밥은 부장님이 사나요?”
“네?”
“식구라면서요.”
“아…… 이건 그거랑 다르죠.”
“설마 강제로 같이 먹도록 하는 건 아니죠?”
“그게…….”
“또 그게네. 그거 부장님이 시작한 유행어인가요?”
내 말에 하종혁 사원이 고개를 돌리고 입을 가렸다.
어깨가 들썩이는 것이 몰래 웃는가 보다.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다른 직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자자! 갑시다.”
* * *
회사 인근의 식당.
9명이 앉기 위해 테이블 두 개를 붙였다.
자리가 정해지자 막내 둘이 바빠졌다.
하종혁은 숟가락과 젓가락을 휴지에 깔아 자리마다 세팅했고, 이인경은 컵에 물을 차례로 따라 나눠 줬다. 그것도 서열대로.
이들은 정말 훈련된 군인처럼 모든 것이 딱딱 정해져 있었다.
모든 세팅을 마치고 벽에 붙어 있는 메뉴판만 물끄러미 보는 직원들.
하종혁은 재빨리 종이와 볼펜을 들고 메뉴를 적을 준비를 했다. 그리고 김중신 부장은 내게 메뉴판을 건네며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이사님 먼저 골라 주세요. 뭐 드시겠습니까?”
윗사람이 고르길 기다리는 건가?
후…….
도대체 뭘 어디서부터 바꿔야 할까?
회사 내에서는 물론이고 식사 자리에서도 이렇게 권위적인데.
그리고 숟가락과 물컵에서 들려오는 막내 사원들의 기억.
<아…… 숨 막혀 죽겠네.>
<이사님까지 같이 오시고…… 오늘 진짜 체하겠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종혁 씨, 받아 적을 필요 없어요.”
“네?”
“테이블 떼고, 각자 원하는 자리 가서 먹어요. 그리고 계산서는 다 이쪽으로 주고, 제가 계산할 거니까.”
“…….”
“그리고 하나 더, 내일부터 점심값 아낄 사람만 저랑 붙어서 먹는 겁니다. 그게 아니면 따로 흩어져서 먹고 싶은 거 먹고 오세요.”
“……정말요?”
조심스럽게 묻는 하종혁.
나는 손을 허공에 휘휘 저으며 빨리 흩어지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김중신 부장을 보며 씩 웃었다.
“점심시간에는 숨 좀 쉬게 해 주자고요. 가끔 상사나 회사 욕도 하면서.”
“아…… 네.”
“전 김치찌개 먹겠습니다. 부장님은요?”
“저…… 저도 같은 거 먹겠습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김중신 부장은 쉬지 않고 말을 했다.
일 얘기, 가족 얘기, 심지어 최구열 이사에 관한 얘기까지 쉼 없이 떠들었다. 그리고 마주한 테이블에서 쉬지 않고 들려오는 기억.
<전략기획부를 바꿔보려고? 그게 쉽게 되겠어?>
<아니지. 원지훈이 회사의 실세잖아.>
<대표님이랑 결혼하면 바로 원 이사가 대표 자리까지 꽤 찰 거잖아.>
<그래. 지금이 기회야. 지금이라도 잘 보여야지.>
참, 말이 많다.
나는 쉴 새 없이 들려오는 그의 기억과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사님. 큐레이션 서비스 기획은 아마 한 달 이상 걸릴 겁니다.”
“왜죠?”
“그게 빅 데이터를 만들어야 하는데, 문제는 지금까지 쌓인 로그가 없어서요.”
“로그가 없어요?”
“네. 다 개발팀 애들이 일을 못 해서 그렇습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할 수 있는데, 그걸 왜 빼먹었는지 진짜…….”
이제는 개발팀을 걸고 넘어가는구나.
다시 또 느끼는 것이지만, 김중신 부장은 참 이타적인 사람이다. 잘못된 것은 남 탓만 하고, 잘된 것은 어떻게든 자신의 평가항목에 끌어다 놓는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냐고요. 개발팀의 생각이 짧아서 로그가 없다는 생각이요.”
“그게…….”
“또 그게네. MD 사업부는 처음 기획 때부터 로그를 쌓아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재고 예측 프로그램도 그 로그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거고요.”
“…….”
“처음부터 그 부분을 고려해서 기획하셨어야죠.”
“아닙니다. 로그가 많이 쌓이면 용량만 커지고, 로그 서버도 다 돈입니다. 불필요한 지출을…….”
이곳에 오기 전 이들의 법인 카드 사용 내용을 확인했다.
법인 카드인지 개인 카드인지…….
참 가관이었다.
어떻게 매일 외근을 나가는 MD 사업부 임원들보다 많이들 쓰는지…….
천천히 짚고 넘어가려던 사항이었는데, 안 되겠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로그 서버가 얼마나 한다고요. 그렇게 회사를 생각하시는 분이 집에 사 갈 빵까지 회사 카드로 결제해서 가십니까?”
“그…… 그게.”
“또 그게입니까? 이제 지겹네요. 그게라는 말.”
“죄송합니다.”
그때, 마주한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기억.
<어린놈이 뭘 알겠어.>
<다 이렇게 사는 거다. 내가 누군데? 나도 다 저렇게 살면서 이 자리까지 올라온 사람이야.>
입에서는 ‘죄송합니다’가 나왔지만, 머릿속에서는 다른 얘기가 튀어나왔다.
그놈의 경력. 그놈의 나이.
이들의 논리는 너무도 단순하다.
자신들이 그렇게 고생하며 올라왔고, 이제는 편하게 지내도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틀렸다.
경력이 권력이 되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
나는 휴지로 입을 닦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김중신 부장님.”
“네?”
“아실지 모르겠지만, 전 최구열 이사님과 많이 다릅니다.”
“아…… 네네.”
“MD 사업부에 정진택 차장 아시죠?”
“네.”
“그분은 직접 밭에 나가서 고추 따고, 과수원에서 수박 따면서 계약도 따옵니다. 저번에는 전복 양식장에 가서, 밤새워 도록 배 타고 전복 끌어 올린 적도 있습니다. 어디 그뿐인 줄 아세요? 김명진 부장은 레토르트 개발 돕는다고, 3일 동안 협력사 연구소에서 나오지 않은 적도 있었어요.”
“…….”
“이게 제가 생각하는 부장, 차장, 팀장들입니다. 다른 직원들에게 모범이 되는 사람이요. 제가 여기 있는 동안은 절대 경력이 권력이 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지금까지 쌓아 올린 경력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면 말씀해 주세요. 그때는 저도 다시 생각해 볼 테니까요.”
내 말에, 김중신 부장은 고개만 떨굴 뿐,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흩어져 식사하던 직원들은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각 테이블에 있는 계산서를 모조리 모아왔다.
그렇게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자.
“이사님! 이사님!”
식사를 마친 하종혁이 급하게 따라왔다.
“네?”
“잘 먹었습니다. 저…… 그리고…….”
“그리고 뭐요?”
“내일 점심도…… 얻어먹을 수 있을까요?”
하종혁은 우리 회사를 가장 짧게 다닌 막내.
그랬기에 변화에 더 빠르게 반응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씩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내일은 카드 줄 테니까, 동기들이랑 맛있는 거 먹고 와요. 난 약속이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