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듣는 회사원-208화 (208/223)

<기억을 듣는 회사원 208화>

209. 사소해도 너무 사소해서 그럽니다

일산의 창고형 마트 건설 현장.

요즘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생각이 많아지는 날에는 이곳을 찾아와 멍하니 서 있는 버릇이.

매서운 바람에 흙먼지가 날렸지만,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건설 현장을 바라봤다. 회색의 콘크리트들이 하나하나 세워질 때면 내 마음이 점점 편해지는 것 같았다.

전략기획부.

70명이 넘는 조직으로 사내에서 두 번째로 큰 부서.

최구열 이사의 권력을 등에 업고 수많은 갑질을 해 왔으며, 우린 그런 그들과 항상 대립해 왔다. 특히, 부정한 방법을 주로 하던 양주영 부장이 있던 작년에는 하루가 멀다고 싸웠었다.

그들은 날 어떻게 생각할까?

그리고 양주영 부장이 빠진 이후로 모두 정상으로 돌아왔을까?

최근에는 전략기획부의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사업부 간의 괜한 대립을 만들어, 최구열 이사와 어색해지는 싫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해야 한다.

그것도 직접 그들과 마주하고 썩은 것들을 도려 내야 한다.

나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때.

“또 여기 나왔어?”

옆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지영이다.

나는 건설 현장을 응시한 채로 한쪽 팔을 옆으로 벌렸다. 그러자 지영이는 내 뜻을 알아차리고, 팔 안으로 쏙 들어왔다.

옆구리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고, 내 입가에 미소가 번져 갔다.

“추운데 뭐하러 나왔어?”

“그러는 넌?”

“글쎄. 모르겠어. 여기오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더라고.”

“최 이사님 때문이지?”

“…….”

“우리 좋게 생각하자. 그분도 좀 쉬셔야지. 그동안 쉬지 않고 달려 오셨잖아.”

지영이는 아직 내 생각을 알지 못했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최구열 이사가 아닌, 70명이 넘는 전략기획부 직원들을 상대해야 하는 것인데…….

나는 그녀를 걱정시킬 필요는 없다는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일산은 내년 여름에 완공이지?”

“응.”

“기대된다. 어떤 사람들이 이곳에 올지 말이야.”

“그래. 새로운 사람을 위해 해야겠지.”

“응?”

“그냥 그렇다고.”

* * *

늦은 저녁, 조용한 전략기획부 사무실.

나는 야근을 하는 몇몇 사람들의 인사를 받으며 천천히 휴게실로 들어갔다.

음료와 간식들이 가득한 이곳.

전략기획부 직원 대부분의 기억이 남아 있는 곳이다. 손을 뻗어 벽과 테이블, 그리고 커피머신과 전자레인지 등을 조심스럽게 만져 갔다.

<원지훈 이사가 온다고? 또 한동안 정신없겠네.>

<양 부장 쫓아낸 원지훈? 와……. 진짜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려는 건지.>

<이제 원지훈이가 다 해먹겠네.>

<어린놈이 뭘 할 줄 알겠어? 데이터나 볼 줄 알겠어?>

<지가 뭔데 그렇게 설쳐 대는 거야? 나이도 어린놈이.>

처음 듣는 목소리들.

누구의 기억인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역시 이들은 나에 대해 반감이 많았다.

충분히 이해한다.

내가 전략기획부의 일에 관여해서 틀어지거나 회사에서 쫓겨난 사람이 여럿 있었으니까.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캡슐 커피머신의 버튼을 누르는 순간, 대화하며 들어오던 남자 둘이 멈춰 섰다.

“원 이사님…….”

“오셨습니까?”

전략기획부의 서인수 부장과 김중신 부장.

현재 전략기획부에는 총 3개의 사업부와 각각의 부장이 있다.

이들 중 서인수 부장과 김중신 부장은 최구열 이사가 관리하던 직원으로 유화성 이사의 직속인 장학연 부장과 거리가 있다.

“퇴근이 늦으시네요?”

“아……. 네……. 뭐……. 그……. 그렇죠. 하핫.”

머리를 긁적이며 계면쩍은 표정으로 답하는 김중신 부장.

강자에게는 꼼짝 못하고, 약자들에게 강한 사람.

나는 그와 같은 사람을 이미 많이 상대했기에, 어떻게 상대하면 될지를 잘 알고 있다.

“잠깐 커피 한잔하실까요?”

“아……. 아닙니다. 밤에 커피를 마시면 잠이 안 와서요. 하핫.”

김중신 부장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뒷걸음질 쳤다.

그의 옆에 차가운 표정을 한 서인수 부장.

전략기획부의 실세다.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이라 최구열 이사도 그를 어려워했었다.

“서 부장님은요?”

내 질문에, 서인수 부장은 아무런 대꾸 없이 다가왔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차가운 음료를 하나 꺼내며 입을 열었다.

“밤늦게 여긴 무슨 일입니까?”

“그러는 부장님은 왜 아직 퇴근 안 하셨어요?”

“내일 오전 회의를 준비하느라 좀 늦었습니다.”

내일 오전 회의는 전략기획부의 진행 중인 업무를 브리핑 받는 자리.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 말, 저 때문에 고생한다는 걸로 들리는데, 맞나요?”

“네.”

너무도 짧고 간결한 서인수 부장의 대답.

그는 이런 사람이다.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신의 주관을 똑바로 밝히는 사람.

매번 반대를 위한 반대의 명분을 만들어 내는 사람.

그리고 이런 사람은 상대하기가 참 어렵다.

아니, 어려운 것보다는 하기가 싫다.

“솔직하시네요.”

“거짓말을 나열하는 것보다는 좋겠죠.”

“…….”

“그럼 내일 오전에 뵙겠습니다.”

서인수 부장은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의 옆에 있던 김중신 부장은 어찌할 줄 모르는 표정을 하고 내게 고개를 숙였다.

“아……. 저 친구가 좀 까칠해서……. 아시죠?”

“네. 알아요.”

“죄송합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나는 후다닥 밖으로 나가는 둘의 등을 바라봤다.

내일 오전 회의에서도 똑같을 것이다.

이들은 날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인정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을 것이다.

쉽지 않겠구나.

특히 서인수 부장이라는 사람은 더더욱 그렇겠구나.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 * *

이른 아침.

커다란 회의실 안에는 팀장 이상의 직급을 가진 전략기획부 직원들이 들어와 있었다.

총 17명에 평균 나이는 42세.

전략기획부는 사내에서 가장 경력이 많은 팀으로 우리 MD 사업부와 달리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조직이다.

회의실에 앉은 것도 딱 그랬다. 테이블 앞에는 부장과 차장들이 앉았고, 뒷 열에는 소속 팀장들이 허접스러운 간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저희 UX 팀에서는 지난 한 달간 신규 사용자의 동선에 대해 파악했습니다. 상품 디테일 페이지의 모든 버튼에 카운팅을 추가했고, 그 결과 우측 상단의 주요 이벤트들에서 가장 많은 클릭이 나온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에 구매 의욕을 가지고 접속한 회원이 다른 이벤트로 시선이 분산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이를 막기 위해 주요 이벤트가 아닌 리뷰와 공급자의 안내 등을 우측 상단에 배치했습니다.”

“그래서 결과는요?”

“실제로 지난 한 달간 페이지 내의 구매율이 3.4% 증가했습니다. 또한, 하단의 리타겟팅 제품군을 노출하면서 다른 상품군의 판매로 이어지는 횟수가 크게 늘었습니다.”

차분하게 설명하는 UX팀의 한주민 차장.

틀렸다.

그는 정작 중요한 것을 빼고, 자신의 팀이 일을 잘하고 있다는 것을 억지로 포장한 것이다.

나는 씩 웃으며 질문을 이었다.

“특판 이벤트의 판매율은 체크해 보셨나요?”

“그게…….”

“너무도 당연한 걸 빼먹으셨군요. 페이지가 변경되면, 이전에 있던 배너나 메뉴의 효율은 얼마나 감소하는지 체크하셨어야죠.”

당황한 표정의 한주민 차장.

나는 그의 뒤에 앉아 있는 UX팀의 김라온 팀장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UX팀은 한주민 차장님과 같은 생각입니까?”

“…….”

“누구든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그건 개인이니까 어쩔 수 없는 겁니다. 하지만 그 팀 전체가 모르고 넘어가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다시 묻죠. 김라온 팀장님의 생각도 같습니까?”

내 말에, 김라온 팀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보고서에는 빠져 있지만, 혹시 모를 리스크를 파악하기 위해서 기존 프로모션 효율의 데이터는 따로 뽑아 봤습니다.”

“네. 말씀해 보세요.”

“네. 특판 이벤트의 경우 접속 수가 7.62% 감소했고, 실제 판매율은 3.12% 빠졌습니다.”

“총 매출은요?”

“기존보다 1.64% 빠졌습니다.”

특판 이벤트가 노출되는 구좌가 줄어들면서, 기존보다 매출이 떨어졌다.

이는 마성근 차장이 불만을 표했던 내용이라 알고 있었다.

그리고 1.64%라는 수치.

이것도 자신들의 데이터가 맞음을 주장하기 위해 줄인 수치다.

“아니요. 7.26% 빠진 겁니다.”

“네?”

“특판은 재고로 진행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실제 재고가 빠지면서 제품의 폐기까지 이어지는 경우를 모두 고려하면 7.26%가 맞습니다.”

“…….”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김라온 팀장.

나는 그의 앞에 앉아 있는 한주민 차장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한주민 차장님. 일부러 이 데이터는 빠뜨리신 건가요?”

“…….”

역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일부러 자신의 공을 부각하기 위해서 문제점을 누락시킨 것이었으니까.

그때, 가만 앉아 있던 서인수 부장이 입을 열었다.

“상품 판매를 예측하는 것은 MD 사업부에서 하는 일입니다. 처음부터 정확한 수량을 들여와 재고를 없애는 것이 우선입니다. 재고의 처분까지 우리 전략기획부에서 고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론적으로 보면 그의 말이 맞다.

하지만 재고를 어떻게 100% 예측한다는 말인가?

너무도 현실성이 떨어지는 말이다.

인제 와서 책임을 MD 사업부로 떠넘기겠다 이건가?

내가 가만있자, 회의 내내 눈치만 보던 김중신 부장이 말했다.

“마……. 맞습니다. 회원들은 익숙한 메뉴가 빠지면서 이탈한 것이지, 시간이 지나면 이는 원상태로 돌아오거나 더 높은 효율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김중신 부장님 확신하십니까?”

“…….”

지금의 위기만 대충 넘기려는 김중신 부장.

그는 내가 눈을 부라리며 묻자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서인수 부장은 달랐다.

“네. 저는 확신합니다. 특판 상품의 경우 할인율이 더 높습니다. 정확한 것은 계산을 해 봐야 알겠지만, 매출이 아닌 영업 이익을 비교했을 때는 크게 차이가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특판 상품의 할인율을 걸고 넘어간 다라…….

이것이 바로 반대를 위한 반대.

어떻게든 반대를 하기 위한 명분을 찾아내는 그의 스타일이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이미 이 보고서들에는 실무를 담당하는 전략기획부의 막내부터 대리, 과장들까지의 기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버튼 하나하나에 공을 들이는 것은 참 고맙게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만큼 우리 마켓 프레시에 애정이 있다는 거지요.”

“…….”

“하지만 특별히 큰일이라고 판단되지 않는군요. 어린아이들 소꿉놀이하는 것처럼 사소한 수치만 보며 위치만 바꿔치기하는 건 누가 못합니까? UX팀에 새로 입사한 막내도 충분히 하겠습니다.”

“이사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소꿉놀이라뇨!”

서인수 부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이게 뭡니까? 하단에 있는 메뉴를 굳이 상단으로 바꿔서 잘했다는 칭찬을 받고 싶은 아이처럼 이 자리에서 브리핑하고.”

“……!”

“그동안 할 일이 없었죠? 뭘 해야 할지 명확하지 못했죠?”

이건 이 보고서에서 들려온 UX팀 사원, 대리, 과장들의 기억이다.

그리고 그들의 말이 맞다.

할 일이 없어서 굳이 이런 보고서까지 만들어야 하느냐는 그들의 기억이 맞다.

“이사님! 사소한 것들이 더 차이를 만드는 겁니다.”

“사소해도 너무 사소해서 그럽니다. 작년에 얘기하던 큐레이션 서비스는 어디까지 기획이 됐습니까?”

큐레이션 서비스.

비슷한 사용자들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많이 판매되는 제품을 추출하는 서비스.

작년에 전략기획부에서 메인으로 가져갔던 아이템이다.

하지만 이는 빅데이터를 다뤄야 하며, 회원들의 성향을 정확히 판단해야 하는 서비스이기에 쉬운 것은 아니다. 전략기획부, 특히 UX 팀에서는 이를 질질 미뤄 왔고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내일부터 한 달, UX팀은 큐레이션 서비스의 기획을 마무리 지으세요.”

내 말에, 회의실에 모인 모든 팀장의 표정이 잿빛이 되어 버렸다.

옥석을 가려내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하지만 나는 꼭 해낼 것이다.

지금까지 이 진흙 밭에서 빛을 내지 못했던 보석을 꼭 찾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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