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206화>
207. 아저씨 고맙습니다
* * *
“팀장님. 건축 사무소에서 조감도 보내 왔어요.”
환하게 웃으며, 둘둘 말린 커다란 전지를 들고 오는 하연두.
아침부터 기분이 좋은가 보다.
그녀는 내 옆으로 붙어 둘둘 말린 종이를 자랑스럽게 펼쳐 보였다.
그럴 법도 하다. 그녀는 이번 TF에서 함께하자는 내 말에 아이처럼 방방 뛰며 좋아했었다. 그리고 매일 일산 물류 센터에 나가 직접 건축 사무소 직원과 함께 설계를 한다고 했다.
자신의 손으로 해야 직성이 풀린다면서.
원지훈 이사와 종종 외근을 나가더니 하는 짓이 그와 똑같아졌다.
나는 조감도를 펼쳐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건축 사무소에서 퀵으로 보낸 거야?”
“네. 어때요?”
“좋은데?”
“그렇죠? 이거 보고 얼마나 뿌듯했는지 알아요? 아무래도 저 이쪽에 소질이 있나 봐요.”
“그렇다고 너무 설레발은 말고.”
“피.”
연두는 입술을 삐쭉 내밀며 고개를 약간 틀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어.”
“넵!”
씩씩하게 답을 하는 하연두.
저 표정이 너무 좋다. 순정 만화의 주인공처럼 저런 말투로 답을 할 때마다, 내 가슴은 제멋대로 발광을 해 댔다.
“경일 팀장!”
요즘, TF의 자리로 자주 오는 원지훈 이사.
인정하기 싫지만 무서울 정도로 잘난 사람이다. 세상에 나보다 잘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저 사람 덕분에 알았다.
“네.”
“조감도 나왔다면서?”
어떻게 알았을까?
연두가 처음으로 받아서 내게 보여 준 것인데…….
가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 본다.
원지훈 이사는 회사 내 CCTV를 모두 보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네. 안 그래도 챙겨서 가려고 했습니다.”
“이거야?”
그는 내 책상 위의 조감도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러다 이 조감도를 인쇄한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종이를 쓰다듬었다.
“센터에서 들어오는 하역장 방향을 바꿔야겠는데? 이쪽으로 길을 내면, 신선 창고랑 가장 가깝게 갈 수 있잖아.”
“아……. 네.”
“주차장은 지상으로 올리는 거지? 매장이 3개 층이고, 주차장도 옥상까지 해서 3개 층을 쓸 수 있겠네.”
“네…….”
그는 이 조감도만 보고 이미 모든 것을 파악했다.
그 이후에도 나는 부연 설명 하나 없이 그가 하는 말에 ‘네’라는 답 말고는 할 말이 없었다.
“이따 코스트 일산점 간다고 했지?”
“네.”
“알았어. 잘 다녀오고.”
“네.”
손을 흔들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원지훈 이사.
매번 이런 식이다. 내가 말하기도 전에 먼저 다 말하고 바람처럼 사라진다. 그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답은 ‘네’뿐이었다.
원지훈 이사가 자리를 뜨자, 곧바로 다른 TF 팀원들이 다가왔다.
“조감도 정말 잘나왔네요.”
“BI는 온라인이랑 똑같이 가는 거죠?”
“벽면이 보라색이라 확실히 튀긴 튀겠어요. 실내도 이 색으로 맞추는 거죠?”
질문들을 쏟아 내는 TF 팀원들.
보통 이게 정상 아닌가?
어떻게 조감도만 보고 건축 사무소의 의도를 모두 파악한 것인가?
나는 원지훈 이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 * *
오후 1시.
코스트의 푸트코트에서 점심을 때울 생각으로 일찍 나왔다.
미국의 대형 유통 브랜드인 코스트.
전국에 10개도 되지 않는 매장으로 국산 대형 마트들을 모두 굴복시킨 강자.
이제 우리의 경쟁자가 될 것이다.
평일 낮인데도 불구하고 푸트코트에는 길게 줄이 서 있었다. 얼마 전까지 미국스러운 피자와 핫도그만 팔던 이곳도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한쪽 벽에 줄지어 있는 소형 매대들.
떡볶이, 호떡, 만두, 닭꼬치 등등 먹을거리가 가득했다. 그리고 난 전통시장처럼 꾸며 둔 인테리어에 마음이 끌렸다.
손목의 시계를 보고 줄이 거의 없는 닭꼬치 매대로 다가갔다.
그냥 아무거나 간단하게 몇 개 집어 먹고 매장 안을 돌아볼 생각이었다.
매장 앞으로 다가가자, 꾀죄죄한 차림의 아이 둘이 마주하고 서 있었다.
한 열 살쯤 됐을까?
아이들은 주머니를 뒤집어 까, 안에 있는 동전을 하나씩 세기 시작했다. 나는 백 원과 십 원짜리가 가득한 동전들을 힐끔 보며 아이들의 옆을 지나쳤다.
“너 이게 전부야?”
“응.”
“그럼 이백 원 모자라잖아.”
“우리 딴 데 가서 먹을까?”
“여기가 제일 맛있는데…….”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닭꼬치 매대의 앞에 섰다.
닭꼬치의 가격은 3,000원.
다른 곳보다 비싸다. 무려 두 배나 되는 가격이다.
닭의 원산지는 브라질, 1,500원에 맞춰도 충분한 이윤을 남겼을 것이다.
입점 매대라 수수료가 많나?
나는 매대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아이들을 보다 고개를 돌렸다.
50대로 보이는 매대의 직원.
아니 사장님인가?
잘 모르겠다. 전통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처럼 인자한 표정을 가진 여자는 내가 주문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본 맵기로 하나 주세요.”
“네.”
“여긴 왜 이렇게 비싸요?”
“아 그건 저희 프리미엄 소스 때문인데요. 너무 달지 않고, 계속해서 땡기는 맛이 일품이거든요. 그리고 직접 수제로 구운 닭고기의 육질도 매우 좋습니다.”
준비한 메뉴얼대로 답을 하는 매대의 직원.
달지 않은데 계속해서 땡긴다라…….
그냥 완제품 받아서 판매하는 것인가 보다.
나는 그녀의 말에 별다른 대꾸 없이 조리 과정을 지켜봤다.
그녀는 진열장에 있는 꼬치 하나를 꺼내, 양념을 바르고 전자레인지 안에 넣어 버렸다. 그렇게 2분을 돌리고, 그럴싸한 종이 포장지 위에 닭꼬치를 올려 줬다.
직접 구운 수제라면서?
실망스러웠다.
전통시장에서처럼 직접 굽는 모습을 기대했는데…….
그때, 주변에서 서성이던 아이들이 매대의 앞으로 다가왔다.
“저……. 아줌마.”
“응? 닭꼬치 줄까?”
“그게요…….”
“응?”
“저희가 200원이 모자라서요. 이거 한 조각만 빼고 주시면 안 돼요?”
“뭐?”
“다섯 조각에 3천 원이면, 한 조각에 600원이잖아요. 그리고 네 조각이면 저희도 안 싸우고 두 조각씩 먹을 수 있고요.”
제법 똑똑한데?
LA 빈민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도 만두 노점의 사장과 흥정을 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의 저 아이들처럼…….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너희 엄마 어디 있어?”
차가운 표정으로 쏘아붙이는 매대의 직원.
이렇게 매서운 표정을 지을 수 있다니…….
인자해 보였다는 말은 취소다.
아이들은 그녀의 말에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
“다음에 엄마랑 와. 그때 먹어. 알았지?”
역시 안 되는 건가?
잠깐이라도 전통시장과 같은 인심을 기대했던 내가 어리석었나 보다.
나는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 매대의 직원에게 내밀었다.
“제가 살게요. 그냥 애들 하나씩 주세요.”
“어머 그래요?”
금세 자본주의 미소로 무장한 직원은 재빨리 내 카드를 낚아채 갔다.
아이들은 내 갑작스러운 호의에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둘 중 키가 더 큰 아이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아저씨 고맙습니다.”
그때, 내 등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꼬마. 한참 큰 나이에 하나 가지고 되겠어? 보니까 사이즈도 작은데? 그리고 다리 살도 아니라 가슴살이라 뻑뻑할 텐데?”
“…….”
“음료수도 같이 마셔야지.”
나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했다.
원지훈 이사.
무슨 일인지 몰라도 그가 이곳에 왔다. 그리고 매대에 가까이 다가가 메뉴판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여기 애들 순한 맛 스페셜로 인당 두 개씩, 그리고 음료는 시원한 슬러시로 하나씩 줘요. 스페셜에 갈릭 플레이크 아끼지 말고 팍팍 뿌려 주시고, 소스는 머스터드로.”
“……네? 네!”
매대의 직원이 답을 하자, 원지훈 이사는 고개를 돌려 아이들에게 물었다.
“괜찮지?”
“와…….”
“왜, 딴 거 더 시켜 줘?”
“아니요. 형 멋있어요.”
저 아이는 조금 전 나한테는 아저씨라고 했었다.
그런데 형이라고?
나이도 같은데 왜 난 아저씨고 원지훈은 형인가?
심지어 내 카드로 계산하면서…….
나는 직원에게 영수증과 카드를 돌려받고, 고개를 돌려 원지훈 이사에게 물었다.
“뭡니까?”
“여기 시장처럼 만든 매대가 새로 들어왔다고 해서 직접 보고 싶어서. 근데 생각보다 별로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인심을 쓰려면 이사님 카드로 하시죠?”
“알았어. 경일 팀장은 내가 딴 거 더 사줄게.”
“네?”
원지훈 이사는 매대에 팔을 걸치고 매대의 직원을 향해 말했다.
“여기서는 전자레인지만 쓰는 거예요?”
“아……. 이게 미리 조리해 와서 따뜻하게 데우기만 하면 됩니다.”
“안에서 바로 조리하면 좋을 것 같은데.”
“그게 소방법 때문에…….”
“에이. 거짓말. 옆에 떡볶이 매대는 바로 조리하는데, 무슨 소방법이에요? 그리고 전자레인지 안에 호일 씌워 둔 거 일주일 넘었죠?”
“네?”
“진열대 안에 양념 튄 자국도 한 3일은 된 거 같은데? 위생은 엉망에 고기는 다리 살이 아니라 가슴살, 심지어 브라질산, 코스트에서 관리 안 하나 보죠?”
원지훈 이사는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 냈다. 그리고 자신의 지갑에서 만 원짜리 하나를 꺼내며 아이들을 향해 말했다.
“애들아 여기 것 먹기 전에 내가 재미있는 숙제를 하나 줄 건데. 어때?”
“네?”
“이 숙제를 해 준다고 하면 만 원을 줄 거야.”
“…….”
“아주 쉬워. 여기 길 건너가면 닭꼬치 판매하는 형이 보일 거거든? 빨간 천막으로 친 노점상. 거기서 너희가 원하는 세 가지를 맛보고 다시 여기로 와서 나한테 어떤 닭꼬치가 더 맛있는지만 말해 주면 돼.”
어리둥절한 표정의 아이들.
둘 중 키가 큰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었다.
“네. 할게요. 저희 닭꼬치 엄청 좋아해요.”
“그래. 그런 거 같아서 너희한테 블라인드 테스트를 시킨 거야.”
“블라인드요?”
“그래. 너희 비밀요원 같은 거 알지? 007이나 어벤저스에 예쁜 누나. 그거랑 똑같은 거야.”
“아……. 어벤저스 알아요.”
“할 수 있지?”
“네!”
아이들은 원지훈 이사가 내민 돈을 받아갔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먹고 싶다던 닭꼬치를 진열대 위에 그대로 두고.
참 보면 볼수록 신기한 사람이다.
언제 길 건너편의 닭꼬치 노점을 봐둔 것일까?
그리고 언제 아이들에게 테스트를 시킬 생각을 했던 것일까?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사님은 못 당하겠네요.”
“왜?”
“어떻게 아이들한테 테스트를 시킬 생각을 하셨습니까?”
“닭꼬치가 좋다고 하잖아.”
“그리고 벌써 푸드코트 매대들까지 기획하시는 겁니까?”
“생각났을 때 해야지. 안 그러면 난 잠도 못 자.”
그가 특판팀 팀장이었던 시절.
나는 갑자기 뚝 떨어진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와 경쟁을 하면 당연이 내가 이길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그는 내가 보는 것보다 몇 수는 앞을 보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아이들로 그런 테스트를 할 생각을 했는지.
또, 이곳의 위생 상태는 언제 그렇게 관찰했는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어련하시겠어요?”
“뭐야 그 표정이랑 말투. 설마 비꼬는 거야?”
“네네. 그렇다고 해 두죠.”
“뭐?”
내 장난에, 원지훈 이사는 피식 웃고 내 어깨를 한 손으로 감쌌다.
“가자. 애들 오기 전에 푸드코트들 좀 돌아보자.”
“네.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