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204화>
205.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면 한 번 해봅시다
며칠 후.
김상만 회장의 예상이 맞았다.
부천의 워터파크에 관해 알아봤고, 매출이 떨어진 그곳이 조만간 폐업할 거라는 소문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디몰의 브랜드를 가진 아웃렛.
지자체에서 지원하는 대규모 사업.
이것만으로도 이미 절반 이상의 성공을 보장하는 사업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식품이 아닌 패션 쇼핑센터라면 나도 잘은 알지 못한다.
김상만 회장의 욕심도 이해가 가는 바이지만, 이건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때,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던 내 머릿속을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씩 웃으며 휴대전화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버님.”
- 그래 알아는 봤는가?
내 전화를 기다렸던 김상만 회장.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내 답을 기다렸다.
“네. 아버님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김선녀 회장은 디몰의 브랜드를 가진 쇼핑 단지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 역시 그랬군. 그래,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가?
“그보다 먼저, 저희가 할 수 있는 사업인지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 응?
“마켓 프레시는 이제 막 패션 카테고리를 오픈하는 커머스입니다. 과연 우리가 처음 하는 패션 카테고리를 가지고 오프라인 아웃렛까지 운영할 수 있을까요?
- 하지만 좋은 기회 아닌가? 브랜드야 부천시에서 홍보를 시작해 주면 알아서 들어와 줄 것이고. 오프라인 사업을 시작한다는 말을 들으면 온라인에도 더 많은 브랜드들이 몰려오지 않겠는가?
“그것보다 우린, 우리가 잘하는 것으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그게 무슨 뜻이지?”
“전국에 우리 물류 센터가 13곳이나 됩니다. 그리고 확장을 고려해, 계약 당시 두 배나 넓은 부지를 확보했습니다.”
“자네 혹시…….”
“네. 맞습니다. 창고형 식품 마트는 어떨까요?”
창고형 식품 마트.
외국 브랜드가 거의 점령한 시장으로 현재 대형마트들이 앞다투어 준비하고 있는 아이템이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아이템이기도 하다.
- 시설 비용은?
“이미 각 물류 센터에 콜드체인은 갖춰져 있기에 큰 비용은 들어가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각 지자체의 협조까지 얻을 수 있다면 더 적은 비용으로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흐음…….
잠시 고민하던 김상만 회장아 곧바로 말을 이었다.
- 그래. 식품이라면 원지훈이가 대한민국 최고지. 나는 좋네. 아주 좋아.
“감사합니다.”
- 관련된 세부 계획서를 보내 주게. 내가 직접, 투자할 만한 곳을 섭외해 보겠네.
“회장님이요?”
- 왜 난 나서면 안 되나?
“아니요. 그런 건 아니지만, 괜찮겠습니까?”
- 당연하지. 설마 자네도 날 뒷방 늙은이 취급하는 건 아니지?
“이제는 아닙니다.”
- 하하하 그래. 이제 좀 살맛나는군.
김상만 회장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활기가 넘쳤다.
사자가 어떻게 풀을 뜯어먹고 살겠는가?
애초에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BO푸드 회장직에서 물러나 화초를 기르는 것에 만족한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그리고 이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국내 온라인 커머스의 70% 이상을 점유한 우리의 식품 카테고리.
매출을 늘릴 수 있는 한계점에 다다랐고, 알게 모르게 지쳐 가고 있었다.
또한, 내가 없어도 되는 완벽에 가까운 MD 사업부의 인재들.
그동안 실무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 아쉬웠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온라인이 한계인 지금, 우린 새로운 오프라인시장에 도전할 것이다.
* * *
이사회.
내 깜짝 발언에 놀란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특히, 최구열 이사는 내가 준비한 PPT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창고형 마트라……. 원 이사님!”
“네.”
“일산이나 남양주 센터는 창고형 마트를 하기에 좋은 곳이라 봅니다. 하지만 서울시에서도 그만한 부지를 구할 수 있을까요?”
“차라리 대형마트가 들어가 있는 곳을 그대로 인수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요즘 폐업하는 곳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요. 그런 곳을 인수했다고 칩시다. 우린 그들과 뭐가 다릅니까? 적자를 내지 않을 거라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받는 수수료 수준으로 오프라인 마트를 운영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온라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 흑자 전환을 한 커머스가 몇이나 있습니까? 그런데도 우린 해내지 않았습니까?”
“그건 여기 있는 모두가 온라인 커머스의 경험이 있었으니까 그랬죠. 이건 단순한 자신감으로 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닙니다.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충분히 신중하게 생각했습니다.”
“오프라인은 너무 많은 변수가 존재하는 곳입니다. 젊은 혈기로 도전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닙니다.”
“지금과 뭐가 다른가요? 우리 콜드체인이나 물류 시스템 모두가 오프라인의 시스템을 기본으로 한 것입니다. 지금도 큰 자금의 투입 없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중하게 생각하자는 최구열 이사.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오프라인은 우리가 지금까지 해 왔던 것과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겁을 먹고 포기하는 것은 나와는 맞지 않는다.
그때, 유화성 이사가 손을 살짝 들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내년에 지자체 선거가 있습니다. 지금 준비한다면 내년 선거전에 오픈할 수 있습니다.”
“선거요?”
“네. 지금이 새로운 지자체에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적기라는 말입니다.”
“흠……. 선거라…….”
“최 이사님. 지자체의 협조는 제가 어떻게든 받아 내겠습니다.”
“자신 있습니까?”
“네. 자신 있습니다.”
유화성 이사가 내 뜻에 동의하자, 최구열 이사는 한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며 더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때, 손을 살짝 들어 올리며 미소를 짓는 유이나 이사.
“저도 두 분과 같은 생각입니다. 코스메틱 카테고리의 상품도 충분히 갖춰졌고, 유화성 이사님의 말씀처럼 지금 시기가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요?”
“네. 식품 카테고리는 이미 오래전에 준비를 끝낸 상황입니다. 지금 하지 못하면 두고두고 후회할지도 모릅니다.”
이제 남은 것은 김지영 대표의 생각뿐.
우린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김지영 대표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녀는 모두를 천천히 둘러보며 입술을 뗐다.
“좋아요.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면 한 번 해봅시다.”
“…….”
“일단 원 이사님은 건설과 새로운 시설에 들어갈 예산을 산정해 주세요. 그리고 최 이사님은 지열별 매출을 예측해 주시고, 유화성 이사님은 지역별 유동인구와 지자체에 제시할 지원안을 구체적으로 작성해 주세요. 마지막으로 유이나 이사님은 코스메틱 카테고리에서 입점시킬 수 있는 브랜드들 정리를 마무리해 주세요. 일주일 후 세부 계획안을 가지고 다시 회의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예.”
* * *
MD 사업부 팀장 회의.
“창고형 마트를 한다고요? 그것도 오프라인에서?”
내 설명이 끝나자, 박대영 부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네.”
“정말 우리가 할 수 있을까요?”
“네. 할 수 있을 겁니다.”
불안한 표정의 박대영 부장.
그는 안정을 제일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라 충분히 그럴 만도 하다.
회의실 안이 조용해졌다.
너무 파격적인 제안이라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그때, 김경일 팀장이 손을 살며시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저도 이사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지금 MD들로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지금 콜드체인과 물류 시스템은 모두 오프라인 유통에서 따온 시스템들이라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 판단했다.
“와. 이거 정말 재미있겠는데요? 안 그래도 좀 무료하다 생각했는데, 이사님이 또 이렇게 일거리를 물어다 주시는군요.”
“그래서 불만이야?”
“아니요. 이렇게 신이 나는데 불만이 있겠습니까?”
흥분한 표정의 김명진 부장.
역시 그는 나처럼 욕심이 많은 친구다.
“오프라인은 아직 경험이 없어 전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재고가 아닙니다. 만약 품절이 나서 상품을 진열할 수 없다면, 시간 내서 온 회원에게 실망을 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재고 관리 시스템을 구축한 도재문 팀장.
그의 말이 맞다.
오프라인 매장은 재고보다는 품절이 되지 않도록 더 신경을 써야 한다.
“수입 가전의 진열에 대해서는 각 업체에 협조를 구해 보겠습니다. 진열상품 몇 개 빼는 것은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가전 카테고리에 맞춰 말하는 이진성 차장.
“건강식품 협력사들은 난리가 나겠네요. 잘하면 오프라인 입점료까지 별도로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중장년층에게 판매가 유리한 건강 식품.
최충연 팀장은 이를 계산하고 신이 난 표정이었다.
“창고형 마트로 팔레트 하나 이상의 제품을 한 번에 팔 수 있다면 음료 제조사들은 모두 환영할 겁니다. 원하신다면 10% 이상 인상된 수수료를 받아오겠습니다.”
자신감을 내 보이는 장선영 차장.
나는 고개를 돌려, 회의 내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정진택 차장에게 물었다.
“정진택 차장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글쎄요. 일단 코스트와 같은 대형 냉장 시스템을 갖춘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문제는 채소나 과일이 아닌 정육 코너인데요. 청년 고기 쪽에 말하면 인력의 지원도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그래요. 청년 고기 쪽에는 제가 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공식품 팀은 어떤가요?”
내 질문에, 김태하 차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당연히 가공식품은 전혀 문제없습니다. 별도로 시식 코너까지 운영한다면, 제품의 홍보 비용을 추가로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끝으로 마 팀장님은 어떻습니까?”
고개를 숙인 채로 문서를 보고 있던 마성근 팀장은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당연히 이사님이 하시는 건데, 안 돼도 되게 해야죠.”
마성근 팀장은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언제나 이와 같은 답을 한다.
나는 씩 웃으며, 모두를 둘러봤다.
“그럼 모두 찬성하시는 겁니까?”
“딱히 반대할 이유가 없는 프로젝트 아닙니까?”
김명진 부장은 양손을 펼쳐 보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김경일 팀장을 불렀다.
“경일 팀장!”
“네?”
“이번 프로젝트를 맡아 줘. 각 팀에서 필요한 인력은 차출하고, 외부 인력이 필요하면 말하고.”
“예. 알겠습니다.”
꼼꼼하고 계획적인 김경일 팀장.
펫 사업팀에만 두기에는 아까운 인재다.
“먼저, 일산과 남양주에 남는 부지 확인하고 건설에 들어갈 비용도 산정해 줘. 예산은 혹시 모르니 최대한 크게 잡아. 알았지?”
“언제까지 하면 되겠습니까?”
“이번 주 안에 마무리 지어 줘.”
“이번 주요?”
오늘은 수요일.
이번 주 남은 시간은 겨우 이틀뿐이다.
“왜 힘들어?”
“아니요. 웬일로 시간을 그렇게 많이 주신데요? 내일까지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김경일 팀장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 역시 지금의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 큰 꿈을 꾸던 그에게 이제 제대로 된 옷이 입혀진 것이다.
나는 회의를 마치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이제 온라인을 넘어 오프라인까지 진출할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