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203화>
204. 그건 내 계획 착오였네
2주가 지났다.
그리고 소문은 내 예상보다 빨랐다.
내가 한 것은 겨우 최두영 이사와 차를 몇 번 마신 것과 성진 어페럴을 두어 번 찾아간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마켓 프레시와 성진 어페럴이 디몰을 인수할 거라는 소문은 돌고 돌아 내 귀에까지 들려올 정도였다.
이렇게 빠르게 소문이 퍼진 이유는 내가 간과한 하나 때문이었다.
바로 최두영 이사.
지금 마프와 성진 어페럴이 관심을 보인다는 것을 잘 포장해야 하는 그가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생각이야?”
대표이사실.
차를 마시던 지영이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디몰 말이야. 정말 인수까지 생각하고 있는 거야?”
“왜?”
“디몰은 이제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잘 알잖아.”
“물론, 알지. 디몰을 인수하고 싶었다면 처음부터 우리 대표님께 보고하고 시작했겠지.”
내가 씩 웃으며 답하자, 지영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럼 무슨 생각인데? 왜 최두영을 도와주고 있는 건데?”
“그래야 김선녀 여사를 그곳에 묶어 둘 수 있잖아. 어쩌면 크게 손해를 보게 만들 수도 있을 거고.”
“……!”
“내가 관심을 보여야, 시간을 끌 수 있어.”
“그래서 뭘 얻으려는 건데?”
“우리가 얻을 것은 이미 다 얻었어. 곽원호 부장이 넘어왔잖아.”
“그럼 왜 그러는 건데?”
“그냥 난 무게 추를 맞춰 주려는 것뿐이야. 지금은 너무 김선녀 여사 쪽에 기울어 있으니까.”
“무슨 생각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당장 그만둬.”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고개를 젓는 지영이.
그녀가 뭘 걱정하는지 잘 안다.
하지만 나는 이 게임의 관전자일 뿐, 싸움은 김선녀 여사와 최두영 이사, 둘이 하는 것이다.
“걱정하지 마. 난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으니까. 그냥 단순하게 시간만 끌 뿐이니까.”
“그러다 네가 다치면?”
“내가 왜?”
“그냥 불안해. 김선녀 회장님과 엮이는 것은 모든 다 불안하단 말이야.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분이야. 어쩌면 네 머리꼭대기에서 모든 수를 보고 있을 수 있다고.”
나도 안다.
김선녀 여사는 나보다 몇 수를 앞설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래서 지금 더 망설이고 있다는 것도 잘 안다.
나는 지영이의 손을 잡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난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이 아니야. 이건 김선녀 여사와 최두영 이사, 둘의 게임이야.”
지영이는 허공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나를 설득할 수 없음을 알고, 화제를 돌리려 하는 행동이었다.
“후……. 이번 휴가는 생각해 봤어?”
“어디 가고 싶은데 있어?”
“내가 먼저 물었잖아.”
“그럼 스페인이나 그리스는 어떨까?”
내 말에 지영이가 눈을 크게 뜨며 환하게 웃었다.
“정말?”
“응. 나 거기 가 본 적 없거든. 꼭 가 보고 싶었어.”
“정말 이럴 때 보면 너무 신기한 거 있지.”
“뭐가?”
“어떻게 내 생각이랑 똑같아? 사실, 나도 이번에 꼭 지중해에 가 보고 싶었거든.”
이 정도로 신기하긴 뭘…….
지난번에 그곳에 가고 싶다는 기억을 듣고 말했을 뿐인데.
나는 그녀가 앉아 있는 소파 옆으로 다가가 어깨를 감싸며 말을 이었다.
“지영아. 그리고 말이야.”
“뭐?”
“아예 우리 신혼여행으로 가는 건 어떨까? 저번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하지? 웨딩은 간단하게 가족들만 불러서 하고 싶다고 했던 거.”
난 종종 이런 식으로 그녀와의 결혼을 꺼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돌아오는 답은 똑같았다.
“내가 왜 너랑 신혼여행을 가?”
나는 이미 지영이의 기억을 수도 없이 들어와서 잘 안다.
사랑은 하지만 결혼까지는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나와의 나이 차이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 왜 만나는 건데?”
“꼭 만난다고 결혼할 필요는 없잖아.”
“그렇다고 꼭 결혼을 안 할 필요도 없잖아.”
“난 결혼과 사랑은 별개라고 생각해.”
지영이는 지금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아주 쿨하시네. 쿨해. 그럼 나는 이렇게 만나다가 결혼할 사람이 나타나면, 그냥 버리겠다는 건가?”
“그런 뜻이 아니잖아.”
“아니긴 뭐가 아니야?”
“계속 말꼬리 잡을 거야?”
“무슨 말꼬리? 사실이잖아. 결혼 얘기만 하면 그렇게 매번 피하잖아.”
내가 화를 내자, 지영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그 얘기는 그만하자.”
“왜 그만하는데?”
“…….”
“뭐가 부끄러운데? 나이? 난 아무 상관없다니까. 이건 우리 얘기야. 다른 얘기가 아니라 우리 둘의 얘기라고.”
“그만하자고!”
말을 끊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지영이.
결혼 얘기에는 매번 저렇게 한 발 뒤로 물러난다.
화를 내지 않으려 했는데…….
나도 모르게 또 화를 내 버렸다.
내게서 등을 돌리고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지영이.
지금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나는 긴 한숨을 내쉬고, 그녀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미안.”
지영이는 나를 밀어내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야. 내가 김선녀 회장 때문에 괜히 날카로웠던 거 같아.”
“…….”
“휴가 얘기는 다음에 하자.”
나는 그렇게 지영이를 혼자 두고 밖으로 나왔다.
지금 그녀에게 혼자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기에 그런 것이었다.
그때, 주머니에서 울리는 전화.
발신자를 확인하고 조용한 곳으로 걸어갔다.
“네. 아버님.”
- 잠깐 이곳으로 와줄 수 있겠나?
지영이의 아버지이자 BO 푸드의 전 회장이었던 김상만 회장.
나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온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네. 바로 가겠습니다.”
- 그래. 여기 별장은 알지?
“네.”
* * *
김상만 회장의 별장.
집은 작지만, 앞에 펼쳐진 정원이 화려한 곳이다. 그리고 한쪽 벽에 가득한 난들은 요즘 그가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이라고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돋보기안경을 끼고 난의 잎을 정성껏 닦고 있던 김상만 회장.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힐끔 보고, 다시 난의 잎에 있는 먼지를 정성껏 닦아 냈다.
“원 이사. 내가 왜 난에 집중하는지 아나?”
“글쎄요.”
“한두 촉의 포기만 가진 형편없는 놈을 정성껏 길러 내면 우수한 대주(大株)로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지. 마치 사람처럼……. 자네도 알지 않는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잡초 같은 놈에게도 시간과 정성을 들여 키워 내면 반드시 제값을 해 준다는 것을.”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김상만 회장은 손에 들고 있던 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디몰의 최두영이 말일세.”
“……!”
“난 자네가 무슨 생각인지 잘 알고 있어. 최두영이 같이 썩어 버린 잡초에 왜 마지막 힘을 실어 주려는지도 말이야.”
“아닙니다. 별다른 생각 없습니다. 그냥 시간만 끌 생각입니다.”
“왜?”
“이미 얻을 것을 다 얻었기 때문입니다.”
내 말에 김상만 회장은 씩 웃으며 소파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상석의 자리에 앉아 나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앉지.”
“네. 아버님.”
“난 김선녀 여사에게 아주 큰 빚이 있어. 처음 회사를 설립할 때, 내가 가지고 있던 레시피를 바론에 넘긴 것이 그녀였으니까.”
“……!”
“그녀는 BO보다 바론에 더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었어. 그래서 BO가 아닌 바론에서 새 제품을 출시하는 것이 더 돈이 될 거로 생각했었던 거야.”
“그걸 알면서도 당한 겁니까?”
“그럼 어쩌겠나? 당장 그녀가 쥐고 있던 BO푸드의 지분이 30% 이상이었는데. 그녀는 매번 그렇게 자신의 재산을 불려 왔어. 돈으로 기업을 사서, 그곳에서 얻은 영업 기밀을 다른 회사에 넘겨 왔지.”
대충은 알고 있었다.
지난 오랜 세월 바론이 그런 방법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때 하나의 의문이 들었다.
김선녀 여사가 그런 사람인 줄 알면서, 김상만 회장은 왜 마켓 프레시를 만들 때 그녀의 투자금을 받은 것일까? 커머스는 그녀의 돈이 없었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사업이었는데.
“그럼 왜 BO 커머스를 시작하실 때 김선녀 여사의 자본금을 받으신 겁니까?”
“그건 내 계획 착오였네.”
“네?”
“난 온라인 유통이 그렇게 이렇게 큰 수익을 남길 수 있다고 생각 못했어. 그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온라인 커머스들이 투자금과 매출만 많았지, 제대로 된 영업 이익을 낸 곳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
“김선녀 회장은 가장 먼저 최구열이를 데려왔네. 그리고 최구열이가 자네를 데려왔고. 그렇게 규모가 점점 커지는데, 그때 알겠더라고. 내가 틀렸다는 것을……. 김선녀 회장이 나보다 더 정확하게 예측을 했다는 것을 말이야.”
“그 얘기를 왜 지금 하시는 겁니까?”
“나도 자네랑 같았어. 김선녀를 업고 있던 최구열이와 정근영의 무게추만 맞춰 주려 했었네. 커머스가 잘되면 돈을 조금 버는 것이고, 잘 안 되면 김선녀 회장에게 복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으니까.”
허공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짓는 김상만 회장.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김선녀 회장은 더 많은 계획을 하고 있을 거야. 그녀는 그런 사람이니까.”
“…….”
“어쩌면 자네가 시간만 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이참에 아예 욕심을 내 보는 건 어떨까?”
“네?”
“매번 당하기만 했던 우리가 이번엔 반격을 좀 해 보는 건 어떨 것 같은가?”
김상만 회장은 테이블 밑에 있던 노란 서류 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내게 열어 보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어 안에 있는 두꺼운 문서를 확인했다.
디몰의 현재 자산과 최근 매출.
특히 보유한 부동산에 대해 자세히 적혀 있는 문서였다.
그리고 문서에서 들려오는 김상만 회장의 기억.
<이곳에 쇼핑 단지를 짓는다는 건가?>
<도로가 생기고,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 여주보다 큰 규모로 형성될 수 있어.>
<김선녀가 이래서 디몰을 놓지 못했던 거야.>
디몰이 가지고 있는 경기도 부천 근처의 부지.
현재는 별로 인기가 없는 워터파크에 임대를 준 부지이기도 하다.
“아웃렛입니까?”
“역시 눈치가 빠르군. 맞네. 김선녀 회장은 그곳에 대형 아웃렛을 계획하고 있는 거야. 교통도 좋고 인근에 다른 상업 시설도 잘되어 있으니까.”
“그럼 워터파크는?”
“적당히 보상금 주고 내보내면 그만이잖아.”
“…….”
“나이를 많이 먹으면 주변에 사람이 많아지지. 부천시의 공무원이 내게 들고 왔더라고. 김선녀 회장보다 빨리 사업을 추진해 보자면서 말이야.”
“…….”
“자네 생각은 어떤가?”
디몰의 이름을 걸고 시작하는 오프라인 아웃렛.
많은 소비자가 몰릴 수 있다.
또한, 입지적으로 완벽하다. 부천은 젊은 사람들이 많은 홍대와도 가까운 곳이며 외부 시설을 유치하는 데 힘을 쓰고 있는 도시이이니까.
“그래서 아버님은 디몰을 먼저 인수하자는 말씀이십니까?”
“맞아. 디몰이라는 브랜드와 이 부지는 충분히 그 값어치를 해 줄 수 있어.”
그래서 김선녀 여사가 망설이고 있다는 것인가?
최두영 이사는 왜 이 사실을 몰랐을까?
께름칙한 마음에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답했다.
“좀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최대한 빨리 알아봐 주게.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자네뿐이니까.”
나는 김상만 회장이 넘긴 자료를 옆구리에 끼고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