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듣는 회사원-200화 (200/223)

<기억을 듣는 회사원 200화>

201. 회장님을 잡아줄 수 있겠습니까?

한 달 후.

“철민 대리! 나 볼펜 하나만!”

“민용 씨! 보안 업체 불렀어? 여기 출입문 고장인 거 같은데?”

“미나 씨 이리 줘! 무거운 거 들 때, 나 부르라니까?”

“고마워요. 이 과장님.”

“내가 남는 게, 힘뿐이라서 말이야. 하하하.”

디몰을 그만두고 처음 회사에 출근한 패션 카테고리의 MD들.

조건은 좋지 못했다.

기존에 받던 연봉의 10% 인상이 전부였다.

스톡옵션의 지급도 뒤로 밀었고, 직급도 이전과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이었다. 누구 하나 인상을 쓰거나 불평의 말을 내뱉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내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한 남자.

나는 그를 급하게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목에 걸린 사원증을 보고 어렵게 결혼을 한다던 이준하 과장임을 알았다.

“이렇게 안 하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이래야죠. 저희 팀원들 데려올까요?”

삐쩍 마른 몸매에 붉은 넥타이.

멜빵을 했으면 마성근 팀장으로 오해할 정도의 외모였다.

하는 짓과 말투도 어쩜 그렇게 비슷한지…….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당연히 인사를 드려야죠. 첫 출근인데.”

“정말 괜찮습니다.”

“그래도…….”

“그것보다 이준하 과장님이시죠? 결혼 축하합니다.”

“헛, 들으셨어요?”

“네. 곽 부장님이 말씀해 주셨어요. 청첩장 나오면 저도 꼭 주세요.”

“그래서 제가 누굽니까? 위층의 식품 MD님들 인사도 할 겸, 100장 넘게 챙겨 왔습니다. 청첩장 핑계로 인사도 좀 하고 그러면 좋을 것 같아서요.”

이준하 과장은 미안한 표정과 함께 상의 안 주머니에 있던 새하얀 봉투를 건넸다.

나는 봉투를 열어 날짜와 장소를 확인하고 미소를 지었다.

“이번 달 29일이네요?”

“네. 꼭 오셔서 식사하고 가세요. 귀한 분들 오실 거 같아서, 예식장에서 가장 비싼 뷔페 코스로 쫘라락 깔아 놨습니다.”

“그러죠.”

내가 답을 하자, 멀찍이 서 있던 곽원호 부장이 다가왔다. 그리고 이준하 과장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준하 과장, 인사가 핑계고 청첩장이 주목적 아니야?”

“아닙니다. 본부장님은 절 그렇게 모르세요?”

“알지. 아주 잘 알지. 이번에 축의금으로 한몫 잡으려는 거잖아.”

“하늘에 맹세코 아닙니다.”

“뭐, 이번엔 믿어 주지.”

“진짜라니까요!”

곽원호 부장은 이준하 과장의 팔을 툭치고, 고개를 돌려 나에게 이유를 설명했다.

“디몰은 식품과 패션이 분리되어 있어서 청첩장도 못 돌렸거든요. 사실, 저도 최두영 이사님 빼고 다른 분 얼굴을 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냥 두면 알아서 매출을 유지할 거로 생각했던 것일까?

바론은 디몰의 패션 카테고리에 전혀 관심이 없었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랬군요. 그나저나 정신없으시죠? 어제 정리를 하긴 했는데, 할 일이 많나 보네요.”

“아닙니다. 금방 정리 끝내고, 오후부터는 업무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그런 건 제가 못 참아서요.”

“생각보다 성격이 급하시네요.”

“네. 제가 좀 급하긴 하죠. 술 끊은 이후 더 심해진 거 같아요. 하여간 정리 끝나면 위로 올라가겠습니다. 부장님들 인사 좀 시켜 주세요.”

“네. 그러죠.”

등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정리를 다 마치고 자리에 앉아 업무를 보는 장선예가 시야에 들어왔다.

검은 레고 머리에 어깨의 뽕이 하늘로 솟은 슈트.

보통 사람은 소화하기 어려운 패션이었다.

“선예 씨. 정리 끝났어요?”

“네.”

“뭐 봐요?”

“인사팀에서 계정을 줘서 관리자 페이지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그것보다 우리 잠깐 밖에 나갈까요?”

“네?”

“좀 도와줄 일이 있어서요.”

“아……. 네 알겠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장선예.

아마, 아는 사람이 없는 지금의 분위기가 어색했나 보다.

나는 그녀와 함께 1층의 카페로 내려갔다. 그리고 커피 40잔을 주문하자, 장선예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직원들 주시려고요?”

“네. 고생하는데 이거라도 줘야죠. 저랑 같이 들고 올라가요. 한 잔씩 주면서 인사도 좀 하고.”

“둘이서 40잔을요?”

“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 보이죠?”

내가 한쪽 구석을 가리키자, 장선예는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봤다.

“아……. 네.”

“식품 MD들이에요. 이따 좀 도와달라고 하죠.”

나는 직원이 커피를 내리는 동안 벽에 등을 기대어 섰다. 그리고 뭘 해야 할지 몰라, 멀뚱멀뚱 서 있는 장선예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첫 출근인데 어때요?”

“좋아요.”

“진짜 좋아요?”

내가 다시 묻자, 장선예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사실,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아는 사람이 없어서…….”

“선예 씨가 먼저 다가가야 친해질 수 있을 겁니다. 팀원들과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도 회사원이 해야 하는 일인 거 알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그녀와 10여 분 동안 대화를 나눴다.

앞으로의 비전과 목표, 성과에 대한 보상 등등.

어떻게 보면 꼰대 같은 얘기들이었지만, 딱히 그녀와 할 얘기가 떠오르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부잣집 막내딸인 그녀는 사회 생활이 처음이라 그런지 내 얘기에 제법 관심을 보였다.

그때, 주머니에 있던 휴대전화가 울렸다.

나는 발신자를 확인하고, 등을 돌려 카페의 구석으로 걸어갔다.

“네, 원지훈입니다.”

- 잘 지냈어요?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의 최두영 이사.

그가 내게 전화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네. 이사님은요?”

- 알면서 묻는 거 같은데……. 조롱이라도 하려는 건가요?

그런 의미로 물은 것이 아닌데…….

그는 내 말을 삐딱하게 받아들였다.

“그런 거 아닙니다.”

-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재미있죠? 큰소리 떵떵 치던 놈이 이 꼴을 당하니까?

“이사님!”

- 덕분에 아주 죽을 맛입니다. 아니, 아예 죽은 거나 마찬가지죠.

“계속 그러실 거면 끊겠습니다.”

내가 전화를 끊으려 하자, 최두영 이사가 급하게 말했다.

- 잠깐만요.

“…….”

- ……시간 좀 내줄 수 있겠습니까? 전화로 말씀드리긴 어려울 것 같고, 직접 얼굴을 봐야 입이 떨어질 것 같습니다.

무슨 생각일까?

마지막 발악이라도 해 보겠다는 걸까?

아니면 얼굴 보고 원망이라도 하겠다는 걸까?

나는 궁금한 마음에 잠시 망설이다가 답을 했다.

“언제요?”

- 지금이요. 길 건너 카페 앞에 있습니다.

“…….”

- 오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바로 가죠.”

전화를 끊자, 나와 눈이 마주친 김준위와 신선팀 직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준위 씨!”

“네. 이사님.”

“미안한데, 저기 선예 씨랑 같이 커피 배달 좀 해 줘.”

“네?”

“패션 카테고리 사무실 말이야. 가서 인사도 좀 하고 친해지라고. 다들 도와줄 거지?”

“아……. 네. 알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나는 김준위의 팔을 툭 치고 밖으로 나갔다.

* * *

길 건너편 카페.

최두영 이사는 간단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이길래,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그와 마주한 테이블을 쓸어내리며 지난 기억을 들었다.

<원지훈이 도와줄까?>

<그냥 깔끔하게 포기해? 내가 얻을 건 다 얻었잖아.>

<아니야. 절대 그렇게 못해. 내가 어떻게 해 왔는데, 이번엔 절대로 포기 못해.>

“곽원우 본부장은 오늘부터 출근이죠?”

어렵게 입술을 떼는 최두영 이사.

한 번 얼굴을 본 게 전부라더니…….

이름도 제대로 기억 못하는구나.

“곽원우가 아니라 곽원호입니다.”

“아……. 그런가요? 제가 좀 헷갈렸네요.”

“용건이 뭔가요?”

“…….”

말없이 고개를 떨구는 최두영 이사.

그는 티스푼으로 커피를 휘휘 저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실 말씀 없으시면 그냥 가겠습니다.”

내가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자, 그는 재빨리 한 손을 내밀며 나를 멈춰 세웠다.

“자……. 잠깐!”

“…….”

“회장님을 잡아 줄 수 있겠습니까?”

“회장님이요?”

“네. 김선녀 회장님이요.”

“…….”

“바론이 추가 투자를 철회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디몰이 정상으로 올라오면, 그때 지분을 매각해서 투자금을 회수하겠다고 하더군요.”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너무 빠르다.

바론이 디몰을 인수한 지 아직 1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빠르네요.”

“네. 바론의 일 처리 하나는 소름 돋을 정도로 빠르더군요.”

“그래서 저한테 김선녀 회장을 잡아 달라는 겁니까?”

“네. 원 이사님도 아시겠지만, 커머스는 자본금이 빠지면 운영할 수 없습니다. 회장님도 원 이사님 말이라면 듣는 거 같으니, 이렇게 부탁을 하는 겁니다.”

뻔뻔한 것인가?

아니면, 절실한 것인가?

무턱대고 이런 부탁을 하는 그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제가 도울 거라 생각하신 겁니까?”

“네.”

“왜죠? 전, 저한테 이득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물론 잘 알죠. 그래서 거절하지 못할 제안을 드리려 합니다.”

“그게 뭔가요?”

“핫딜의 지분 7%를 가지고 있습니다. 핫딜도 이번 연도 상장을 생각하고 있는데, 가지고 계시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온라인 커머스 1위 핫딜.

격차를 줄이긴 했지만, 그들의 매출을 따라가려면 패션과 코스메틱 카테고리가 선전을 해 줘야 한다.

최두영 이사는 핫딜의 본부장 출신.

핫딜을 나오면서 주식을 팔지 않았던 것인가?

“핫딜이요?”

“네. 요즘 시세는 잘 모르지만, 7%면 최소 400억 이상은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원 이사님께는 350억에 드리죠.”

핫딜의 주식을 넘긴다고?

그것도 경쟁사의 임원에게?

돈이 필요한 것인가?

그리고 핫딜을 나왔으면서 어떻게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그 주식을 가지고 계신 겁니까?”

“초창기 창업 멤버에 대한 예우라고 해 두죠.”

그때,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기억.

<이것도 뺏어 갔으면 내가 쉽게 나가지 않았을 거니까.>

최두영 이사는 핫딜에서 내쳐졌구나.

그의 발로 나온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디몰로 간 것이었구나.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질문을 이었다.

“그걸 저에게 넘긴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없을 겁니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디몰을 살려 보려는 겁니까?”

“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끝까지 해 볼 생각입니다. 제가 자본금을 넣는다고 하면, 회장님을 설득하기 더 쉬울 것입니다.”

최두영 이사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조금 전의 기억.

<그 새끼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수는 없어.>

<내가 누군데. 나 최두영이야. 커머스 2조 신화의 최두영이라고.>

나는 얼마 전까지 최두영 이사의 적이었다.

그런 나에게 이런 부탁을 하다니…….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그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핫딜의 주식은 탐이 나지만,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최두영 이사는 각종 악행을 자행하던 사람.

그를 돕는다면 또다시 그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

“싫습니다.”

“…….”

“핫딜의 주식이 탐나지 않고, 회장님을 보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

“제가 아는 사람이 그러더군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요.”

“아닙니다. 절대 마켓 프레시와 이사님께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요. 오늘 얘기는 못 들은 걸로 하죠.”

“원 이사님!”

“그만 가보겠습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최두영 이사가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

한없이 당당하던 그였다.

스타트업 기업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던 그였다.

하지만 나를 대하는 그에게서는 그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남을 무너트리고, 빈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익숙했던 최두영 이사.

이번에도 그렇게 하면 될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수에 당한 것이다.

나는 밖으로 나가기 전, 멍하니 앉아 있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의 어깨는, 일인자로 군림하던 사람 같지 않게 쓸쓸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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