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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듣는 회사원-199화 (199/223)

<기억을 듣는 회사원 199화>

200. 더 없어요?

며칠 후, 우린 패션과 코스메틱 카테고리의 늘어날 인력을 위해 현재 건물의 1개 층을 급하게 임대하기로 했다.

뿐만 아니라 유화성 이사는 김지영 대표의 지시로 사옥을 지을 부지를 찾아다녔다.

꿈 같은 일이다.

BO푸드 사옥의 몇 개 층을 빌려 시작했던 우리가.

드디어 우리만의 사옥을 갖게 된다.

그것도 정식 오픈을 하고 겨우 2년 만에.

“사옥 부지는 정해졌어?”

커피를 두 잔을 들고 내 방으로 들어온 김태하 차장.

그는 내 책상 위에 커피 한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아직. 유 이사님이 이 근방으로 알아보고 있어.”

“꼭 일산인 거지?”

“아무래도 그렇지. 직원들 대부분이 이 근처에 살잖아. 그리고 물류센터랑도 가깝고.”

“하긴…….”

김태하 차장이 내 방에 들어온 목적은 이것이 아닐 것이다.

10년을 넘게 안 이 녀석은 기억을 들을 필요도 없다.

얼굴만 봐도 대충은 안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희 인력 부족하구나?”

“와, 귀신 같은 놈. 어떻게 알았어?”

“얼굴에 쓰여 있는데 뭐?”

“그랬나? 하여간 요새 디몰이랑 계약 파기한 업체들이 쏟아져 나오잖아. 빨리 주워 담아야지. 지금 놓치면 평생 후회한다.”

디몰의 상황은 시간이 갈수록 좋지 못했다.

소비자들의 불매 운동으로 판매량은 갈수록 떨어졌고, 이를 견디지 못한 제조사들이 하나둘 퉁겨져 나오고 있었다.

이에 MD 사업부 대부분이 신규 제조사들의 계약에 몰두했고, 덕분에 우린 일주일 만에 30여 개의 브랜드와 계약을 마쳤다.

“얼마나 필요한데?”

“한 다섯? 그리고 다 경력이었으면 좋겠어.”

“경력이라…….”

“이사님도 알잖아. 지금 신입 뽑아서 가르칠 시간 없다는 거. 이번엔 제대로 교육을 받은 사람이 필요해.”

신규 협력사가 늘어나면 관리 업무도 많아지는 법.

다른 팀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갑자기 늘어난 업무에 모두 정신이 반쯤 나가 있는 상태니까.

“그래. 정진택 차장님은?”

“오늘은 전주 간다고 했나? 나도 얼굴 못 본 지 일주일은 된 거 같아.”

사업부 내에서 가장 바쁜 팀은 신선 식품 팀.

그들은 전국 생산자들과의 미팅을 위해 모두 외근을 나가야만 했다.

“흠……. 그래. 다른 팀들도 충원해야겠구나.”

“당연하지. 경일이는 오늘 링거 맞으면서 출근했더라.”

“그래. 이따 팀장 회의 좀 하자.”

“괜찮겠어?”

“뭐가?”

“주주들 말이야. 전에 임시 주총에서 사무실 임대랑 사옥 짓는 거 때문에 난리였잖아.”

고정비가 늘어나면 주주들의 수익도 줄어드는 법.

김태하는 이를 걱정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투자만 이어지면 주주들도 등을 돌릴 수 있어. 유 이사님한테 들었지? 연금공단에서도 발 빼려고 한다고?”

연금공단은 우리의 대주주.

담당자는 지출이 조금만 늘어도 불평을 털어 내는 인물이다.

또한, 얼마나 겁을 주는지.

자신들이 빠지면 우리 주가는 바로 곤두박질칠 거라 으름장을 놓았다.

국민의 세금으로 투자하니 이해가 가는 바이지만, 그래도 우리 쪽에 나오는 담당자는 좀 심하긴 하다.

“들었어. 빠지려면 빠지라고 하지 뭐.”

“뭐야? 뭐 믿는 구석이라도 있어?”

“아니. 없어.”

“김선녀 회장인가 뭔가를 만난다더니, 또 그쪽 자금 손대려는 거야?”

“아니. 절대 아니야.”

“그럼 뭔데?”

“그냥 자신감이랄까?”

“넌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감 타령이냐?”

김태하는 씩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내 책상에 기대어 서서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곽원호 본부장인가? 그 사람은 어떻게 됐어?”

디몰의 곽원호 본부장은 내가 가장 공을 들이는 사람.

여러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기억까지 들어 봤지만, 그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이야.”

“뭘 그렇게 튕긴데? 조건도 최고잖아.”

“10년간 근무했던 회사인데, 생각할 게 많겠지.”

“베이식 김도식 부장이나 피핀 박지민 이사는 만나 봤어?”

“김도식 부장은 그냥 껍데기던데? 실무는 영 꽝이면서, 애써 포장하는 게 안쓰럽더라고. 박지민 이사는 거짓말투성이라 믿을 수 없는 사람이고.”

“그러면 저스트 원 이채영 그룹장은? 얼마 전에 퇴사했다고 하던데?”

물론, 이채영 그룹장도 만나 봤다.

그리고 그녀가 퇴사한 것이 아닌 횡령으로 쫓겨난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분은 우리랑 안 맞을 거야.”

“왜? 업무 능력 좋다고 소문이 자자한데, 나랑 친한 밴더들이 강추한 인물이야.”

“오늘 결론 날 거야.”

“누구? 곽원호 본부장?”

“그래.”

김태하는 내 등을 쓰다듬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고 말을 이었다.

“우리 이사님, 그 사람한테 너무 공들이는 거 아냐? 무슨 삼고초려도 아니고…….”

“정말 탐나는 사람이야. 능력도 있고.”

“그 정도야?”

“응.”

“네가 그 정도라면 뭐……. 그래. 내가 도울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해.”

“그래. 고맙다.”

* * *

늦은 저녁 압구정의 모던바.

바의 구석에 앉아 있는 곽원호가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웬일인지, 거의 술을 마시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의 옆자리에 걸터앉으며 바텐더에게 남은 술을 꺼내 달라고 손짓했다.

“…….”

말없이 고개를 살짝 숙이는 곽원호.

그의 표정은 마치 나를 기다린 것 같았다.

“오늘은 멀쩡하시네요?”

내 질문에, 곽원호는 자신의 앞에 있는 탄산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술 끊었습니다.”

“그래요?”

“네.”

“술 끊었는데 여긴 왜 오셨어요? 혹시 저 기다리신 겁니까?”

“네.”

날 기다렸다니…….

오늘은 드디어 답을 들을 수 있겠구나.

나는 씩 웃으며, 바텐더에게 남은 술 대신 음료수를 주문했다. 그리고 그때, 정면을 응시하던 곽원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태형 팀장은 내년에 큰 아이가 중학교에 갑니다. 연주 과장은 없는 살림에 대학원까지 나와서 빚이 많습니다. 정준 대리는 일찍 결혼해서 벌써 애가 셋입니다. 준하 과장은 이번에 어렵게 결혼을 합니다. 현아 대리는 만삭이라 곧 출산 휴가에 들어가야 합니다. 상민 대리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못합니다. 곧 큰 수술이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뜬금없는 그의 말에 놀랐겠지만, 나는 달랐다.

이는 지난번에 그의 기억으로 들었던 내용으로 패션 카테고리 MD 사업부에 열 명의 자리를 비워 뒀다.

“더 없어요?”

내 말에, 곽원호는 고개를 떨구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네. 진작부터 알았죠. 본부장님이 디몰을 나오지 못하는 것이 사람 때문이라는 것을요.”

“역시 그 소문이 사실인가 보군요.”

“무슨 소문이요?”

“이사님이 독심술을 한다고 하던데.”

“독심술이라……. 뭐 나쁘지 않네요.”

“정말 가능하겠습니까? 좀 많은데…….”

“몇 명이죠?”

“스물셋입니다.”

스물세 명이라…….

생각보다 많구나.

얼마 전에 패션 카테고리 정규직 MD 열 명을 채용했다.

디몰에서 넘어올 MD들을 모두 포함하면 33명.

코스메틱 카테고리의 MD가 스무 명인 것에 비하면 너무 많은 수준이다.

물론 언젠가는 50명, 100명이 되겠지만, 처음부터 MD 서른셋을 두는 것은 무리가 있다. 또한, 식품 카테고리에도 최소 20명 정도가 늘어나고 디자인, 개발 등에도 인력이 충원되면 고정 비용이 늘어날 것이다.

과연 주주들이 가만있을까?

주총 때 사옥을 짓는 것에 반대하던 그들인데?

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주주들에게 불평이 나오지 않게 하려면 결국 뭔가를 포기해야만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자, 곽원호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역시, 어려운가 보군요.”

“아니요. 어렵진 않습니다. 대신, 주주들을 설득할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명분이요?”

“네. 명분이요. 갑자기 이렇게 많은 인력이, 더군다나 같은 회사에 있던 사람들이 몰려오면 좋게 보지 않더라고요.”

주주들은 업무보다는 파벌과 세력 나누기에 익숙하다. 그래서 지금과 같이 대규모의 인력이 넘어올 경우, 본능적으로 경계할 것이다.

곽원호는 탄산수를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주주들은 의심이 많은 족속이니까.”

“네. 그래서 말인데요.”

“…….”

“스톡옵션 지급 기한을 좀 미뤄 볼까 합니다. 아무래도 주주들에게 직접적인 것은 주식이니까요. 괜찮겠습니까?”

내 말에, 곽원호가 씩 웃었다.

“그러세요.”

“아쉽지 않아요?”

“아쉽죠. 아주 많이 아쉽죠. 그것도 BO커머스의 주식인데…….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우리 목표는 이사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 위에 있으니까요. 당당하게 저희 실력으로 받아 내겠습니다.”

“궁금하네요. 제가 생각하는 목표보다 높다고 하시니.”

“…….”

“목표가 뭡니까?”

“1년 안에 디몰의 최고치를 넘어서겠습니다.”

디몰의 연 매출은 대략 1조 원가량.

이를 1년 안에 넘는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의 목표.

나는 더 큰 꿈이 있기에 코스메틱과 패션에 더 많은 투자를 하는 것이었다.

“겨우 그겁니까?”

“네?”

눈을 휘둥그레 뜨는 곽원호.

나는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고, 의자를 돌려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본부장님. 우리가 왜 코스메틱과 뷰티를 급하게 가져가는지 아세요?”

“글쎄요. 저도 그건 좀 궁금했습니다. 물류 센터도 계속 늘리고, 사옥도 올리고, 카테고리까지 늘리면 또 적자로 돌아서는 거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일시적일 겁니다.”

“그러면?”

“코스메틱은 이번 연도에 아마존과 알바오에 판매를 시작할 겁니다. 그리고 내년에는 패션도 똑같은 절차를 밟게 될 것입니다.”

“……!”

“바론이 국내에서 우릴 따라 잡으려 할 때, 우린 더 큰 시장을 봤습니다.”

“코스메틱과 패션도 미리 얘기된 겁니까?”

“네. 물론이죠. 특히 알바오는 패션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그럼 저희가 선택한 의류가…….”

“네. 알바오 메인에 걸릴 겁니다. 앞으로 공부 많이 하셔야 할 겁니다. 지금까지 하셨던 일과는 좀 다를 거니까요.”

“주주들은 스톡옵션을 포기하는 것만으로 설득할 수 있을까요? 혹시 더 필요하다면…….”

다급하게 묻는 곽원호.

이전까지는 자신의 직원들 챙기기에만 급급했던 그였는데, 이제는 좀 욕심이 나나 보구나.

패션을 하는 사람들에게 중국의 알바오는 꿈의 무대다.

많은 잠재 고객이 존재하고, 한류 열풍으로 성공이 보장된 시장이니까.

나는 그의 말을 끊어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능할 겁니다. 든든한 분이 계시거든요.”

“누구요?”

“김지영 대표님. 주주들 구워삶는 데는 아주 타고난 분입니다.”

“아……. 네.”

“믿으세요. 이제 우린 한 팀이니까.”

이로써 곽원호 본부장과 그의 사람들을 얻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목표치보다 더 높은 꿈을 꾸게 될 것이다.

아시아 미국, 더 나가서 유럽까지.

유통기한이 있는 식품과 코스메틱은 제약이 많았지만, 의류는 그렇지 않다.

충분히 더 높은 목표를 잡을 만한 시장이다.

특히 한류 열풍이 불고 있는 지금은 더더욱 그렇다.

나는 남은 음료수를 털어 넣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다른 조건은 없습니까?”

“네. 없습니다.”

“좋아요. 이제는 제가 해야 할 일만 남았군요.”

“부탁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곽원호.

10년 가까이 함께해 온 직원들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중국 알바오라는 더 큰 시장 때문이었을까?

그가 지금처럼 내게 고개를 숙인 것은 처음이었다.

이제 준비 운동은 끝났다.

식품으로 지금까지의 기초를 닦았고, 우린 더 큰 시장을 향해 나갈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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