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98화>
199. 그때는 왜 거절하셨습니까?
“매일 드시나 보죠?”
압구정의 모던 바.
곽원호 본부장이 앉아 있는 바에 다가갔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의자를 뒤로 빼며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오늘도 술친구 해 주시는 겁니까?”
“그러죠. 전에 보관해 둔 술도 많이 남았으니까.”
“하하하, 그거요? 그럼 오늘도 찐하게 얻어먹겠습니다.”
발음이 정확하지 않은 곽원호 본부장.
오늘도 제법 취한 상태였다.
그는 바텐더에게 손짓하며 술을 빨리 내달라는 손짓을 했다.
그렇게 술잔에 술이 차고, 얘기가 길어졌다. 그리고 그는 첫 만남 때보다 더 많은 말들을 쏟아 냈다.
“처음 시작부터가 잘못이었습니다. 디몰의 메인 타깃층은 20대인데, 어떻게 그들에게 식품을 강요합니까?”
“강요라…….”
“그게 강요지 뭡니까? 메인에 식품 카테고리 버젓이 만들어 두고……. 더군다나 바론 제품이 절반 이상입니다. 옷 사면 과자 한 봉 준다는 이벤트는 또 뭡니까? 애들은 과자나 처먹어라 이겁니까?”
“…….”
“BI도 그래요. 패션 타깃이 80% 이상인데, 시즌에 맞는 음식 일러스트나 올려 두고……. 정말 어이가 없어서……. 그러니까 있던 회원도 떠나는 겁니다.”
그의 말이 맞다.
바론은 디몰을 인수한 이후 패션이 아닌, 식품 카테고리에 무게를 뒀다. 지주 회사인 그들의 욕심이었기에 최두영 이사도 아무런 말을 못했을 것이다.
곽원호 본부장은 두툼한 손으로 입을 쓱 닦으며 말을 이었다.
“에이. 그만하시죠. 회사 얘기하니까, 술맛이 확 떨어지네요.”
나는 술잔의 술을 비우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생각은 좀 해 보셨습니까?”
“생각? 무슨 생각이요?”
“제가 제안드렸던 거요.”
“아……. 마프에 패션 카테고리를 맡아 달라는 그거요?”
곽원호 본부장은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나는 그의 풀린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생각해 봤죠. 아주 진지하게 해 봤습니다.”
“그래서요?”
“전 못합니다. 못해요.”
“…….”
“생각해 보세요. 어떤 사람이 불쑥 튀어나와서 더 좋은 조건을 주겠다고 하면 이사님은 마음이 변할 거 같습니까? 10년입니다. 자그마치 10년이요. 전 아직도 기억합니다. 빈 상가 자리 찾아서 땡처리하던 놈이 번듯한 정장을 입고 온라인 커머스의 MD가 되던 그날을요.”
입가에 미소를 띠며, 고개를 떨구는 곽원호 본부장.
그는 천천히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과연 나는 어떨까?
만약, 마켓 프레시가 지금의 디몰과 처지가 같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디몰은 곽원호 본부장의 손때가 담긴 커머스.
아무리 불만이 많아도 쉽게 떠날 수는 없는 법이다.
이해한다.
충분히 그의 마음을 이해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지금 내게는 디몰을 정상까지 올린 그와 동료들의 특별한 경험이 필요하다.
“그건 본부장님 개인의 생각이죠.”
“……!”
“사업부 인원들은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요? 어떻게든 디몰을 살려 보겠다고 생각할까요?”
곽원호 본부장은 자신의 잔에 술을 가득 따르고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이사님 참, 잔인하시네요.”
“…….”
“그걸 이 자리에서 딱 꼬집으셔야겠습니까?”
나는 그가 조금 전에 잡았던 술병을 잡고, 내 잔에 술을 따랐다.
그때 들려온 기억.
<태형이 애가 내년에 중학교 간다고 했지?>
<정준이 녀석은 벌써 애가 셋이라고 했나?>
<연주는 내년이 학자금 대출 만기라고 했을 거야.>
<준하는 회사 그만두기 전에 결혼한다고 했는데…….>
자신의 부서원들을 떠올렸구나.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디몰이 오래가지 못할 것임을.
그리고 직원들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의 잔에 술을 따라 주며 짧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본부장님은 10년간 무엇을 위해 일해 왔습니까? 디몰이라는 껍데기를 위해서 일한 겁니까?”
“……!”
“제가 본부장님과 똑같은 입장이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으셨죠?”
“…….”
“저는 제 동료들과 함께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절대 놓치지 않을 겁니다. 그들이 있어서 성공할 수 있었고, 더 큰 꿈을 꿀 수 있었습니다. 명진이는 저보다 더 치밀하고 계획적인 사람입니다. 대영 부장은 언제나 든든하고, 진성 차장처럼 제가 본 사람 중 가장 붙임성이 좋은 사람입니다. 진택 차장은 항상 노력하는 사람이고, 태하의 아이디어는 누구보다 뛰어납니다.”
“……좋은 사람들이네요.”
곽원호 본부장은 씩 웃으며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디몰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조금만 시간을 더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술병을 들어 조명에 비춰 봤다. 그리고 3분의 1가량이 남은 것을 확인한 후 말을 이었다.
“그러죠. 아직 술이 아직 3분의 1이나 남았으니까.”
“그럼 오늘은 좀 아껴야겠군요.”
곽원호 본부장은 술병의 뚜껑을 닫고, 씩 웃어 보였다.
* * *
3일 후 늦은 저녁.
문이 열리고 스타일 몰의 주영민이 안으로 들어왔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아니요. 조금 전에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일이 좀 늦게 끝났네요.”
“뭐 드실래요?”
“아휴, 제가 사야죠. 일부러 회사 근처까지 오셨는데.”
그는 부랴부랴 자리에서 일어나, 음료를 주문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진동벨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 차 많이 막히셨죠?”
“조금요. 과장님, 생각은 좀 해 보셨나요?”
“네. 근데……. 아닙니다. 이따 얘기하시죠.”
거절하려는 건가?
그 순간 진동벨이 울렸고, 나는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움켜잡았다.
<만약 잘 안 되면 내칠 거 아냐?>
<신중해야 해. 이제 회사를 막 옮겨 다닐 나이는 아니니까.>
불안하구나.
하긴 그럴 법도 하다.
생면부지의 내가 갑자기 나타나 제안했는데, 충분히 그럴 만하다.
나는 진동벨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보니까 급하게 오신 거 같은데, 일단 숨 좀 돌리세요.”
그렇게 음료를 받아와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불안하시죠?”
“네?”
“이해합니다.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내 말에, 주영민은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답했다.
“네. 말이 나와서 그런데요. 솔직히 불안합니다. 얼마 전 바론이 디몰을 인수할 때, 똑같은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팀 전체가 제안을 받았었죠.”
“그때는 왜 거절하셨습니까?”
주영민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잠시 망설이다가 입술을 뗐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아닌 차장님의 결정이었습니다. 바론은 식품 전문 회사고 아무래도 패션 카테고리에는 무게를 덜 둘 것이라면서요.”
“그럼 과장님 생각은요?”
“그때는 좀 의아했는데, 지금은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사님도 디몰이 흔들리는 건 아시잖아요. 그리고……. 마프의 패션 카테고리도 성공 보장은 없고…….”
그때 함께 마주한 작은 원형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기억.
<금현 제품들 마감 잘못된 거 뻔히 알면서, 그걸 받아? 아무리 바론의 협력사라도 그렇지. 그런 식으로 상품 받으면 오래 못 가는 거 모르나?>
<내가 디몰에 넘어갔으면 드러누워서라도 막았을 텐데.>
그의 말이 맞다.
제화 브랜드의 금현은 바론의 자본금이 들어간 회사로, 디몰을 인수 후 금현의 제품에 집중했었다.
그리고 지금 이 기억.
디몰에 넘어가고 싶었다는 생각은 의외였다.
이렇게 욕심이 있던 사람이었나?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너무도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시네요.”
“네?”
“욕심나지 않으세요? 스타일 몰보다 30% 더 높은 연봉에 직급, 심지어 스톡옵션까지 약속드렸습니다.”
“물론 욕심은 나죠. 하지만 사람은 분수를 알아야…….”
“분수요? 하……. 어떻게 과장님은 저보다 본인을 모르십니까?”
“…….”
“과장님이 생각한 아이템들을 진열하고, 과장님의 기획안이 소비자에게 평가를 받을 기회입니다. 누구보다 바라셨잖아요. 남의 눈치 안 보고 과장님 소신대로 기획하고 싶으셨잖아요.”
“그야…….”
“가족들도 아마 그걸 더 좋아할 겁니다. 매일 9시에 출근해서 6시에 퇴근하는 삶도 좋지만, 그보다 열정적으로 일하는 과장님을 더 좋아할 겁니다.”
“…….”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주영민은 남은 차를 마시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공무원이셨습니다. 두 분 다 제가 그 길을 이어 가길 바랐었죠. 안정적인 직장이니까요. 근데, 저는 그럴 수 없더군요.”
“네. 그랬겠죠. 욕심이 났으니까.”
“맞아요. 욕심이 나서 도무지 그럴 수 없었습니다. 제가 진열한 아이템을 판매하고, 그 아이템이 돋보이도록 기획하는 일이 정말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시장에서 제품을 사 와서 무턱대고 오픈마켓에 판매해 봤습니다. 덕분에 아내가 고생했죠. 한 달에 생활비 50만 원도 못 주는 남편 대신 안 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
“그 고생을 또 시킬까 봐 두렵습니다. 이제는 애도 있는데…….”
상황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법.
가족을 위해서.
안정적인 급여를 위해서.
누구보다 욕심이 많던 그는 가족이라는 벽에 막혀 자신의 꿈을 포기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핑계일 뿐, 난 그의 속에서 꿈틀대는 욕심을 잘 알고 있다.
지금 그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다.
“그렇게 못 믿으십니까?”
“아니요. 그건 아니고…….”
미안한 표정으로 말하는 주영민.
나는 고개를 저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아니라 과장님 본인이요.”
“……!”
“오픈마켓에서 판매하셨던 경력으로 스타일 몰에 취업했고, 스타일 몰에서의 경험으로 제가 스카우트 제안을 드리는 겁니다. 다음은 솔직히 저도 모릅니다. 과장님이 우리와 함께 쭉 갈 수도 있고, 다른 제안을 받고 다른 곳에 가실 수도 있는 겁니다.”
“…….”
“과장님은 그동안 저보다 훨씬 더 많은 경험을 하셨습니다. 멋모르고 시장 물건을 받아와 오픈마켓에 판매하던 사람이 아닙니다. 이제 과장님 본인을 믿으세요. 과장님은 당연히 그럴 가치와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내 말을 듣고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주영민.
안경 뒤로 보이는 그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려왔다.
나는 그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후회하시죠?”
“네?”
“디몰로 가지 않은 걸요.”
“제가 왜?”
“그런 생각하셨잖아요. 디몰에 갔다면 그렇게 안 했을 거라는 생각이요.”
자신의 생각을 들킨 주영민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아니요. 과장님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분입니다. 그만큼 욕심이 많은 분입니다.”
“…….”
“솔직해지세요. 그리고 자신 있으면 연락 주세요. 우린 무턱대고 좋은 조건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능력이 있다 판단하고 제안을 드린 겁니다.”
“후…….”
나는 그의 긴 한숨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주영민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좋습니다.”
“…….”
“욕심 내 보겠습니다. 대신, 50%는 인상해 주셔야겠습니다. 스타일 몰은 지난 5년간 연봉이 동결이었습니다.”
“스타일 몰 대신 우리에게 연봉을 올려 달라는 겁니까? 그것도 한 번에?”
“네. 제가 그 정도는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안 그렇습니까?”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좀 솔직하시네. 그래요. 그렇게 하죠.”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욕심을 억눌렀던 주영민.
그는 이제 더 많은 욕심을 낼 것이다.
자신과 가족이 모두 만족할 수 있는 결과를 위해서.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그에게 말했다.
“저희의 최종 제안을 정리해서 내일까지 메일로 보내드리죠.”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