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97화>
198. 오래는 못 기다립니다
“제가 아는 선예는 천재예요.”
나에게 사람을 추천하는 유이나 이사.
그녀는 세상에 그런 천재가 없다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나는 사람을 구할 때, 가장 먼저 남의 평가를 듣는다.
이력서에 보이는 글이나 경력보다는 직접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신빙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 정도예요?”
“네. 이사님도 장문영 씨 아시죠?”
“장문영이라면…….”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장문영, 모르세요?”
“아……. 그분?”
솔직히 모른다.
그냥 마네킹이 입은 옷만 사 입는 나는 패션에 관심을 둔 적이 없다.
“선예가 그분 막내딸이에요. 세 살 때부터 가위를 들고, 다섯 살에는 재봉틀을 잡았다던데……. 역시 피는 못 속이나 봐요. 엄마는 자신의 뒤를 이어 줄 디자이너가 되길 원했는데, 걔가 그렇게 MD를 한다고 고집을 피웠다 하더라고요.”
“그래요?”
“네. 옷을 만드는 것보다 파는 게 더 재미있어 보인다나 뭐라나……. 하여간 그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었죠. 천재라 불리던 선예가 3대째 이어 가 줄 거로 생각했는데, 실망이 컸겠죠.”
유이나 이사도 똑같은 말을 했었다.
제품을 만드는 것도 좋지만, 판매하는 것이 더 좋다는 말을.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 이사님이랑 똑같은 친구네요.”
“하하 듣고 보니 그러네요.”
“그분 나이가 어떻게 되죠?”
“스물둘이요.”
“아직 어리군요.”
“네. 근데 엄마를 따라다니면서 전 세계를 돌아서 그런지, 옷을 보는 눈 하나는 정확해요. 내년 유행할 패션까지 다 찍어 내는데, 적중률이 100% 예요.”
“타고난 MD 체질이군요.”
“맞아요.”
궁금했다.
유이나 이사가 이렇게까지 칭찬하는 장선예가 누군지.
“혹시 약속을 잡아 주실 수 있을까요?”
“어머, 이사님이 직접 면접 봐주시게요?”
“네. 왜요?”
“신입이잖아요. 경력도 없는데…….”
“어떤 사람이길래, 유 이사님이 그렇게 추천해 주시는지 궁금해서요.”
“고마워요. 제가 최대한 빨리 약속을 잡아 볼게요.”
* * *
이틀 후.
유이나 이사는 장선예와 약속을 잡았고, 우리는 그녀가 기다릴 카페로 향했다.
조수석에 앉은 유이나 이사는 가는 내내 그녀의 칭찬을 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얘기투성이였다.
열두 살의 나이에 디자인한 옷이 프랑스 패션쇼에 올라갔고, 열네 살에는 바쁜 엄마를 대신해 원단 가공을 했으며, 열다섯에는 단독 패션쇼를 열었다고 했다.
나는 유이나 이사의 얘기를 묵묵히 들으며 액셀을 세게 밟았다.
그렇게 30여 분 후, 목적지에 도착했다.
나는 큰길에 차를 세우고 유이나 이사에게 말했다.
“여기네요. 이사님은 먼저 들어가세요. 전 주차하고 갈게요.”
“네.”
주차를 마치고,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넓은 카페 안.
유이나 이사를 찾았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앉아 있는 여자를 보고 나도 모르게 멈춰 서고 말았다.
레고 장난감과 같은 단발머리.
검은색이 아닌 핑크다. 그것도 아주 찐한 핑크.
또 옷은 얼마나 화려하던지…….
알록달록한 무지개색 크롭티에 팬티인지 바지인지 모를 정도의 짧은 바지와 커다란 구멍이 뚫린 망사 스타킹.
아무리 여기가 패션의 거리 홍대라지만, 저건 좀…….
“후…….”
짧은 한숨을 내쉬고, 유이나 이사의 옆으로 걸어갔다.
“원지훈입니다.”
내가 손을 내밀자, 장선예는 나를 아래위로 훑으며 손을 내밀었다.
손등을 위로 한 채로.
그 행동은 마치, 여왕이 손등에 입을 맞추라는 것 같았다.
“장선예입니다.”
“오는 길에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무슨 얘기요?”
눈을 초롱이며 관심을 보이는 장선예.
나는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유 이사님은 천재라고 하던데요?”
“천재는 무슨. 언니, 너무 바람 넣은 거 아니야?”
“내가 뭐? 그리고 너 천재 맞잖아.”
“천재는 무슨. 요즘 그런 허위 사실 유포하면 잡혀가!”
유이나 이사의 설레발에 장선예는 자신을 낮췄다.
그렇게 우린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갔다.
부모의 기대를 받고 자란 엘리트 딸.
그런 딸이 부모가 원하지 않던 길로 간다면 보통 고집이 아닐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는 내 선입관이었을까?
그녀는 강한 외모와 달리, 말투는 상냥하고 차분했다.
“MD라는 직업이 참 매력적이더라고요. 제가 선택한 옷이 판매된다는 것은 결국 내가 옳았다는 거잖아요.”
“그건 그렇죠.”
“어릴 때는 몰랐어요. 남들이 천재, 천재 하니까 정말 제가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런데 처음 쇼를 열고 깨달았죠. 난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요.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에 비할 수 없다는 것을요.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만드는 것보다는 파는 것에 집중하자고 생각했던 것이요.”
고개를 끄덕이고, 공유한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기억에 귀를 기울였다.
<어떻게 내가 송화 언니보다 더 화려하게 만들겠어?>
<선화 이모는 절대 못 따라가. 이번에 새로 만든 패턴도 대박이었잖아.>
어린 나이부터 주목을 받아 왔던 장선예.
그 관심이 오히려 그녀의 성장을 멈추게 했구나.
하긴 그럴 만도 하다.
겨우 열다섯짜리 아이를 몇십 년 동안 이 일을 해 온 사람들과 경쟁을 붙였으니…….
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다시 옷을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네. 전혀요.”
“왜요?”
“부족하니까요.”
“그래도 그런 안목이라면 남들보다 더 유리할 수 있잖아요.”
“아니요. 그건 이사님이 잘 모르셔서 그래요. 남의 옷을 보는 것과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이에요.”
겸손이 지나치면 무능이 되는 법.
내가 생각하는 패션 카테고리에는 좀 버릇이 없어도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 필요하다.
“제가 우리 MD들 얘기를 좀 해 줄까요?”
“네!”
장선예는 궁금했는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얼마 전에 인턴 딱지를 막 뗀 김준위라는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가 한번은 작은 회사의 레토르트를 가져와서 팔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선임 MD들이 맛을 봤는데, 형편없더라고요. 맵고, 짜고……. 얼마나 맛이 강한지 도저히 못 먹을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요?”
“돌려보냈죠. 좋은 제품을 판매하는 것이 회원들과의 약속이니까요.”
“김준위라는 그 친구가 잘못했네요. MD라면 처음부터 잘 선택해 왔어야죠.”
작은 에피소드에 눈을 초롱이는 장선예.
MD가 정말 하고 싶었나 보다.
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요. 그 친구는 다른 욕심이 있었습니다.”
“네?”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무슨 수를 써서든 3개월 이내로 그 회사의 레토르트를 다 뜯어고치겠다고요. 그리고 겨우 두 달 만에 새로운 제품을 가져왔는데, 정말 놀랐습니다.”
“왜요?”
“맛이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어요.”
“어떤 제품인데요? 저도 아는 거예요?”
“진송 갈비탕, 진송 부대찌개, 진송 순두부찌개.”
진송의 레토르트 3종은 인기가 좋아 TV 광고까지 나가는 제품이다.
또한, 다른 제품과 번들 구성 판매를 자주 해서 국내에 맛을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장선예는 내 얘기를 듣고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와……. 대박. 진송, 저 그거 먹어 봤어요. 진짜 집에서 해 먹는 것같이 맛있더라고요.”
“네. 그럴 겁니다.”
“그럼 결국 그 인턴이 맞았네요?”
“맞아요. 진준이는 남들과 다르게 엉터리 같은 맛에서 특별함을 느꼈던 거예요. 선임들이 모두 포기하라고 했지만, 그 친구는 조금만 변화를 주면 반드시 대중적인 제품을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던 거죠.”
“와……. 대박. 재미있겠다.”
“그래요?”
“네. 제가 꼭 해 보고 싶었던 일이에요.”
“할 수 있겠어요?”
“네?”
“제가 옷은 잘 모르지만, 패션 MD도 똑같을 겁니다. 세상에 100% 완벽한 제품은 없어요. 소재가 좋지 못하면 MD가 이를 지적해 줘야 하고, 가능성이 있는 업체가 있다면 지원해 줘야 하는 것이 MD입니다.”
“……!”
“완벽한 제품만 골라내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아닐까요?”
“…….”
“할 수 있겠어요?”
내 물음에, 장선예를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유이나 이사는 장선예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다독였다.
“할 수 있지?”
“…….”
“하고 싶어 했잖아.”
자신감이 없다면 남을 만족시킬 수 없는 법.
지금의 장선예는 자신이 선택한 제품이 소비자에게 외면을 당한다면 쉽게 무너질 사람이다.
그녀가 유이나 이사의 말처럼 천재라면 이를 이겨 내야만 한다.
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모님과 사람들의 기대에 도망칠 곳이 필요했던 건가요?”
“…….”
“그런 생각으로 MD를 선택했다면 잘못 생각한 겁니다.”
“아니요. 절대 그런 게 아니에요. 정말 하고 싶어요. MD가 하고 싶어요.”
“그럼 능력 부족이군요.”
“…….”
“자신감이 생기면 다시 와요. 그때까지 기다릴 테니까.”
“…….”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가 볼게요.”
이제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다 해 줬다.
그녀가 주변의 기대와 관심을 넘어선다면 천재가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한다면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이 될 것이다.
카페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재빨리 뒤를 따라온 장선예가 내 한쪽 팔을 잡았다.
“정말 기다려 주실 거죠?”
“오래는 못 기다립니다.”
내 답을 들은 장선예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네.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 * *
며칠 후.
패션 카테고리 MD를 뽑는 최종 면접장.
면접관들이 회의실로 들어갔다.
이번 면접관의 헤드는 유이나 이사.
아무래도 코스메틱이 패션 카테고리와 관련성이 높아 그렇게 하도록 하고, 나는 곽원호 본부장과 주영민 과장의 스카우트를 마무리하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사님! 원 이사님!”
등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
고개를 돌려 나를 부른 사람을 바라봤다.
핑크색 레고 머리에 새빨간 슈트.
범상치 않은 옷을 입은 그녀는 며칠 전 만났던 장선예였다.
“왔어요?”
“네. 생각보다 빨리 왔죠?”
“그러네요. 면접 잘 보고,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봐요.”
내가 대충 인사를 마치고 가려는 순간, 그녀는 내 팔을 잡아 멈춰 세웠다.
“이사님.”
“네?”
“이 옷 어때요?”
“빨간데요?”
내 답에, 장예나는 고개를 틀어 피식 웃었다.
그리고 패션모델처럼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며 말을 이었다.
“이번 연도 발렌티노 쇼에 프록 드레스가 등장했었어요. 이건 치우리와 피치올리가 디렉터로 와서 그런 건데요. 미디 기장의 프록 드레스는 발렌티노가 만든 유산이 아니라, 치우리와 피치올리의 개성을 주기 위해서 만든 거였죠.”
무슨 얘기지?
발렌티노에 프록 드레스, 치우리는 또 뭐고.
내가 눈을 깜빡이자, 장선예는 양팔을 들어 올리며 사선으로 빗겨 섰다.
“제가 남들보다 팔이 좀 길어요. 근데 어때요? 길어 보여요?”
“아니요.”
“허리도 좀 긴 편인데 그래 보여요?”
“아니요.”
“목선이 좀 길고 쇄골이 예쁘다고 하는데 어때요?”
“그래서 결론이 뭔가요?”
“이거 제가 만든 옷이에요. 그것도 7년 만에.”
자신감을 잃고 옷을 만들지 않겠다고 했는데…….
이제 다시 시작하려 하는구나.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들어요?”
“그럼요. 천재가 만든 옷인데 당연히 그렇죠. 이사님 눈에는 어때요?”
“예쁘네요. 기다린 보람이 있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