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94화>
195. 샤인머스캣이랑 똑같네요
“때로는 잡기 싫은 손을 잡아야 할 때도 있는 겁니다.”
내 이야기에 최구열 이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김선녀 여사는 언제든 뒤통수를 때릴 수 있는 인물이다.
더군다나 최구열 이사는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은가?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사님은 그래서 그렇게 당하셨습니까?”
“감정을 이입하면 그건 아마추어죠. 모든 것이 나 자신을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저는 똑같은 선택을 할 겁니다.”
“…….”
“그때 일은 단순히 제가 원 이사님과의 경쟁에서 밀렸던 것입니다. 이 바닥에서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죠. 그리고 원 이사님과의 경쟁에서 밀려난 회장님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러니까 그때의 감정을 모두 잊고, 지금 다시 손을 잡자고 온 거겠죠.”
마켓 프레시의 오픈 초기.
김선녀 여사는 최구열 이사의 뒤에서 마켓 프레시 지분을 확보했다.
하지만 그들의 동맹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는 갑자기 튀어나온 내게 모든 것을 베팅했고, 나는 결국 마켓 프레시에서 그녀를 밀어냈다.
최구열 이사의 말처럼 김선녀 여사는 나에게 악감정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먼저 손을 내민 것이다.
돈이라는 절대적인 가치를 위해서…….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최구열 이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 바닥이 다 이렇죠. 감정은 빼고 필요에 의해서만 손을 잡는 것입니다.”
“만약 다른 속셈이 있다면요?”
“그건 나중에 생각할 일입니다. 일단은 지금 손을 잡는 것이 맞습니다.”
“흠…….”
“저는 찬성입니다. 아니, 대 찬성입니다. 디몰이면 너무도 매력적인 옵션 아닙니까?”
맞는 말이다.
패션 카테고리에서 10년 이상 최강자로 군림했던 디몰.
그들의 회원과 협력사를 합치면, 국내에서 가장 큰 커머스가 될 수도 있다.
“고민해 보겠습니다.”
“네. 이사님, 한 가지만 명심하세요. 사업을 하다 보면 가끔은 내가 싫어하는 사람과도 손을 잡아야 하는 상황이 옵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밖으로 나왔다.
* * *
“난 싫어. 그 사람을 어떻게 믿어?”
내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대뜸 화 먼저 내는 김지영 대표.
그녀는 최구열 이사와 반대로 일이 아닌 사람을 평가했다.
“흠…….”
“그 사람은 언제든 뒤통수를 칠 수 있는 사람이야. 저번에 그렇게 당하고, 어떻게 그런 얘기를 해?”
“그래. 이해해. 근데 디몰이 너무 탐나지 않아?”
“탐나지. 너무 탐나지. 목표까지 바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인데. 하지만 김선녀 여사와 한배를 타는 것은 싫어. 난 차라리 깔끔하게 포기하는 게 더 좋다고 봐.”
김지영 대표가 내게 강한 반대 의견을 내는 것은 아마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매번 ‘네가 알아서 해’, ‘잘할 거야’라는 말만 했는데…….
나는 아예 고개를 돌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알았어. 고민해 볼게.”
“차라리 스타일 몰은 어떨까? 거기 디몰에서 이탈한 회원도 많이 들어왔다고 하더라고.”
“스타일 몰?”
“아니면, 더블유 클럽은? 스타일 플러스도 매출이 좀 올랐다고 하던데?”
김지영 이사는 내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했다.
어떻게든 김선녀 여사의 손을 잡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다.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만약 이사회에서 정식으로 이 얘기를 한다면 어떨까?”
“기어코 이 일을 이사회까지 가져가겠다고?”
이사회에 가져가고, 주총에서 최종 표결을 한다면 이는 통과할 것이 분명하다.
주주들은 사람보다는 회사의 이득을 먼저 생각하니까.
김지영 대표는 내 옆으로 앉으며 긴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지훈아. 난 매번 네 결정을 존중했어. 언제나 맞는 선택을 했으니까. 하지만 이번은 아니야. 절대 그 사람과 엮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
“디몰, 탐나지. 인수만 하면 바로 최고가 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잘 생각해 봐. 우린 지금도 잘하고 있어. 조금 시간이 더 걸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잘할 수 있잖아. 그리고 난 무엇보다 네가 다치는 것을 원치 않아. 저번엔 잘 넘어갔지만 혹시나 잘못되면…….”
“그래. 알았어.”
나를 걱정하는 김지영 대표.
아마 이것 때문에 많은 예를 들어 반대했을 것이다.
나는 흥분한 그녀를 진정시키고 밖으로 나왔다.
* * *
“이사님! 이사님!”
MD 사업부 회의실.
이번 여름 시즌 예상 매출에 대해 브리핑하던 정진택 차장이 나를 불렀다.
“네?”
“무슨 일 있어요?”
“아닙니다. 그래서 샤인머스캣 경쟁력이 떨어진다고요?”
이번 회의 주제는 샤인머스캣이었다.
청포도와 비슷한 샤인머스캣은 알이 크고 씹을수록 망고 맛이 난다고 해서 망고 포도로도 불리는 품종이다. 당도는 18브릭스 이상이며, 산 함량은 비교적 낮은, 말 그대로 단 포도다.
“네. 샤인머스캣 열풍이 불면서 너도나도 샤인머스캣 재배를 시작했더라고요. 작년에 이미 계약을 마친 저희는 다른 커머스에 비해 단가가 비쌉니다. 특히, 에이마켓의 소비자 가격과는 30% 이상 차이가 납니다.”
“흠…….”
“새로 재배를 시작한 농가들이라 당도도 떨어지고, 씨알도 크지 않은데 아주 미친 듯이 팔려 나가나 봅니다.”
오픈마켓 시스템의 에이마켓.
그들은 판매자가 직접 제품을 올리는 시스템으로 퀄리티보다는 가격이 중요한 곳이다.
“우리 쪽 판매량은 어떻습니까?”
“좋지 못합니다. 예상치보다 60% 이상 떨어졌습니다. 아마, 다른 커머스에서 단가가 떨어지니까, 정작 우리 샤인머스캣에는 손이 안 가나 봅니다. 확실히 품질이 다른데…….”
“그렇겠죠.”
다른 커머스의 판매가가 떨어지면, 비싼 제품에 대해 손이 안 가는 법.
충분히 이해가 가는 바다.
“제품 상세 페이지에 당도까지 비교했는데, 반응이 좋지 못하네요. 이러다 예상치보다 재고가 많이 생길 것 같습니다.”
“대안은요?”
“단가를 20%까지 낮춰 보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재고를 안고 가는 것보다는 일단 다 쳐 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네. 지금은 가격을 조정하는 것이 최선으로 보입니다.”
지난 겨울, 신선식품 팀은 어떻게든 샤인머스캣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뛰어다녔다.
사입 계약을 하기 위해 전국 안 다닌 농가가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찾아온 올해 여름.
전국 샤인머스캣의 30% 이상을 확보한 우리의 기대는 컸다.
하지만 정작 뚜껑을 열어 보니 기대와는 너무도 달랐다.
너도나도 샤인머스캣 재배를 시작했고, 품질이 좋지 못한 상품이 시장에 풀리기 시작했다. 가격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소비자는 이전에 먹던 맛이 아니라며 실망을 표하기 일쑤였다.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소비자는 현명합니다. 분명 다른 제품을 맛보고 우리 제품을 찾아올 겁니다.”
“그럴까요?”
“네. 지난겨울, 좋은 제품을 선별하느라 고생하셨잖아요. 노력은 절대 배신하지 않습니다.”
“다음 주에 20톤이 추가로 들어옵니다. 정말 다음 주까지 답이 없으면 이거 다 폐기해야 할지 모릅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죠. 분명 반응이 올 겁니다.”
그렇게 회의가 끝이 나고, 정진택 차장이 내 옆으로 바짝 달라붙었다.
“이사님. 무슨 걱정 있으세요?”
“네?”
“오늘 영 이상하셔서요. 회의에 집중도 못하시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는 정진택 차장.
분명 평소였다면 발벗고 나설 일이었지만, 지금 내 관심사는 디몰과 김선녀 여사에게 쏠려 있었다.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잠깐 커피 한잔 할까요?”
“네.”
* * *
“와……. 진짜요?”
김선녀 여사의 얘기를 모두 들은 정진택 차장이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네. 차장님이면 어떻게 하실 거 같아요?”
“저야 당연히…….”
쉽게 말을 잇지 못하는 정진택 차장.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전 반대입니다.”
“그래요? 예상외네요.”
“네. 아무리 디몰이 탐난다고 하더라도, 그 할망구랑 편먹기는 싫습니다.”
“흠…….”
“욕심만 많은 할망구가 또 뒤에서 무슨 짓을 꾸밀지도 모르잖아요. 저번에는 잘 넘어갔지만, 이번은 모릅니다. 이를 갈고 준비했을 수도 있어요.”
“…….”
“생각해 보세요. 그 할망구가 과연 본전만 찾고 떠날까요? 절대 아닐걸요. 지금 우리 주가도 꾸준히 오르는데, 당연히 탐이 나겠죠. 사람의 본성은 바뀔 수 없는 겁니다. 그 할망구는 절대 본전만 찾고 떠날 인물이 아닙니다.”
“그래요. 그럼 더는 고민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정진택 차장은 뭔가 아쉬운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근데 이사님. 만약 우리가 준비를 철저히 한다면요? 저번에도 잘 막았는데 어쩌면…….”
“네?”
“막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디몰 이대로 두면 완전히 망가질 텐데.”
역시 그냥 버리긴 아까운가 보다.
나는 정진택 차장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왜? 디몰이 걱정돼요?”
“아니, 아까우니까요. 10년입니다. 장장무려 10년간 패션몰에서 탑을 유지하던 디몰인데, 주인 잘못 만나서 저 고생을 하니 아까운 거죠. 어쩌다 최두영이 같은 놈을 머리로 세워서…….”
“하긴 그렇죠.”
“최두영이 생각하니까 갑자기 화가 나네요. 이번 댓글 부대도 그렇고……. 그놈이 할망구보다 더 나쁜 놈 아닙니까? 감히 우리를…….”
오락가락하며 생각을 정리 못하는 정진택 차장.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뭔가 생각이 났는지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리고 환하게 웃으며 흥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샤인머스캣이랑 똑같네요.”
“샤인머스캣이요?”
“네. 지금 상황은 우리가 샤인머스캣을 두고 고민하는 것과 똑같잖아요. 품질이 좋지 못한데, 소비자들은 가격이 싸다는 이유로 오픈마켓의 제품으로 몰려간 현실이랑요. 이사님도 말씀하셨죠? 결국, 맛을 보고 다시 소비자들이 찾아올 것이라고요. 저도 그 의견에 동감합니다.”
“…….”
“할망구는 싼 맛에 바론을 잡았어요. 그에 반해, 마프가 비싸졌다고 해도, 그때 맛이 그리운 겁니다. 우리에게 투자했을 때는 제대로 꿀을 빨았잖아요. 근데 이번엔 이상하게 맛이 없는 겁니다. 저번에 먹었던 맛을 기대했는데 영 그 맛이 아닌 거죠.”
“흠…….”
“싸구려 샤인머스캣, 최두영이는 이제 똥줄이 탈 겁니다. 바론이 먼저 맛이 없다고 자금줄을 끊으려는 상황인데, 할망구마저 떠나면 낙동강의 오리알이 되는 거죠.”
“그럼 그냥 시간만 끌자는 건가요?”
“네, 맞아요.”
“그래서 우리가 얻는 건, 복수 하나 아닌가요?”
“아니죠. 우린 우리 나름대로 다음 그림을 그려 놔야죠. 디몰이 산산이 조각나면 그 회원들을 당겨 갈 커머스를 미리 인수하는 겁니다.”
“스타 일몰? 아니면, 더블유 클럽이나 스타일 플러스?”
“네. 맞아요. 이번 댓글 부대 이후로 그쪽 매출 좀 올랐다고 하던데.”
“흠…….”
“제 친구들 통해서 좀 알아볼게요. 아마 이런 생각하는 곳이 많을 겁니다.”
김지영 대표가 말했던 이유는 내 관심을 딴 곳으로 보내기 위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정진택 차장은 다르다.
좀 더 구체적이고 충분히 실현 가능성이 있는 말이다.
그는 남은 차를 한입에 털어 넣고 씩 웃으며 말했다.
“망할 할망구랑 재수 없는 최두영이 이번에 한번 제대로 빅 엿을 먹여 보죠.”
“…….”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할 빅 엿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