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90화>
191. 이건 선전포고 수준입니다
“이거 뭐……. 생각보다 괜찮은 거 같네요.”
샘플로 나온 투비팩.
이재훈 팀장은 이리저리 돌려보며 마지못해 칭찬했다.
“감사합니다.”
만족스러운 표정의 김준위.
그는 처음부터 투비팩을 계획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치밀하고, 더 구체적으로 말이다.
가져온 샘플을 들어 좌우로 돌려 봤다.
<길이는 딱 좋아. 3호 상자에 딱 맞겠어.>
<2호 상자에 맞춰서 완충재를 좀 줄여 볼까? 그럼 물류 비용이 더 빠지겠지?>
샘플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기억.
그가 그동안 얼마나 고민했는지를 확인시켜 줬다.
3면은 종이, 한쪽 면은 투명한 플라스틱 소재를 덧붙여 놨다. 길쭉한 우유팩을 눕혀 놓은 것 같은 사이즈에 과일이 보기 좋게 정렬되어 있었다.
특히 샤인머스캣은 예술과도 같았다.
투명한 플라스틱 뒤로 보이는 포도알들이 영롱한 빛을 내뿜었다.
“좋은데?”
내 말이 끝나자, 옆에 있던 정진택 차장이 박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브라보! 완벽해. 연구실 결과는?”
“데이터를 가져왔습니다.”
김준위는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으로 출력한 종이를 우리에게 나눠 줬다.
일단 외형 보관에는 전혀 문제는 없다.
산도, 당도, 경도, 색도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좋은데? 아니. 완벽한데?”
정진택 차장은 보던 데이터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김준위의 어깨를 툭 치며 결과에 만족한다는 생각을 밝혔다.
하지만 처음부터 부정적이던 이재훈 팀장은 달랐다.
그는 데이터를 꼼꼼히 살피다, 한쪽 페이지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준위 씨. 192원이잖아. 생각보다 20원 정도 오른 거지?”
“정확히 16원입니다.”
“정확히 해야지. 16원이면 얼마나 큰 차이인 줄 알아? 기존 플라스틱보다 무려 100원 가까이 비싼 거야!”
“60원입니다.”
“60원이나 100원이나! 시물레이션 데이터는?”
“아직 집계 중이라……. 3시까지 뽑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60원이면 그렇게 큰 손해는 아니다.
이 정도의 비용은 물류 과정에서 충분히 줄일 수 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김준위에게 물었다.
“준위 씨. 충격 테스트는 해 봤어?”
“네. 실제 물류에 넣어서 저희 집으로 배송까지 해 봤습니다.”
“스티로폼 상자로?”
“아니요. 종이 상자에 넣은 것과 그냥 이 상태로 배송해 봤습니다.”
“결과는?”
“둘 다 외형의 변화는 없었습니다.”
김준위의 말을 들은 이재훈 팀장은 더는 토를 달지 못했다.
스티로폼에서 종이 상자로 포장만 바꿔도 절감되는 금액이 60원을 훨씬 넘기 때문이었다.
“재훈 팀장님. 3일 후 오픈이죠?”
“……네.”
“다른 문제점은 없는지 꼼꼼히 확인해 줘요. 내일까지.”
“알겠습니다.”
“준위 씨. 수고했어.”
나는 김준위의 등을 토닥이고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정진택 차장이 재빨리 따라 나와 내 옆으로 바짝 붙었다.
“준위. 저놈 보면 볼수록 물건이네요.”
“그러게요.”
“이번엔 과일, 다음엔 채소까지 들어가면 1인용 제품들의 판매도 따라올 겁니다. 그리고 투비팩. 이거 진짜 괜찮네요. 처음에 이사님이 투비팩에 투자한다고 했을 때, 왜 그런 걸 신경 쓰나 했는데…….”
“그랬어요?”
“앞으로 오프라인 마트들까지 투비팩으로 과일, 채소들이 포장될 거라고 생각하니까 더 흥분되네요.”
정진택 차장은 이미 다음, 그리고 그다음까지 예상했다.
나는 씩 웃으며,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배고파 죽겠네요.”
“아……. 그러시죠.”
* * *
늦은 오후.
“지훈아! 지훈아!”
김태하 차장이 내 방문을 열고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뭔가 이상하다.
회사에서 꼬박꼬박 존칭을 쓰던 그인데…….
“무슨 일 있어?”
김태하 차장은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휴대전화를 들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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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세진 공룡 마켓 프레시, 판매 수수료 인상
- 한국비즈
마켓 프레시 수수료 17.2% → 18.3%로 인상
- 종합뉴스
마켓 프레시와 다른 행보, 디몰 정직한 수수료로 제조사와의 상생을 꿈꾸다
- 이경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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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3분 전에 쏟아져 나온 기사의 헤드라인들.
이번엔 언론을 통해 공격하려는 것인가?
우리는 모든 제품을 직매입하기에 수수료가 높을 수밖에 없다. 또한, 물류까지 직접 운영해 제조사나 벤더들의 비용이 절감된다.
하지만 이를 자세히 모르는 소비자들.
그들은 분명 과정이 아닌 이 숫자에만 집중할 것이다.
나는 기사를 하나 눌러 밑에 달린 댓글들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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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ar***
판매자 입장에서 마프는 정말 뼈까지 갈아먹는 악랄한 놈들이다.
jjjim***
마프는 판매 수수료가 높아서 그만큼 판매자들이 가격을 높게 잡아서 판매할 수밖에 없는 구조임. 실제로 다른 곳과 비교해 보면 더 쌈.
cps21***
야들아 마프 달빛배송 의미 있냐? 다른 업체도 이튿날이면 오는데
jack***
이러니까 소비자들만 가격 올라 피해지.
4han***
도둑놈들. 벼룩의 간을 빼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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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부정적인 댓글들.
냄새가 나지만 딱히 증거는 없다.
김태하 차장은 내 옆으로 바짝 붙어 고개를 들이밀며 말했다.
“이런 기사를 뿌려? 지들은 물류를 다 안 하니까 수수료를 그렇게 받는 거잖아.”
“…….”
“그냥 이대로 둘 거야? 우리도 빨리 보도자료 보내서 대응하자. 응?”
“태하야, 넌 일단 BO로 넘어가. 홍보팀장에게는 전화해 둘 테니까.”
“알았어.”
김태하는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나는 테이블 위에 있던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
“이사님!”
- 지훈이, 오랜만이네.
잠에서 막 깬 거 같은 목소리의 이정우 이사.
나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인터넷 보셨어요?”
- 잠깐만. 나 지금 막 일어나서 말이야. 어제 밤새도록 촬영했어. 오늘 편집까지 해야 하는데 언제 다 하냐. 요새는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라니까. 어제는 말이야 온종일…….
이정우 이사는 컴퓨터의 전원을 켜면서 넋두리를 시작했다.
다급한 나는 그의 말을 바로 끊어 냈다.
“멀었어요?”
- 왜? 뭔데? 뭐길래 천하의 원지훈이가 그렇게 안달이야?
“수수료를 문제 삼는 기사들이 올라왔습니다.”
- 수수료? 잠깐 나 지금 컴퓨터 켰어.
잠시 후, 이정우 이사는 기사의 헤드라인을 소리 내 읽기 시작했다.
- 온라인 커머스 수수료, 결국 소비자 부담…… 온라인 공룡 마켓 프레시 수수료 인상……. 와……. 이 새끼들은 페어플레이도 모르나? 디몰이지? 디몰 그놈들이지?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 뭐가 확실하지 않아? 딱 봐도 디몰이잖아. 자기네 수수료 밑에 붙여서 비교하는 거 보고도 몰라?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댓글들이요.”
수화기 너머로 급하게 마우스 스크롤을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정우 이사는 화를 찾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 이게 뭐야? 뭐 이렇게 죽어라, 덤벼? 댓글도 장난치는 거 아냐?
“모르죠.”
- 이 새끼들 진짜 안 되겠네?
“…….”
- 오늘 늦게 딱콩이 영상 올라가는데, 거기다 좀 설명을 넣어 볼까? 어때?
딱콩은 구독자 50만이 넘는 먹방 BJ.
이를 원했기에 이정우 이사에게 전화했던 것이다.
“가능하시겠어요?”
- 응, 할 수 있을 거야. 아니. 해야지. 꼭 해야지.
“그럼 필요한 자료 보내드릴게요.”
- 아니야. 보내지 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일단 그쪽에서 수습을 좀 해 봐.
“고맙습니다.”
- 잊었어? 나도 마프 대주주야.
여론으로 상대를 걸어왔다면, 똑같이 여론으로 대응해야 하는 법.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많은 기사와 인지도가 높은 사람들의 입을 빌리는 것뿐이다.
전화를 끊자, 곧바로 최구열 이사의 전화가 걸려 왔다.
- 이사님 어디십니까?
“제 방입니다.”
- 기사 보셨죠?
“네. 바로 가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고, 최구열 이사의 사무실로 향했다.
* * *
미간을 좁힌 채로 모니터를 보는 최구열 이사.
그는 기사와 댓글들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옆에 있는 나에게 말했다.
“최두영입니다.”
“확실하십니까?”
“네. 제가 그룹폰에 있을 당시에도 이런 짓을 자주 했었습니다.”
“그때는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고개를 푹 떨구고 좌우로 젓는 최구열 이사.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대응 못했습니다. 이건 선전포고 수준입니다. 앞으로 이들은 지속해서 꼬투리를 잡아 여론을 이용할 겁니다. 이번엔 수수료지만 다음엔 직원들 처우가 될 것이고, 그다음은 품질, 배송……. 모든 것을 부풀릴 것입니다. 그게 최두영의 방식입니다.”
“……!”
“이사님은 왜 그룹폰이 한국을 철수하고 바로 매각됐다고 생각하시나요?”
“그야 한국 제조사들과의 트러블이랑 직원들의 불만이…….”
“대부분이 그렇게 알고 있죠.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최두영이 다 만들어 낸 것들입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최두영 이사를 너무 간과했구나.
이렇게 악랄하게 상대를 공격하고 자리를 뺏다니.
“왜 대응 안 하셨습니까?”
“대응했습니다. 근데 계속 커지더군요. 눈덩이처럼 커진 소문은 우리가 아무리 대응을 해도 막아 낼 수 없었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는 최구열 이사.
나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증거를 찾아야 합니다. 최두영 이사가 뒤에 있다는 증거요.”
“네. 일단 저도 알아보겠습니다. 하지만 쉽지 않을 겁니다. 얼마나 치밀한지, 이전에도 어떤 혐의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두 분, 여기 계셨군요!”
최구열 이사의 방문이 열리고, 김지영 대표와 유화성 이사가 들어왔다.
김지영 대표는 나와 최구열 이사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기사들 보셨죠?”
“네. 우선 김태하 차장을 푸드 홍보팀 쪽에 보냈습니다. 이정우 이사의 BJ들 방송에도 수수료 부분을 추가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 유화성 이사가 말을 이었다.
“전략 기획 팀은 외주 홍보 팀을 섭외하도록 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대표님. 그냥 우리 맞불로 가는 건 어떨까요? 우리만 손해 볼 수는 없잖아요.”
디몰의 단점에 대한 보도 자료를 내자는 말.
김지영 대표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요. 그럼 같이 죽자는 것밖에 안 됩니다. 일단 여론이 이해할 만한 대응을 해야 합니다.”
“그러다 매번 이러면요?”
“그건 이번 문제에 대응하고 다시 논의하시죠.”
“……알겠습니다.”
분을 참지 못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유화성 이사.
김지영 대표는 침착하게 그를 설득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최구열 이사를 보고 말했다.
“최 이사님은 바이럴 업체들을 좀 찾아주세요. 댓글들을 보니까 아마 바이럴 대행사를 껴서 움직인 것 같습니다.”
불법적으로 얻은 포털 사이트의 아이디로 댓글과 여론을 조작하는 바이럴 대행사들.
나 또한 이들을 의심했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때, 최구열 이사의 방문이 열리고 MD 사업부의 김명진 부장이 들어왔다.
“이사님! 원 이사님!”
그는 이곳에 모여 있는 대표와 이사들을 보고 다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너무 급한 일이라…….”
“부장님 무슨 일인가요?”
내가 묻자, 김명진 부장은 고개를 들고 급하게 말했다.
“콜센터 쪽으로 항의가 폭증하고 있다고 합니다.”
“콜센터?”
“네. 수수료는 회원 부담이라면서……. 환불까지 요구를…….”
“얼마나 되지?”
“아직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일단 박대영 부장이 콜센터로 직접 갔습니다.”
“한 시간 내로 환불 금액과 사유들 정리해 줘.”
“알겠습니다.”
최구열 이사의 말이 맞다.
이건 시작이다.
수수료를 걸고 넘어가는 것은 겨우 시작일 뿐이다.
회사라는 조직은 모두가 100% 만족할 수 없는 법.
분명 다른 곳에서도 잡음이 새어 나갈 것이고, 최두영 이사는 이를 잡아낼 것이다.
나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