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듣는 회사원-188화 (188/223)

<기억을 듣는 회사원 188화>

189. 사과는 센 놈한테 하는 게 아니다

마포 홀리스 호텔 앞.

이곳으로 오는 중에 리우 포에게 카페로 내려 오라는 전화를 했다.

그는 거의 술을 마시지 않은 것 같았다. 목소리와 태도, 심지어 한국어 억양까지 오전과 같았다.

호텔의 카페로 들어서자, 미리 내려 와 있던 리우 포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샤워를 방금 마쳤는지, 머리에 물기가 아직 있었다.

안경 뒤의 동공은 흔들림이 없었고, 옷은 오전과 다른 편한 캐쥬얼 복장이었다.

“마성근 팀장이 많이 취했더군요.”

“아……. 그분. 참 재미있는 분이시더라고요. 중국어도 잘하시고…….”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신 겁니까?”

“많이 드셨나요? 전 그분 술이 꽤 센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군요.”

“…….”

“이번 프로젝트에 굉장히 의욕이 강하신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든 꽌시로 엮어 보시려 노력하시던데……. 그럴 필요 없다고 전해 주십시오. 우린 관계보다 실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회사입니다.”

리우 포는 태연하게 내 말을 받아쳤다.

오전과 같이 겸손하고 차분한 태도로.

심지어 의심한 내가 더 부끄러울 정도로 말이다.

어차피 마주한 테이블에서 들리는 기억은 모두 중국어.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직접 확인해 보는 수밖에…….

“혹시, 디몰과 우리를 비딩 붙이려 하시는 겁니까?”

“디몰이면 바론 아닙니까?”

“네. 맞습니다.”

“바론의 제품들은 중국에도 많습니다. 그들의 제품이 우리 기획전에 들어와도 고객들은 전혀 새롭지 않을 겁니다.”

리우 포는 바론과 디몰의 제품을 아예 염두에 두고 있지도 않았다.

마성근 팀장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아니다. 아닐 것이다.

마성근 팀장의 기억에서는 분명 이들이 많은 것을 요구했었다.

“믿어도 되겠습니까?”

“네. 그리고 설령 우리가 그렇게 한다고 해도 자신 없습니까? 난 원 이사님이면 당연히 자신 있으실 거로 생각했는데요?”

강하게 부인하는 리우 포.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남은 커피를 마시는 사이, 그는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근무 시간에 술을 마신 게 문제였나요?”

“네?”

“마 팀장이요.”

“아닙니다. 그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술에 목적이 들어가고, 그 목적을 위한 자리가 이어진다면 엇나갈 것이 분명해서 그럽니다.”

“세상에 목적이 들어가지 않은 술자리가 있을까요? 그것도 첫 만남에?”

마성근 팀장의 일방적인 착각이라는 말일까?

아니면 자신들이 목적이 있다는 뜻일까?

차갑고 딱딱한 리우 포의 어조에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는 재빨리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장난입니다. 장난.”

“…….”

“그냥 해 본 말입니다. 우린 그 술자리에서 어떤 목적도 갖지 않았습니다. 그냥 마켓 프레시가 궁금했을 뿐입니다.”

“그 말, 일단 믿어 보죠.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를 빌미로 무리한 요구를 한다면, 저희는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지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내 설레발이었나?

나는 태연히 커피를 마시는 리우 포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옅은 미소를 짓는 그의 표정에서는 전혀 마음을 읽을 수 없었다.

기억이라도 들으면 좋겠건만…….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오른손으로 테이블을 쓸어내렸다.

들려오는 리우 포의 기억들.

중국어뿐이다.

영어 단어 하나도 없다.

그렇게 10여 분이 지나고, 나는 그 어떤 힌트도 얻지 못한 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 * *

며칠 후.

알바오 담당자들이 중국으로 돌아간 후 어떤 연락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그때의 기억을 잊었고,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이 이어졌다.

- 다음 주 특판 리스트 컨펌 부탁드립니다.

마성근 팀장의 메시지에 인트라넷 페이지에 접속했다.

레토르트 3종과 스낵 2종, 신선 식품은 5종에 새로운 베이커리 2종이 추가됐다.

나는 추가된 베이커리 제품들의 스펙을 확인했다.

처음 보는 제품들.

이상하다.

이런 제품이 있다는 것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심지어 우리 마켓 프레시에서 판매하는 제품군이 아니다.

나는 메신저로 마성근 팀장을 불렀다.

- 마 팀장님. 베이커리 제품들 뭡니까?

- 네? 어떤 제품이요?

- 실크롤케이크랑 초콜릿 깜빠뉴요.

- 아! 그거요? 저희가 시식해 봤는데, 괜찮아서 추가해 봤습니다.

- 제조사가 어딥니까?

- 잠시만요. 확인해 보겠습니다.

이상하다.

평소 같으면 제조사나 벤더명을 바로 말했을 텐데…….

지금의 마성근 팀장은 이상하게 뜸을 들였다.

마치 내가 묻지 않길 바라는 것처럼.

그렇게 1분 정도가 지나, 그는 여섯 글자의 메시지를 보냈다.

- 몬도나입니다.

베이커리 생산을 주로 하는 몬도나.

우리와 거래하는 제조사가 아니다.

그리고 중국산 밀가루를 주로 쓰고, 6개월 전 중국산 잣의 원산지를 속였던 업체이기도 하다.

- 몬도나요?

- 네. 원산지는 저희가 확실히 확인했습니다. 이번엔 이상 없을 겁니다.

먼저 내 의구심을 끊어 내려는 마성근 팀장.

보면 볼수록 더 이상하다.

- 밀가루는요?

- 깜바뉴와 롤케이크는 국산 밀가루입니다. 그것도 확실히 확인했습니다.

마성근 팀장은 특판 상품을 컨택할 때, 브랜드를 중요하게 여긴다.

브랜드는 소비자와의 약속이라는 말.

그가 내게 했던 말이다.

그랬던 그가, 불과 6개월 전에 원산지 표시를 숨긴 업체의 프로모션을 기획했다. 그것도 당당하게 내놓지 못하고 메신저로 슬쩍 컨펌을 요구하면서 말이다.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그를 내 방으로 불렀다.

- 팀장님. 잠깐 뵙죠.

- 네?

- 지금 제 방으로 오세요.

잠시 후, 잔뜩 긴장한 표정의 마성근 팀장이 문을 빼꼼히 열고 들어왔다.

“이사님…….”

“몬도나 정말 괜찮습니까?”

“네. 문제없습니다.”

“다시 묻죠. 정말 문제없습니까?”

“……네.”

고개를 푹 숙이고 답하는 마성근 팀장.

무언가 당당하지 못할 때, 그는 확실히 티가 난다.

“브랜드는 소비자와의 약속이라는 말. 마성근 팀장님이 하셨던 말입니다.”

“…….”

“안 그러시던 분이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몬도나에 친구라도 있나요?”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정말 제품이 괜찮아서…….”

“그 말을 저한테 믿으라는 겁니까?”

“…….”

한쪽이 풀려 있는 마성근 팀장의 멜빵끈.

나는 천천히 손을 올려 그의 멜방 끝 끝을 잡았다.

재빨리 뒤로 물러나려던 마성근 팀장이 풀린 멜빵끈을 확인하고 부랴부랴 내 손을 밀어냈다.

“이게 언제 풀렸지? 하하.”

계면쩍은 표정의 마성근 팀장.

잠깐이었지만 분명 들었다.

<몬도나 재고만 처리해 주면 끝이지?>

<그래, 이번만 눈 딱 감고 하는 거야. 알바오잖아. 알바오.>

알바오. 분명 알바오라고 했다.

나는 그 짧은 기억으로 모든 것을 파악했다.

몬도나 제품을 팔아 주면 알바오의 기획전을 열어 주겠다는 제안을.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마성근 팀장을 불렀다.

“마성근 팀장님.”

“네. 이사님.”

“알바오 때문입니까?”

내 말에 마성근 팀장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번만 눈 딱 감아 주시면, 제가 마무리 짓겠습니다. 그럼 알바오에 기획전도 오픈하고…….”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는 겁니다.”

“이 좋은 기회를 디몰에게 뺏길 수는 없었습니다.”

“…….”

“이번만 저를 좀 믿어 주십시오. 이사님 손에 더러운 똥을 묻히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마 팀장님!”

“지금 리우 포 그룹장. 디몰에 가 있습니다. 우리와 대놓고 비딩을 붙이려고 간 겁니다.”

“……!”

아니라고 했었다.

분명 알바오의 리우 포는 디몰이 아닌, 우리와 협상할 것이라 했다.

“사실입니까?”

“네. 저도 고민 많이 했습니다. 근데 방법이 없었습니다. 정말 방법이…….”

“마성근 팀장님!”

“이번만, 제발 이번 한 번만 제 뜻을 따라주세요. 아니. 그냥 모르는 척만 해 주시면 됩니다. 뒷일은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실망이군요.”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사님! 이사님, 그……. 그게 아니라…….”

“승진 욕심 때문이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늘에 맹세코 욕심 때문에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대성이 PPT 잘못하는 거 아시죠? 그런 놈이 며칠 밤을 새워서 PPT를 만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우진이 놈. 제조사에 제품 가격 깎는 거 죽어라 하기 싫어하잖아요. 그놈이 호린 식품 가서 공급가를 20%나 다운시켜왔습니다. 연두는 특별한 밀키트 만든다면서 지방에 있는 식당들 돌고 있고요.”

“…….”

“팀장이 돼서 그렇게 죽어라 일하는 애들 실망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사님. 이번 한 번만 딱 눈을 감아주세요. 그놈들 얼마나 노력했는데요. 이사님도 잘 아시잖아요.”

마성근 팀장은 두 손으로 내 팔을 잡았다.

나도 잘 안다.

특판 팀 식구들이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를.

하지만 처음이 어렵고 두 번, 세 번은 쉬운 법.

이번에 그들의 요구에 맞춰 주면 다음은 더 큰 요구를 받을 것이 뻔하다.

나는 마성근 팀장의 손을 떼어 내며 고개를 저었다.

“리우 포 그룹장. 한국에 있다고요? 일단 제가 만나 보겠습니다.”

“이사님.”

“그리고 모든 책임은 내가 집니다.”

* * *

마포 홀리스 호텔의 카페.

내 전화를 받은 리우 포가 로비에 내려 와 있었다.

반쯤 풀어진 동공과 헝클어진 머리.

깔끔한 슈트가 아닌 검은 반바지를 입은 그는 심하게 다리를 떨며, 자리에서 살짝 일어났다.

“오랜만입니다.”

한국어가 아닌 영어다.

아직 취기가 남아 있는 것인가?

안 봐도 뻔하다.

디몰의 담당자와 마셨을 것이다.

심하게 들떠 있는 그의 목소리가 약간 갈라져 있었다.

마치 노래를 많이 한 사람처럼.

“오늘은 영어로 말씀하시는군요.”

“사실 영어가 더 편합니다. 중국보다 미국에서 더 오래 살았거든요. 근데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제가 했던 경고 잊으셨나요?”

“네?”

“몬도나. 오면서 대충 알아봤습니다.”

“……몬도나요? 그게 뭡니까?”

이맛살을 찌푸리며 되묻는 리우 포.

공유한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기억은 역시 중국어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내 방식대로 할 때다.

“몬도나에 대해 조금 알아봤습니다. 2017년 알바오에 제품을 입점한 적이 있더군요.”

“그건 돈을 내면 누구나 살 수 있는 영역입니다.”

“맞아요. 알바오의 카테고리 상단은 돈을 내고 들어가는 자리죠. 그리고 가장 많은 금액을 제시한 업체가 상단을 유지합니다. 제시한 금액은 상점주들에게 비밀이고요.”

알바오의 광고 시스템은 검색 포털의 키워드 광고와 같다.

카테고리 상단의 가격을 예측하여 제시하고, 가장 많은 금액을 제시한 업체가 일주일 동안 상위에 위치한다.

내 말에 리우 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몬도나는 무려 3개월간 상위에 노출되었더군요. 그게 가능합니까?”

“…….”

“다른 회사의 입찰 금액을 정확히 알고 입찰했다는 말인데. 그것도 3개월 내내 총 14번을요. 알바오의 시스템상으로 그게 가능한 말입니까?”

“몬도나는 우리와 어떤 연관도 없습니다.”

“알바오가 아니라 리우 포 그룹장님과 연관이 있는 거겠죠.”

“……!”

흠칫 놀란 표정의 리우 포.

나는 그를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몬도나의 왕진영 이사. 화교더군요.”

“아닙니다. 저는 모르는 사람입니다.”

“뭐 아니라고 치죠. 근데 알바오의 다른 간부들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기억을 들을 수 없으면 철저하게 사전 조사를 해야 하는 법.

나는 이곳에 오기 전에 많은 제조사의 실무자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려 30통이 넘는 전화를 말이다.

그렇게 얻게 된 정보.

몬도나의 이사가 화교 출신이고, 유난히 중국 커머스 영업에 강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던져 봤는데, 바로 반응이 왔다.

나는 아무런 답도 못하는 그에게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건 알바오에서 판단할 겁니다.”

“……!”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돌리자, 리우 포는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좋습니다. 이번엔 제가 포기하죠.”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번엔?”

“죄송합니다. 실수였습니다.”

고개를 숙인 리우 포.

죄송하다는 말은 모든 것을 인정하니, 회사에는 알리지 말아 달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대로 끝낼 수는 없는 법.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룹장님. 사과는 센 놈한테 하는 게 아니라 잘못한 상대에게 하는 겁니다.”

“…….”

“내가 아니라 마성근 팀장에게 직접 사과하세요. 그럼 그때 생각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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