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86화>
187. 이걸 구분 못하는 MD가 어디 있어요?
“성진 씨! 지난 주 실적 데이터 좀 뽑아줘!”
에이마켓에서 마켓 프레시로 이직한 지 한 달이 지났다.
3년의 경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허드렛일만 한다.
복사, 팩스, 데이터 분석, 전화 돌려받기 등.
인턴이나 신입이 하는 업무들이 전부다.
빠른 적응을 위해서라나 뭐라나…….
하여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럴 거면 차라리 영업 압박이 심했던 에이마켓이 낫다.
영업은 내가 가장 좋아하던 일이니까.
그 사이, 프린터에서 방금 나온 따끈한 문서를 집어 들었다.
“그냥 매출 데이터를 가져왔네? 이게 아니라 손익 데이터를 말한 거야. 제품 개별 단가에 사입비 녹여서 새롭게 시트를 만들어 보라고.”
김대성 선배.
언제나 훈계질을 한다.
매번 뭐가 그렇게 틀렸다고 하는지…….
에이마켓 때는 이런 대접을 받은 적이 없었다.
“성진 씨. 회의 준비는 다 했어요?”
“금방 하겠습니다.”
“음, 제가 일단 초안은 잡았는데, 보고 추가할 거 있으면 성진 씨가 추가해 줘요.”
하연두 선배.
나보다 경력은 적지만, 마켓 프레시에 먼저 왔다는 이유로 선배 짓을 톡톡히 한다.
근데 괜찮다.
가끔 나에게 웃어 주는 그 미소가 너무 좋다.
지금도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를 짓는데 또 심장이 나대기 시작한다.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네.”
“성진이 요새 오픈마켓 물 빼느라 힘들지?”
음흉한 미소와 함께 내 어깨를 주무르는 남자.
마성근 팀장.
특판팀의 절대자이자,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다.
능력도 크게 없어 보이는데, 원지훈 이사는 이상하게도 그를 감싸고 돈다.
만약 나였다면 바로 내쳤을 텐데…….
자기 라인의 사람이라 더 챙기는 건가?
어느 회사나 라인이 존재하는 법.
그런 부조리한 회사가 싫지만 어쩌겠는가?
참아야지.
에이마켓보다 연봉이 30%나 올랐는데.
“괜찮습니다.”
“괜찮길 뭘. 얼굴이 입사 초기에 비해 완전 썩었는데.”
“그래요?”
“응, 우리 최성진이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지?”
“스물 여덟입니다.”
“캬. 좋을 때다. 좋을 때. 하여간 관리 잘해. 아 참 코스메틱 카테고리에 올라온 마스크팩 있지? 그거 써봐. 우리 마눌님 말로는 그거 쓰고 얼굴이 팽팽해졌다고 하더라고.”
좀 주면서 써 보라고 하던가.
나는 계면쩍은 표정으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하나 더. 이따 나랑 나가자.”
“네?”
“특판팀의 전통 같은 거야. 팀장이 막내를 데리고 제조사들 한 바퀴 도는 거.”
“아……. 네 알겠습니다.”
드디어 기회가 왔구나.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은 사람을 대하는 것.
나는 끝까지 들러붙어 필요한 것들을 뽑아 내는 사람이다.
“마 팀장님! 양지, 이번에 특판 들어가죠?”
특판팀 근처를 지나가던 가공식품 팀의 김태하 차장이 말했다.
이에 마성근 팀장은 공손한 태도로 답했다.
“오늘 갑니다.”
“팀장님이 직접 양지 넘어가세요?”
“네. 레토르트 새로 나왔다는데, 기대가 좀 크네요.”
“하긴 실장님 실력이면 또 대박 치겠죠. 특판 끝나면 데이터 저희 쪽에도 토스해 주세요.”
“물론이죠.”
김태하 차장은 참 깔끔한 사람이다.
능력도 출중해 이 회사에서 가장 닮고 싶은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공식품 팀에 가고 싶다고 했었는데…….
“양지에 가는 겁니까?”
내 질문에, 마성근 팀장은 자신의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응. 회의 끝나면 바로 나갈 거니까 준비해.”
“알겠습니다.”
양지에는 아는 사람이 있다.
식품 개발팀의 김영학 대리라고 회사에서 제법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다.
에이마켓 때 양지의 제품을 가져오기 위해 며칠 동안 김영학 대리에게 공을 들였었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내 진가를 보여 주겠다고 다짐했다.
* * *
달리는 차 안.
“테쓰형! 세상이 왜 이래~“
운전대를 잡은 마성근 팀장은 스피커에서 나오는 트로트를 따라 불렀다.
미간까지 좁히며 아주 진지하게 부르는 것이 가관이다.
조수석에 앉은 나는 아무런 말없이 창밖을 내다봤다.
그때.
“성진아. 너 에이마켓에서 주로 밖으로 돌았다고 했지?”
“네.”
“양지에 아는 사람 있어?”
“거기 김영학 대리는 좀 압니다. 이전에 양지 군만두 가져오려고 만난 적이 있습니다.”
“김영학? 처음 듣는 이름인데?”
“식품 개발팀에 나름대로 실세라고 들었는데요.”
“그래? 신기하네. 그래서 군만두는 가져갔어?”
“아니요. 마프에 들어갈 수량도 부족하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하긴 그렇겠지. 양지는 원 이사님이 완전 탄탄히 다져 둔 텃밭이라 절대 다른 온라인 커머스에 제품 안 줄 거야.”
마성근 팀장은 매번 저런 식이다.
말끝마다 원지훈 이사를 찬양하고 또 찬양했다.
아주 지겨울 정도로.
“또, 원 이사님 얘기인가요?”
“내가 말했지? 원 이사님은 하늘로 승천하는 용 같은 분이라고. 어떻게 사람의 속마음을 다 아는지……. 전에 일주일 내내 공들인 제조사가 있었는데, 원 이사님 출동하고 30분 만에 끝났어.”
“어딘데요?”
“가람죽.”
가람은 죽을 판매하는 대형 프렌차이즈.
레토르트 시장에서도 탄탄한 고객이 있는 제조사다.
“가람죽이요?”
“응, 근데 가람죽 애들 참 불쌍해.”
원지훈 이사가 조건을 후려쳤나?
왜 불쌍하다는 거지?
나는 흥미로운 얘기에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왜요?”
“맨날 죽을 준비하잖아.”
“……!”
당했다. 또 아재 개그다.
이걸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마성근 팀장이 기세를 몰아쳤다.
“거기 이승은 과장이라고 있거든. 그 친구 내가 별명 지어 줬잖아. ‘저승은’이라고 푸하하하하. 어때? 죽 제조사에 저승은, 기가 막히지?”
“……!”
2연타다. 이런 연속기를 쓰다니.
정말 기가 막힌다.
내가 머뭇거리자 마성근 팀장은 내 어깨를 툭 치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웃기면 웃어! 여기가 무슨 군대인 줄 알아?”
“아…….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지옥 같은 30분이 지나고.
우린 양지푸드에 도착했다.
마성근 팀장은 차에서 내려 자주 와 본 사람처럼 본관의 건물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2층 사무실의 벨을 누르자, 머리에 볼펜을 꽂아 말아 올린 여자가 다가왔다.
30대 초반인 거 같은데, 매서운 눈매에서 강렬한 포스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녀의 뒤로 내가 아는 김영학 대리가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다.
“팀장님 오셨어요?”
“네. 실장님. 잘 지내셨죠?”
“덕분예요. 같이 오신 분은?”
“저희 신입입니다. 최성진이라고 예전 에이마켓에 근무하던 친구입니다.”
나는 마성근 팀장의 소개가 끝나고 곧바로 그녀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최성진이라고 합니다.”
“네. 서보미입니다.”
서보미 실장.
실장 정도의 직급이면 양지의 실세겠구나.
그때, 그녀의 뒤에서 반소매 티셔츠에 후줄근한 바지를 입고 저벅저벅 걸어오는 남자가 있었다.
부스스한 머리에 눈곱까지 낀 그는 마성근 팀장을 보고 반가운 듯 손을 흔들었다.
“요! 마 팀장! 지훈이는? 지훈이는 안 왔어?”
“대표님. 요새 이사님 바빠요.”
대표라고?
그럼 저 사람이 양지푸드의 창업주 함중식 대표인가?
군만두는 국내 1등이라고 들었는데, 겨우 저런 사람이었나?
함중식 대표는 머리를 긁적이며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래? 섭섭하네.”
“직접 전화해 보시든가요.”
“싫어. 지훈이한테 전해. 다음에 신제품 나오면 절대 마프 안 줄 거라고.”
“꼭 전하죠. 대표님이 그러셨다고.”
진지한 표정으로 답하는 마성근 팀장.
그러자 함중식 대표가 재빨리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장난이야. 장난. 마 팀장은 무슨 예능을 다큐로 받아쳐?”
쩔쩔매는 함중식 대표.
에이마켓 때와는 전혀 다르다.
그때는 유명 제조사가 제품을 뺀다는 말에 부장까지 달려가서 고개를 숙였었는데…….
마성근 팀장은 내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에이 때랑 완전 다르지? 이게 마프야. 그리고 원 이사님이 이렇게 만든 거고.”
원지훈 이사가 이렇게 제조사를 쩔쩔매게 만들었다는 것인가?
그것도 양지푸드처럼 큰 회사를?
마성근 팀장은 내 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들어가지.”
우린 긴 테이블이 있는 회의실로 들어갔다.
서보미 실장과 김영학 대리가 맞은편에 앉았고, 김영학 대리는 감자탕 레토르트를 뜯어 조리를 준비했다.
예전에는 자신이 실세라고 떵떵거리더니…….
“뭘 조리까지 해서 주십니까? 실장님이 만드셨으면 무조건 좋은 거죠.”
마성근 팀장의 말에, 서보미 실장이 미간을 좁혔다.
“그래도 맛은 보셔야죠.”
“그럼 밥도 좀 주세요. 감자탕은 밥이랑 먹어야죠.”
“역시 마 팀장님. 뭘 좀 아시네. 영학 대리. 가서 즉석밥 좀 돌려 와요.”
“네.”
서보미 실장의 명령에 김영학 대리는 재빨리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렇게 10여 분 후, 김영학 대리는 하얀 쟁반에 따뜻한 밥을 가져왔다.
그것도 즉석밥 용기가 아닌, 사기그릇에 담아서.
마성근 팀장은 그 모습을 보고 씩 웃으며 말했다.
“역시 양지 사람들은 센스가 있어요. 보기 좋은 게 맛도 좋다고, 이렇게 사기그릇에 담아 주시고.”
“시식해 보고 말씀해 주세요.”
마성근 팀장은 진지한 표정으로 밥과 감자탕을 떠먹었다.
그리고 나에게도 맛을 보라는 손짓을 했다.
“성진 씨도 시식해 봐.”
“네.”
나는 뼈에 붙어 있는 감자탕의 고기를 발라내 밥 위에 얹고, 자작한 국물에 숟가락을 담갔다.
그렇게 입 안에 넣는 순간.
알싸한 마늘 향과 깊은 사골의 향이 입안을 맴돌았다.
맛있다.
정말 100년 전통 감자탕 집의 감자탕보다 맛있는 거 같았다.
계속 당기는 이 맛은 밥 한 공기를 다 먹어도 모자를 정도였다.
나는 국물을 떠서 아예 밥에 비비기 시작했다.
“성진 씨, 입맛에는 맞나 보네요.”
서보미 실장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네’라는 답을 하려는 순간, 마성근 팀장이 먼저 내 말을 끊어 냈다.
“실장님 실망입니다.”
“네?”
“실장님이라 무조건 믿고 시식도 안 하려고 했는데…….”
“무슨 문제 있나요?”
“마늘 중국산이죠? 왜 여기다가는 중국 마늘 넣은 겁니까? 저번에 물만두에는 의성 마늘 썼잖아요.”
“역시 단번에 아시네.”
“이걸 구분 못하는 MD가 어디 있어요? 이렇게 나오면 우리 못 팔아요. 아시잖아요. 우리 회원들 입은 청와대라는 거.”
“알죠.”
“그런데 이렇게 준비하신 겁니까? 양지 다시 봐야겠네.”
어떻게 알았을까?
음식의 맛만 보고, 안에 들어가는 재료를…….
구분 못하는 MD가 없다라.
부끄럽다.
밥까지 비벼서 먹으려 했던 내가 한없이 부끄럽다.
마성근 팀장이 화를 내자, 서보미 실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하고 고개를 돌렸다.
“영학 대리. 거 봐. 마 팀장님 바로 알 거라고 했지?”
“죄송합니다.”
“맛은 속일 수 없어. 당장 가서 새로 가져와.”
“네. 알겠습니다.”
김영학 대리는 어쩔줄 몰라하는 표정을 하고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서보미 실장은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와 우리에게 주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희 영학 대리가 아직 배우는 중이라서요.”
“우릴 가지고 테스트하신 겁니까?”
“백 번 말하는 것보다 이렇게 직접 경험하는 게 더 좋으니까요. 그래서 마 팀장님도 성진 씨랑 같이 나오신 거잖아요.”
“하긴 뭐……. 그렇죠. 그래도 좀 너무했습니다. 실장님한테 실망할 뻔했잖아요.”
“죄송합니다. 이해해 주실 거죠?”
“대신, 저도 하나 얻어 가야겠습니다.”
마성근 팀장의 말에 서보미 실장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원 이사님이랑 다니시더니, 원 이사님이랑 똑같이 하시네요.”
“좋은 건 배워야죠.”
“뭘 드리면 될까요?”
“우리 성진 씨. 공장 좀 둘러보게 해 줘요. 연구실까지 전부다.”
“그래요. 그렇게 해요.”
난 몰랐다.
내가 아직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을.
수박 겉핥기 같은 3년의 경력을 믿고 이 사람들을 무시했다.
제조사의 공장을 직접 본다라…….
그것도 양지푸드의 공장을.
에이마켓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 당시 제조사들은 나를 귀찮은 벌레쯤으로 여겼었다.
다르다.
확실히 제조사의 대우도 다르고, 대처하는 방법도 다르다.
나는 정말 속 빈 강정이었구나.
그래. 이제 다시 시작하자.
이들처럼 진짜 MD가 되어보자.
나는 씩 웃으며 서보미 실장에게 말했다.
“라면 사리를 좀 넣으면 좋을 거 같네요. 근데 실장님. 그거 아세요?”
“뭐요?”
“프랑스에서는 절대 국물 요리에 라면을 안 넣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요? 이 좋은 걸 왜 안 넣는데요?”
“불어 쓰니까요.”
“푸하하하하!”
당황한 표정의 서보미 실장.
그리고 크게 웃는 마성근 팀장.
그는 내 등을 쓰다듬으며 서보미 실장에게 말했다.
“제 수제자입니다. 개그의 신이 낳은 아이. 바로 갓난아이죠. 푸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