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85화>
186. 널 좋아했는지 알아?
“햄버거 어때요? 이번에 버거퀸에서 순살 패티…….”
“햄버거로 배가 차? 패스. 다음.”
“에그 플레이는요? 이게 요새 핫해요. 달걀이 부드러운 게…….”
“패스! 일하려면 밥을 먹어야지 자꾸 왜 빵 쪼가리를 말하는 거야?”
“부대찌개요. 요 앞에 햄 사리 추가하면 산처럼 쌓아 주거든요. 맵기도 팀장님이 딱 좋아하실 정도입니다. 아 참, 공깃밥 무한 리필입니다.”
“콜! 가자! 가자고! 초록 씨도 갈 거지?”
점심을 놓고 실랑이를 하는 특판 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점심시간이었다.
나는 씩 웃으며 메뉴를 고르는 마성근 팀장의 옆으로 다가갔다.
“마 팀장님. 적당히 좀 고르세요. 매일 대성이가 힘들잖아요.”
“전 점심시간이 유일한 낙인 사람입니다. 마누라가 얼마나 요리를 못하는지, 밖에서 먹는 이 한 끼가 없으면 못 살 겁니다. 대성이도 그렇고. 그렇지?”
“저도 마찬가지예요. 집에 가면 대충 때우는데, 점심이라도 잘 먹어야죠. 그리고 요즘은 기획안 통과했을 때보다 점심 메뉴 통과할 때가 더 짜릿해요. 히히.”
김대성은 입을 삐쭉 내밀며 비꼬듯 말했다.
나는 그의 등을 쓰다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그때, 이진성 차장이 다가와 큰 소리로 말했다.
“이사님! 오늘 점심은 소고기뭇국 어떠세요? 파주 쪽에 백반집이 있는데, 거기 국물이 진짜 진합니다. 이사님도 드시면 바로 반할걸요?”
다시 활기를 찾은 이진성 차장.
소문에는 요새 연애를 한다고 한다.
상대도 돌싱녀라 부담 없이 만난다던데, 덕분에 한동안 뜸했던 전국 맛집 투어가 다시 시작됐다.
“저는 오늘 빼 주세요. 약속이 있어서요.”
“혹시 데이트?”
데이트라…….
지금 생각해 보니 지영이를 만난 지 좀 됐다.
상장한 후 나도 그렇고, 지영이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마음 편하게 식사를 한 것이 언제인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진성 차장님은 잘 만나고 계시죠?”
“헛…….”
“이미 소문이 파다합니다. 진성 차장님께 과분한 미인이시라던데?”
“뭐, 그렇죠.”
“어떻게 만나신 거예요? 소개팅?”
“아…….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초등학교 동창회에 가서 우연히…….”
이진성 차장은 머리를 긁적이며 부끄러운 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토닥이고 씩 웃었다.
“오늘 반차라서 못 들어올 겁니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주세요.”
“네. 근데 무슨 약속이시길래 반차까지 쓰셨어요?”
“그냥 좋은 일이요.”
* * *
한국의료원.
최구열 이사의 외동딸 혜연이가 퇴원하는 날이다.
그리고 나는 며칠 전 미국으로 출장 간 최구열 이사를 대신해 온 것이다.
아마존과 진행하는 K푸드 기획전은 매번 대성공이었고, 이에 더 큰 프로젝트를 만들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었다.
최구열 이사는 사람을 쓰면 된다며 거절했지만, 그래도 내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직접 오겠다고 했다.
병실의 문을 열고 크게 소리쳤다.
“혜연아!”
“아저씨!”
“오늘 아빠를 대신해서 아저씨가 왔지.”
“아빠보다 더 좋은데? 헤헤.”
“그래?”
처음 봤을 때와 달리 꽤 밝아졌다.
근처를 지날 때마다 이곳을 들려서 그런지 혜연이와도 제법 친해졌다.
“아빠가 혜연이 원하는 거 다 사 주라고 이 카드를 주고 갔는데 말이야. 아저씨랑 백화점 털러 갈까?”
“콜! 당장 가야지! 그리고 나 버거퀸 먹고 싶은데.”
“아, 그 순살 패티에 어쩌고?”
“응.”
“오늘은 배 터지도록 먹어. 아빠가 카드 문자 보고 놀랄 정도로.”
“하하하, 그럴까?”
나는 혜연이와 농담을 주고받고, 옆에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최구열 이사의 아내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사님이 바쁘셔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네. 들었습니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
최구열 이사의 아내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제가 좋아서 온 겁니다. 혜연이랑 놀면 시간 가는 줄 몰라서요.”
사람들은 최구열 이사는 돈과 명예를 모두 가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기억을 듣는 나는 그가 얼마나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는 줄 안다.
그동안 일에만 몰두한 자신을 원망하는 것도 잘 안다.
그래서 이번 아마존의 요청에 한참을 망설였고, 내가 혜연이의 퇴원을 돕겠다는 말에 수락한 것이었다.
“혜연아 아빠가 영통 좀 하자고 했는데, 지금 잠깐 할까?”
“아니. 옷 갈아입고 화장도 좀 하고.”
밝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나 보다.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저씨 나가 있을게. 끝나면 불러.”
“응.”
병원 복도로 나가 긴 벤치에 걸터앉았다.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지영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점심 먹었어?”
- 응. 먹었지. 병원이야?
“응.”
- 혜연이는 좀 어때?
“괜찮아. 최 이사님이 왔어야 하는데…….”
- 어쩌겠어. 잘 부탁해.
“그래. 그리고 지영아.”
- 응?
“오늘 말이야. 이따…….”
- 아 미안. 나 손님 오셔서 내가 전화할게.
끊어진 전화.
또 많이 바쁜가 보구나.
하긴 나도 그랬다.
지영이가 전화하면 바쁘다는 이유로 끊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그녀의 생일 선물만 주고 회사로 들어간 적도 있었다.
얼마나 서운했을까?
나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가셔도 됩니다. 준비 다 했어요.”
병실 문을 열고 나온 최구열 이사의 아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혜연이 간호하느라 힘드셨죠? 오늘은 집에 가서 좀 쉬세요. 데이트 끝나면 안전하게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저 이사님…….”
“네?”
“아직 결혼 안 하셨죠?”
“네. 아직입니다.”
“남편이 걱정하더라고요.”
“네? 무슨 걱정을?”
“원 이사님도 자신처럼 될 것 같다는 걱정이요. 혹시 만나시는 분이 있다면 잘해 주세요.”
“네. 그러겠습니다.”
그녀에게 다시 고개를 숙인 후 병실의 안으로 들어갔다.
“혜연아, 아빠 기다리시겠다. 영통 먼저 하자.”
“응!”
휴대전화를 꺼내, 최구열 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기다렸는지, 화면에 비친 그는 우스꽝스러운 고깔모자까지 쓰고 있었다.
“모자 뭐예요?”
- 아……. 그게……. 그게…….
재빨리 휴대전화 화면을 돌리는 최구열 이사.
나는 귀여운 그의 행동에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보기 좋아요. 혜연이 바꿔 드릴게요.”
- 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휴대전화를 넘겨주자, 혜연이는 나름 얼짱 각도를 유지하며 영상 통화를 시작했다.
“아빠!”
- 우리 딸! 오늘 퇴원 축하해!
“피. 하나뿐인 딸이 퇴원하는 데 아빠가 오지도 않고.”
- 대신 지훈이 아저씨가 갔잖아. 아빠보다 지훈이 아저씨가 더 좋다면서?
“아빠는 그 말을 믿어?”
- 그래……. 고맙다. 고마워.
목이 멘 최구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딸이 다 나아서 퇴원한다는 사실에 감정이 북받쳐 올랐나 보다.
“오늘 각오해. 아빠 카드 한도 초과 할 때까지 쓸 거니까.”
- 그래. 우리 딸 오늘 사고 싶은 거 다 사.
“응. 아빠도 일 잘하고. 거기 몇 시야?”
- 저녁 9시.
“내일 중요한 미팅 있다면서. 빨리 자.”
- ……고마워, 우리 딸.
“고맙긴 뭐가 고마워. 아빠 몸조심하고. 빨리 와. 보고 싶으니까.”
- 그래.
* * *
늦은 밤.
혜연이를 데려다주고 집으로 향했다.
달리는 차 안에서 다시 지영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가는 중. 밥은 먹었어?”
- 응, 먹었지. 혜연이는 어때?
“괜찮아. 다음 주부터 학교도 다시 갈 거래.”
- 잘됐네. 오늘 삼전물산이랑 저녁 식사했어. 너도 삼전 알지?
삼전 물산이면 국내에서 제법 규모가 있는 유통회사.
주로 수입 가구를 취급하는 곳이라 우리와는 접점이 없는 곳이다.
“응, 조금은.”
- 수입 가구가 그렇게 마진이 좋은지 몰랐어. 이번에 새로 분양하는 아파트에 싱크대 들어가서 좀 벌었다고 하더라고. 다음 카테고리는 가구 쪽 어때? 이번에 코스메틱도 괜찮았잖아.
“그래. 한번 확인해 볼게.”
- 5천 세대가 넘는 아파트니까 아마 꽤 벌었을 거야.
지영이는 그렇게 계속 자신의 말을 했다.
대표가 되고, 새로운 영역들을 접하면서 흥미가 생긴 것이다.
나는 신이 나서 말하는 그녀에게 꼬박꼬박 답을 하다, 중간에 말을 끊었다.
“지영아. 잠깐 시간 돼?”
- 왜? 아……. PB 때문이구나. 납품일 이틀 딜레이 해 줬다면서? 명진 부장한테 들었어.
“아니. 그냥 보고 싶어서.”
지영이는 잠시 말을 멈췄다.
아마 이런 말을 할 줄은 예상 못했나 보다.
그동안 우리의 대화는 일에 관한 것이 거의 전부였으니까.
- 언제쯤 도착해?
“한 30분?”
- 알았어, 준비하고 있을게. 운전 조심하고.
“그래.”
30분 후.
오피스텔의 1층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지영이와 만나기로 한 공원의 벤치에 앉아 기다렸다.
잠시 후, 분홍색 트레이닝복에 모자를 눌러쓴 지영이가 내려와 내 옆으로 바짝 붙어 앉았다.
“밥은 먹었어?”
“응. 혜연이랑 먹었어.”
“뭐 먹었는데?”
“버거퀸에 있는 모든 세트 싹 시켜 먹었어. 카드 내용 보고 최 이사 좀 놀랐을 거야.”
“그래?”
“응. 백화점에 있는 옷들도 신상으로 싹 사도록 했거든.”
“잘했네. 최 이사님도 좋아하겠네.”
“그래.”
대화가 끊기니까 할 말이 없었다.
아마 지영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린 일 얘기 말고는 딱히 해 온 적이 없었으니까.
“아버님은 잘 계시지?”
“응. 요새 집 앞 텃밭 가꾸느라 바쁘시지. 진정한 즐거움을 찾았다고 하던데?”
“그렇구나. 형님은?”
“오빠도 바빠. 푸드 주가도 꽤 올랐잖아. 다음 주 주총인데, 실적 발표할 생각에 아주 들떠 있더라고.”
“그래.”
가족 얘기도 이게 다다.
우리도 어쩌면 일 때문에 서로에게 소홀했던 것인가?
과거를 후회하는 최구열 이사처럼…….
나는 먼 곳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술 한잔할까?”
“차는?”
“대리 불러서 가야지.”
“내일 오전에 미팅 있지 않아?”
“괜찮아. 많이는 안 마실 거야.”
“그래.”
인근의 실내 포차.
내 잔에 술을 따라주던 지영이가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응?”
“오늘 그냥 조금 이상한 거 같아서.”
술잔의 술을 비우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최 이사님 아내분이 그러더라고. 만나는 사람이 있으면 후회하기 전에 잘해 주라고. 그 말을 듣는데, 문득 네 생각이 나더라고.”
“그랬어?”
“최 이사님도 그렇게 살아왔잖아. 일에만 집중하느라 가족은 멀리하고…….”
“그래서 내 생각이 난 거야?”
지영이는 고개를 앞으로 들이밀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의 내 손을 꽉 잡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은 나랑 있자.”
“응?”
“무슨 뜻인지 몰라? 무슨 남자가 이래?”
지영이는 지금까지 한 번도 같이 있자 한 적이 없었다.
그것도 밤에.
그런데 오늘, 그것도 불쑥.
이런 말을 들으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내가 머뭇거리자 지영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에 와서 앉았다. 그리고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조용히 속삭였다.
“내가 왜 양심도 없이 널 좋아했는지 알아?”
“…….”
“일에 빠져 사는 모습이 멋있더라고. 필요할 때 탁 튀어나와서 파팍 해결하고 가는 모습이 말이야. 사실 커머스의 대표직을 맡은 것도 내가 아니라 너 때문이었어. 널 옆에서 더 오래 보고 싶어서.”
“…….”
“걱정하지 마. 넌 지금까지 잘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잘할 거니까.”
“…….”
“혹시 나한테 서운한 거 있으면 말해. 나도 노력할게.”
“그래. 고마워.”
“이번에 여름휴가 때 같이 갈까? 하와이 어때? 난 꼭 남친 생기면 거기 가려고 했거든.”
“좋지.”
내 어깨에 기댄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