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84화>
185. 덕분에 도둑놈을 잡았네요
바른 경쟁은 성장을 가져온다.
경제부와 중소 벤처기업부가 주최하는 이번 콘퍼런스의 슬로건이다.
과연 바른 경쟁이 있을까?
그리고 그 경쟁이 정말 성장을 가져다줄까?
거의 반강제적인 정부의 참여 요구에 나와 최구열 이사가 이곳에 왔다.
콘퍼런스장 곳곳에는 카메라들이 즐비했고, 행사 진행을 맡은 개그맨이 무거운 분위기를 살리려 노력했다.
“하아…….”
딱딱한 행사가 지겨웠는지, 옆에 있던 최구열 이사가 하품을 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원 이사님. 우리 나가서 바람 좀 쐽시다.”
“네. 그러죠.”
그렇게 나온 행사장 입구.
지겨운 행사를 참지 못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나는 최구열 이사의 옆을 걷다가 씩 웃으며 말했다.
“행사장 안보다 사람이 더 많은 거 같네요.”
“우리처럼 강제로 끌려온 사람이 많을 겁니다. 그나저나 언제 끝난대요?”
“글쎄요. 행사 진행표가 딱히 없어서.”
한때 나와 첨예한 대립을 했던 최구열 이사.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하나의 목표를 둔 우리는 이런 대화를 나눌 정도로 편한 상대가 되어 버렸다.
그때.
“최구열 이사님! 안녕하십니까.”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하는 한 남자.
어찌나 목소리가 큰지, 주변의 사람들이 일제히 우릴 바라봤다.
최구열 이사는 재빨리 남자를 일으켜 세우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 네. 누구시더라.”
“이룸몰의 김성연입니다. 이렇게 뵐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아……. 네네.”
두 손으로 최대한 공손하게 명함을 내미는 남자.
최구열 이사는 그의 명함을 받고, 자신의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저 이사님……. 시간 괜찮으시면…….”
최구열 이사는 이 바닥의 신화와 같은 인물이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처럼 깍듯이 예를 갖추고 조언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충분히 이해한다.
나도 그를 처음 봤을 때, 지금 이 남자와 같은 마음이었으니까.
“죄송합니다. 일행이 있어서…….”
나를 힐끔 보며 거절하는 최구열 이사.
지루한 행사장에서 빠져나가고 싶어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나는 그의 등을 밀어 주며 환하게 웃었다.
“저렇게 열심인데 가서 좋은 얘기 좀 해 주세요.”
“제가요?”
“딱 봐도 이사님 만나러 이번 콘퍼런스 오신 거 같은데. 안 그래요?”
내 질문에 남자는 두 손을 모으고 다시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네. 맞습니다. 최구열 이사님을 뵙고 싶어서 왔습니다.”
“거 봐요.”
“이거 참.”
“다녀오세요. 여기 있어도 정치인들이랑 악수나 하지, 별거 없잖아요.”
“흐음……. 그래도……. 정부에서 주관하는 행사라…….”
“언제부터 그런 거 따지셨어요?”
내 말에 최구열 이사는 피식 웃어 보였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 줘요.”
“네.”
그렇게 그가 떠나고, 나는 사람이 없는 벤치에 걸터앉았다.
휴대전화를 꺼내 메시지들을 확인하는 순간, 커피잔이 휴대전화의 위로 쑥 들어왔다.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남자를 바라봤다.
다리를 꼬고 먼 곳을 주시하는 남자.
핫딜의 최두영 이사다.
내가 멍하니 바라보자, 그는 옅은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왜요? 독이라도 넣었을까 봐 그래요?”
나는 씩 웃으며 그가 주는 커피잔을 받았다.
“넣고는 싶었나 보죠?”
“편의점에서 청산가리를 안 팔아서 포기했습니다.”
“실수하셨네. 일산 편의점들은 팔던데.”
“하하 그러게요. 실수했네요.”
“잘 마시겠습니다.”
커피를 받아 등을 벤치에 기댔다.
그리고 여전히 정면을 응시하는 최두영 이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참 찾았습니다.”
“저를요?”
“네. 오늘 만나면 꼭 고맙다는 말을 해 주고 싶어서요. 덕분에 도둑놈을 잡았네요.”
“그 정도로 뭘…….”
김진준 본부장에 대한 말.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감사 인사는 다음에 듣죠. 아직 더 상대해야 할 도둑이 많아서요.”
“기대되는군요.”
“네.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남은 커피를 한입에 털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최두영 이사는 여전히 정면을 응시한 채로 나를 불렀다.
“원 이사님!”
“…….”
“마켓 프레시, 코스메틱 오픈이 다음 주죠?”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네. 뭐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그러고 보니, 이사님도 피부 관리 좀 들어가셔야겠네요.”
“…….”
“이번에 마스크 팩 괜찮은 거 들어왔거든요.”
나는 씩 웃고, 등을 돌렸다.
그가 준 커피잔에서 들려오는 기억을 곱씹으며.
<그나마 쓸 만한 놈은 그놈뿐이었는데.>
<이러다 바론의 투자금이 늦는 거 아니야? 이번 일로 손실이 400억이 넘으니…….>
* * *
며칠 후,
마켓 프레시에 코스메틱 카테고리가 생겼다.
새로운 카테고리를 오픈한다고 발표한 이후 우리의 주가는 20% 이상 상승했고, 오픈한 당일에도 5% 이상 올랐다.
신이 난 직원들.
그리고 그들 중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섞여 있는 이은지 대리가 눈에 들어왔다.
“은지 대리.”
내 목소리에, 눈물을 글썽이던 이은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탕비실로 달려갔다.
원스몰에서부터 함께 일했던 그녀.
김태하와 헤어진 후에도 전혀 구김이 없었는데…….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직원에게 물었다.
“진원 씨. 은지 대리 무슨 일 있어?”
“아뇨. 아까 점심도 잘 먹었는데…….”
“그래?”
나는 말을 마치고 이은지가 잡았던 마우스를 살짝 스쳤다.
그때 들려온 기억.
<지금 와서 안 된다고 하면 어떡하라고?>
<팀에 큰소리는 쳐 놨는데……. 후……. 진짜 돌아 버리겠네.>
<창운 말만 들은 내가 바보지.>
창운은 건강식품을 주로 유통하는 벤더.
계약 직전에 공급가를 바꾸는 일들이 종종 있었다.
나는 탕비실로 천천히 걸어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이은지는 재빨리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돌렸다.
“은지 대리. 무슨 일 있어?”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얼굴에 다 쓰여 있는데.”
“…….”
“나한테도 말하기 힘들어?”
자존심이 강한 이은지 대리.
마켓 프레시에 처음 왔을 때, 그녀는 하루가 멀다고 나를 찾아왔었다.
낯가림이 심한 그녀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으니까.
내성적인 성격에 다른 사람에게 모르는 것을 들키기 싫었으니까.
그녀는 배우고 또 배웠다.
처음 이곳에 온 한 달 동안은 9시 이전에 퇴근한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녀가 대리를 단 지 두 달이 지났다.
압박이 심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압박이 아닌, 자신을 스스로 옭아매는 압박이.
“창운 때문이지?”
내 말에, 이은지 대리가 고개를 들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아셨어요? 형선이가 말해요?”
“아니. 형선 씨는 아무 말도 안 했어.”
“근데 어떻게 아셨어요?”
“뭐 뻔하지. 은지 대리가 창운이랑 일할 거라는 말에 예상했어. 그리고 충연 팀장도 그렇게 생각했을걸?”
“…….”
“충연 팀장도 창운 애들한테 많이 당했으니까.”
내 말에 기분이 조금 풀렸는지, 이은지는 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후……. 어떡하죠? 당장 내일부터 로트벡 비타민 사전 예약 걸어야 하는데.”
로트벡 비타민은 독일의 유명 건강 음료로 우리가 국내에 처음으로 정식 유통을 하는 제품이다.
최충연 팀장이 로트벡을 가져온다고 신나서 떠들었었는데…….
하필 그 로트백을 창운이 수입 유통하는구나.
“얼마지?”
“750ml 기본 패킷 기준으로 만 사천 원이요.”
로트벡 비타민 750ml 한 병의 소비자가는 대략 1만 5천 원.
인터넷을 잘 뒤져 보면 1만 4천 원짜리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처음 계약 전에는 얼마였어?”
“구천육백 원이요.”
무려 사천사백 원이나 차이가 나다니.
이건 그냥 계약하지 않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미쳤구나.”
“물류비용이 많이 올랐다고 절대 그 이하로는 안 된다고…….”
“그래서 그냥 뒀어?”
“아니요. 어제 만나서 따졌는데……. 완전 태도가 변했더라고요.”
로트백 비타민은 최근 방송에 나오면서 더 인기가 있었다.
물류비용이 올랐다는 것은 핑계.
창운의 생각은 뻔하다.
우리와의 계약을 철회하고 자신들이 직접 오픈 마켓에 팔려고 할 것이다.
“충연 팀장은 알고 있고?”
“아니요. 아직…….”
“얘기 안 할 거야?”
“그래야 하는데……. 워낙 제가 큰소리를 쳐 놔서…….”
말끝을 흐리는 이은지 대리.
그녀는 낯가림도 심하고 자존심도 강하다.
그래서 매번 내가 나서서 해결을 해 줬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내가 나선다면 그녀는 평생 나만 찾을 것이다.
스스로 하는 법.
동료와 선임을 활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충연 팀장한테 사실대로 말하고 방법을 찾아 봐.”
“……“
“이은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이은지는 고개를 푹 떨구며 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 * *
1시간 후,
내 방으로 들어온 최충연 팀장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창운 애들이 또 장난질을 치려나 보네요.”
“그래요?”
나는 이은지 대리에게 들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자신을 거치지 않고 나에게 말했다는 사실이 기분 나쁠 수도 있으니까.
“네. 로트벡 비타민 기억나시죠?”
“아……. 네.”
“그거 창운이 들고 오는 거였거든요.”
“얼마나 차이 나는데요?”
“한 5천 원? 어이가 없죠. 진짜 이 양아치 새끼들.”
어금니를 꽉 깨무는 최충연 팀장.
나는 그를 회의 테이블에 앉으라 손짓하고 맞은편에 앉았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래서 말인데요. 이사님. 고람에 들어가는 사입비용을 한시적으로 늘려 주실 수 있으세요?”
고람은 창운의 경쟁사.
매번 창운보다 늦게 물류를 가져오는 곳으로 유명했다.
“고람이요?”
“네. 고람 애들 이번에 수입 건강에 사활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단가나 물량을 실수한 적이 없어요.”
“얼마나 필요한데요?”
“20억 정도요.”
“가능하겠어요? 창운이 로트벡 독점 유통권 가져왔으면 어쩌려고요?”
“창운 애들 수법은 훤합니다. 절대 독점권 못 가져왔을 거예요.”
“확실해요?”
“네. 하루 이틀 봅니까? 게네들 자본금이 많지 않아요. 로트벡 정도면 못해도 독점권에 20억 이상 불렀을 겁니다.”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고람에 독점권을 쥐여 주려는 건가요?”
“네. 독점권 계약하도록 하고 창운이 이번에 들여온 제품들까지 다 인수하도록 할 생각입니다.”
“와. 충연 팀장님 완전 악랄하네요.”
“창운이 한 짓에 비하면 아직 반도 못했습니다. 전에 두 달 전에 프로틴 바 가지고 장난 친애들도 창운이었어요.”
씩씩대는 최충연 팀장.
나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20억으로 가능하겠어요?”
“네 충분합니다. 로트벡 쪽에 이미 슬쩍 흘려서 답을 받았습니다.”
“그래요. 그렇게 하세요.”
“오늘 안에 계약서 초안 올려놓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래요. 그리고 이거 은지 대리 담당이었죠?”
“아니요.”
“…….”
“제가 실적 좀 내 보려고 단독으로 진행했던 겁니다.”
“그래요?”
“네. 제가 한 실수니까 이번에 어떻게든 만회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은지 대리의 실수를 숨겨 주는 최충연 팀장.
이제 그녀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동료가 자신의 옆에 있었다는 것을.
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해요.”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