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83화>
184. 제대로 한 방 먹이셨네
법원 앞.
계단 밑에 있던 무리의 남녀가 내게로 달려왔다.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고 있는 그들.
기자들이었다.
어떻게 알고 왔을까?
이번 재판에 대해 그 어떤 언론에도 알리지 않았는데…….
“재판 결과는 어떻게 예상하시나요?”
“개인의 욕심 때문에 레시피를 훔쳤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추가 피해자는 없습니까?”
“마켓 프레시에서 추가 고발까지 생각하시나요?”
“피해 기업들의 단체 고발도 있을 거라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BO커머스도 개인을 상대로 함께 고소할 생각이신가요?”
이상하다.
모든 질문에 바론이라는 주어가 빠져 있다.
그리고 김진준 본부장에게만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나는 기자가 들이민 마이크에 손을 얹었다.
그때 들려오는 기억.
<대단한 사람이네. 승진 욕심 때문에 그런 짓까지 하고.>
<바론이 정말 큰 결심했어.>
<바론이 배임까지 걸고 넘어가겠지?>
<바론에 BO라……. 그 인간은 인생 끝났네. 끝났어.>
바론이 먼저 꼬리를 잘라 냈구나.
이렇게 기자들을 많이 움직인 것을 보니 그들이 분명했다.
나는 냉정하고 잔인한 그들의 태도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다.
오늘 법정에서 나온 증거는 모두 김진준 본부장, 개인의 것.
바론은 처음부터 이를 계산해 놨기에 쉽게 꼬리를 잘라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이런 시나리오는 상정돼 있었을 수도 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론의 짓이라 떠들면?
경쟁사의 직원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비방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맞선다.
나는 천천히 마이크에 가까이 다가가 입을 열었다.
“씨앤코리아, 오양, 기린, 창해, 영진, 화도, 천우. 혹시 이 이름을 들어 보셨나요?”
“…….”
“레시피를 도둑맞은 회사들입니다. 그리고 이 회사들에 속한 직원만 무려 500여 명입니다. 이들은 힘겹게 개발한 제품의 레시피를 도둑맞고 다른 회사로 이직하거나, 아직도 실직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켓 프레시는 그들의 노력을 응원하며,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 보고자 합니다. 오늘부터 출시되는 저희 프레시 제품군에 그들의 노력을 담은 제품을 내놓을 생각입니다.”
“프레시 제품군이면 PB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PB로 출시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계약 때문입니다.”
“계약이요?”
“네. 바론의 독점 계약 항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른 브랜드로 출시하게 되는 겁니다. 바론이 이 계약을 무효화해 준다면 그들도 자신의 브랜드로 다시 출시할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원 이사님은 혹시 이번 일이 바론과 연계가 되어 있다고 보십니까?”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고, 우선 부정한 방법으로 생산된 제품들은 모두 폐기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바론이 이를 먼저 생각했을지도 모르겠군요.”
당황한 표정의 기자들.
아마 바론도 기존 제품을 폐기한다는 것까지는 발표하지 않았나 보다.
“폐기요?”
“네. 폐기요. 불공정한 방법으로 만들어진 제품입니다. 당연히 판매가 중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꼬리를 자르기 위해 보낸 기자들.
난 이들을 이용했다.
이제 바론은 자신들이 보낸 언론을 통해 기존 제품들의 생산을 중지한다는 발표를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일곱 개 제조사들의 계약까지 파기해야만 할 것이다.
“지나가겠습니다.”
나는 기자들의 사이를 뚫고 밑으로 내려갔다.
계단의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성근 팀장이 내 앞으로 빠르게 걸어와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제대로 한 방 먹이셨네.”
“그런가요?”
“네. 이 기사들 나가면 바론에서 난리가 날 거 같네요.”
나는 침착한 표정으로 뒷좌석에 올라탔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김명진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명진 부장.”
- 네, 이사님. 잘 끝나셨어요?
“응, 잘 끝났어. 아마 기사들이 나올 거야. 우리 홍보 팀도 같이 기사들 퍼 나르도록 해 줘.”
- 거기 기자들이 갔어요?
“응. 바론에서 보냈더라고.”
- 바론이요? 와……. 진짜.
눈치 빠른 김명진 부장은 어이가 없다는 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 나쁜 놈들. 그놈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할 생각이었을 겁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김진준이를 잘라 내야겠다고요.
“그럴지도 모르지. 임기응변이라고 치기에는 너무 대처가 빨랐어. 하여간 기사 내려가지 않도록 꾸준히 푸쉬해 줘. 홍보 자료에 우리 PB 제품들 홍보도 빼먹지 말고.”
- 알겠습니다. 조심히 들어오세요.
* * *
일주일 후.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연신 고개를 숙이는 씨앤코리아의 최무진 대표.
나는 그를 재빨리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한 겁니다.”
“정말 이사님 아니었다면……. 후……. 저희 직원들을 대표해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씨앤코리아 직원들은 모두 복귀했나요?”
“네. 덕분에 전원 복귀했습니다.”
바론은 여론의 압박에 백기를 들었다.
판매 중인 제품들을 모두 거둬들였고, 생산 공장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 레시피를 뺏긴 제조사들과의 계약을 파기하면서 제조사들은 자신의 브랜드로 제품을 생산할 수 있게 됐다.
이뿐 아니었다.
여론의 힘을 얻은 우리 PB 제품들은 역대 최고 매출까지 기록했다.
“이사님! 이사님! 이사님!”
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최충연 팀장.
흥분한 표정이 PB 매출에 대해 말하러 왔나 보다.
그는 내 방에 있는 최무진 대표를 보고 흐뭇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최 대표님, 여기서 뭐 해요?”
“네?”
“지금 생산 밀린 거 안 보여요? 어제 오후 4시에 완판됐다고요!”
“아…….”
“어제 매출만 12억입니다. 뭐 해요? 빨리 찍어서 보내 주셔야죠.”
최충연 팀장과 오랜 친구였던 최무진 대표는 고개를 숙이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다. 충연아.”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이사님께 크게 밥이나 사.”
“그래. 그래야지.”
나는 둘의 사이로 들어가 씩 웃으며 말했다.
“저 입, 완전 고급인 거 아시죠? 아무거나 안 먹습니다.”
“그럼요. 제가 한 달, 아니 일 년 내내 저녁 식사를 대접하겠습니다.”
최무진 대표의 말에 최충연 팀장이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럼 나는?”
“물론 너도. 언제든 불러. 1년 내내 소주는 내가 살 테니까.”
“소주만?”
“아니. 아무거나 다!”
“너 약속한 거다!”
“그래.”
최무진 대표는 최충연 팀장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환하게 웃었다.
* * *
“코스메틱 카테고리 메인으로 들어갈 샘물 마스크팩입니다.”
며칠 전, 최구열 이사가 주도한 제이 스킨과의 인수합병 계약이 끝났다.
조건은 주식의 스와핑.
제이 스킨의 80% 지분을 사오며, 100억 원 규모의 우리 주식을 교환하기로 했다.
그리고 제이 스킨의 유이나 대표는 우리의 사내 이사가 됐다.
이로써 이사회에 참석하는 이사는 총 다섯.
이렇게 우리는 더 성장했다.
유이나 이사는 테이블 밑에 내려 둔 가방에서 마스크팩 샘플을 꺼내 이사들에게 나눠 줬다.
“샘물 마스크팩은 어성초와 검정콩, 블루베리, 율무의 추출물로 생산됐으며, 모두 국내에서 유기농 원료로 만든 제품입니다. 피부를 도톰하게 감싸주는 시트 역시 유칼립투스 나무로 만들어진 소재인 텐셀로 만들어졌습니다.”
꼼꼼하게 설명하는 유이나 이사.
그녀는 마스크팩 샘플을 만지작거리는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원 이사님. 마스크 팩 쓰시나요?”
“아니요. 아직.”
“관리 좀 하셔야죠. 가져가서 써 보시고 말씀해 주세요.”
그녀는 가방에서 마스크팩 한 움큼을 꺼내 내게 밀어 줬다.
“저는요?”
내 옆에 앉아 있던 유화성 이사가 손을 살포시 들고 자신에게도 더 달라는 손짓을 했다. 이에 유이나 이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더 드려야죠. 대신 제품 평가 가득 적어 주시는 겁니다.”
“제품 평가요?”
“네. 원 이사님은 매번 그러셨거든요.”
“얼마나요?”
“한 100개 정도?”
“헐……. 그럼 전 안 하렵니다. 그냥 사서 쓰죠. 뭐.”
“농담입니다. 써 보시고 간략하게 말씀해 주세요.”
환하게 웃어 보이는 유이나 이사.
그녀는 밝고 쾌활했으며, 다른 직원들과도 잘 어울렸다.
김지영 대표는 마스크팩을 열어 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코끝으로 가져가 향을 맡으며 말했다.
“유이나 이사님.”
“네. 대표님.”
“이거 향이 너무 약하지 않나요? 저는 향이 좋아서 마스크팩을 쓰거든요.”
“별도로 향을 추가하지 않은 제품이라 그렇게 느끼실 수 있습니다. 근데 써 보시면 다른 제품들과 차이가 명확히 느껴지실 겁니다.”
“그래요? 정말 그렇게 좋아요?”
“네. 아마 깜짝 놀라실 겁니다. 밀착력도 좋고 에센스의 증발량도 적거든요.”
“어떻게 지금까지 이런 제품을 몰랐을까요?”
“이제 알아 가시면 되죠.”
“기대되네요. 그럼 저도 써 보고 제품 평가 가득 적어 드릴게요.”
“고맙습니다. 대표님.”
김지영 대표는 눈웃음을 지은 후 말을 이었다.
“최구열 이사님. 코스메틱 카테고리의 오픈 일정은 문제없죠?”
“네. 현재 최종 테스트 중이며, 일주일 후에 오픈할 수 있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아닙니다. 기획, 디자인, 개발팀이 수고했죠.”
“그럼 오늘 이사회는 여기서 마치고, 코스메틱 카테고리 오픈 하루 전에 임원회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이사회가 끝나고, 나는 샘플로 받은 마스크팩을 종이가방에 담아 엘리베이터의 앞으로 걸어갔다.
“이사님! 원지훈 이사님!”
내 옆으로 다가온 유이나 이사.
그녀는 묵직한 종이가방 하나를 내밀며 말했다.
“MD 사업부 직원들에게 도움을 좀 받을 수 있을까요?”
“마스크팩인가요?”
“네. 정확한 인원을 몰라서 좀 넉넉히 담았어요.”
나는 그녀가 들고 있던 종이가방을 받아 들었다.
<에멀젼은 용기만 새로 바꾸면 되고, 에센스 샘플 먼저 준비해야지.>
<기본 스킨을 먼저 가 볼까?>
<토너는? 베이스 토너나 클렌징 제품군도 괜찮겠어.>
<대표님이 세럼도 알아봐 달라고 했지? 닥터레인 라인이 좋긴 한데.>
오직 일에 대한 기억뿐이다.
이렇게 하고 싶은 것이 많으면서 어떻게 그동안 참았을까?
“앞으로 자주 주세요. 언제든 이사님의 테스터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사님. 제이에서 넘어오는 MD가 일곱 명인가요?”
“네, 맞아요.”
“부족하지 않아요?”
“일단 초기 제품 세팅하고 새로 뽑아야죠. 아 참, 전에 함께 만났단 민정 팀장님 있잖아요.”
“네.”
“혹시 코스메틱 쪽은 관심 없으시대요?”
“음……. 원래 코스메틱을 하셨으니까 관심은 있겠죠.”
“이사님 생각은 어떠세요?”
유아동의 김민정 팀장을 내달라는 말이구나.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정 팀장님께 물어보겠습니다. 개인 의사가 중요하니까.”
“고맙습니다.”
일주일 후 오픈하게 될 코스메틱 카테고리.
처음 시작하는 카테고리지만, 식품만큼 기대가 크다.
그리고 새로운 가족이 된 유이나 이사와 직원들은 우리의 기대에 부응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